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8 1절로부터 7절까지 입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아멘.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

오늘 우리가 함께 다룰 성경 본문은 창세기 38 거의 전체입니다. 38장은 우리가 읽은 것처럼 ‘그 후에’라고 시작하는데, 이는 시간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그전에 있었던 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바로 요셉을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17살에 팔렸죠.

 

‘그 후’라는 말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가 아니라, ‘그 무렵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17살에 팔려갔던 무렵에 유다가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요셉은 팔려서 집을 떠나고, 그를 팔아넘기는 가장 주도적이었던 유다는 스스로 집을 떠납니다. 사람의 이야기는 요셉의 전체 이야기와 평행 구조를 이루며 비교할 점이 많습니다. 오늘 그것을 비교하지는 않겠지만, 유다는 형제와 가족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 이방인을 친구로 사귀고, 나아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이 무조건 문제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아내로 맞았을 ,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모습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요셉도 애굽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유다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중 명은 분명한 이방 여인입니다. 마지막 명인 밧세바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학자들은 그녀의 남편이 족속 사람이라 족속의 여인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두 이방인일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방 여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우상을 숭배하는 태도가 가장 문제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쨌든 유다는 이방 여인과 혼인하는데, 여인의 배경이나 이름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의 이름은 모두 나옵니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엘이었습니다. 유다는 엘을 위해 아내를 구하게 됩니다.

 

유다와 요셉의 시간적 배경

, 그렇다면 이제 시간을 한번 보십시오. 요셉이 17 유다가 집을 떠났습니다. 요셉이 팔려갔으니 떠난 것이죠. 그리고 후에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되냐면, 22 후에 요셉을 애굽에서 만나게 됩니다. 계산해보면 요셉이 17살에 팔렸다가 30살에 총리가 되니 13년이 지나고, 그로부터 9년이 지나 가족을 만납니다. 합치면 22년이 됩니다. 그래서 22 후에 요셉을 만나게 되는데, 유다의 이야기는 바로 시간 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의 이야기가 요셉의 이야기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요셉이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총리가 되는 일이 벌어지는 동안, 유다의 집안에서는 일이 같은 시간에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말의 남편, 엘의 죽음

그리고 지금 엘이라는 아들이 아내를 맞이합니다. 대개 우리가 적어도 17-18, 10 후반이었다고 봅니다. 당시 이방인 사회에서 정도 나이에 결혼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정확한 나이가 나오지는 않지만 미루어 짐작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말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10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젊은 부부가 드디어 혼인하게 되었는데, 다말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건강하고 건장하며 젊은 남편이 그날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은 종려나무라는 뜻인데, 종려나무는 팔레스타인이나 가나안 지역에서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 집안은 대대로 며느리가 당대 최고의 미인이었던 것을 보면, 아마 다말도 아름다웠기에 이름이 다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느냐 하면, 창세기는 성경의 책인데 여기에 “하나님이 죽이셨더라”라는 표현이 처음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장면에서도 하나님이 직접 사람을 죽였다고 표현하지 않고, 우박과 유황, 지진으로 도시가 멸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표현하는 것은 처음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그의 일생을 설명하지 않고 한마디로 “무지하게 나쁜 인간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는 악한 사람이었다”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쨌든 악함 때문에 엘이 죽었고, 다말은 생각지도 못하게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형제 결혼 제도와 오난의

그렇게 되었을 , 이스라엘에서는 당연하게(나중에 모세의 율법에도 나옵니다) 형이 자식 없이 요절하면 그다음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형을 위해 자식을 낳아 주어야 했습니다. 물론 아내가 되고 자기 자식도 되지만, 처음 낳은 아들은 형의 자식으로서 가문의 기업을 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번째 결혼이 성립되었고, 오난이 이제 다말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난은 '내가 만약 다말을 통해 아들을 낳게 되면, 죽은 형님의 재산은 아들에게 가게 된다'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룻기에서 보아스가 재산을 무를 벌어지는 일과 같은 상황입니다. 자식을 낳게 되면 자신이 받을 재산을 조카나 마찬가지인 아들에게 주어야 하니 하기 싫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난이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그것을 악하게 보시고 그가 죽어버립니다. 이는 그가 재산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다말에게 성적인 수치심을 느끼게 했던 죄도 있었기 때문이지만, 중요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약속에 거슬러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통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주시겠다는 약속을 거스른 것이죠. 결국 다말은 다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모든 책임을 다말에게 전가하는 유다

