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1 1절로부터 16절까지입니다.

 

“만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가에 있는데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뒤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가에서 올라와 소와 함께 나일 가에 있더니 흉하고 파리한 소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후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죄를 기억하나이다.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곳에 친위대장의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꿈대로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놓은지라. 요셉이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아멘.

 

고난 요셉의 마음: 말씀이 그를 단련하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있었던 기간은 최대 13년에서 14년간이었습니다. 기간 동안 가나안에서는 그의 할아버지 이삭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기 직전, 감옥에서 나오기 바로 해에 이삭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결국 요셉은 할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시편 105편에 나타나 있습니다. 물론 그가 감옥에서 처했던 구체적인 상황을 모두 수는 없으나, 당시 그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성경은 그의 발이 족쇄(차꼬) 상하고 목에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구절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셉은 당시 간수장의 신임을 받아 감옥 업무를 관장하던 사람이었기에, 그가 실제로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구절은 그의 몸이 아니라 그의 혼과 ,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 상처와 비참함 속에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는 "말씀이 그를 단련했다"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제가 그의 내면, 마음에 대한 것임을 충분히 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깊은 절망 속에서 그의 영혼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그때 명의 고위 관리가 감옥에 들어왔고,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고, 해석대로 명은 복직되고 다른 명은 죽게 되었습니다.

 

맡은 관원에게 '헤세드' 구하다

꿈의 해석대로 일이 진행된 , 요셉은 맡은 관원에게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당신이 복직되어 올라가면, 바로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여 나를 감옥에서 빼내 달라" 것이었습니다. 말을 행동 자체는 문제가 없을 있으나, 문제는 이야기를 했던 요셉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요셉은 맡은 관원에게 "나를 도와달라" 말할 , "당신이 되면 당신의 헤세드(인자) 나를 도와달라" 했습니다. '헤세드'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약속을 따라 사랑하실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맡은 관원장을 마치 하나님처럼 여긴 것임을 봅니다. 그는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나가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사람에게 기대했던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꿈을 해석할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말했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의지하고 있었음을 있습니다.

 

2 후의 응답: 인간의 망각과 하나님의 주권

일이 있은 2년이 흘렀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시간이 흐르듯, 2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고, 그동안 맡은 관원은 요셉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본문대로 일곱 마리의 암소 이야기와 일곱 개의 이삭 이야기였습니다. 살찌고 아름다운 암소를 흉하고 파리한 암소가 잡아먹는 , 그리고 튼실한 이삭을 가늘고 마른 이삭이 삼키는 꿈이었습니다.

 

단순히 잠꼬대로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꿈이 바로를 괴롭게 했습니다. 꿈이 계속 기억나면서 근심하게 것입니다. 바로는 왕으로서 나라의 모든 점술가와 현인들을 불러 꿈을 이야기하고 해석을 요구했습니다. 다니엘 시대와 같이, 신하들은 왕의 명령으로 해석할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해석이 틀리면 죽임을 당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이유로 아무도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의 확연한 변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때서야 맡은 관원장은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비로소 기억해냈습니다. '맞다, 그때 요셉이 꿈을 해석해 대로 되었지!' 그는 왕에게 요셉을 추천하였고, 바로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요셉을 불러오라 명령했습니다. 요셉은 급히 옥에서 나와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앞에 요셉의 반응은 매우 중요합니다. 맡은 관원이 요셉을 추천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 사람이 꿈을 기가 막히게 풉니다. 용한 사람입니다"라고만 보고했습니다. 말에 솔깃했던 바로는 요셉에게 "네가 그렇게 꿈을 푼다며?"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요셉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대답은 겉보기에는 이전에 맡은 관원에게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보입니다. 요셉은 관원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까 청하건대 나에게 이르소서"라고 말했었습니다.

 

과거 관원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했을 , 강조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부탁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이 해석한 대로 '사람'에게 의지하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신이 해석한 능력에 강조점을 두고 해석대로 사람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야기해 보라" 말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로 앞에서 하는 말은 확연히 다릅니다. 그는 왕에게 "나에게 꿈을 이야기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나는 아닙니다. 내가 꿈을 푸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자신의 능력을 부정합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답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이는 과거와 상당히 비슷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는 태도입니다. 이제 "나에게 말해 보라" 아닌 "나는 아닙니다" 그의 진정한 고백이 것입니다.

