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0 9절로부터 23절 까지 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아멘.

 

요셉의 고난과 신앙의 성숙 과정

지난주에 저희가 살펴본 것처럼 창세기 39장 마지막 구절과 40장의 첫 구절 사이에는 자그마치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성경이 자세히 기록하지 않지만, 저희가 시편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요셉은 그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갈등과 아픔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목에는 큰 칼을 쓰는 등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11년쯤 되었을 때, 그가 갇혀 있는 감옥에 두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왔던 모든 사람과는 달리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디발이 그에게 시중을 들라고 지시했고, 요셉은 그곳에서 두 명의 왕의 신하들을 시중들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살피던 요셉은 아침에 일어나 그들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어디 안 좋으냐고 굉장히 친절하게 묻습니다. 그들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무슨 꿈인지를 몰라 근심하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요셉이 말합니다. "아니, 그런 해석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냐? 나에게 말해봐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그 꿈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서 나중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셉은 그중에 한 명인 술 맡은 관원이 결국 다시 바로를 만나게 되고, 바로에게 추천을 하여 요셉은 드디어 옥에서 벗어나 총리가 되는 이야기를 우리가 이 요셉의 이야기에서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의 고난에 대한 해석: 총리 성공 스토리가 아닌 이유

우리는 요셉의 생애를 보면서 그가 비록 감옥에서 고생은 했지만, 결국 감옥에 들어간 것도 나중에 바로를 만나게 되고 총리가 되기 위한 준비였으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 이 모든 고난이 결국은 나중에 좋은 것이 되리라는 '새옹지마 해석법'으로 요셉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오묘하게 작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그렇게만 보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첫 번째로 요셉이 나중에 결국 총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살펴봐도 알 수 있듯이, 요셉이 나중에 형제들을 만나서 "나를 먼저 보내신 것은 당신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내 유골을 가지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는데, 이것이 히브리서가 말했던 믿음의 이야기였습니다.

 

, 이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형성하시며, 어떻게 구원하셔서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우실 것인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결국은 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오게 될 것인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요셉이 총리가 되는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 성숙은 인격적인 과정이다

또 하나는 이 스토리 안에 요셉 개인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요셉이 처음 17살의 나이부터 시작해서 그가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역사(시간)가 있으며, 그 사람이 17살에 갑자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모든 신앙을 한꺼번에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을 하나님이 동행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이끌어 가시고, 만들어 가시고, 세워가시는 부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분이 형제와 자매들을 바라보는 올바른 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일반 성도들이 목사 같은 지도자가 조금 더 높은 도덕성을 갖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가 잘못된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성도들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직분을 주신 사람이건, 또 그가 맡은 일이 아무리 우리의 눈에 신성해 보이고 거룩해 보일지라도, 그 역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위해서 세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는 물론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 인생을 건다면 저를 위해서도 세우셨다 이 말입니다. (목사를 안 했으면 제가 얼마나 딴 짓을 했을까 생각하면 하나님의 그 손길이 항상 고맙기만 합니다.)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인생의 목적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성도들은 지금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내가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고, 더 많이 기다려 줄 수도 있으며, 또 더 많이 권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갈 일들, 바꿀 수 있고 고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일들이 다 우리에게는 어드벤처(모험), 너무 모험적이고 즐거운 일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기쁜 길이라, 즐거운 길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걸어갈수록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조금씩 알게 될 것이고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며, 주님의 그 영원하시고 거룩하신 삶을 조금씩 조금씩 내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된 인생입니까? 여러분은 먹고 살기 위해서나, 무언가 족적을 크게 남기려고, 혹은 성공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온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닮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와 누구하고도 바꿀 수 없는 목적을 함께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요셉의 고백과 신앙의 성장 곡선