이제 번째 아들만 남았습니다.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를 보면서 아직 나이가 어리다고 생각합니다. 연년생으로 보더라도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에, '너는 기다려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다리라고 이유가 바로 ' 다말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막내 셀라와 결혼시키면 셀라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얼마나 기이합니까? 우리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아들들의 때문에 그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유다 자신도 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가 했던 행동과 자식들을 가르쳤던 일들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와 자기 아들들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다말이 모든 죄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 여자가 우리에게 가까이 있어서는 되겠다' 생각하며 모든 잘못을 그녀에게 덮어씌웁니다.

 

유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기 동생을 죽이려다 팔자고 했던 사람입니다. 형제와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위험한 혼인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서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아들이 죽자 모든 것을 다말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우리는 흔히 '그래, 나도 잘못한 있지. 내가 잘했다는 아니야, 그런데 네가 잘못했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모든 문제를 돌리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특징은 자기 이름은 살짝 걸쳐놓고 자신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겪는 고통이나 문제가 사실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유다의 바닥과 다말의 상처

그래서 우리는 유다의 인격적인 바닥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며느리를 위로하고, 아들들이 그들의 때문에 죽었으니 미안하다고 생각하며 잘해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바닥을 보입니다.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버렸습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행위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이런 낙인은 '너는 저주받은 여인이다. 때문에 우리 집안에 이런 불행이 거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막내가 때까지만 있어라' 했지만, 속으로는 절대 아들을 주지 않으려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막내가 컸는데도 전혀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다말의 고통과 상처

여러분, 다말은 어떠했을까요? 그녀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이는 자신을 보호할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자식도 낳을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노후를 책임질 자식도 없다는 뜻입니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거기다가 가장 힘든 일은 복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의 집안에 시집을 갔는데, 자신을 저주받은 여인으로 만든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90세에 아이를 낳았던 사라가 있고요, 60세에 아이를 낳았던 리브가도 있습니다. 야곱의 부인이었던 라헬은 아이가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런데 다말의 이야기는 그런 아이 낳지 못하는 모든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여인을 계획적으로 쫓아냄으로써 여인을 아이조차 낳지 못하는 저주받은 여인으로 만든 사건입니다. 질이 나쁜 거죠. 유다의 바닥을 보여준 겁니다. 정말 이것이 하나님을 믿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의 근원이 거라고 하는 가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놀랍고도 끔찍한 일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택함을 받은 집안, 야곱의 아들 유다의 가정인데, 사건을 통해서 복의 근원이었던 가정은 순식간에 상처와 고통의 가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로 갚는 , 끝나지 않는 악순환

그러던 중에 유다의 아내도 죽었습니다. 유다의 아내가 죽었다는 것은 유다가 재혼하지 않는 그에게서 이상 자녀가 나올 없게 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셀라는 다말과 약혼한 상태였지만, 아버지가 결혼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셀라는 평생 총각으로, 다말도 평생 처녀로 늙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상황에서 유다가 저지르는 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자기 나름대로는 아들을 보호하려 것이지만 사실은 자기 지파 자체를 말라 죽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통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이 가장 하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의 다른 바닥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 아들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하나님의 약속조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이것을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소용없는 상황이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좋은 말씀이지', '맞는 말씀이지' 하고 끝나는 것이죠. 말씀은 여러분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적인 하나님 무시입니다. 겉으로는 찬송하고, 말씀 듣고, 예배하지만 사실은 실제적인 무신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고 말씀이 옳다고 여겼다면 그렇게 진지하게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았을 텐데 유다는 그러지 않았고, 어쩌면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다말의 복수와 유다의 타락

