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7 11절로부터 16 까지 입니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그들이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회중에 들려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아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가지 이미지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을 표현하는 가지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어리석은 비둘기이며, 하나는 속이는 활입니다.

 

비둘기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영화의 장면처럼 하늘로 힘껏 날아가는 모습, 혹은 입에 올리브 잎을 물고 있는 비둘기의 그림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는 모두 노아의 방주에서 유래한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받은 인류에게 "이제 안식으로 들어가라" 메시지를 주셨을 , 비둘기는 평화와 안식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에서도 비둘기는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여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 표현합니다.

 

어리석은 비둘기의 참된 의미

그러나 오늘 본문의 비둘기는 어리석은 비둘기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야생 비둘기는 모이를 주거나 음식이 앞에 있으면 다른 것은 거의 살피지 않아 지각 센스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눈치와 코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쉽게 덫에 걸리거나 다른 곳으로 끌려가기 쉬웠습니다. '어리석다', '지각이 없다'라는 표현이 비둘기에 많이 사용된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비둘기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힘이 쪽으로만 쉽게 이동하다가 결국 양쪽으로부터 침략과 조롱을 당하는 것을 보며 '지혜가 없다'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절은 어느 나라를 택했거나 앗수르나 애굽에 의지했다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어 생긴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 의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은 가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으나, 하나님은 노발대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많은 것을 가지고 올라옴으로써 후일 있을 출애굽의 그림자 역할을 했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으로 갔습니다. 심지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바벨론으로 가라. 그것이 생명의 길이다"라고 전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바벨론으로 가느냐, 애굽으로 가느냐, 혹은 예루살렘에 남느냐—어느 나라를 선택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을 의지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지혜가 없다" 것은 단순히 분별력이나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잠언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모든 지식, 모든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가 없다'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뜻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고,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의 지혜가 사라진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그들의 분별력이나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로 가느냐" 아니라 **"누구를 의지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바벨론에 가서도 하나님이 "내가 너와 함께 것이고, 그곳에서 너는 농사를 짓고 집을 지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바벨론까지도 함께하심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느냐입니다. 말씀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바벨론에 가든, 애굽으로 가든, 포로가 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마음속에 진지하고 거룩하며 놀라운 질문을 품고 계십니까?

 

순간의 선택과 하나님 의지하기

여러분은 크고 힘든 일이 생길 누구나 질문을 어느 정도는 합니다. "내가 사업을 접을 것이냐, 확장할 것이냐?" 이런 고민이 있을 모두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좋겠습니까? 하나님, 지혜를 주십시오."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려 합니다. 직장을 옮길 때도, 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인생의 문제 앞에 있을 때도 신자는 적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작은 일에서의 신뢰

그러나 여러분, 어떻습니까? 아주 작은 일에서는 어떠합니까? 아이들과 부대끼는 하루의 일과 속에서, "나는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을까?" 아이와 다투고, 아내나 남편과 말다툼하며, 생활고에 찌들어 일을 어떻게 할까 고민할 ,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여러분이 쇼핑할 , 물건을 두고 "이것을 살까 말까" 고민하면서, 여러분은 호주머니 사정만을 살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십니까? 여러분이 결정해야 순간,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는 그때에, 여러분은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물론 모든 상황은 우리의 상식과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상식을 무시할 없고, 결정을 내릴 환경과 조건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결정에 앞서서 여러분의 내면 속에 반드시 있어야 마음과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나는 결정과 선택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 때문에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그래서 결정할 있고, 감사하며, 겸손해지고 있는가—그것을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지의 태도

여기서 제가 말하는 "하나님을 의지하라" 것은, 여러분에게 "매일 아주 작은 일마다 기도하라"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이것을 '번개 기도'라고도 합니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짧게 기도하는 , 그것도 좋은 경건의 훈련이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교통사고가 뻔했을 , 그때 신앙이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제가 "..." 하는 동안, 저희 뒤에 타고 있던 아이가 "주여!" 하더군요. 그때 알았습니다. ", 우리 집에서 제일 신앙 좋은 사람은 얘구나." 그런 것도 좋은 신앙의 훈련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아무 일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해야지, 기도해야지" 하다가 정작 당장 결정해야 때는 아무것도 하게 됩니다. 제가 강조하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며, 매번 어떤 특별한 응답이나 계시를 받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세탁기를 사러 가는데 삼성이 좋고 엘지가 좋은데 "주여, 삼성입니까? LG입니까? 말씀해 주옵소서. '삼성을 사라'" 이러시겠습니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내가 삶에서 돈을 사용할 무엇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기억하는지,

