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9 19절로부터 23 까지 입니다.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아멘.

 

요셉의 고난과 말씀의 단련

오늘의 본문은 창세기 39 19절에서 23 말씀과 함께 시편 105편입니다. 시편 기자가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옥에 갇힌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잘못하여 갇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게 살려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17살의 요셉은 천방지축에 자기중심적이었으며, 형들이 고생하는 곳에 채색 옷을 입고 정도로 철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 노예가 되고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버지의 사랑 속에서 온실처럼 자란 아이가 갑자기 종이 되었으니 얼마나 변화와 힘든 일이겠는가' 하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디발의 인정을 받았고, 이제 겨우 17살의 어린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보디발의 집안이 복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로써 요셉은 자신의 인생에 특별한 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겨우 열일곱 살의 나이에 종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모든 것을 맡는 총관이 되었을 , 그는 놀랍게도 집안을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 인도했습니다. 보디발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보디발의 아내를 통해 그는 가장 어려운 번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요셉이라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거나 꾀를 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유혹을 벗어나기 위해 옷을 벗어던지고 도망쳤습니다.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셔서 복이 것이라 생각했고, 요셉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감옥의 진실

시편 기자는 감옥에 그의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다." 구절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우리가 아까 읽은 구절을 보면, 요셉이 감옥에 갔을 간수장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를 모든 죄수를 관장하는 사람으로 세웠고, 그를 통해 모든 일이 실수 없이 진행되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발에는 족쇄를 차고 있고 몸은 쇠사슬에 매였다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았던 같습니다.

 

이어서 지난주에도 읽어드린 말씀이지만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가 쇠사슬에 매여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라는 구절을 통해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번째는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그의 ' 살펴보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발의 차꼬를 찼다' 것은 족쇄를 말합니다. 한국 분들은 사극을 많이 보셔서 감옥에 가면 발에 채우는 것을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그리고 ''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이라는 단어 옆에는 관주(번호) 적혀 있습니다.

 

그의 '' 위에 적힌 조그마한 숫자를 보면 밑에 각주에 '희혼(히브리어로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 '영혼' 뜻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경에 글자가 없으면 1이라고 쓰시고 밑에다가 '히브리어로는 혼이다, 영혼이다'라고 쓰세요. 그리고 쉼표를 찍고 '생명'이라고도 쓰세요. 단어가 '생명' 되기도 합니다. 점을 찍고 ''이라고도 쓰세요. '' 아니라 ''입니다. '네페쉬'라는 단어가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숨을 내쉬었죠. 그래서 '생명이 된지라'라고 합니다. 그게 '네페쉬'입니다. 여기 ''이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말한다면, '몸이 쇠사슬에 묶였다' 것보다 '목에 우리가 말하는 칼을 찼다' 번역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감옥에 갇힐 목에 길게 차는 쇠칼을 찼다는 것입니다. 이는 발에는 족쇄를 차고 목에는 쇠칼을 차서 움직이지 못하고 감옥에 계속 있었다는 것을 금방 있게 해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그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번역을 하게 되면, 우리가 보기에는 그는 간수장의 인정을 받아 감옥 모든 일들을 관장하는 사람인데, 목에 쇠칼을 차고 다리가 족쇄를 모습은 조금 이상합니다. 그래서 ''이라는 단어, 영혼 혹은 생명을 사용하여 '영혼이 쇠에 갇혀 있다'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없습니다. 영혼이 갇혀 있다는 것은 영혼이 몹시 괴롭다는 뜻입니다. , 요셉은 육체적으로도 힘들었고, 영혼도 몹시 괴로웠다는 것입니다. 어느 번역을 취하든 제가 말씀드리려는 뜻은 분명합니다.

 

요셉의 억울함과 깨달음

뜻은,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 간수장의 은혜를 입어 일을 맡는 상황을 겪고 있었지만, 결코 마음이 편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에 평화가 없었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찬송하며 기뻐할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맡은 관원과 맡은 관원의 이야기에서 밝혀집니다. 요셉이 맡은 관원의 꿈을 해석해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의 마음을 엿볼 있는 매우 중요한 힌트입니다. "당신이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그는 '이곳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빨리 나가고 싶어 사람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 구절이 그의 마음을 정확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해 줍니다.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입니다.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억울하다', ' 지은 없다' 뜻입니다.

