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9 1 에서 6 까지 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의 소유를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아멘.

 

요셉 이야기의 가지 관점

저희가 읽은 본문 마지막을 보면, 아브라함 가문은 인물로는 어디에 빠지지 않는 집안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요셉 또한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끌려간 것이죠. 오늘부터 저희가 요셉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텐데, 여러분은 요셉에 대해 너무나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교회에 번도 와보지 않은 분들도 요셉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상식이 도움이 때도 있지만,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추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의 이야기를 단순히 단편적으로 기록하신 것이 아니라, 흡사 연속극처럼 전개하셨다는 것을 있습니다. 17살에 자기밖에 모르고 채색 옷을 입고 뽐내던 요셉의 신앙이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신앙을 향해 나아가는가를 추적하는 것이, 이번에 요셉 이야기를 함께 공부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가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통해 어떤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며 함께 보셨으면 합니다.

 

요셉 이야기는 오늘 시작이기 때문에, 시작을 가지 관점에서 여러분과 함께 보려고 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요셉의 관점, 보디발의 관점,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모세가 이야기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안에 하나님의 관점이 자주 등장하고 물론 요셉의 관점도 등장합니다. 우리는 관점들을 통해 요셉의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1. 요셉의 관점: 형통 속에서 하나님을 깨닫다

먼저는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지금 팔려 왔습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요셉이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주인인 보디발이 그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형통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처음에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형통'이라는 말이 번째로 “그가 애굽 사람의 집에 거하였더라”는 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의 많은 노예들은 보통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밖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노예가 있었고, 안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있었죠. 안의 노예들은 밖에 나간 노예들처럼 힘든 노동에 쓰이지 않았고, 가정교사나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 혹은 집안일을 관리하는 집사와 같은 역할을 맡았습니다. , 실질적으로 지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속에는 그가 안으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안에서 일하는 것을 보니, 그를 지켜보던 보디발의 눈에 요셉은 뭔가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관점에서 어쨌든 요셉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의 뛰어난 용모 때문인지 혹은 나이가 어려서인지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국 그를 형통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을 보디발이 보았을 , 단순히 운이 좋거나 우연히 이렇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것을 느끼게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보디발이 요셉이 행동하는 것이나 일이 되는 것을 보고 ‘저것은 신이 도와주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겁니다. 가지 오해하지 않아야 것은, 요셉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집안이 복을 받아 보디발이 “이 사람이 들어오니 우리가 복을 많이 받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알게 것은 아닙니다. 복을 받은 것은 나중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에게 집안일을 맡기자, 그가 일을 시작할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집과 밭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셉 때문에 복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요셉이 오자마자 그런 복이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디발은 자기에게 당장 유익이 있어서 요셉을 것이 아니라, ‘이 요셉이 있으면 우리에게 유익이 있을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보디발은 어떤 면에서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죠. ‘이 요셉을 고용하면 우리 집에 좋은 일이 있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무슨 복의 근원인지 몰랐겠지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알았을 겁니다. 그는 양떼를 쳐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가장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일을 잘하고 능력이 뛰어나서 형통했던 것만은 아니었던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고, 그의 일이 풀렸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가지고 있는 실력이나 그가 이제까지 받았던 훈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본문으로부터 우리가 확실하게 있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지금 소위 말해 형통하여 일이 풀리고 있는데, 그것은 요셉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디발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의 구체적인 내용은 우리가 없지만, 일은 요셉에게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들입니다. 자신의 실력으로 보면 풀리기 어려운 일들인데, 그는 종이 되어 노예로 일하면서도 형통합니다. 그렇게 인생이 낮아졌을 그는 가지를 알게 됩니다. 그가 그것을 알게 것은 나중의 일로 보입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그가 집안 전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은 지위가 완전히 올라간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 자신은 보디발 바로 밑에 자기만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모든 권한을 가진 것입니다. 굉장히 높은 자리에 올라간 거죠. 자신의 능력과 실력이 아닌데 이렇게 되는 것을 보며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 요셉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해본 적도 없고 익숙하지도 않은데 인정을 받는다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라고 생각했겠죠. 그것이 확실하게 보여진 것은 그가 자리에 올라가자 집안 전체가 달라지게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어떤 말씀일까요? 바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말씀입니다. “너를 통하여 모든 백성이 복을 얻게 것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약속을 요셉이 기억하게 거죠. 혹시 “제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는데요. 목사님이 설교하신다고 마음대로 갖다 붙이시는 건가요?”라고 생각하실까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야기는 바로 요셉이 부모님을 통해 들었던 야곱 가문의 아주 중요한 내용,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다’는 말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으로 혼자 떨어져 나와 노예가 되었는데, 그가 들어간 집에 그가 일을 맡게 되자 복이 임한 겁니다. 그때 요셉이 가장 정확하게 알게 것이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구나.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내가 채색 옷을 입고 있을 때만 함께하신 아니라, 이곳에서 노예의 옷을 입고 있을 때에도 함께하시는구나. 이것은 요셉에게 깨달음이었을 겁니다. 그는 가나안에서 야곱과 함께 있었던 그곳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팔려와 애굽에서 노예가 되었는데,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나타난 겁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 하나님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나와 함께하시는 분이구나”라는 대단히 각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갈 때도 이것은 각성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약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것에 익숙해 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 와서 은혜받는 알았어요. 교회에서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알았어요. 물론 교회에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건물에 있을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여 건물에서 떠나지 않으려 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옛날에는 예배 끝날 때쯤 예배실에 들어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목사가 축도할 축복은 받으려 하지만, 설교는 듣기 힘들고 귀찮으니 마지막에 슬쩍 들어와서 축도만 받고 가는 일도 있었죠. 목사가 하는 축도가 무언가 특별한 효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도를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하시나요? 축도가 여러분에게 정말 은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며 영원히 같이 계시다는 말씀을 말입니다. 옛날 초대교회에서는 설교자가 항상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바울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럼 예배 마지막에 축도가 나옵니다. 그것이 실질적인 축도의 모습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선언하는 겁니다. 손을 올리는 것은 구약적인 잔재입니다. 제사장들이 손을 올려 복을 빌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손을 올리는 겁니다.