 

여러분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일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인격을 다듬고 계시는지를 깨닫고 계신지,

 

그리고 여러분이 자녀를 대할 , 아내를 대할 , 남편을 대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붙잡고 있으며, 그래서 내가 비록 여기서 실수하는 일이 생길지라도 힘들고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과연 진정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받는 삶을 있는가—이것을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는가를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되시기 때문에

결정이 마치 인생을 결정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내가 결정했고 내가 집을 샀고, 내가 차를 샀고, 내가 교회를 정했고, 내가 모든 것을 선택했다" 사실—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거기에만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처럼, **"나의 모든 길을 주께서 아시오니 주께서 나를 단련하사 나를 순금처럼 만드시옵소서"**라는 마음으로, 나의 모든 일과 나의 모든 상황과 나의 모든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올 것을 믿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이것을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평강과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손길을 의지하십니까?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 나는 주님만을 의지합니다"라는 식의 고백이나, 모든 일을 무조건 기도로 물어보거나 특별한 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니 나를 오늘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주시고, 모든 삶의 결단과 선택 속에 나의 위로가 되어 주시고, 나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삶의 태도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에 인생과 문제가 꼬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본다면 정말일지 모릅니다. 그때 학교를 가지 않은 , 직장을 그만둔 , 돈을 잘못 사용한 , 이러한 판단과 선택이 인생에 어려움을 주거나 혹은 좋은 일들을 주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선택하셨으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그게 아니라 선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의 모든 되시기 때문에, 나의 어떠한 선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된 자리로 이끌어 가실 것을 의지하고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속에서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리석은 비둘기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결정을 의지하거나, 앗수르나 애굽을 의지하거나, 우리 식으로 말하면 통장을 의지하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쉽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

호세아는 성도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며 자기의 이익만을 따라 결정하고 감정과 경험만을 내세울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본문 12절에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의 그물을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회중에 들려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호세아 7:12)

 

구절이 따뜻하게 느껴지십니까? 호세아서는 매번 "징계한다", " 있을진저", "너희는 끝장이다" 같은 어려운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힘든 책입니다. '징계'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두려움과 "하나님, 제발 잠깐 멈춰주세요"라는 마음이 생기십니까, 아니면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 생기십니까?

 

징계의 목적: 사랑으로 빚으심

여러분, 여러분이 괴롭거나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이 있으시다면 오늘 생각을 바꾸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징계란 징계로 쓰지만, 우리는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끈질기고 깊은 사랑으로 나를 의롭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만드는 " 이것이 징계입니다. 징계는 여러분에게 보복을 하거나, " 한번 당해봐라" 하시는 것도, 혹은 "네가 갚아야 " 하고 주는 벌도 아닙니다. 징계는 벌보다 훨씬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 때까지 일을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얻어맞는 것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을 끊임없이 추적하고, 끊임없이 돌보며, 끊임없이 위로하고, 끊임없이 힘을 주려고 하시며, 동시에 눈물이 빠지도록 회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나님이 멈추시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하신 일입니다.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 하나님의 그물

"내가 그물을 펴서 잡는다" 말씀에서, 비둘기가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어디로 가든지 마리도 놓치지 않고 그물로 잡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속에 눈과 능력과 나의 사랑과 너희를 향한 나의 마음을 벗어날 것은 없다."

 

솔직히 믿지 않는 노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구멍이 크고 깊고 넓기만 해서 모든 것이 빠져나갈 같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을 살펴보니, 모든 일들이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같지만, 어떻게 이렇게 하나씩 아귀가 맞아서 일어나는가 놀라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태양이 매일 떠오르고, 지구가 돌고, 우주가 운행되는 일들 속에서, 하늘은 넓고 넓어 아무것도 붙잡을 없을 같으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속에 놓치시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죠.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노자 같은 사람도 놀랐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우리를 붙잡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만드시며,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했던 , 걸었던 , 돈을 벌기 위해 했던 일들이 **하나님의 눈과 손길에서는 하나도 은혜 가운데 일어나지 않은 일이 없구나"**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면 13절로 넘어가면서 진리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죄의 이스라엘을 속량하려 하시는 하나님

13 뒤에 "내가 그들을 건져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한다"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건져주려 하나" 단순히 물에서 건진다는 뜻이 아니라, 영어로 '리딤(redeem)', 속량(贖良)하다, 구속(救贖)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내가 그들을 속량하려 하나"라는 말입니다.

