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37 29절로부터 36절까지 말씀입니다.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아멘.

 

요셉의 꿈과 인생의 폭풍

창세기 37장의 뒷부분 이야기는 요셉의 꿈이 깨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으나, 그에게 아마 다시없을 인생의 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그리고 폭풍 속에서 그의 꿈은 좌절되었지요. 그는 왕이 아닌 종으로,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왕의 꿈을 꾸었으나, 현실은 노예로 전락한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겪은 폭풍이 바로 가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그는 인생의 가장 힘겨운 폭풍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진실을 말하자면,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네 인생은 요셉의 인생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사랑 속에서 승승장구할 알았으나, 그의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인생이란 살면 살수록 우리 스스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인생은 정말 깨지기 쉬운 그릇과 같습니다.

 

평안하다가도 어느 생각지도 못한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곁을 떠나는 일도 있으며, 결혼 생활에 위기를 겪을 때도 있습니다. 남에게 알리지 못하는 학대를 겪는 이들도 있고, 그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인생을 힘겹게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이나 여전히 일하는 이들은 나은 경력, 좋은 직장을 소망하지만, 그것이 되지 않아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자신이 세웠던 계획과 야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하기도 하고, 이처럼 크든 작든 인생의 폭풍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뒤집어지며, 오늘의 요셉처럼 깨어지고 맙니다.

 

어떤 폭풍은 참으로 가혹하여, ‘이것이 과연 회복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정도로 힘든 순간을 맞기도 합니다.

 

요셉의 꿈도 이처럼 가혹한 인생의 폭풍을 만났고, 결국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의 배신과 야곱의 속임-꿈꾸는 자를 향한 모의

꿈꾸는 요셉이 꿈을 깨는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가 사실 창세기 37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요셉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멀리서 보고 벌써 그를 죽일 생각을 것입니다.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것이니라.’”

 

그들은 요셉의 형제들입니다. 베냐민과 요셉을 제외한 명이 지금 모의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모의는 결국 요셉을 죽이려는 내용이었고, 그들은 원래 계획대로 “짐승에게 잡혀 먹었다”라는 거짓말을 끝까지 하게 됩니다.

 

르우벤과 유다의 행동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르우벤은 요셉을 살려보내자고, 요셉을 죽이지 말자고 이야기했지만, 르우벤이 그렇게 말만 했을 장자로서, 그리고 가장 연장자로서 요셉을 구하거나 실제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유 없이 자리를 뜹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 요셉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사이에 유다가 나서서 이야기합니다.

 

“야, 우리가 어떻게 우리 형제를 죽이겠냐. 우리 손에 피를 묻히지 말고 마침 지나가는 노예상인이 있으니 그들에게 팔도록 하자.

 

다른 형제들이 이야기를 모두 좋게 여겼습니다. , 이야기는 들을수록 ‘정말 이렇게까지 있을까? 정도이지만, 다른 아무도 반대하지 않아서 요셉을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을 팔아버리고 나서 르우벤이 보고는 깜짝 놀라죠. 르우벤이 마치 요셉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처럼 보일 있지만, 사실 요셉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와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지금 만약 일로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받으면, 그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얻고 싶어 라헬이 죽었을 실수를 저질렀고, 세겜에서도 아들 명으로 세겜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었습니다. 야곱은 행위를 전혀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일을 겪을까 굉장히 겁을 냈던 같습니다.

 

아버지 야곱을 향한 기만

하지만 결국 그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았고, 아버지를 속여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거짓말과 함께 묻은 옷을 아버지에게 가져가게 됩니다. 일은 야곱의 이야기이지만, 놀랍도록 비슷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야곱이 장자권을 얻기 위해 어떻게 했습니까? 짐승을 죽여 털을 몸에 붙이고 아버지를 속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슬픔과 위로 거부

어쩌면 우리는 “인과응보이다, 똑같은 일을 당하는구나, 저렇게 약은 꾀를 쓰고 살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약 사실을 기억했다면 그의 마음은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 하필 내가 요셉을 보냈던 곳에서 이런 일을 당했을까…” 야곱은 요셉의 옷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슬퍼한 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옷을 찢으며 애통한 것입니다. 이는 놀라거나 슬퍼할 취하는 행동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이야기는 자녀들이 아버지를 위로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아버지는 위로를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라헬도 자신이 마지막 베냐민을 낳을 위로받기를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슬피 울면서 “내가 스올로 아들과 함께 내려가겠다”고 말합니다.