 

요셉은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히브리 , 가나안 땅에서 죄가 없어 노예 상인에게 팔려왔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팔려왔을까? 형들한테 얼마나 잘못했으면 나를 팔았을까?'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어 억울하게 이곳에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셉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여러분이 요셉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가 변화하는 순간들을 충분히 이해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억울합니다. 가나안에 있다가 여기 끌려온 것도, 종이 것도, 그리고 짓지도 않은 때문에 감옥까지 것도 억울합니다. '나는 여기 있어서는 되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며,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일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론,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해서 그가 무조건 '저래서는 되지'라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을 통해 스토리를 알고 있지만, 요셉 자신은 깨닫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못하는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기준을 분명히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항상 제일 객관적인 길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잘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는데 본인은 모릅니다. 본인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너무 많은 거죠.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아닌 말씀의 단련

요셉은 그런 상황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모르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 속에서 그를 만들어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듯이, " 모든 일이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요셉이 고난을 받았지. 감옥까지 끌려가서 고생했지'라고 생각하면서, 고난 때문에 요셉이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고난을 통해 철이 없던 사람이 철이 들거나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세상에서도 자주 봅니다. 성공하던 사람이 실패를 겪고 겸손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요셉 이야기를 통해 '고생은 주고도 산다'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가 무엇으로 변하고 단련되었다고 말합니까? 말씀으로입니다. 고난으로가 아닙니다. 고난으로 그가 금같이 나왔는데, 고난 속에서 무엇 때문에 그가 금같이 되었습니까?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가 금과 같이 나오는 것이지, 고난만 통과한다고 해서 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그의 고난을 주장하고, 그의 고난 속에서 역사하며 함께하지 않는 , 요셉의 인생은 고생만 하고 성경이 말하는 것들은 하나도 얻을 없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를 말씀이 단련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셉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언약

여러분, 우리 다음 질문은 당연히 이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무슨 말씀이었기에 그를 그토록 변화시켰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은 어떤 것인가요? 요셉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 있을까요? 요셉 이야기를 떠올리면 제일 처음은 요셉이 꿈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형들과 부모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계시를 주셨죠. ', , 말씀이 그로 하여금 어려운 시기와 고난을 이기게 했구나.' 다시 말해, '언젠가는 그날이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종이 되고 감옥에 갇혀 있지만, 언젠가는 형들이 나에게 와서 무릎을 꿇는 날이 것이다. 아버지 야곱이 나에게 와서 절하는 날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이겨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는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시편 105편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바로가 '너를 내가 건져낼 , 그가 너를 자유하게 했을 '라고 말합니다. 그때까지 말씀이 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로부터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형들을 만납니다. 그때까지 말씀이 응했다는 것은 형들이나 아버지에게 응한 것이 아니라 바로에게 응한 말씀인데, 바로에게 어떤 말씀이 응했냐면 요셉을 발탁하여 높은 자리에 앉혔더니 그가 “집의 주관자로 삼아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를 높여 높은 자들을 교훈하고 가르치게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응할 때까지의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요셉을 발탁했더니 기근으로 망할 수밖에 없었던 애굽 나라의 문제가 바로의 꿈을 해석한 요셉 덕분에 해결된 것입니다. 보디발의 문제가 요셉 때문에 해결되었듯이, 애굽 나라의 문제도 요셉을 통해 해결된 것입니다. , 말씀이 응했다는 것은 애굽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라가 좋아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어느 말씀과 관계가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진 증거, 유언

이것을 시편 105 8절에서 이야기합니다. 8절과 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그의 언약 천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시편 105편의 앞부분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억하셔서 이런 일을 해주셨는지, 요셉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요셉 이후에 출애굽이 일어났는지, 애굽에서 사람들을 이끌어내 가나안까지 인도하셨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든 일의 이유가 바로 영원한 언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셉이 모든 일을 견뎌내고 변화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것은 바로 언약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시작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로 인하여 모든 이방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다." 보디발도 복을 받고, 애굽과 바로도 지금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요셉 때문에.

 

우리가 가끔 농담으로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것처럼 지금 요셉 때문에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복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약속은 '너희가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입니다. 가나안 땅이 너희의 것이라는 언약이 있습니다. 언약 역시 매우 중요하여 요셉의 생애가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줍니다. 창세기 50, 요셉이 죽을 때가 되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지금 요셉이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는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들을 결국 하나님께서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실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보내셔서 여러분을 구원하려고 하신 '이라는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게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정점

말이 아니라 신약에 있는 말씀을 들어보시고 어느 책인지 맞춰보십시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것은 신약 히브리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말씀은 요셉의 인생을 줄로 요약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으로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했다'거나 '믿음으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 이야기에는 믿음으로 행한 모든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요셉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형제들과의 재회는 히브리서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정점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고, 그가 가나안 땅에 모든 이들이 돌아갈 것을 말하고 자기 뼈도 그때 가져가라고 명한 있다고 말합니다. 요셉이 자신이 나라에 속한 자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이 요셉으로 하여금 감옥에서의 모든 고난, 감옥 이후의 모든 인생, 형제들을 용서하는 순간, 그가 살아가는 모든 속에서 문제들을 이겨내고 견뎌내며 단련받게 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겪고 있는 아픔과 눈물, 한숨, 혹은 여러 문제가 있을 , '주께서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라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우리가 얼마나 사실을 잊고 사는지 아시겠습니까? '주께서 다시 오시며 우리를 위하여 나라를 예비하셨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의 '이라는 때문에 가슴이 뜁니까? 그것 때문에 힘든 것을 극복해낼 있습니까?