 

목사가 특별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는 건물이 특별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이 다른 곳보다 성스러운 장소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모여 있고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성령님이 함께하는 무엇보다 귀중하며 가장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성도이며,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여러분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바로 성전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것을 기억하신다면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단지 요셉의 인생 속에서 그가 겪고 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이나 성전이 있는 곳만이 아니라, 에스겔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희가 포로로 잡혀갈 내가 너희와 함께할 것이다”라는 중요한 내용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요셉이 보게 것이고, 약속의 말씀이 그로 하여금 변화하게 했습니다. 17살짜리 소년이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 변화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지키시더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 내가 너를 택하여 세상에 하늘의 별보다 땅의 모래보다 많게 것이며, 네가 모든 복의 근원이 것이다”라는 말씀이 여기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요셉은 여전히 자기가 여기 끌려왔는지, 종이 되었는지, 하필 보디발의 집에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찾지만, 뜻을 아는 순간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크고 거룩한 뜻은 우리가 알지만, 매일 겪는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지는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여기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생긴 거죠.

 

첫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그것을 알았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구나. 이것이 바로 요셉이 그의 삶에서 번째 시험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게 이유입니다. 그는 “내 주인이 나에게 모든 것을 맡겼는데 어떻게 주인을 배신하고 그렇게 있느냐”고 말하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까. 요셉의 생각에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고백이기도 하지만, 요셉의 고백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여전히 길이 멀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지금 말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지금 유혹을 받았는데 나는 이것을 동의하고 함께할 수가 없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드디어 노예였지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안정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평안을 누리게 되었고, 고생 끝에 행복이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인정을 받는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의 평안한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위를 갖게 거죠.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셨기에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키는 것이 당연하죠. 그런데 그는 거기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면, 자신이 형통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가질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죄를 짓는 것이고, 죄를 짓게 되면 내가 지금 누리는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는 그럴 없다. 그에게 ‘형통’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과거에 그가 나갔을 때는 아버지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었고, 그것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의식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형통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래서는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여기에는 미묘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게 되면 나는 내가 이제까지 누리던 것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데, 이런 것을 거두어 가실 분이라는 거죠. 바꾸어 말하면, 그가 지금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사실은 가야 곳은 “나의 형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입니다. 그게 그가 가야 종착역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찬송이며 하나님이 나의 형통이며 하나님 자신이 나의 기쁨입니다. 그곳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은 “하나님이 나를 형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붙잡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됩니다”라는 자리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 거의 예외 없이 처음 거쳤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처음부터 하나님만이 나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의미를 온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항상 자랑하거나 생각할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하면 대개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그래서 병이 치료받았습니다. “사업이 힘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얘기하게 됩니다. 말은 여전히 나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을 위해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보이고 살겠습니다’라는 마음이 되는 거죠. 이것은 무조건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되면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 그는 여전히 신약적으로 말하면 율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기 때문에 누릴 있는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나는 그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죠. 그는 여전히 자기가 여기 있는지,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가 알고 있던 것은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는 분이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나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자기의 형통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안전, 지위, 누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었던 거죠. 잘못된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는 내가 가진 것들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일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진행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요셉이 만약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갔다면 번째 사건은 방향이 달랐을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오히려 자신의 지위도, 가지고 있던 것도 잃어버리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죄를 짓습니까?”라고 했지만, 돌아온 것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그가 가진 현실이 어떤 것이었냐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라는 것은 알았지만,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의 것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것을 위해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2. 보디발의 관점: 하나님보다 이익을 택하다