 

속량의 의미와 노예

속량은 노예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어딘가에 잡혀 있는 노예를 돈을 주고 자유롭게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로부터 풀려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다 쓰는 단어가 속량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희를 속량하려 했다"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누군가의 노예, 종이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의지하지 않는 삶을 선택한 것들의 종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그것이 결국 자기의 주인이 되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없이 돈을 쫓아갔다면, 돈이 여러분의 주인이 됩니다. 내가 돈을 쓰는 알았는데, 알고 보니 돈이 나를 지배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을 지키려고 열심히 운동한 알았는데, 건강에 매여 살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몸을 챙기려 사는 알았는데, 사실은 건강이 하나님이 되어버린 겁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지금 그렇게 노예가 되어 있는 줄도 모르더군요. 그래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노예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화하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종이었다" 하시니 그들이 "우리는 자유인인데, 무슨 종이냐? 아브라함 때로부터 우리는 자유인이었다. 종인 적이 없다"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아비는 마귀니라. 너희는 마귀의 종이었다."

 

, 말씀을 듣던 사람 입장에서는 속이 부글부글했을 같습니다. "아니, 대놓고 마귀의 자식이라니?" 하지만 주님께서는 정확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 거기서 건져내기 위하여 내가 왔으니, 너희는 나를 감사하고 기뻐해야 존재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알아보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 하는도다." 주님의 준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종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또한 얼마나 쉽게 죄의 종이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속량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속량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명기 7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므로 너희를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내셨다"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애굽에서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때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까? 애굽의 장자들이 죽고, 짐승들의 새끼들도 죽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셔서 길을 내셨고, 성경은 이를 **"세례를 주셨다"**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를 새롭게 것이다. 너희를 나의 백성으로 삼을 것이다. 너희는 저들에게 속한 노예가 아니다. 너희는 나의 친구요, 나의 자녀요, 나의 백성이다." 그렇게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건조차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노예가 되어갔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노예가 되고, 나중에는 나라를 빼앗겨 종이 됩니다. 계속 반복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은 완성품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가 말씀을 기록한 이후 1,500년이 지나서 드디어 완성품이 옵니다. 베드로전서에 진리가 나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것이 아니요, 오직 없고 없는 어린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18-19)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유월절 어린 , 예수님의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기억하십시오. 그때 너희가 노래하며 찬양하고, 모세를 추앙하며 율법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단번에, 영원히 너희를 구원한 참된 어린 ,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분이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출애굽은 세상 사람들조차 놀랄 만큼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장면보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인한 영원한 생명이 훨씬 위대하고 스펙터클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속량하려 했으나, 너희가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였도다."

 

본문은 이처럼 놀라운 일을 경험한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행한 전형적인 실수가 바로 호세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실수: 그릇된 길과 거짓

이스라엘이 행한 실수 하나는 그들은 계속 그릇된 길로 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릇된 길로 간다는 말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반대로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릇된 길은 하나님과 자꾸 멀어지는 길이며, 이는 신자가 하는 실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음으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저지르는 가장 흔한 실수 하나는 쓸데없는 고집을 가지고 다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길로 가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려 하지 않고, 이스라엘처럼 앗수르나 애굽과 같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야 하지만, 마음의 문은 점점 닫히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바로 그릇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감정, 마음이 점점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우리는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단호히 돌아설 있을 같은데도, 길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차가워질수록 우리는 가까이 가야 하지만, 오히려 불이 싫은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겨울에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으려 하지만, 신앙은 몸이 차가워지고 마음이 단단해지고 추울수록 따뜻한 곳을 찾는 것이 아니라, 추운 곳으로 가려고 하고, 차가워지려 하며, 마음을 닫으려고 합니다.

 

차가워진 마음을 위한 경고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 말씀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데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편향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읽다가 은혜가 되기보다는 마음을 답답하게 때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마음이 나지 않을 때도 있고, 기도하기가 너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럴 때일수록 **"내가 따뜻한 곳을 향하여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지금 나의 마음이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춥다"라는 것을 느끼셔야 합니다. "춥구나. 내가 지금 냉동고 속에 들어와 있구나. 자꾸 온도가 내려가는데도 내가 느끼지 못하고 개구리처럼 온도에 적응해가면서 살다가 결국은 얼어 죽겠구나." 그것을 깨닫고 여러분, **"춥다"**라는 것을 빨리 느끼셔야 합니다.