다말은 심각한 상황 속에서 ‘유다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나도 유다를 속이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계획은 끔찍합니다. 만약 함정을 놓으려 했다면 셋째 아들 셀라를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말은 유다를 함정에 빠뜨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지 마음을 읽을 있습니다. 하나는, 집안에 시집을 왔으니 자식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나는 저주받은 여인이 아니다. 나는 자식을 낳을 있었다'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 어디에도 다말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믿음으로 행동했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번째 이유가 그녀의 진짜 의도를 알려줍니다. 그녀는 유다를 속이며 “당신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당신의 신분증과 운전면허증을 나에게 맡겨라, 당신이 누군지 내가 가지고 있겠다' 뜻입니다. 다시 말해, 유다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셀라에게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유다에게 '당신이 틀렸고 내가 맞으며 당신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증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었습니다. 집안에 시집왔다는 외에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녀가 겪었던 상처와 일들은 그녀로 하여금 죄에 대해 똑같은 죄로, 악에 대해 똑같은 악으로 대응하게 만들었습니다.

 

유다, 바닥 아래 바닥을 드러내다

그녀는 유다에게 덫을 놓았고, 유다의 번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몸을 파는 여인처럼 속였는데, 유다는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요셉처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내가 이런 길을 가서는 된다' 거부하는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유혹에 빠져버렸습니다.

 

도대체 유다의 바닥은 어디일까요? 며느리를 홀로 두고 쫓아내버리는 비정한 모습에 이미 바닥인 알았는데, 밑에 지하 주차장이 있는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다말도 무섭습니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모른 , 무서운 방법을 통해 유다에게 사실을 알리려 했습니다.

 

죄로 갚는 , 끝나지 않는 악순환

전까지 그녀는 분명한 피해자였는데, 갑자기 그때부터 가해자가 되기 시작합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며, 죄에 대하여 죄로 갚고, 악에 대하여 악으로 대항하는 . 이것이 바로 죄의 가장 무서운 모습입니다.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어디서 멈출까요? 모두가 파멸할 멈춥니다. 이것은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마디에 마디로, 칼에 총으로 대응하며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유다도 그랬고, 다말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직면한 유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이야기,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성경에서 ' 이거 뺐어, 놓은 거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편한 이야기입니다. 불편한 이야기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대개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렇더라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저건 아니지'. 이것이 아마 여러분이 느끼는 수치감이나 불편함이겠죠.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진짜로 뜨겁고 불편해야 진짜 이유는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양파 껍질보다 무서운

여러분,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모습에서 우리는 깊은 바닥을 보게 되고, 피해자인 알았는데 이번엔 가해자가 되고, 원수를 만났는데 원수를 위해 다른 원수를 만들어내는 무서운 모습에서 우리는 죄라는 것이 양파 껍질보다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까도 까도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유다가 다말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아세요? 다말이 일을 통해 아이를 갖게 됐습니다. 3개월이 지나니 임신한 것이 드러납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 친정에 있는 여자가 갑자기 아이를 가졌느냐' 수군대고, 행음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유다가 듣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이 일을 조금은 기억나지 않을까요? '내가 3개월 전에 했던가?' 3개월 전에 당신이 일은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다윗을 생각해 보세요. 다윗은 자신을 그렇게 따르던 장군을 계획적으로 죽였습니다. 여인(밧세바) 취하고 싶어서 계획적으로 불러다가 죽였어요. 전쟁터로 내보내서 죽이긴 했지만, 어쨌든 불러다 다음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터에 보내서 죽여버렸어요. 그러면 당연히 다음에 밧세바가 왔고, 자신이 그러한 일을 다음에, 우리가 아는 다윗은 '주님,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겠습니까? 죄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시편을 썼을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다윗이 회개한 언제인 아세요? 1년이 지난 다음입니다. 밧세바가 아이를 낳은 다음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얘기하니까, 그때도 자기 얘기인 줄도 모르고 얘기를 듣고 '그런 놈이라면 당연히 죽여야지'라고 했습니다. 그게 자기였던 거죠. 그때 깨닫고 회개하잖아요. 얼마나 1 동안이나 몰랐어요.

 

막장 드라마 같은 현실

그것이 제가 깜짝 놀라 여러분에게 호소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지금 혹시 유다의 이야기를 들으며 '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사람은 양파 껍질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바닥 아래 바닥까지 내려갈 있는지 모를 지경입니다. 심지어는 ' 며느리를 데리고 와라, 끌어내서 불살라 죽이라' 합니다. 돌로 치는 것도 아닌 불로 태워 죽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 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자신이 했는지조차 물론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이를 갖게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어요.

