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0 1절부터 8절까지 말씀입니다.

 

후에 애굽 왕의 맡은 자와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관원장 맡은 관원장과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요셉이 갇힌 곳이라.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여러 날이라. 옥에 갇힌 애굽 왕의 맡은 자와 굽는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내용이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아멘.

 

요셉의 형통: 감옥 속에서의

요셉은 처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나서 오히려 모든 것을 잃고 죄수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자신을 믿었던 주인마저 그를 감옥에 넣었으니, 시편 기자의 표현처럼 그는 감옥 안에서 발에 고랑을 차고 목에는 쇠칼을 감은 묶여 있는 처지였습니다. 시편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감옥 생활을 덤덤히 견딘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믿어주는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감옥의 간수장이었습니다. 요셉을 자세히 관찰한 간수장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요셉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요셉이 하는 일들 속에서, 그리고 그가 만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생각지도 못한 복이 임하며 그들의 삶이 변화하는 광경을 여러 목격했던 같습니다. 그렇기에 간수장은 점점 많은 죄수들의 관리를 요셉에게 맡기려 했습니다. 요셉이 일을 맡은 후부터 놀랍게도 많은 죄수들과 주변 사람들이 유익과 복을 누리는 것을 빈번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감옥 속에서조차 요셉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요셉에게도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감옥에서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위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 언약의 성취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본다면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갇힌 그에게는 말로 다할 없는 속상한 감정이 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감옥에서 인정을 받아 많은 일을 맡게 되었으니, 이전보다는 편한 수감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마냥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씌운 원수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워야 할지, 참으로 애매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언약

그러한 상황에서 요셉이 마음속에 지닌 확신은 가지였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 언약이 그에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지가 요셉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성경은 "요셉이 형통했다" 표현합니다. 요셉과 대비하여 우리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다고 확신하시나요? , 아멘입니다.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임마누엘'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있습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들이 여러분에게 성취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백성들을 구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셔서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에 아멘으로 답하셨고, 하나님의 언약이 여러분의 속에서 성취되는 것에도 아멘 하셨다면, 여러분도 요셉과 마찬가지로 형통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화가 만한 일이 생기고, 육신의 병이 찾아와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당장 해결되지 않는 많은 문제들로 인해 괴롭고 답답하더라도, 우리는 속에서 형통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문제에 직면하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든지, 문제로 인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여러분의 가장 근본적인 상황은 형통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형통 속에서 모든 일들을 겪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일들을 '너희가 기쁨으로 이길 있다'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셉도 하나님의 형통 안에 있었습니다.

 

' 후에': 11년의

이야기는 지난주 설교인 창세기 39 마지막 부분에서 시작하여, 오늘 설교 본문인 40장으로 넘어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 후에 애굽 왕의 맡은 자와 굽는 자가.' 여러분이 아시는 명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39장과 40 사이를 연결하는 단어가 40 처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 후에'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접속사나 단어들은 문맥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므로, 항상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 후에'라는 단어 속에는 무려 11년이라는 시간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이에는 11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좋아하시겠습니까? 무려 11년이 지나가 버렸으니, 우리가 조금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본문에서 놓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관원장의 등장 (사르 - Sar)

창세기 39 이후로 요셉은 11 동안 계속해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40장에 들어와서 요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요셉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있는 내용이 보디발과의 대화 속에 담겨 있습니다. 어느 보디발이 요셉을 찾아와 이집트 왕의 술과 떡을 담당하는 신하들에 대한 부탁을 합니다. 이때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사르 (שַׂר, H8269)' 단순한 관원을 넘어 관원의 우두머리를 뜻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보디발도 역시 왕의 친위대에서 '사르', 수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관원장은 이집트에서 매우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르'라는 단어는 나아가면 환관이라는 뜻도 포함하므로, 모든 사실을 종합해 , 사람은 왕의 최측근에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자들임을 있습니다.