 

스올(Sheol)이라는 말은 무덤, 죽음을 뜻합니다. 신약에서 ‘게헨나’라 불리는 지옥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나, 구약에서는 ‘지옥’이라는 단어 대신 ‘스올’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깊은 , 무덤, 또는 죽음을 뜻하는 단어이죠. 야곱은 바로 그곳으로 자신이 가겠다는 말입니다. “아들과 함께 내가 죽음까지 같이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이었다면, 그는 형제들의 위로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형제들의 위로도 필요 없다며 “나는 그저 그냥 죽고만 싶다”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형태로 보아도, 우리는 야곱에게서 믿음의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반응을 보게 됩니다.

 

위로를 거부한 이유: 진실 외면

야곱은 결국 위로를 거절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는 위로를 거절했으며 위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까요? 아들들이 “아버지, 요셉만 아들입니까?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런 모든 위로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아들들이 그렇게 접근해서는 되었을 것입니다. 아들들의 위로는 분명 거짓 위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진정한 위로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들들 역시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아가 야곱 역시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들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요셉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자신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자녀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신들을 살피지 않았고, 야곱 또한 자신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참된 위로는 진실을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어떤 병에 걸렸을 , 예전부터 한국적인 정서 속에서는 “아이에게 병을 숨겨라. 혹시 충격을 받아 힘들어질 있다”는 말이 많았으나, 이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판단할 일입니다. 때로는 늦춰야 때가 있고, 때로는 빨리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시 요셉을 만나기 전까지는 진실을 마주할 없었습니다.

 

진실을 향한 용기: '나는 누구인가' - 장발장 이야기의 교훈

여러분, 장발장이라는 유명한 인물을 아실 것입니다. 저도 어릴 《레 미제라블》이라는 소설은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장발장》이라는 제목의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장발장의 이야기는 항상—빵 조각 훔쳤다가 5 동안 감옥에 갇혔고, 그동안 번이나 탈옥을 시도하다가—결국 19 동안 감옥에 갇혔다는, 억울한 사나이의 이야기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어느 성당에 들어가 은그릇들을 훔쳐 나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괜찮다. 가져가서 새롭게 살아라”라고 말하죠. 말에 감동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저는 부분이 이야기의 끝인 알았습니다. “장발장” 하면 거기서 끝나는 알았죠. 그런데 《레 미제라블》 뮤지컬을 보기 전까지는, 그게 이야기의 시작인 몰랐습니다. 영화로도 나왔듯이, 그것이 바로 시작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그가 자기 신분을 속이면서 시작됩니다. 나중에 그는 이름을 “마들렌”으로 바꾸고 시의 시장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을 끝까지 쫓는 형사가 있죠. 형사가 “저 사람이 아무리 봐도 장발장이다”라며 의심합니다.

 

그러던 마침 법원에서 “장발장을 잡았다”고 연락이 옵니다. 그런데 진짜 장발장은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형사가 다시 법원으로 가는 사이에, 장발장은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이 가짜인 것을 너무나 아는데, 내가 여기서 양심 선언을 해야 할까? 그렇게 하면 지금까지 이룩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대신 누군가가 사형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는 너무나 괴로워하다가 결국 법정으로 향합니다.

 

정체성을 고백하는 노래

거기서 유명한 노래,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부릅니다.

 

My soul belongs to God, I know 영혼은 하나님의 , 잊지 않았네.

I made that bargain long ago 이는 아주 오래전 내가 다짐한 .

He gave me hope when hope was gone 그분은 희망이 없던 내게 희망을 주고,

He gave me strength to journey on 살아 나아갈 힘을 주었네.

Who am I?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I'm Jean Valjean 내가 장발장.

That man bears no more guilt than you 자는 아무런 죄가 없어.

Who am I? 24601! 나는 누구인가? 24601!