 

막장 스토리는 우리 모두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르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이제까지 일이 있잖아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불쌍한 며느리.'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셉이 마리아에게 했던 것처럼 '조용히 끊고자'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고생한 며느리, 이미 아들 둘이 죽었고 앞으로도 아무런 소망이 없는 며느리를 그는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얘기합니다. 그녀는 친정집에서 끌려 나옵니다. 그리고는 증거물(드라이버 라이센스) 내밉니다. ' 사람이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드라마로 치면 정말 막장에 막장입니다.

 

가해자임을 깨닫다

'어떻게 그럴 수가?' 증거를 보았던 유다가 드디어 반응합니다. 일이 있었던 곳이 '애나임', '눈을 뜬다'라는 뜻의 장소였습니다. 드디어 유다가 눈을 뜨고 자신의 죄와 위선을 보게 것이죠. 자식들이 다말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자기가 살아 있으니 다말이 자기 아이를 가졌고, 자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만약 다말 때문이었다면 오난처럼 자신도 죽었어야 했을 테니까요. 그는 비로소 '이것이 다말의 죄가 아니구나, 아들들의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셨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말이 일에 대해 얼마나 깨끗했는지도 알게 되죠.

 

사실로 인해 다말을 향했던 그의 분노와 정죄가 거짓이며 위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가장 밝히 드러난 진실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의 죄를 드디어 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던 유다가 자신이 가해자였다는 것을 알게 거예요. '내가 다말을 죽인 자였구나.'

 

나는 가해자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인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분명히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죄인'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져 감각이 없어졌기에, 제가 이것을 바꾸어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가해자입니다.' 속에서 자식이든, 배우자든, 부모님이든, 혹은 주위 사람이든, 세상을 향해서든, 자연을 향해서든, 모든 것에 역시도 가해자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 아들을 잃은 것은 다말 때문이다'라며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게 것입니다. '내가 바로 다말을 죽게 하는 가해자구나. 나의 , 나의 행동, 내가 정당하다고 했던 것조차도 모든 것이 사실은 아니었구나.'

 

회개, 삶의 변화로 이어지다

그는 “그녀가 나보다 옳도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성경에 “그녀가 나보다 의롭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며 틀렸다' 뜻입니다. 그는 다말에게 거짓말을 했고, 그녀의 수치와 상처를 전혀 돌아보지 않았으며, 그녀의 권리를 무시했습니다. 다말은 당연한 권리로서 막내아들을 자기 남편으로 것을 생각했지만, 유다는 그녀의 권리를 무시했고, 결국 그녀를 저주받은 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드디어 고백하게 것입니다. '내가 바로 가해자다.' 순간 그가 보이기 시작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 같습니다. 이후 그의 삶이 정말 드라마처럼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이 형제를 떠난 , 아버지를 떠난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떠났던 것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죄의 고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에게 증거물(끈과 도장, 지팡이) 사람을 통해 보내면서 “청하건대 보소서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말은 유다와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고 묻은 옷을 가지고 야곱에게 갔을 “이 옷이 누구의 것이니까?”라고 말했던 히브리어 단어와 구조가 똑같습니다.

 

그때 같은 단어를 들었을 , 유다는 비로소 자신이 요셉을 죽인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전까지는 요셉을 팔아넘긴 것에 대해 형제들은 물론이고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거나 회개하거나 반성하지도 후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는 나중에 요셉을 다시 만났을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드디어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노라마처럼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다에게 순간이야말로 며느리에게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말했던 것처럼, 숨겨왔던 자기 자신이 끌려 나와 불에 타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되니 너무나 뜨거웠을 것입니다.

 

나는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저는 사건의 마지막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부분이 너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유다의 이야기,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런 죄를 범한 적이 없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다처럼 껍질 속에서 썩어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유다처럼, 다윗도 자신의 죄를 전혀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아십니까? 여러분이 가해자라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흘려 말했던 한마디 때문에 누군가는 밤새도록 고통스러워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혹시 아십니까? 여러분이 '나는 옳다' 생각하며 했던 말들이 결국 사람을 지옥과 같은 곳에 두었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혹시 아십니까? '연자 맷돌을 그의 목에 걸고 바다에 빠뜨린 적이 있다는 것을 혹시 아십니까?'