 

보디발의 명령과 요셉의

이런 사람들이 왕에게 미움을 받아 보디발의 안에 있는 감옥으로 들어오게 것입니다. 이는 보디발이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왕이 매우 아끼던 사람이 죄를 짓자 일반 감옥이 아닌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에 들여보낸 것입니다. 이때 보디발은 요셉을 불러서 지금부터 특별히 신경 써서 사람을 보살피고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10년의 옥살이 후에도 여전한

어찌 보면 별일 아닌 보이지만, 요셉에게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온 10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억울함을 풀어줄 생각도 않고, 아내의 거짓말만 믿고 자신을 감옥으로 몰아넣은 보디발이 있었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요셉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0년이 지난 후에도 보디발은 중요한 일을 요셉에게 맡깁니다. 여러분이 요셉의 입장이라면 어떠했을까요? 자신의 누명을 입증하려는 노력도 없이 10 동안 자신을 자신의 안에 있는 감옥에 가둔 사람이 자신에게 일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여전히 요셉을 신뢰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셉을 석방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으며, 요셉은 언제까지 감옥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지는 우리가 쉽게 헤아리기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요셉의 변화: 진심 어린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요셉은 죄수의 신분이지만 현재 옥사의 관리를 맡고 있었기에 보디발이 시킨 일을 있는 사람이긴 했습니다. 간수장이 요셉에게 그런 책임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보디발이 직접 요셉을 찾아와 부탁한 것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을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을 떠맡은 요셉이 아침에 죄수가 관원들을 만나보니, 사람의 얼굴빛이 하나같이 좋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이유를 관원에게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일은 자신을 10 동안이나 억울하게 감옥살이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시킨 일입니다. 과연 우리 같았으면 일을 마음이 들었을까요? 그렇게 아침부터 찾아가서 얼굴빛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근심하는 이유를 물어볼 마음이 생겨난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안 두기드의 주석: 요셉의

히브리어에 정통한 이안 두기드(Iain Duguid) 목사님은 구절을 읽고 이러한 주석을 달았습니다. ' 구절에서 요셉은 죄수로서가 아니라 마치 자신의 아주 가까운 사람들로 받아들이고 진심을 다하여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안부를 묻고 어떤 근심들이 있는지를 묻는 뉘앙스를 가진 히브리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지금 그저 영혼 없이 건네는 가벼운 인사말 정도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으로 근심에 가득 관원들에게 혹시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요셉 vs. 감옥의

여러분은 대목에서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요셉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던 요셉은 채색 옷을 입고 형들이 힘들게 일하는 곳으로 찾아가 형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요셉의 이러한 진정 어린 행동은 지금의 그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는 것을 쉽게 느끼게 합니다.

 

아무것도 지킬 없는 자의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집안의 열쇠를 모두 도맡아 관리할 때에도, 그는 자신이 드디어 가지게 지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상황에 처했을 그가 행동은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어진 죄수가 요셉은 11년간의 옥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섬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요셉의 행동은 놀랍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사실 이렇게 그들을 돕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나서도 2 동안 요셉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을 바라고 그들을 섬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을 앞둔 중범죄자들이었고, 지금 그들을 돕는다는 자체가 무엇인가 대단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들을 진심으로 도왔습니다.

 

광야의 시간: 숨겨진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11 동안의 감옥 생활, 아무런 자유가 없었던 11 동안의 힘든 생활 속에서 요셉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요셉의 11년처럼 숨겨져 있는 시간들을 자주 발견할 있습니다.

 

바울의 아라비아

그중 하나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광야에서의 시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이 곧바로 회심하여 전도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사이의 시간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내용은 그가 아라비아 광야로 가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때 광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럴까요? 그것이 바로 광야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의미: 하나님만 의지하게

지금 요셉도 마찬가지로 바울이 있었던 광야와 같은 감옥에서 11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통해 시간을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 있을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런 자리로 오게 하셨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인생의 일기장에서 다시는 읽고 싶지 않고 부분만 도려내고 싶은 시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들,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고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던 그런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모두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허락된 이유를 생각해 적이 있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이들을 광야로 내보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까지는 떡으로만 사는 알고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위해 자신의 힘을 의지하며 살았던 그들에게 하나님만이 그들의 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 외에는 다른 무엇도 의지할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들을 광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형통: 모순 속의