 

“이름을 가질 자격도 없는 나는 24601. 24601 죄수 번호입니다. “내가 바로 죄수다.

 

대목에서 노래는 가장 높은 음으로 치닫습니다. 테너가 부르는 노래에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이름도 가질 자격이 없는, 식스 지로 (24601)!

 

모든 일을 바로잡는 데에는 진실이 필요했고, 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 의식의 중요성

그리고 진실이 중요해지는 지점은, 장발장의 경우를 통해 예로 것처럼, 단순히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를 속일 없고 하나님을 속일 없다’는 의식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진실하게 보아야 하고, ‘내가 하나님의 것이기에 사실을 숨길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내가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나를 살리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아들들은 심해서 ‘내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그것이 진실이라면 진실을 이야기할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것은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패도, 나의 좌절도, 나의 욕망들도, 나의 모든 아픔과 슬픔조차도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해야 잘못이 있고, 갚아야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투 식스 지로 .

 

여러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에게 어디까지 솔직하십니까?

 

죄인됨의 진정한 인정

우리 모두 죄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죄가 많은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죄인이라고 때는 다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고백하다가도, 옆에 있는 사람이 “맞아, 죄인이야”라고 하면 벌떡 일어납니다.

 

“뭐라고? 당신이 뭔데 나한테 죄인이라고 하는가?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디까지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까? 남이 나를 공격할 공격을 내가 참지 못할 정도의 죄인이라는 것까지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모든 것을 회개한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 사실은 “하나님, 나는 괜찮지 않습니까? 나는 그래도 회개한 사람입니다. 쟤는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보여줄 때”에 비로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더욱 명확히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까? 이름조차 없고 번호밖에 없는 나까지, 감옥까지, 죄수의 삶까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지는 모든 바닥까지—거기까지 누가 오신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있겠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야곱은 위로를 받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그리고 자기 자신을 대면할 그러한 모습과 삶을 지금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신뢰와 소망의 회복 - 하나님을 신뢰할 있는 이유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렇게 인정하더라도—억울한 면이 있을 있습니다. 아들들이 나를 속였는데 내가 어떻게 모든 것을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리고 우리들은 똑같이 위로와 소망을 회복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을 모르더라도,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할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여러분은 어둡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등불을 들고 숲속을 헤매며 길을 찾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손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숲을 걸어가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야곱의 선택과 우리의 선택

사실 욥기의 이야기나 성경에 나오는 많은 신앙인의 이야기는 문제를 항상 다루게 됩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알고, 당신의 힘으로 불을 비추어 당신의 인생길을 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어떤 때는 앞이 보이지 않고, 어떤 때는 깜깜하며, 어떤 때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순간에—

 

“하나님, 나에게 그저 앞을 비추는 플래시라이트 하나를 주지 마시고, 하나님이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리고 가십시오. 나는 따라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는 야곱이 너무나 다른 길을 택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스올로 내려가리라, 나는 죽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남은 인생 전체에서 위로를 거절하고, 차라리 “내 감정 속에서, 죽음 앞에서, 아들의 아픔 앞에서 그저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의 소망

여러분, 누구도 사실 야곱을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정말 진실하며,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아유, 됐어.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 일어나”라는 말처럼 아프게 하는 것도 없을 있습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 있는 사람에게, 신앙인이 “그것을 이겨? 믿음으로 일어나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를 주저앉히는 일이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러한 권면을 하고 싶다면, 우리는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픔과 슬픔을 진심 어린 마음으로 함께 느끼고,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상한 마음에만 머물러서는 됩니다. 왜냐하면 상한 마음에 소망이 없게 되면 그것은 결국 스올(죽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상한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없고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것은 돌이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음만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사업 실패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일을 했을까?”라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좌절시키고, 힘들게 하는 순간에도 여러분은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벗겨져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놓칠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있다. 정확하게 시편 34편을 읽어드리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얼마나 달콤한 언어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즐겁고 기뻐서 여러분의 기도 제목을 모두 들어주시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걱정거리 없게 해주십시오. 속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도 항상 사랑이 넘치게 해주십시오.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는 어렵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서는 됩니다.