 

지혜의 본질: 하나님이 하신다

혹자는 "그렇게 했더라도 결국 듣고 해석한 똑같지 않으냐"라고 이야기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이 꿈의 내용을 듣고 나서 번이나 반복한 말이 있는데, 말을 통해 요셉의 태도가 얼마나 확연히 달라졌는지 있습니다.

 

25절에서 요셉은 이렇게 아룁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8절에서는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니이다"라고 말하고, 32절에서는 "바로께서 꿈을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실 것입니다"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주어는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이상 자기의 해석이 주어가 아닙니다.

 

요셉은 일을 통해 총리가 되면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 모두에게 크게 높임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꿈을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바로의 마음에 들게 해석했기에, 사람들은 해석하는 능력 때문에 그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높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생각하는 지혜,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의 해석 실력이 그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확실하고 똑똑하게 해석했는가 하는 해석의 내용도 아닙니다. 심지어 해석한 대로 이루어진 , 그것 역시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고백을 분명히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정하셨고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의 말입니다. 그는 꿈도, 꿈꾸는 자도, 해석하는 사람도, 그의 해석도, 해석하는 실력도 어떤 것도 중심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역사를 계획하셨고, 일을 정하셨으며, 일을 이루시는 , 그것이 바로 지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이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일입니다.

 

세상의 관심과 요셉의 비천함

사실 바로와 요셉은 모두 알지 못했지만, 일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실 복음의 메시지를 사건으로부터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록 바로와 요셉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로와 애굽 전체가 요셉에게 놀라 그를 높였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은 항상 어떤 일이 진행되든지 간에 사람을 높이는 쪽으로 가고 싶어 합니다. 요셉이 번이나 "하나님이 행하십니다"라고 이야기했지만, 바로는 " 하나님이시구나"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계속 요셉을 높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인간이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느냐에 많은 관심을 둡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가르치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저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냥 조금 좋아할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 이야기를 때도, 결국 자랑하는 것은 손주가 얼마나 똑똑한지, 얼마나 잘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정말 주님께서 아이를 이렇게까지 키우셨습니다"라는 고백은 어쩌다가 기도할 때나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끼리 좋아하고 우리가 높이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르고 그냥 넘어갑니다.

 

요셉의 현실: 사회적 지위의 최하층

그런데 여러분, 요셉이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 요셉은 지금 가장 비천한 노예입니다. 바로 앞에 불려 나온 요셉은 노예입니다. 노예 중에서도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 노예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가장 낮은 신분인데, 그중에서도 애굽 사람이 아닌 히브리 사람, 외국인 노예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사회적 지위는 문자 그대로 바닥 중의 바닥이었을 것입니다.

 

상한 심령: 하나님이 쓰시는 준비된

거기에 더해, 그의 마음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그의 신분은 비참했고, 그의 내면은 과연 평안했을까요? 우리는 요셉이 감옥에서 "할렐루야, 하나님께 찬양합니다"라고 주님을 찬양하며 시편 편이라도 남겨줬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시편은 오히려 그의 마음이 쇠사슬에 묶여 고통과 비참함과 절망 속에 갇혀 있었던 모습을 훨씬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성경은 "말씀이 그를 단련했다" 분명히 말합니다. '단련'이라는 것은 금속을 불에 달구고 망치로 치는 것처럼, 철을 칼로 만들기 위해 물에 담갔다가 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놓고 "나는 그를 지금 고생시키고 있다"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은 것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훨씬 많은 단련과 고통 속에서 엄청난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갔다면, 그가 경건하게 기도할 알았겠지만, 오히려 그는 앉아서 "하나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겁니까? 차라리 고향에서 꾸짖음을 받았으면 나을 것을, 채색 옷을 입었던 내가 여기서 죄수복을 입고 있습니다"라고 부르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을까요? 시편의 구절은 그것을 “그의 마음이 쇠사슬에 붙잡혀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원망을 했다는 말까지는 없지만, 그는 정말 많은 의심과 깊은 고민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숙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우울하고 소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13년에서 14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나갈 아무런 방법도 없는 상황 속에 있는 사람, 고통과 갈등 속에서 어쩔 모르는 히브리 사람 죄인, 이것이 바로 요셉의 정확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신실한 사람으로 형제를 용서하고 총리가 되어 성공한 이야기를 이미 너무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편안할지 모르겠으나, 당시 요셉의 마음은 전혀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 "이보다 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엄청나게 부르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를 바로 앞으로 불러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세상의 조건이 아닌 마음의 가난함