저는 이런 순간이 제가 예수를 믿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리고 제가 목사가 되어 이런 말씀을 전할 있다는 것에도 스스로에게 놀랍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전하는 대상이 크리스천 공동체라는 저는 너무나도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광야로 보내셔서 그곳에서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며, 논바닥이 갈라지듯 우리 마음이 갈라지는 그런 힘든 순간들을 우리로 하여금 지나가게 하셨으나, 성경은 시간을 '우리가 형통했다' 말씀하십니다. 어느 누가 이런 설교를 은혜로 있겠습니까? 이런 고난의 시간을 '형통'이라고 누구에게 말할 있겠습니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를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현대의 감옥에서는 죄수들이 많은 시간 동안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고,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해 지식을 쌓을 수도 있으며, 사색과 명상을 통해 어떤 깨달음도 이룰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의 광야와 요셉의 감옥에서의 시간은 조금 달랐습니다. 구별되는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항상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번째는 시간 동안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위에 있는 이들이 복을 받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광야와 그리고 감옥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에 겪는

참으로 은혜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방울 없는 사막에 떨어진 것과 같은 너무나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주셨다는 간증을 우리는 자주 듣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번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셨으니, 너무나도 감사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일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감옥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과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 자녀로서의 인생을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

그래서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길을 우리에게 가게 하신 , 성경은 우리에게 길을 '복의 ' 그리고 '형통'이라고 담대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길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길이며, 기뻐하시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 어두운 터널을 이미 지나셨던 분이 계시다면 그때 힘들었던 순간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떠올리며 감사할 있을지 모르나, 혹시 지금 순간 어두운 터널을 지나시는 분이 계시다면 말씀으로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힘드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가 수도 있고, 마치 약을 올리는 같은 기분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너무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지금 힘들고 깜깜한 길을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이게 진정 말이 됩니까? 하나님이 정말 저를 사랑하시는 것입니까?' 너무나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해 모든 힘들었던 것이 편안해지지 않고, 좁았던 길이 넓어지지 않습니다. 좁은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더라도 길의 끝에는 좋은 것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장밋빛의 길이 있는 나라로 우리를 항상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을, 감옥과도 같은 광야로 가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빚어 가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의 모든 것이 안전하며, 풍성해지며, 모든 것을 가진 자와 같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길로 내모시는 것입니다.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인생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이시며, 얼마나 풍성하신 분인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알기의 중요성: 참된 신앙의

여러분은 예수를 믿으셨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셨으며, 오늘 예배의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신앙을 결정지을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예배의 자리로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노력에 있을까요? 아니면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는 나의 열심에 있을까요? 우리의 모든 신앙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요셉의 고백: 광야 형통 깨달

심지어 요셉도 하나님의 동행을 인지하지 못한 살아갈 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좋은 일들을 행운쯤으로 여기며 지나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났던 어떤 조그만 일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이러한 고백을 있게 것입니다. 관원장은 어떻게 본다면 요셉에게는 광야와 같은 감옥 생활의 결과물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을 얽어매고 있는 진정한 족쇄가 무엇인지를 질문했고,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좌절이라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힘든 자신의 삶을 도와주는 존재가 없는 같아서 속상해하기도 하고, 이제는 무엇을 기대고 살아야 하나 고민도 했으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하는 그런 시간을 감옥 속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감옥에서의 요셉의 인생은 성경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요셉의 이야기는 하나의 결론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셉은 자신의 모든 고민하던 순간들, 어떤 때는 울음을 터뜨렸고, 속상해했으며, 힘이 들어 이루던 많은 날들과, 혹은 평탄해 보였던 날들,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형통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꿈과 근심: 관원장의

이런 요셉이 얼굴빛이 좋지 않아 보이는 관원장에게 따뜻하게 안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불안의 원인이 사람이 지난밤에 꾸었던 이상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은 동시에 비슷한 꿈을 꾸었고, 꿈이 뭔가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아무도 그것을 그들에게 알려줄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의 해석

그런 와중에 이들은 요셉을 만나게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장면은 오늘 본문에 처음 등장합니다. 물론 이전에 꿈을 적이 있었지만, 꿈을 해석하는 장면은 오늘 본문에 처음입니다.