 

요셉은 지금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의 언약,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것이다. 내가 허락한 가나안 땅이 너의 땅이요, 내가 너를 세우는 나라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이 오늘 여러분을 어떻게 살게 하십니까?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일에 그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놀라운 역사 하나는 그가 드디어 '애굽이 나의 모든 것이 아니고 나의 진정한 본향은 가나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우리는 요셉이 말씀 때문에 달라졌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자신과는 연결하지 못합니다. 형통을 좋아하는 요셉의 모습은 금방 알면서도, 그의 인생을 정말 있게 만들었던 하나님의 약속들은 우리가 소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의 의미

요셉이 형통했다고 말하는데, 그곳이 다름 아닌 감옥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감옥에 가지 않아야 형통이거나, 설령 감옥에 갔더라도 지진이 일어나 구출되어야 형통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감옥에 있는 요셉을 향해 '형통했다'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의 의미와는 정반대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형통하게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노예에서 죄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께 실망할 만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는데 돌아온 것은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얼마나 크게 좌절했는지 시편 105편은 "그의 영혼조차도 쇠사슬에 묶였도다, 쇠에 갇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찾은 형통의 본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있을까요? 요셉이 놀란 것은 다음 사건일 것입니다. 감옥에서 끝날 알았는데, 그곳에서 복을 받습니다. 간수장이 모든 죄수를 요셉에게 맡겼고, 성경은 그를 '범사에 형통한 '라고 칭합니다. 부분은 앞서 언급한 요셉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요셉은 발에 족쇄를 차고 몸은 쇠사슬에 묶인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매일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 하셨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형통' 단순히 일이 풀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간수장이 요셉을 인정하고 모든 일을 맡긴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는 와중에도 바로가 그를 자유롭게 해줄 때까지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그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통'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이렇게 해석해야 정확합니다. 말씀이 그를 단련하는 모든 것은 형통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단련하는 모든 과정이 성경이 말하는 형통입니다. 요셉이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단지 참고 견뎌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힘들어서 쓰러지고 눈물 흘리고 영혼이 괴로웠던 순간조차도 성경은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과정을 통해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첫째, 형통은 장소와 관계가 없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있든, 감옥에 있든 하나님은 그를 형통케 하시는 분입니다. 자신이 어떤 자리에 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함께하십니다.

 

둘째, 형통은 나로부터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형통이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에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 때문에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셋째, 형통은 생각과 다릅니다. 요셉은 형통이 어려움 없이 모든 일이 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단련하는 모든 것이 형통이다"라고 말합니다. 말씀 때문에 고민하고 기뻐하고, 부딪히고 힘들어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든 순간까지도 성경은 형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씀 때문에 고민하는 순간들, 말씀 때문에 기뻐하는 순간들, 말씀 때문에 부딪히고 힘들어하며 애쓰고 눈물 흘리던 순간까지도 성경은 형통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그대로 지켜 살고 싶은데 그것이 되는 때문에 고민하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여 어쩔 모르는 순간들도, 말씀이 여러분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승리하게 하는 순간만이 형통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쓰러뜨리는 순간만도 형통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단련하는 모든 순간들이 형통입니다. 금을 추출해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 녹이는 순간들을 '형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금으로 빼어내는, 금으로 빠져나와 금덩이가 되었을 때가 형통이 아니라, 금덩이 속에서 모든 불순물이 나와 불타고 냄새를 내고 썩어가는 순간들도, 주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시며 말씀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순간들이 형통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인생

형통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마음대로 하는 같지만 그런 하나도 없습니다. 말이 아니고 성경이 하는 말이잖아요. 우리 중에 '나를 위하여 사는 이는 아무도 없고 주를 위하여 산다'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정말 그러세요? 어제도 밥은 누구를 위해서 드셨습니까? 오늘 아침에 예배에 왔지만 예배는 이렇게 열심히 오셨습니까? 때로는 보면 나를 위한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니다. 너를 위해 사는 같지만 순간에도 말씀이 우리를 단련하고 있다'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형통한 사람입니다. 한번 따라 해보실래요? "나는 형통한 자라." 말씀이 나에게도 이루어지니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의미

이제 마지막으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말과 '형통'이라는 말이 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본문에서 여러 반복해서 나오는데, 우리는 대개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뻔한 동화를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그래 하나님이 당연히 우리와 함께하시고,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그러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마치 동화책의 마지막에 백설공주와 왕자가 만나 왕자님의 키스에 사과가 떨어져 나가고 깨어나서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더라' 끝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런 적이 있습니까? '결혼하고 나서 행복하게 살았더라' 아니라 전까지가 행복한 것이죠.

