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12절로부터 24절 까지 입니다.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아멘.
요셉의 꿈과 형들의 질투
우리가 요셉을 떠올리면 당연히 '꿈'이 생각나고, 그 꿈은 형들의 시기를 받게 됩니다. 형들은 단지 요셉의 말이 미웠던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통해 요셉은 왕이 되고 자신들은 종이 되는 일이 일어날까 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은 꿈의 본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의 계시인 그 꿈을 받아들였습니다. 원래 그 꿈은 요셉이 왕이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제들과 부모를 구원하는 일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두가 기근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형들은 계속해서 그를 시기했고, 어느 날 양 떼를 몰고 세겜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세겜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에서 봉변을 당하자, 그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 성읍을 약탈하는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 사건은 요셉이 열일곱 살이 된 시점으로부터 불과 2~3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 사건 당사자 측에서 혼인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요셉보다 나이가 어린 디나가 적어도 열다섯 살은 되었을 것입니다. 디나의 나이가 요셉보다 어리므로, 요셉이 열다섯 살 무렵에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볼 때, 오늘 이 본문은 그때로부터 넉넉히 잡아도 2~3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아들들을 다시 세겜으로 양을 치러 보낸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지역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세겜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주변 부족들이 야곱의 가족을 해치지 못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아들들에게 "너희들 세겜에 가서 양을 쳐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건은 사실 굉장히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용납할 수 없는 죄
세겜 사람들을 모두 죽여 주변의 원수가 된 형제들이 다시 그곳에 갔는데도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해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사 생명을 보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 양을 치게 한 것도, 형제들이 그곳으로 양을 몰고 간 것도 모두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던 곳에서, 그들은 동생을 죽이려 합니다. 이 사건의 심각성이 느껴지십니까?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는 다른 상황을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요셉이 세겜과 도단, 즉 가나안 쪽으로 갔을 때, 마침 형들이 떠나고 없어서 길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때 한 세겜 사람이 요셉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묻자, 요셉은 "형제들을 찾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열 명이나 무리를 지어 다니는 요셉의 형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즉, 세겜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말미암아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벌어질 만한 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호의적인 땅에서도 형들은 멀리서 요셉을 보자마자 죽이려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형들만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요셉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형들이 나가서 고생하며 양 떼를 치고 있을 때, 요셉은 집에서 아버지 옆에 편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놀고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요셉에게 아버지가 "세겜에 가서 형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오라"고 합니다. 세겜 땅이라 걱정이 되었던 야곱이 요셉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무엇을 입고 갔을까요? 바로 채색옷을 입고 갔습니다.
이것은 마치 교회 바자회에서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 파티복에 뾰족구두를 신고 와서 "뭐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괜찮으니 앉아서 쉬세요"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아버지가 선택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길을 가는 동안에도 채색옷을 입고 형들을 만나러 나섰던 것입니다. 보통 옷을 입었다면 멀리서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 그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야, 채색옷 입고 요셉이 온다!"
옷이 워낙 화려하니 멀리서도 잘 보였고, 형들은 그를 멀리서 보자마자 죽이려고 의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한 것은 바로 그 옷 때문입니다. 형제들도 잘못했지만, 이 집안이 결코 만만한 집안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자, 꿈의 주인
요셉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동안 형제들은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때부터 성경에는 요셉의 대화나 말, 혹은 그가 억울해하는 기록이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오직 형제들의 말만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형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그들의 처분에 따르기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사건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형이 요셉을 멀리서 발견하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말한 히브리어는 사실 두 단어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는 '바알'인데, 형들이 사용한 히브리어 '바알'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우상이기도 합니다. '신'이라는 뜻 외에 '주' 또는 '주인'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어는 '꿈'을 뜻하는 '헤로모트'입니다. 이 두 단어를 합쳐 번역하면 ‘꿈의 주인이 온다’가 됩니다. '꿈을 꾼 그 사람이 온다'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마에스트로 드리머(Maestro Dreamer)', 즉 꿈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알고 대단하며 꿈꾸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온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엄청나게 비꼬는 말입니다. 형들은 '야, 쟤는 맨날 꿈 꿨다고 하는 그 녀석인데, 꿈만 얘기하면 자기가 뭐든지 최고라고 하지'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필 '꿈의 주인'이라는 단어에 '바알'을 사용해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형들이 죽이려 한 것은 사실 요셉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셉의 꿈까지도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꿈이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왕이 되고 자신들이 종이 되는 그 꿈의 내용을 완전히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죽으면 그 꿈은 어떻게 되나 보자, 그 꿈이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당시 꿈이 항상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꾸짖으면서도 그 꿈을 마음에 두었던 것도 그저 요셉을 사랑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꿈을 통해 얼마나 많은 계시를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꿈을 소홀히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들들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기에 더욱 화가 났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들들은 단순히 요셉과 그의 꿈뿐만 아니라, 그 꿈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까지도 거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왜 요셉입니까? 왜 그에게만 이렇게 많은 것을 주십니까? 