 

형제들의 해석 vs. 요셉의

이전에 요셉의 꿈을 해석한 사람은 그의 형제들입니다. 볏단들과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놓고 형제들은 요셉이 자신들의 왕이 되고 자신들을 다스린다고 해석하여 요셉에게 화를 내었고 그를 시기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면 꿈의 내용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해석했고 해석의 많은 부분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해석과 똑같이 되진 않았으나, 그들은 결국 요셉에게 절을 하게 되었으며, 요셉이 총리로서 다스리는 애굽에서 살게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을 해석한 그들의 마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해석의 마음: 지식 너머의

성경은 일반적으로 문법적으로만, 아니면 역사적이거나 혹은 우리가 아는 문맥적 해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평생을 개혁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화란 출신의 신학자인 로버트 가프리(Robert Godfrey) 교수는 자신의 서적을 통해 진정한 설교의 의미는 구약의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풀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개혁교회에서는 성경 말씀의 문법적인 설명을 많이 했습니다. 단어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단어가 사용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실제로도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을 해석하는 형제들의 이야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제들이 요셉의 꿈을 대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에 대해 그러한 해석을 내린 ,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자신의 가족들에게 무엇인가를 주시거나 이루려고 하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꿈의 해석을 올바른 자리로 이끌어 가서 놀라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 행위, 그리고 성경을 공부하거나 훌륭한 신앙 서적들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며, 반드시 여러분이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성령 안에서의 말씀

성령 하나님께 우리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여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그로부터 지식을 얻을 수는 있으며, 어느 정도의 감동도 체험할 있고, 새로운 것을 깨닫는 기쁨을 누릴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각자의 인생과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며 신비한 체험은 결코 경험할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없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귀하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들이 오히려 우리 자신을 만족시키는 일로만 끝나지는 않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길로만 흘러가는지 염려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우리는 진실로 조심스럽게 우리가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며, 이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특별히 조심해서 살펴야 합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대할 , 나의 지식이나 생각, 그리고 성경 이야기들의 배경지식을 알고 내용을 읽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이러한 접근 방법은 아주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이므로 어쩌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낼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와 친분이 있는 학자들 중에 분은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성경을 읽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굉장히 깊은 소위 말하는 성경의 인사이트를 파악해서 저에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분은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실 아니라 시와 문학적인 감각도 탁월하셔서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놓친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줄 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분의 성경 읽기에서는 어떤 생명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수많은 설교를 들었으며, 여러 성경을 완독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자리에 계시다면 오늘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가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서 성경을 읽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성경을 읽고 있을 , 나는 과연 진정으로 성령님께 의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해석: 요셉의

이러한 마음으로 오늘 본문의 요셉의 해석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시간에 모든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을 다룰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결정지을 있는 제일 처음 요셉이 했던 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감옥에 있는 관원들이 꿈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근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때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먼저 꿈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를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꿈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겠지요.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사람들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지혜를 바탕으로 꿈을 나름대로 해석해 주어서 해석을 통해 사람들을 놀라게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는 모든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꿈의 해석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전의 모습들만 놓고 본다면 참으로 요셉답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의 채색 옷을 형들에게 자랑하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참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감옥에 있었던 10 동안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주인으로 서서히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는 기간 동안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조차 없었던 시간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었으며, 진정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있느니라.'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인생의 해석자: 하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따라서 그의 해석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한 해석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인생을 보면서도 그는 똑같이 '당신들의 인생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이야기할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해석'이라는 말은 단순히 의미만을 파악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이 반드시 그렇게 것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께 똑같이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무엇으로 해석하고 계십니까?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20대부터 90세를 넘기신 다양한 분들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단어로 표현한다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혹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지나온 생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시겠습니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요? 여러분께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할 ,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해석의 기준은 누구입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우리 자신입니까?

 

요셉은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해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고. 인생을 해석할 있는 분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요셉이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해석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따위는 전혀 신경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어린 시절에 어떤 상처가 있으셨나요? 그냥 넘어가고 잊어버리십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참으로 아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결산하시고,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포함한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주권자이시며 우리의 인생 의미를 해석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이 10 동안 요셉을 가르치시고 단단히 붙잡으시고 단련시키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알려주신 가장 중요한 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금의 요셉으로 만드셨고,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인생의

우리는 자주 우리의 인생은 저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고백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여러분의 인생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되시나요? 여러분의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정말로 가늠이 되시나요?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의 인생에는 어떠한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여러분은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성경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이고 세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같은 죄수인 요셉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요셉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감옥에 갇혀 있는 평범한 죄수의 사람에 불과합니다. 보디발을 포함한 어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필요할 잠깐 써먹을 있는 죄수일 뿐입니다. 머리를 사람이 필요하거나 힘든 일을 시킬 한번 불러서 써먹으면 그뿐인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이런 요셉은 전혀 다른 존재였습니다.