여러분, 이러한 신앙 성숙을 이어가는 과정 속에서 요셉이 17살 때와는 다르게 그럴듯한 말을 한마디 합니다. "아 도대체 이 꿈 때문에 고민이다. 아니 그 해석은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니냐.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내가 보니까 내 인생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더라. 결국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만나서 주님을 닮아가면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우상향(위로 쭉 올라가는 것)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신앙이 계속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대부분 이렇게 자랍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자랍니다. 그리고 그 지식 때문에 우리는 상당히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자인지를 알게 되고,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는구나를 깨닫게 되면서 주님을 조금 더 닮아갑니다. 그리고 나면 또 시간이 가면서 주님을 조금 더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지그재그가 아니고 단순하게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그저 기계처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인격적으로 다루시고 계시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내가 필요할 때면 잠시 쉬게도 하시고, 어떤 때는 한순간에 나의 인생과 마음을 정말 독수리처럼 날갯짓 치고 올라가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시고, 또 어떨 때는 그 상황 속에서 사막과 같은 그 시간들을 지나게 하시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가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요셉에게도 마찬가지였다는 걸 기억하셔야 됩니다. 요셉은 오늘 사실 그가 고백했던 그 고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꿈의 해석, 계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우선순위

오늘 말씀에는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진리, 혹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설명한 뒤, 오늘 설교의 진정한 목적인 요셉의 신앙 정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꿈의 해석에 대한 부분이며, 왜 여기서 꿈이라는 주제가 나왔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꿈의 해석과 요셉의 한계

요셉의 꿈 이야기가 자주 나오기에, 여러분은 요셉이 꿈을 멋있게 해석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세 개가 나온 것을 사흘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 세 개의 광주리가 머리에 이어진 것도 사흘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 세 가지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자, 그 열매를 따서 바로의 잔에 즙을 짜서 넣고 그것을 바로에게 주는 것을 보고, ', 당신은 이제 바로가 다시 불러 이 일을 다시 맡게 될 거다'라고 해석했습니다.

 

또 하나는 맨 위에 있는 광주리가 바로를 위한 광주리였는데 거기에 새가 와서 그 광주리에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 당신은 똑같이 사흘 후에 부름을 받겠지만 바로가 당신을 매달 것이다, 나무에 매달아 죽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의 꿈을 듣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 자체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석해서 그대로 됩니다.

 

이것이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것에 대한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자이며, 하나님께서 참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신 자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을 무너뜨릴 말을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석을 잘하는 요셉은 자기가 감옥에서 나올 꿈을 못 꿨습니다. 정말 성경에 기록될 때 '요셉이 꿈을 꿨는데 며칠 후에 나가겠구나'라고 기록되어야 '역시 요셉이다' 이럴 텐데, 자신의 꿈은 하나도 못 꿨습니다. 그러고 일은 벌어지기만 했습니다.

 

성령과 말씀의 해석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꿈이라는 것이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줄 때 사용된 적이 있는 것은 맞지만, 여러분과 제가 성경을 보면서 구약에는 창세기와 다니엘서에, 그리고 신약에서는 실질적으로 마태복음(계시록의 것은 환상으로 보고요)에만 꿈을 통한 계시가 등장합니다. 자주 나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꿈이 중요한 것은 요엘서 때문입니다. 요엘서 2 28절은 베드로가 사도행전에서 처음 설교할 때 인용했던 구절로, "청년이나 젊은이들이나 노인이나 모두 다 꿈을 꾸고 예언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약과는 달리 모든 이들이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같이 살게 하는 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을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언이라는 것은 앞일을 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서로 말하고 해석하며 이해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성령님이 오시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의 말씀을 드디어 들을 수 있게 됐고 이해할 수 있게 됐으며,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역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부 다 성경을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만 하면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셔서 그 모든 말씀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거죠.

 

단지 여러분과 제가 조심하는 것은, 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성경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령님의 해석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 문제인 거예요. 우리의 욕심 때문에 성경을 비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조건과 내 생각으로 맞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도록 한 성령께서 많은 성도들과 우리의 신앙 선배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차근차근 알려주시게 되고, 성령께서 잘못된 것을 어떻게 바로잡는지도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개인적인 해석에만 머무르지 않고 항상 하나님이 공적으로 우리에게 역사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며, 또 어떤 때는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이 있더라도 그 말씀을 들으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가를 성경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다 한 번에 다 밝히 보여주지는 않을지라도 말씀을 알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최종 계시

이런 면에서 꿈이라는 것도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시를 알도록 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 안에 꿈, 환상, 사건, 병 나음 등 여러 계시의 모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끝이 왔다는 거죠.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제 아들을 통하여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 언약의 말씀이 우리에게 마지막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더 이상 이 말씀에 더하거나 혹은 빼거나 하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우리 신약 성도들과 함께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성경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꿈이라든지 혹은 기적이라든지,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방법이라든지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고(마음에 빛을 비추셔서) 깨달음을 얻게 하실 수는 있지만 계시를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 성경에 기록될 말씀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권이 되는 이유