제가 보디발에 대해 먼저 다루고 그다음 하나님을 이야기할 텐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시편을 통해 이야기에 대한 시원한 해석을 해드릴 겁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이토록 되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본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의 집에 이익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익은 나중에 것이기에,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남다르게 나타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눈치챈 것이죠. 노예인데 노예 생활이 평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디발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한 것은 문제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기도할 “주님, 이것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여 기도한 것은 좋지만, 기도한 이유가 주님이 좋고 나의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그저 무언가를 받기 위해서였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요셉이 지금 상태였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그토록 형통한 것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보았던 것이죠.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의 관점은 엄청나게 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요셉을 붙잡은 이유는 요셉이 자기 집에 남게 되면 유익을 얻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죠. 하나님의 형통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눈앞에서 보았지만, 그는 하나님께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자기에게 이익으로 향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조차도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이익을 있는 요셉만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그는 하나님의 역사는 알았지만, 하나님 대신에 그의 집과 그의 소유를 붙잡았던 사람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조차 이렇게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자기 눈앞에 있는 문제만을 바라보는 것이죠. 겪고 있는 어려움과 아픔만이 너무 커서 하나님도 생각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너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보디발과 같습니다. 보디발은 믿음이 없으니까 그렇게 것이 당연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을 있는 가장 좋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저렇게 복을 주실까? 그러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붙잡으면 되는데'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안타깝게도 자신의 이익만을 쫓았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수도 없이 하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돌아가는 길목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지켜주셨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물론이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하셔서 그때그때 여러분이 감사한 적도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때 어디로 가셨습니까? "드디어 문제가 해결됐구나"라는 길로 가셨습니까? 아니면 “나를 끝까지 붙잡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구나”라는 길로 가셨습니까? 보디발은 당연히 전자의 길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만약 여러분이 길로 가지 않고 "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끝난다면, 이것은 어쩌면 우리는 보디발만도 못한,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이 되는 것일 있습니다. 보디발의 관점은 그러한 면에서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가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현세만을 보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은 적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과거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나 보디발은 현세, 자기가 지금 누리는 것만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아시는 분이 계실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만 바라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 살려주세요”만 생각하는 분도 있을 있겠죠. 우리 모두는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학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관점: 종말론적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 하나님의 관점은 이와 같습니다. 시편 105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05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끊으셨도다. 이것은 나중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7절부터 19절까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가 사람을 앞서 보내셨으며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었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무엇이 응했습니까? 요셉 이야기인 창세기 39장에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 같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단련되었습니다. 어떤 말씀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말씀과 그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약속들이 요셉을 단련시켰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게 하셨고, 그것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를 알게 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구나”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이 바라봐야 가장 중요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요셉은 아직 그곳에 온전히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가야 곳입니다. 우리도 너무 실망하지 맙시다.