 

“주님, 인생 속에서 우리가 언제나 아픔을 겪게 됨을 압니다. 근원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며, 가까이는 우리의 욕심이요, 우리의 교만이요, 우리의 자존심 때문에 오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으로도, 어떤 것으로도 지울 없는—어떤 것으로도 닦아낼 없는—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십자가, 하나님의 사랑, 주님 그것이 있음을 붙잡습니다. 그것으로 함께하시는 주님과 내가 걷기를 원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상한 마음에 주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야곱은 그의 남은 인생을 무덤 속에 살기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아닌 절망을 택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자기 자신을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그는 부활하신 무덤이 아니라 슬픔으로 가득 무덤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아닌 하나님을 아는 행복

여러분, 야곱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 있습니다. 단지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힘들어했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과 내일 일어날 일들을 이해하십니까? 아십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설명할 없는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내일 아침에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내일의 신문을 원하십니까? 내일의 모든 일들을 보여주는 신문이 매일 저녁마다 여러분에게 오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지고, 정말 있을 같습니까?

 

여러분이 앞일을 모두 알고 있으면, 여러분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 있다고 정말 확신하십니까? 세상의 모든 일들을 깨닫고 만큼 여러분의 지식과 능력이 대단해서, 듣고 아는 것마다 이해하고 인생의 모든 일들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행복하실 것이라고 정말 확신하십니까?

 

성경의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것을 알아서 여러분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내일 나와 함께 걸어가시며, 인생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나를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은 오히려 불행할 것입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피할 수도 없으니까요.

 

어찌해야 좋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간다면,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의와 평강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잊어버린 믿음: 이삭과 여호와 이레

여러분, 우리가 사실을 너무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찾습니다.

 

야곱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은 이삭이 어떻게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는지 이야기를 들었을 터인데,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깝게는 세겜에서의 위험한 이야기조차 잊어버린 것입니다. 가족들이 모두 죽을 뻔했으나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는데도, 그것마저 잃어버린 같습니다.

 

그는 염소의 피를 보았습니다. 옷에 염소의 피가 묻지 않았습니까? 요셉의 피로 오인하고 있었지만, 염소의 피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숫양의 피로 제사를 드렸던 아브라함과 이삭의 여호와 이레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지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산을 올랐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깨어진 꿈과 꿈을 꾸었던 요셉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만 보였던 것이죠.

 

야곱에게 정말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때 있었다면 야곱을 붙잡고, ‘야곱, 당신은 말이 무슨 뜻이냐? 스올로 아들과 함께 가고 싶다니, 같이 죽겠다니, 이게 무슨 말이냐? 살아계신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서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어디에 계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염려하고 계시며, 무엇 때문에 연약해졌으며,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 - 슬픔을 아시는 아버지

그래서 저는 우리가 반드시 야곱과 다른 아버지를 기억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야곱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울었고, 어쩌면 사랑을 가진 아버지였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게 만든 아버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슬픔보다 슬픔을 아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는요, 아들을 잃어보신, 잃어버리셨던 아버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잃은 자를 도우실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던 아버지,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상심한 자를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죽음 속으로 함께 오신

게다가 우리가 것처럼, 사망의 길을 걸어갈 야곱은 자기 마음대로 “내가 음부(스올) 들어가리라” 이야기했지만, 실제로 야곱은 같이 수도,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길을 정말로 같이 가신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편 23편도 우리에게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분은 권세로 죽음을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으로 죽음을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은혜와 뜨거운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죽음 속으로도 들어오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영원한 식탁의 잔치

여러분, 저는 시편 23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습니다. 시는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식탁을 베푸실 것이다.

 

저는 예전에 한문 성경을 보지 않고 한글 성경을 처음 봤을 , “상을 베푸시고”라는 구절을 보고 밥상이 아닌, 진짜 () 주는 알았습니다. 개근상 같은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와, 주님께서 상급을 주시는구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밥상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음식을 만드시고, 여러분을 위해 식탁을 차리시고, 여러분을 초대하셔서 함께 식탁을 나누자고 하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번도 부엌에 들어가시는 것을 적이 없어서, 자신도 그려지지 않습니다. 저는 아버님을 너무 존경했고, 아버님을 따라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남자의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에이프런을 두르시고, 가장 좋고 가장 영양 있는, 가장 생명이 되는 모든 음식을 직접 지으셔서 여러분에게 식탁을 베푸십니다. 여러분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고, 여러분과 함께 잔을 나누십니다. 잔은 영원한 잔이고, 잔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6)