왜 우리의 것은 챙기지 못하십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꼬맹이가 아버지만 믿고 자기가 우리 위에 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하나님 정말 이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를 죽이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을 죽이려 한 이유는 그 꿈을, 그리고 그 꿈을 주신 하나님을 산산조각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꿈꾸는 자로서 채색옷을 입고 자신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동생은, 오자마자 옷을 빼앗기고 구덩이로 던져집니다. 그때 르우벤이 "죽이지는 말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그의 마음속에 요셉을 나중에 돌려보내려 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요셉을 생각해서 그랬다기보다는, 맏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자 했던 의도가 더 컸을 것이라는 의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요셉을 팔자고 했을 때, 형제들 중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르우벤이 진심으로 요셉의 생명을 아꼈다면, 그때 "야, 이 정도 혼냈으면 됐으니 이제 아버지께 돌려보내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고, 모두 동의하여 요셉을 팔게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비록 베냐민이 있지만, 집안의 막내와도 같은 요셉을 팔아 다른 나라로 그냥 보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가 정말 놀라는 것은,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넣어놓고 무엇을 했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통 속에서 외면당한 애걸
성경은 “요셉을 구덩이에 놓고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라고 기록합니다. 동생은 물 없는 깊은 구덩이에 있는데, 형들은 그 위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배고프니 밥을 먹으며 어떻게 할지 의논할 수도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린 동생은 구덩이에 넣어놓고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이건 정말 큰 문제구나'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때 요셉은 어떻게 했을까요?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을까요? "주여, 저를 건져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을까요? 그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창세기 후반부, 총리가 된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 직접 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모른 척하며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자, 형들은 자신들이 열두 형제이며 그중 한 명은 아버지와 있고 한 명은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때 요셉이 "그럼 베냐민을 데리고 와라, 너희는 인질이다"라고 말하자, 형들이 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그제야 형들은 요셉을 기억하고, 자신들이 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요셉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시키는 대로 구덩이에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살려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어린 동생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는데, 옆에서 밥을 먹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정하고 잔인한 일입니다. 그들의 미움이 얼마나 컸고, 그 마음에 요셉에 대한 동정심이 손톱만큼도 들어갈 틈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는 없을 것 같지만, 우리도 감정이 쌓이면 그렇게 될 때가 있습니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용서해줄 만한데도, 본인은 못하겠다고 고집하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바늘 꽂을 틈조차 없이 단단해진 것입니다. 형들이 바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단단해지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사탄의 조정을 받게 됩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상황으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이럴 수밖에 없다고, 마땅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 녀석이 그렇게 꿈을 꿨기 때문에 우리를 자기 종이라고 말하니, 어떻게 용서하겠느냐? 이 기회에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 결국 요셉은 팔려가고, 그의 모든 꿈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때 요셉이 '이 꿈이 있으니 팔려가서도 잘될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려달라고 애걸했습니다. '형들이 나를 이렇게 해도 소용없어, 하나님께서 내게 준 계시는 형들이 결국 나한테 다 절할 거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말을 압니다. 요셉이 결국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그것 봐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붙들어 인도하셔서 결국 총리를 만드시지 않았느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의 진정한 의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구절을 이해할 때, 대부분 전화위복이나 새옹지마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즉, "나쁜 일, 힘든 일, 어려운 일이 결국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별 볼 일 없어 보이지만, 모두 맞춰지면 멋진 그림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생각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의 말씀은 우리가 흔히 아는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은 매우 제한된 사람, 곧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입니다. 만약 이 특별한 일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겪는 것과 같다면, 성경이 굳이 이 말씀을 기록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이 말이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번역은 킹제임스 흠정역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번역대로 문장의 주어가 '모든 것'이 되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퍼즐처럼 합력하여 결국 좋은 것을 이루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앞 구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실 이 구절의 주어는 '모든 것'이 아니라, 문맥적으로 훨씬 더 자연스러운 '하나님'입니다. 이 구절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모든 것 속에서 역사하셔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느니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내용이므로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모든 것'이 주어가 되면 '퍼즐을 하나씩 맞춰서 이것들도 결국은 좋은 일이 된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많은 것들을 가져다가 섞어 맛있는 비빔밥을 만든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는 영어로 'God works in everything'입니다. 'God works everything'이 아니라, 'in everything'(모든 것 안에서)입니다. 즉,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서 일하신다'는 뜻이며, 우리를 포함하여 우리와 함께 그 모든 일을 이루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합력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이 썼던 말씀처럼 '하나님이 나의 뜻을 너희 안에 두어 행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주시고, 그 뜻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에서 주어가 무엇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순간, 이 모든 일 속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결국은 이렇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일 저 일 다 섞어 좋은 일로 만들 거야'라는 정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표: 그리스도의 형상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선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본문인 로마서 8장 29절에는 하나님이 이루시겠다는 선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최종 목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금 모든 것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덧붙입니다.