 

우리가 신앙을 생각할 , 우리의 신앙이 요셉에게 있는지, 보디발에게 있는지, 아니면 보디발의 아내에게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남을 힘들게 하고 나도 힘들게 하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면 보디발처럼 그저 “하나님,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는가? 혹은 요셉처럼 지금 하나님의 단련을 받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봐야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이렇습니다. 창세기 39장이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로 시작할 , 주어는 노예 상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105편을 보니 누가 요셉을 이끌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앞서 보내셨더라. 우리는 이것을 종말론적 시각이라고 합니다. 요셉은 과거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이는 좋은 신앙입니다. 보디발은 오직 현세만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은 어디서부터 보냐면,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져서 너의 인생이 어떻게 완성될지를 보는 시각에서 과거를 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시각입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어떠한 존재가 될지를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인생을 보실 , 우리의 인생을 평가하며 붙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대부분 성도는 종말론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종말론적인 시각을 주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요셉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 당시 요셉은 “자기가 어떻게 것이며, 나중에 형제들을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용서할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래서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랄 일이 없습니다. “노예로 팔려갔다”고 , 만약 성경책이 창세기 38장까지만 있었다면, “아이고, 요셉이 팔려갔네. 어쩌면 좋아? 가서 죽을 건가?”라고 궁금해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걱정하지 않나요? “나중에 형제들 만날 텐데 . 총리가 거고, 하나님이 미리 보내신 거잖아. 우리가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종말론적 시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심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는 시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마지막을 알려주셨고, ‘어떻게 된다’를 여러분보다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죽어도 겁이 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르신들이 저에게 자주 와서 “주님 곁에 빨리 가고 싶다”고 말씀하시지만, 목욕탕에서 살짝만 다치셔도 “아이고, 죽을 뻔했다”고 걱정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것이며, 그곳에서 우주를 다스릴 자로서 영광에 참여할 것이며,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결말을 알고 있는데, 여러분은 요셉의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그런 평안과 기쁨과 기대감과 그것으로 오는 안식이 없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여러분은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 인생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형통은 내가 지금 하나님 때문에 땅에서 받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나의 진짜 형통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마지막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거죠.

 

내가 영화롭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영화로운 삶을 추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한다는 것을 알기에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거룩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거룩한 삶이 것을 믿기에,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놀라운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거룩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거룩을 향해 가는 외에 다른 길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길이 가장 좋은 길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며, 내가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인생이 어디에 있든지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옛날에 피겨스케이팅 보는 것을 제일 힘들어했습니다. 유명한 선수 김연아 선수가 연기할 직접 적이 없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때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 조마조마해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녹화된 것을 보았습니다. 금메달 다음에 녹화된 것을 보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합니까? ‘아니, 잘할 거야. 분명히. 하는 것마다 안심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녹화된 인생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아는 분들이 땅에서 흔들리십니까? 염려하십니까? 걱정하십니까? 약해지십니까? 여러분은 느긋하게 앉아서 여러분의 인생을 있는 되는 분들입니다.

 

“아, 하나님의 안에 나의 인생이 있으며 나의 끝이 있구나. 그래서 우리는 있고, 싸울 있고, 거룩하게 사랑하며, 힘을 다해 애쓸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도 알고 있고, 환난 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도 알고 있기에 놀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욕심이 우리를 붙잡아 속에 빠뜨리는 일이 생길 때도, 우리는 놀라는 대신에 예수를 부릅니다. 우리는 쓰러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이는 진흙탕 속에서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우리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놀라지 말고 흔들리지 마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을 받으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이룰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여 우리가 누릴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우리는 우리 인생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땅에서 것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베풀 있게 하시며, 나의 것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일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우리를 단련시켜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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