 

놀랍지 않습니까? , 야곱이 하나님께 호소했다면, 야곱이 하나님을 번이라도 불렀다면, 그의 슬픔과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는 소망 없이,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의 고백

우리가 알고 있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셨던 이야기가, 그가 소천하신 후에 유명해졌습니다. 그가 임종이 가까웠을 언론에 남겼던 말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여러분이 ‘빌리 그레이엄이 죽었다’는 소식을 읽거나 듣게 것입니다. 한마디도 믿지 마세요. 나는 지금보다 확실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주소만 맨해튼에서 하나님 나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처럼 집회와 많은 복음주의 운동을 이끈 분들이 교회에 유익을 끼쳤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약점도 많았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의 메가 집회들이 교회에 모든 면에서 유익만을 끼쳤다고 단정할 없으며, 그의 신학적인 입장이나 가르침이 항상 성경과 가장 가까웠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알았으며,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것을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한마디도 믿지 마세요. 나는 지금보다 확실하게 살아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절망에서 구원으로: 요셉 이야기의 대반전 - 부서진 꿈의 시작

오늘 본문의 대반전이 바로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슬쩍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 바로 다음 장에 유다 이야기가 이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구절을 넣으십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팔렸더라.

 

요셉은 죽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죽었어요. 요셉의 이야기도 장발장의 이야기처럼, 그냥 “그가 이제부터 마음을 고치고 열심히 살았더라” 하고 끝나는 것처럼 팔려갔더라…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처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시작인 것입니다. 요셉은 죽었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일이 시작되고 있으며, 너희를 구원할 나의 일들이 시작될 것이다.

 

부서져버린 꿈이 산산조각 나서 영원히 없어질 알았는데, 산산조각 꿈을 통해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의 옷이 구원의 옷으로

여러분, 야곱은 요셉의 죽음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꿈조차 깨어졌고, 소망을 잃었으며, 믿음 또한 너무나 약해져서 거의 잃어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요셉의 묻은 옷은 야곱에게 절망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하늘 아버지에게는, 묻은 옷이 바로 다른 아들들을 구할 그리스도의 옷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죄를 지었다는 유일한 증거, 너희의 죄를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속에는 그들의 시기심, 절망, 교만, 이기심, 분노, 탐욕, 모든 것이 가득 있던, 피로 물들었던 옷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구원의 옷이 되어, 그리스도의 거룩과 의를 입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이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같았으나, 사실은 반대의 인생을 하나님은 지금 시작하고 계시며, 우리는 길에 증인으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부서진 조각에서 순수한 것을

제가 전에도 소개해 드렸던 이안 두기두 목사님이 그의 《창세기에 나타난 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는 아버지가 어찌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선을 위하여 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일을 잊어버리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여러분의 인생을 그렇게 가볍게, 그리고 쉽게 내버려 두실 같습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러분의 인생이지만, 하나님이 어찌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분은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일하실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힘들게 하는 타인의 죄가 당신을 구석으로 수도 있습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남기는 당신의 죄도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막지 않고 그냥 두실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꿈도 산산조각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부서진 조각들에서 순수하고 풍성한 것을 가져오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시련과 우리의 ,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도,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게 하실 것이고,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얼마나 절실한가를, 모든 부서진 순간순간들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이 얼마나 부서져 있는지도, 주님은 모든 것을 통해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고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가 찾아야 진정한 보물, 바로 하나님 자신과 그분께만 집중하도록 가르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고통 앞에서 소망을 잃고 '스올로 내려가리라' 했던 야곱의 깊은 절망을 마주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갇혀 주님을 외면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나는 주님의 '이라는 진실 하나로, 모든 슬픔과 고난을 담대히 직면할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시는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게 하소서. 깨어진 꿈의 조각들을 모아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절망의 묻은 옷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의의 옷으로 바꾸신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믿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함께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소망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슬픔을 거부하고, 주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는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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