 

이런 거창한 일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자녀는 어떻습니까? 부모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지 않나요? '내가 부모님 때문에 이런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다', ' 자녀들은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었고, 내가 잘해주려고 했는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다', '언제나 말을 한번 들어줄까?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나' 이런 생각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가득 있지는 않았습니까? ' 세상은 이렇게 나에게 불공평한가'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까지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피해자인지, 아니면 가해자이기도 했는지, 나는 지금도 혹시 가해자가 아닌지. 제가 여러분에게 말을 하는 이유는 가지 때문입니다. 내가 가해자이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내가 바로 일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정말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움,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이것을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할 우리는 수가 없습니다. 20 년에 걸쳐 유다의 인생이 진행되었고 그의 마지막은 어떻게 보면 처참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가 돌이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 확실히 하나님께서 그를 이렇게 하시기 위해 인도하셨구나'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다말은 뭐가 됩니까? 다말은 자기 인생이 그러한 험악한 일을 통해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고자 했는데, 다말은 뭐가 됩니까? 다말도 자신을 깨달았을까요? 다말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있었을까요? 여러분이 이야기를 보면서 '유다가 변했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야기의 진짜 마지막은 유다가 자신을 돌아보며 죄인임을 깨닫고 '역시 내가 나쁜 인간이구나'라고 깨달은 전부가 아닙니다.

 

죄의 고리를 끊는 베레스

이야기의 마지막은 엉뚱한 것에서 끝납니다. 여러분, 마지막 28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죄와 속에서, 바닥과 바닥에서, 그리고 모든 악과 속에서, 원수를 갚는 원수들 속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손에 매었더니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쌍둥이가 나오는데, 아이가 손을 먼저 내밀었습니다. 산파가 아이가 형이라 생각하고 손에 홍색 실을 맸습니다. 그런데 손이 다시 들어가 버리고 다른 아이가 태어나 버렸습니다. 동생인데, 동생이 먼저 나온 것처럼 나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더라.

 

여러분, 이야기의 마지막에 부분이 있다는 것은 전체 이야기에서 무엇을 보여주는지, 스토리의 가장 놀랍고도 뛰어난 점을 드러냅니다.

 

터뜨리고 돌파하는 ‘베레스’

‘베레스’라는 말은 ‘터뜨린다’, ‘돌파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상 이야기의 핵심은, 이제까지 모든 죄가 꼬리를 물고, 악이 악으로 대항하며, 다말이 목숨까지 걸고 유다에게 복수하려 했던, 악을 악으로 갚으려 했던 모든 사건의 바닥을 터뜨리고 돌파하는 일이 마지막에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베레스라는 사람은 성경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족보처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였던 사르나는 "창세기에서 베레스라는 이름은 창세기의 획을 가르는 이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룻기가 끝날 이렇게 나옵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느니라.

 

다윗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베레스 이야기가 다윗에게서 끝나지 않고 이사야서로 넘어가면 다윗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가 연결됩니다.

 

“이는 아기가 우리에게 낳았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것이라.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누구에게요? 우리에게! 단어가 얼마나 소름 끼치도록 정확한 단어를 쓰는 것입니까? 악으로 악을 갚고, 죄로 죄를 막고, 끝없이 쳇바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지금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누가 왔다고요? 아기가 왔는데, 아기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처참한 세상 속으로 오셔서 바닥의 바닥을 어떻게 하셨다는 겁니까? ‘베레스’, 터뜨렸다는 이야기죠. 그로부터 다윗이 왔고, 그로부터 예수가 오게 됩니다.

 

죄의 고리는 사랑으로 끝난다

이것은 장벽을 무너뜨린 이야기입니다. 계속되는 원수의 원수 관계를 끊어버린 이야기입니다. 이제 이상 죄를 피하기 위해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다른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마치는 이야기가 드디어 왔다는 것입니다.