여러분, 우리가 보통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통해 일하실까 질문하면, 대부분은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준비된 사람을 쓰신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준비되었다'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예로 들어 '준비되었다' 것을 생각할 , '그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으며, 로마 시민권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선교를 마음껏 하실 있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시키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가 가진 환경과 배경을 쓰실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준비되었다' 의미의 전부일까요? 오늘 요셉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잘하게 되었다는 말을 적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열한 후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모든 것을 배설물같이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배설물 같은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을 위해 준비한다고 생각하는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진정으로 준비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요셉이 바로 앞에 이유: 마음의 가난함과 오직 하나님

여러분과 저는 부유한 사람, 세상에서 이름이 있고 똑똑한 사람, 타이틀을 가진 사람을 선호합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존경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 " 사람도 예수를 믿었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예수를 믿은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이 누구를 준비시키고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대해 너무 오해하고 있습니다. " 사람이 재물을 주셨으니 하나님이 큰일을 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일하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그의 육체나 가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가난한가를 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지금 요셉만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것이고, 그의 인생에서 기댈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맡은 관원도 붙잡아 보았지만 되었습니다. 심지어 유혹을 뿌리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조차도 그를 감옥에서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한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세우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 것은 그것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 이유는 그가 히브리인 중에서 종이 되었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마음에 고민과 갈등이 있으며 몹시도 우울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하나님 손길 아래서 바로 앞에 서게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의 모든 방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하나님밖에 없구나 하고 붙잡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잡지 않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아니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상한 심령

여러분, 우리는 요셉이 총리 것이나, 유혹을 뿌리친 , 집안 살림을 맡은 , 감옥을 관리한 , 심지어 꿈을 해석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어떤 것도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오직 그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며, 아무것도 의지할 없어 하나님만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십시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넘어뜨렸을 때일 것입니다. 나라가 환호했던 그때, 그의 신앙이 가장 훌륭했을까요? 시편을 보면, 다윗의 많은 가운데 골리앗을 때려잡은 이야기는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슨 이야기는 나옵니까? 밧세바 이야기는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처절하게 깨닫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며 기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 제가 지난주보다 조금 나았습니다. 성경 구절 읽었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하나님 앞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제가 노력했지만 저의 능력으로는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하루하루 인생을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며, 욕심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나를 자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과 싸우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입니까?"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정말 힘으로는 됩니다.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상한 심령이라고요. 사람을 쓰시고, 사람이 준비된 자입니다.

 

심령의 가난함: 하나님 없이 없음

상한 심령을 아는 사람이 진정으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나쁜 의미로) 너무 부유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 주님 없이는 없어야 하는데, 여러분은 하나님 없어도 사는 것이 너무나 편안합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사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기도할 것도 매달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상태인데, 우리는 그것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여러분이 무조건 어렵고 힘든 순간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풍족하고 모든 일이 잘되더라도 마음은 가난해야 합니다.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좋고, 하는 일에 문제가 없어도 마음은 가난해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살고 있습니다. 일이 열린 것도, 막힌 것도, 그로 인해 제가 울고 힘들어하는 것도, 즐거워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뻔뻔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자의 당당함

여러분,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나 실망합니다. " 같은 사람이 무슨 주님의 일을 있겠습니까? 기도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우리는 도망치기 바쁩니다. " 신앙을 이야기하기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워." 이것이 우리가 자주 도망치는 변명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그렇다 치고, 교회에서 어떤 일을 있습니까? 성격은 어떻습니까? " 교회에 맞는 맞춤형 성격이야"라고 말하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계속 외향적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님, 성격을 활발하게 바꿔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분도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연약할 , 상한 심령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로 앞에 세우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숟가락만 얹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데, 오히려 내가 숟가락을 얹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예레미야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 지혜 자랑하지 마라. 용사는 용맹을 자랑하지 마라. 부자는 부함을 자랑하지 마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을 자랑해라." 그리고 뭐라고 말합니까? "나를 아는 자랑해라." 여러분과 제가 갖고 있는 총재산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디서 재산 전체를 적으라고 하면, 주식이나 예금은 쓰지 마시고 은행에 가서 이렇게 쓰십시오. "나에게 있는 재산은 하나님(G.O.D)이다." 물어보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것이 사실이다"라고 이야기하십시오. 우리는 사람 아닙니까?