따라서 여러분이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많은 생각들이나 우리의 관심, 욕심, 좌절, 절망도 나타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말씀을 너무 사모해 하나님의 말씀이 꿈속에서 조명이 돼서 '아브라함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말씀과 같은 계시가 될 수 없으므로 무엇에 의하여 다시 점검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점검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권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분이 저한테 와서 "목사님 제가 기도 많이 하시는 분에게 기도를 받았는데 제가 이 사업을 시작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합니다"라고 말을 한다고 합시다. 제가 "하지 말라, 하라" 그렇게 얘기하기보다는 이렇게 말씀을 드릴 거예요. "그러한 말을 들었다는 그 계시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압니까?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오한 거예요. 오류가 있으면 안 되잖아요, 하나님 말씀인데. 그렇다면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 개인의 사업에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실 리는 없고 성경처럼 성경책에 기록이 돼야 되겠죠."

 

또 하나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신의 사업이 성공하고 실패하고 때로는 큰일을 이루거나 상처가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당신에게 분명하게 약속한 것은 당신의 인생 전체가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가고 있으며 절대 실패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함으로 당신은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여러분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인생의 모든 성공과 실패를 다 덮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 속에서 무슨 고민을 하고 계시든지, 여러분이 주님의 자녀라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게 이루어질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꿈을 꾸거나 혹은 계시를 받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내 바로 앞일이 어떻게 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지금 함께 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시라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살리는 힘이지, 사업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직업이나 건물, 재산 같은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철밥통이었던 은행원도, 좋은 직업이었던 공무원이나 선생님도,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도 이제는 인기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여러분의 인생을 거신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생명의 가치가 그것밖에 안 되겠습니까? 물론 당장 힘들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것은 없는 것보다 조금 편할 수도 있고, 계획했던 일들이 잘 되는 것은 순간적이지만 기쁨을 줄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영원한 기쁨과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인생은 우리가 열심히 살며 온 힘을 다하여 나의 달란트와 하나님이 주신 일을 위하여 애쓰고 살아야 하는 일이지만, 이것과 천국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것과 나의 영원한 하나님의 그 기쁨과 영광과는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고 꿈을 해석한 일은 우리에게 이렇게 계시로 전달되었지만, 이제 여러분은 '내가 꿈을 꾸거나 그런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속에서 이것을 어떻게 봐야 되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꿈이나 혹은 무슨 '기도 많이 했다'는 말로 여러분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거든 속으로 (겉으로는 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나를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으며 내 인생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보다 당신이 꾼 꿈이 더 세다고? 당신이 받은 기도에 응답이 더 세다고?'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잘 아셨다면 두 번째 사실을 좀 얘기하려고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인가, 신앙적인 방법인가?

요셉이 꿈의 해석을 하고 나서 술 맡은 관원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당신이 잘 되면 나를 좀 기억해 가지고 나를 끌어서 여기서 좀 나가게 해달라" 이렇게 얘기하잖아요. 우리는 요셉이 지혜롭게 행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러분, 이것은 청탁이에요.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지금 요셉이 하는 일을 청탁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여러분은 "이거 너무 세상적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꿈이 이루어져 잘 되거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같으면 그러지 않겠어요?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보니까 이렇습니다. 이걸 붙잡고 힘을 내십시오"라는 좋은 조언을 줬는데, 그분이 "정말 힘이 나네요"라고 할 때, 여러분이 "나한테 돈 좀 주실래요?" 할 거 아니잖아요. 말뿐일지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하겠습니까? 사실은 뭔가 주기를 바라지만 말뿐이어도. 근데 요셉이 그렇게 하고 있는 거거든요. 지금 하나님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쉽게 '맞아, 이렇게 사람에게 잘 얘기해서 바로에게 끄집어내 달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세상적인 방법이니까 불신앙이고 믿음이 없는 것이다. 요셉의 믿음이 너무 없구나'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결론은 조금 비슷할지 몰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여러분 바울이 가이샤라 감옥에 갇힌 적이 있어요. 그때 그가 로마로 가게 된 방법은 자기 시민권을 내세워 "내가 이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거나 벼락이 치거나 간수들이 졸도해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그냥 자기가 갖고 있던 시민권을 이용해 가지고 나왔어요. '역시 바울은 지혜롭다'라고 해석하시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세상적인 방법과 뭐가 다릅니까? 똑같잖아요. 그럼 세상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거죠.