 

그다음부터는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더라' 맞는 아닌가요? 생각에는 소설의 뒷부분을 쓴다면 이렇게 것입니다. '이제 백설공주를 말에 태우고 가다가 백설공주가 나는 뒤에 타야 ? 하며 뛰어내렸더라. 그걸 찾으러 왕자도 뛰어내렸더라. 그리고 끝까지 도망가는 바람에 가서 대판 싸웠더라. 그러고 나서 왕자가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서 겨우 다시 와서 말을 탔더라. 이번에는 앞에다가 백설공주를 태웠더라.' 이렇게 되어야 하는 아니에요? 그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습니까? 해피 엔딩? 글쎄요. 우리가 아는 모든 동화는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결혼식장에서도 모두 압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신부와 신랑만 빼고 모든 사람들은 압니다. '아이고, 이제 지금부터 시작이구나.' 신랑과 신부만 그날이 끝인 압니다. '드디어! 드디어 결혼했다.' 한지도 모르고 있는 거죠. 우리만. 우린 압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똑같은 일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일어난 일입니다.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28장에서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거든요. 다시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에 정말 군대에 다녀오신 분들이 아시는 단어, '뺑이 돌았습니다.' '뺑이'라는 말은 '뺑뺑이'라고 해서 같은 곳을 계속 돌며 고생한 것을 말합니다. 20년을 그의 인생에 있었던 인생을 너무 고생한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형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를 어려움에서 건져내서 풀리게 하리라." 아니었습니다. 요셉만 해도 "내가 너를 건져내리라" 해서 "감옥으로 보내리라" 이렇게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러나 내가 감옥에 함께 가리라. 노예가 요셉과 함께 가리라. 죄수가 요셉도 함께 가리라. 훗날 총리가 되었을 때도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문제 하나가 해결되거나, 심지어 감옥에 가지 않게 하시거나,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신다는 해피엔딩 스토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네버 엔딩 스토리입니다. 끝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결혼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고 우리를 단련할 것이고, 영원히 배우게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실 것이고, 영원히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여러분은 배우실 것입니다. 언제까지?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을 알아갈 것입니다.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서 정말 지루할 틈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을 매일매일 말할 없이 깊게, 깊게 알아갈 것이고, 좋아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감격하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순간도 지루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천국에서도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눈 말씀, "내가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것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나라를 예비하셨다"라는 말씀들이 "내가 다시 것이며, 너를 가장 나와 함께 우주를 통치하는 자로 만들 "이라는 약속들이 여러분을 힘이 나게 하며, 살게 하며, 능력 있게 하며, 감사하고 찬양하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이라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약속은 천국이나 만국에 가도, 아니 천만국에 가도 영원할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우리를 그토록 있게 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그분에게서 드디어 성취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영원히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영원히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 어떻게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버리심으로써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버렸기 때문에 우리를 얻게 되었고, 따라서 절대 놓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아들을 주고 바꾼 여러분의 생명을, 인생을, 순간들을,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시련과 아픔들을 하나님은 절대 놓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소중하며 하나님께서 가장 귀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근거

여러분, 여러분이 믿는,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여러분을 지킬 없습니다. 되고 풀리는 인생, 여러분이 성공한 인생이 여러분을 절대 지켜줄 없습니다. 요셉을 지킬 없었던 것처럼,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나갔던 그것이 그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기대하고 있는 성공, '이것만 되면, 좋은 직장만 생기면, 좋은 아내나 남편만 생기면, 혹은 좋은 집만 생기면, 우리 통장이 조금만 커지면, 돈을 많이 벌면' 하는 생각은 하나도 여러분을 붙들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붙듭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을 붙듭니다. 슬픔과 좌절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감옥이든 들판이든, 외롭고 고독에 빠지는 순간에도, 아니 죽음으로 달려가는 마지막 숨이 끊어질 같은 순간에도 주님은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요셉을 단련시킨 말씀이 여러분 안에 살아 있으니, 여러분과 함께하는 말씀 때문에 심장이 뛰고 눈이 밝아지며, 손과 발이 힘을 얻고, '내가 나라의 백성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가치가 있다' 것을 다시 깨닫고 함께 달려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끝나지 않는 사랑, 끝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가 주님, 저희 마음에 그리고 저희 인생에 함께하시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주님과 함께하겠습니다. 주님이 저희를 번도 부인하지 않으신 것처럼, 저희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길을 걷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