 

힘들어서 기도조차 어려운 우리, 말씀을 읽으면서도 눈물만 흘릴 뿐인 우리. 그런데 우리가 그러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기도하려고 하고, 말씀을 읽는다고 발버둥을 칩니까? 하나님을 아니까, 아버지를 아니까 그분만이 나를 도우시는 분이고, 그분 외에는 나에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고백: 하나님께서 바로의 '샬롬'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가 비슷한 꿈을 꿉니다. 성경에는 요셉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지만, 그때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로가 꿈을 꾸니, 요셉이 의미를 이야기해 줍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들을 마치 사이다가 터지는 같습니다. 요셉이 지금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로여, 바로께서 꿈을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일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일을 행하실 겁니다." 지금 요셉의 인생에서 꿈을 겹쳐 꾸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정하신 것이고 속히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셨나요? 잡혀가고, 감옥에 들어가서, 지금 죽을 하고 있는 아닙니까?

 

지금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나한테 속히 행하신 일이 이거였네"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로에게 이야기도 14 동안 일어날 이야기인데, 됐다가 망할 이야기입니다. 이는 요셉에게 특별히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미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지금 속히 인생에 행하신 것이고, 나를 이렇게 낮추셨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셨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다는 " 그의 인생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요셉이 바로에게 이야기하면서 ' 이야기네' 하고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것이 요셉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관전 포인트 하나입니다.

 

내가 아닌 안의 그리스도: 당신의 샬롬

그는 이제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도 이야기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하나님이 평안한 답을 거다" 혹은 "바로께서 원하시는 답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합니다. 번역이 나쁘지는 않으나,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 좋습니다. 원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샬롬을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것은 바로 당신의 샬롬(평안, 평강) 것입니다. 대답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당신의 샬롬이 것입니다.

 

요셉에게 하나님이 해석하시고 그의 인생에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의 샬롬이 것입니다. 그의 감옥에서의 인생조차도 요셉의 샬롬이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도 있고, 지금도 속상하고, "하나님, 조금 숨만 트이게 주세요"라고 생각할 정도로 힘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생을 샬롬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만들어 오셨고,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답을 주시고, 사랑스러운 답을 주시고, 공의로운 답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이 아니라, 여러분의 샬롬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상한 심령, 그러나 뻔뻔한 믿음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한 심령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수도 없는 자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을 , 거기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요셉처럼 "하나님이 그때 나를 바로 앞에 세우신다"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드디어 뻔뻔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불쌍한 자가 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주님께 나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 나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는 히브리인 중에 종이고, 아무것도 내세울 없는 사람이지만, 나에게 가지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를 압니다."

 

그리스도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인생

여러분, 우리가 함께 불렀던 찬송가 중에 "Yet Not I But Through Christ In Me"라는 제목의 찬송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안의 그리스도를 통해"라는 찬송입니다. 마치 요셉이 "나는 아니고 하나님을 통하여"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찬송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은혜로 받은 선물 예수 나의 구주, 하늘이 이보다 좋은 것을 수는 없네.

 

여러분은 앞으로 무슨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로또에 당첨이 될지, 자녀들이 크게 성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여러분은 약소한 말을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후에 얼마나 대단한 일을 받으실지 몰라도, 그것보다 더한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인생을 사는 동안 이것보다 좋은 것은 받으십니다. 그것을 받으셨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 나의 자유가 되시고, 변함없는 사랑, 깊고 끝없는 평화 대신에 붙들리라, 나의 소망 오직 예수 붙들리라.

 

삶은 온전히 주님께 있으니, 얼마나 신비로우며 거룩한 것인가,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노래할 있으니, 내가 아닌 안에 사신 그리스도를 통해.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쉬는 순간마다 나는 주를 따르리, 주께서 나를 본향으로 인도하신다 약속하셨네. 영광의 보좌 앞에 기쁨으로 때까지,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하심을 나는 알고 있네. 붙들리라 소망 예수, 모든 영광을 그에게만 돌리리라. 인생의 경주가 끝나는 순간에도 입술은 외치리. 내가 아닌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 살았었노라고, 내가 아닌 안에 그리스도로 인해 살았노라고, 내가 아닌 안에 그리스도가 살았노라고 그렇게 노래하리.

 

여러분의 인생은 그리스도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기도합시다.

밤은 어둡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네. 주님이 곁에 항상 계시네. 약할 나는 힘을 내며 기뻐하리라. 내가 약할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리라. 내가 붙들리라 나를 지키시는 목자 예수,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나를 인도하시니, 어둠의 밤은 사라졌고 나는 승리하리, 내가 아닌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 우리의 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자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진정 상한 심령을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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