“그래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총리로 만드는 것이 요셉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요셉 이야기의 끝은 '하나님의 화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보낼 때 "형들이 잘 있는지 보고 오라"고 했는데, 이때 '잘'이라는 단어가 '샬롬'입니다. 아버지가 문제가 있는 아들에게 가서 형들과 '샬롬'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샬롬이 이루어지기까지 22년이 걸린 것입니다.
결국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샬롬'이 일어나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들어와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좋은 일 같지만, 더 넓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의 과정이었고, 하나님의 샬롬이 일어나고, 40년의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서의 승리가 일어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형상을 이루겠다는 뜻을 가지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사탄이든, 천사든, 죽음이든, 절망이든, 실패든, 성공이든,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든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in everything', 곧 모든 것 안에서 일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이루는 일을 반드시 이루어내실 것입니다.
고난을 관통하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요셉의 이야기는 로마서 8장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의 꿈은 부서졌지만, 그 부서진 꿈이 산산조각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꿈을 뚫고, 요셉이 갇혔던 감옥도 뚫고, 보디발의 집도 뚫으셔서 결국 총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총리가 된 것이 단순히 이 모든 일의 합산된 결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과 그 속에서 어떻게 승리하셨는지를 보여주고,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요셉의 시대에서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당신의 화해, 즉 샬롬을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 일을 관통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황에 맞춰 퍼즐처럼 예쁜 일이 결국 이루어질 거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 있는 모든 환난, 거짓, 심지어 죽음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이루게 하실 것이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신약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들고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질주는 역사를 부수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시간과 미래를 부수어 버리는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아버지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너의 생명인 그 십자가의 힘이 네 인생을 묵직하게 밀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에 뚜벅뚜벅 들어오셔서 "내가 너를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변하고, AI가 오고, 이 우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우리를 향한 놀라운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와 함께 모든 것을 부수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 이겨내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우리는 천국에 가야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고 우리가 아는 모든 기적을 행하신 것보다, 죄가 사라지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 일이 훨씬 더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그때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는 위대한 합력의 역사에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놓을 수 없는 사랑
하나님께서는 '나쁜 일도 그저 받아들여라, 결국 너에게 득이 될 거야'라는 스토아적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말에도 일부분 진리가 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나는 너를 놓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욕하고 돌아서고, “이제 하나님 안 믿어”라고 말하고, “교회에 다시는 안 와”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않으십니다. 루터가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한 번 나가보라”고 말한 것은 협박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단단히 붙잡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반어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안고 가는 이 길을 그 어떤 것도 막거나 끊거나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도, 절망도, 실패도, 성공도 이 진리의 길을 막지 못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느 날 주님 앞에서 주님의 형상으로 만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볼 때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 들겠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룰 것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일의 증거가 될 것이고, 주님의 못 박힌 손이 여러분을 감싸 안고 이 길을 반드시 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진행되는지 제가 설명드렸으니, 이제 그 앞에 놓인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며,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저희는 많은 일들이 그저 결국 좋게 끝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만약 그것이 선이라면, 세상에 바울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 있으며, 베드로처럼 엉망이었던 사람이 어디 있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순교하신 모든 분은 다 어리석고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주님, 저희가 생각하는 선이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저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배우게 하여 주옵소서.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영광을 누리게 될지를 기억하여, 진정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가 주는 기쁨과 찬양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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