 

기적이 아닌 모든 것을 세상적이라고 오해하는 위험성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서 발견하는 방법들을 만약 다 세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항상 마음속에 '아니지, 내가 기도해야지. 내가 이런 걸 쓰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이 있으실 거예요. 그래서 저도 어릴 때 많이 들었어요. 사업이 어려워 친구에게 돈을 빌리러 갔더니, 그 친구가 "기도는 하고 왔느냐? 기도를 먼저 해야지, 나에게 먼저 오는 것은 나를 의지하는 것이고 이래선 안 된다"라고 야단쳐서 내보냈다는 이야기를요. (돈이나 빌려주면서 그 말을 해야죠.)

 

여러분, 어떤 일이 있을 때 내가 좀 잘 계획하고 잘 생각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아 그건 자꾸 잔머리 굴리는 거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 이런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이 말에는 분명히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것을 걸러내는 데는 좀 지혜가 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극단적으로 가게 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것들은 별 볼 일이 없는 것처럼 생각이 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병이 걸렸을 때 의사나 약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막는 거라고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의사와 약을 먼저 쓰냐? 하나님께 기도해서 먼저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약 없이 의사 없이 어떤 사람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그것은 기적적인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면 다 세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을 우리에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 신앙은 초자연적인 것이 맞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방식을 초월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것이 모두 다 신앙적인 것은 아닙니다. 사탄도 초자연적인 것을 행할 수 있어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초자연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는 기적의 이야기라고 얘기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사가 너무 없는 겁니다.

 

여러분, 숨을 쉬고 살아가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누워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감사를 해요.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나 죽을 뻔했는데 산소호흡기 달아서 살았다.' 그때는 감사를 하고 지금 내가 숨을 쉬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무도 감사를 안 해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올시다. 가장 초자연적인 것은 사실은 가장 신앙적이며 가장 성경적인 것들입니다. 성경에 있는 원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원리를 성경에서 발견했는데 그 원리대로 나의 삶에서 이루어지더라. 그게 가장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사건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은 것만큼 기적이 어디 있으며,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기 때문에, 세 가지를 꼭 기준으로 해서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적인 방법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세상적인 방법과 거룩한 방법의 기준

첫째, 목적이 세상의 가치인가? 세상적인 방법의 첫 번째 기준은 세상이 추구하는 목적, 곧 세상이 주는 가치, 즉 돈을 얻기 위해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갖고, 내가 원하는 것만을 이루기 위해서 이 방법을 쓰는 것은 사실상 내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일 때 세상적인 방법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도록 그 길을 함께 가는 의미에서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방법 자체를 의존하는가? 똑같은 원리로 여러분이 쓰는 방식이 그 방식을 전적으로 의존할 때 세상적인 방법이 됩니다. 예를 들어 병이 걸려 약을 쓰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약을 써서 병이 낫기를 원하는 이유는, 남아 있는 시간도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약을 먹는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며, 그때 여러분은 거룩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에게 몽땅 의지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세상적인 방법이 됩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나의 삶을 붙드시는 분이라는 것을 내가 굳게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의 지혜(의사나 약)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하고 있을 때, 여러분은 그것이 바로 세상적인 일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의 거룩한 부르심

개혁교회가 우리 성도들에게 돌려준 가장 중요한 성경 진리 중 하나는 모두가 성직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직장에서 일할 때 그 직장은 여러분이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나 개인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하여 많은 이들의 가정을 돕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통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들을 함께 나누고 있으며, 동시에 거기서 나오는 이익들 중 일정 부분들을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것이 성스러운 일, 거룩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여러분이 쓰는 방법들이 그 방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주님, 저에게 건강을 주신 것도, 제가 이 일을 하는 데 지혜를 주시는 것도, 내가 이 일을 잘 하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방법들이 바로 성스럽고 거룩한 하나님의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모두 다 성직자입니다.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그저 가게 하나를 운영하는 사람, 직장을 다니며 돈을 받아서 살기만 하는 사람, 자녀를 힘겹게 키우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니며, 어쩔 수 없이 시간을 연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위하여 살고 있는 성직자가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인정할 때, ", 내 삶이 이토록 가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부르셨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목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하면서도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이름을 내며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고 있다면 그것이 가장 세속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여러분이 주님의 뜻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마음을 품고 살게 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더 놀라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거룩하십시오. 거룩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실수, 하나님의 기억하심