 

성경 인물들의 가치: 하나님께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시드기야 왕은 일부러 찾아와 조언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삼손이 마지막에 감옥 속에 갇혀 있을 ,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도 비웃었을 것입니다. 사사라고 큰소리치고 잘난 척하더니 저렇게 힘없이 잡혀서 눈까지 뽑히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크게 떠들며 조롱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삼손보다는 조금 나은가요?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의 인생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니십니까?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잡고 있었던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로소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께서 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세례 요한도 세상적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셨으며 그중 명인 가룟 유다는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을 정도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다니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연보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아주 풍족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자들과 같이 다니실 그렇게 불편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에 비해 세례 요한은 벌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먹는 것은 얼마나 보잘것없었을지는 쉽게 짐작할 있습니다. 그런 그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것을 제일 무서워했던 사람이 누구였나요? 바로 세례 요한을 감옥에 넣은 헤롯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선지자를 감옥에 가둔 사실 때문에 백성의 비난을 두려워했던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헤롯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백성들의 비난도 신경이 쓰였지만, 헤롯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세례 요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헤롯도 백성들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세례 요한 인생의 유일한 가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 속에 있는 어느 무엇과도 비교될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가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사실 그는 무척이나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린도 교회로 그는 무척 두려웠고 때문에 벌벌 떨며 발길을 고린도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 안에 있는 나의 백성을 위해 들어가라' 말씀해 주셨고 그제서야 고린도 교회로 향했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이라면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다면 내가 지금 복음을 전하는데 이까짓 생명이 아까우랴'라고 하면서 용기를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잘못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내 놓고도 편지의 내용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하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만큼 바울은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면 그는 어떠했을까요? 그는 스스로 절망하고 낙담하는 대신, 그가 감옥 속에서 겪고 있는 모든 일들과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할 있었습니다. 죄수의 인생에 뭐가 그렇게 즐겁고 기뻐할 있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기뻐할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인생 전체의 가치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가치를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가치가 어디 있는지, 여러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여러분이 그렇게 귀중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대단한 것을 이루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봉사와 헌신을 했으며 얼마나 대단한 선교를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인생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귀한 존재일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마틴 루터도 칼빈도 그렇게 대단하고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목회를 하다가 쫓겨난 교회를 칼빈은 후에 다시 가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같았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결코 다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빙을 받아 다시 교회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그렇게 있었던 것이 단지 그의 마음이 좋아서거나 신앙이 훌륭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교회에서 쫓겨난 사실에 두지 않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무시했던 교인들에게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무엇이 여러분을 흔들 있겠습니까? 모든 자존심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여러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다면 어떤 것도 여러분을 흔들 없게 것입니다.

 

요셉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지금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가야 바를 알지 못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인생의 어려운 일들 속에서 답답해하고 속이 상하며, 어디로 가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 방황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리고 심한 상처들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린 분이 계시다면 지금 요셉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었는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요셉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인생은 어디에 걸려 있습니까?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 있습니까?' 예수님도 똑같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근심과 두려움이 무엇이냐? 너희는 어디에 있느냐? 안에서 너는 모든 것을 있는 자가 아니더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죄와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주 많은 대단한 일들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냅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합니다. 올림픽에서는 과녁의 똑같은 지점을 번이고 반복해서 맞춥니다. 인간들은 일들을 해냅니다. 대단한 일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보다도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싸워서 이길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참된 복과 신자의

인생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복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며, 나의 가슴속에 예수님을 품은 자이며, 성령님으로 충만한 자이며, 포도나무에 붙어서 열매를 맺고 있는 가지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며, 나는 거룩한 자입니다. 또한 나는 회개하는 자이며, 죄에 대하여 죽는 자이며, 나의 죄와 싸워서 승리하는 자이며, 나는 하나님의 영광인 하나님의 영화로운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요셉이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당신은 근심하고 있습니까? 불안해하십니까? 당신의 인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 주님, 저에게 말씀해 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들의 심령 하나하나에 말씀해 주옵소서. 그들이 기뻐해야 하는지, 그들이 안심할 있는지, 그들이 험한 세상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있는지를 말씀해 주옵소서.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장에, 그들의 깊은 마음속에 말씀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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