 

죄는 이상 꼬리를 필요가 없습니다. 죄가 베레스로부터 다윗에게, 그리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렀을 , 죄가 드디어 나에게서 끝나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바닥은 없습니다. 내가 잘나서도, 착해서도, 남보다 무언가를 잘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죄를 바닥과 함께 터뜨려 버렸습니다. 유다의 바닥에서, 유다와 다말의 죄가 서로 묻는 바닥에서 '베레스', 터뜨려 버렸습니다. 이상 바닥이 없고 죄는 드디어 끝나게 됩니다.

 

어떻게 끝나나요? 나에게서 끝납니다. 무엇으로 끝납니까? 죄는, 미움은, 원수는 사랑으로 끝납니다. 인내로 끝납니다. 겸손으로 끝납니다. 죄는 드디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죽습니다. 바닥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터져버린 것입니다.

 

믿음으로 변화된

여러분, 이것을 경험한 유다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를 폐기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던 훌륭한 요셉을 알지만, 혹시 유다도 아십니까? 유다가 말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요셉이 계략을 부려 베냐민이 도둑으로 몰립니다. 요셉은 “베냐민은 여기다 두고 가라. 그럼 너희들은 가서 이거 가지고 가고, 너희들이 잘못한 것은 돈으로 보상해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족이 다시 돌아가려고 유다가 나섭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여기 머물러 있어 주의 노예가 되게 하시고 아이는 올려보내소서.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몹시도 아끼는 아들입니다. 여러분, 차이를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요셉을 미워했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아들만 좋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야곱은 여전히 베냐민만 좋아합니다. “베냐민은 놔두고 너희들끼리 가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베냐민을 향해 지금 유다가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는 보내주고 나를 이곳에 인질로 잡아라. 아니, 나를 종으로 삼아라. 내가 노예로 일하겠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 유다가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요? 여러분도 그렇게 변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성경이 너무나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셔야 합니까? 여러분은 지금 '나보다 착하게 살아야겠다', '나도 용서하는 사람이 돼야겠다', ' 미움을 없애버려야겠다'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어라."

 

그리스도가 여러분 앞에 계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지금 막고 있는 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내가 신앙에 너무 정진하지 않고 있고 세상에 한눈이 팔린 '만은 아니에요,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만요. 여러분을 막고 있는 것은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 때문에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여러분의 죄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여러분을 향하여 등을 내밀고 “나에게 업혀라, 너와 함께 내가 죄를 터뜨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같이 가자”라고 하시는 그분의 등에 타지 않고 있는 당신 자신이 당신을 막고 있는 겁니다. 믿음으로 주님께 나가는 아니라, 여러분은 또다시 알량한 능력으로 나가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주님께 안기며 주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주님의 은혜 속에 들어간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혹시 부러워라도 해보셨습니까? ', 저랬으면…'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우리는 모두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누가 한번 보여준 사람이 거의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고리를 끊는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이 바로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을 안고 모든 죄를 터뜨리고 부수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시는 분입니다. 구원하셨고, 구원하고 계시며, 분명히 구원하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그분에게 매달리십시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때 유다가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속에서도 이제까지 죄로 시작했다가 죄를 물었던 내가, 악을 향해 악으로 대접했던 내가, 계속 쳇바퀴 속에서 물고 물렸던 내가 드디어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가 없으면 끝이 나요. 억울한데 어떻게 끝을 내겠어요? 그런데 끝이 보이게 되는 겁니다. “나를 잡아두시오. 나를 죽이시오. 사랑으로 끝을 내게 되는 겁니다. 드디어 인내가 끝이 되는 겁니다. 드디어 성령의 열매가 끝이 되는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고 고백하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멈추지 마십시오. 주님을 믿으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 '예수를 믿으라', '그를 의지하라' 말이 얼마나 놀라우면서도 우리 자신에게는 얼마나 힘든 말입니까? 우리가 듣는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말이지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신을 너무나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우상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보다 모든 것에 앞서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는 욕심이 많아 사랑의 선수가 되고 싶고, 인내의 열매를 맺고 싶고, 모두 겸손하고 주님 앞에서 예수를 닮은 사람들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지 없는 것은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주여, 제가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히려 주님을 믿지 않으니,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나라가 어찌 우리 안에 이루어질 것을 기대할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주여, 저희로 하여금 다른 무엇보다 주님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 예수를 제대로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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