과연 요셉은 술 맡은 관원에게 이야기할 때 세상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거기 나오는 단어들은 그가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있기보다는, 그 술 맡은 관원을 엄청나게 의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너무나 많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든다면 그가 했던 말 중에 "나를 기억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를 생각하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얘기합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 중 제일 많이 쓰이는 언약의 단어입니다. '당신하고 나하고 이렇게 변함없는 약속을 맺으려고 합니다'라는 뜻이 되는 거죠. 이것은 마치 그 술 맡은 관원을 나보다 높은 주인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더 확실한 것은 "이 집에서 나를 건지소서" 했을 때, '건지소서'라는 단어의 신학적 의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주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할 때 쓰는 단어, 즉 출애굽 언어입니다. 앞에도 언약 은혜, 하나님의 언어고 뒤에도 출애굽,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언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요셉은 술 맡은 관원을 마치 하나님처럼 그가 이 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하나님처럼 여기고 그 단어와 내용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방법과 거룩한 방법을 판단하는 두 번째 기준, 즉 방법 자체를 의지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의 문제에서, 지금 요셉은 사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적인 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잊어도 하나님은 기억하신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세상은 여러분을 절대 돌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으로 삼으려고 하죠. 여러분이 돈을 사랑할지라도 돈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으며, 여러분을 종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결국 요셉이 의지했던 술 맡은 관원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를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창세기 40장 마지막 절입니다. "술 맡은 관원이 그러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우리는 요셉이 2년이 지난 후 41장을 통해 바로 앞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40장과 41장 사이에 만약 한 글자만 쓸 수 있는 빈칸이 있다면, 그 한 칸에 이렇게 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셨더라."

 

요셉에게는 술 맡은 관원장이라는 동아줄이 있었지만, 그것은 썩은 동아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나중에 바로 앞에서는 앞선 태도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말을 합니다. 바로가 "내가 들었더니 너는 꿈을 그렇게 잘 풀어낸다며? 한번 해봐라" 하고 얘기하자, 곧바로 요셉이 한 말은 "내가 아닙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답 하실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이제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답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지탱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끝까지 추적해 주신, 세상은 나를 잊어버리며 술 맡은 관원은 잊어버리지만 나를 끝까지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추적하시는 사랑, 헤세드

여러분,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시편 23편이 있죠. 앞 구절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이렇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에, 아마 요셉도 그 어려운 감옥 속에서 주님이 자신과 함께하신 것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편에 가장 멋있는 부분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내가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오히려 세상을 의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세상이 너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는 그 구절이 시편 23편에도 나옵니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따르리라'는 단어는 원래 군사 용어입니다. 그것은 도망치는 도망병을 뒤에서 쫓아간다는 뜻입니다. "정녕 너를 추적하여 내가 끝까지 잡으리니"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사니까 도망치고 숨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추적하셔서 나를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요셉은 고백합니다. '내가 아닙니다. 내가 사는 것도, 내가 아는 것도, 내가 가진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답입니다.' 그것이 요셉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너무나 쉽게 우리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이유 모를 분노와 이기심 때문에 흔들립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채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바로 나 자신을 추적하시는 분이 계시다니까요. 그렇더라도 끝까지 여러분을 놓치지 않는 분이 계시니, 그분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기억해 달라".

 

여러분만 주님을 기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도 여러분에게 부탁하십니다. 그 부탁의 정점이 성만찬입니다. 그때 뭐라고 얘기하셨습니까? "너희가 이것을 지켜 나를 기억하라. 기념하라."

 

주님을 기억하는 순간, 그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드디어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자유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왜 내가 울고, 왜 내가 기뻐해야 되고, 왜 내가 안식해야 되고, 왜 내가 평강이 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합시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사실로 감사합니다. 정말 아멘입니다. 그러나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기억해라. 내 이름을 기억해라. 내가 너를 위하여서 죽은 십자가를 기억하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기억하라. 나의 생명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나의 마음을 기억하라." 오 주님, 그 주님께 나아 가오니 주여 나의 이름을 불러주옵소서. 나를 기억하시는 주님, 나를 오늘 다시 불러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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