 

춥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금 내가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읽히지 않으면 기를 쓰고 구절이라도 읽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한마디라도, 울면서라도, 답답해서 "주여,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소리치더라도 주님께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따뜻한 곳을 향해 가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몸은 점점 차가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을 읽기가 힘드시다면 그때가 성경을 읽어야 때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기가 너무 힘들어지고, 기도가 여러분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어져 가고 있다면 그때가 바로 내가 기도를 해야 때입니다.

 

많이, 열심히, 여러분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앞으로 순종하고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까이 가야 하니까요. 그릇된 길은 우리를 그렇게 괴롭힐 있고 우리는 이런 실수를 자주 하며, 너무나 많은 에너지와 힘을 쏟게 만듭니다.

 

자신을 위한 종교 행위, '거짓'

하나의 실수는 거짓입니다. 14절에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오직 침상에서만 슬퍼했다" 말합니다. 그들은 곡식과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지만 사실은 나를 거역한다는 것입니다.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은 나를 위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구나"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느냐? 나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구절은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곡식과 포도주를 얻으려고 '모인다' 말이 문자적으로도 해석되지만, '자기에게 상처를 낸다' 단어로도 있습니다. , **"곡식과 포도주로 말미암아 자신을 상처 입힌다"** 읽을 있습니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은 곡식과 포도주인데, 그것을 위해 몸을 상해하고 자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방신을 섬기는 이들이 하는 행위, 예배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가지 해석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는 전제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하나님, 사랑한다면서요. 근데 이거 주십니까? 주면 좋은 하나님, 주면 가짜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유치하지만 우리는 사실 그렇게 삽니다. 기도에 응답해 주면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참아라, 인내해라." "하나님, 이게 인내할 일입니까? 하나님하고 저하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시오. 하나님도 참을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예수님도 아마 여기는 힘드실 거야" 하고 기도해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도사로서 교회 목회 상황에 대해 "예수님이 오셔도 교회 목회는 못한다" 깜찍한 생각을 적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그게 그러냐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사실은 **" 말을 듣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하나님은 진짜, 내가 기도한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하나님은 가짜"**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의 머리는 이야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속이는 활과 지도자들의 교만

사실은 마지막 비유와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마지막 비유에는 속이는 활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키웠다. 너에게 힘을 주었고, 너의 팔을 주었으며, 활을 쏘게 주었다"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기도를 하듯이 "하나님, 주여!" 하고 화살을 주님을 향해 쏩니다. 그런데 맞는 곳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여!" 하고 쏘아도 맞는 곳은 돈입니다. 표적은 엉뚱한 곳에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이라 외치며 쏘지만 사실은 ' 영광' 맞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속이는 활입니다. 엉뚱한 곳으로 가며 표적을 빗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조상들같이 배반하고 거짓을 행하여 속이는 활같이 빗나간다." (시편 78:57)

 

빗나가는 것입니다. 속이는 활은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빗나가는 화살입니다. 결국 무엇을 맞추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맞추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맞춥니다.

 

지도자들의 오만과 분노

그래서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저들이 나에게 돌아오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는 않더라" 말합니다. 그들은 돌아오는데 높으신 자에게로는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더라는 것입니다. "주께로 갑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야기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얼마나 두리뭉실하고 말이 되는 것이었던지 사실은 회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는 활이었던 것입니다. 꽂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은 **"나는 잘못이 없다. 쟤들 때문에 이렇게 거다"**라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고 있는, 다름 아닌 바로 지도자들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바꾸셔도 좋습니다.

 

지도자들의 혀가 어떻다고 말하냐면 거칠다고 말합니다. 이는 좋게 해석한 것이며, 말은 오만하고 분노로 가득 찼다는 의미입니다.

 

지도자들이 분노를 갖고 있습니다. 누구를 향한 분노일까요? 자기를 향한 분노라면 회개했겠죠. 아닙니다. 앗수르를 향한 분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줄을 대서 자기 먹고 살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앗수르를 저주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누구만 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인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자기의 진노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불과 같은 마음을 쏟아내면서 **"너희들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이렇게 잘하고 열심히 했는데,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됐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처음부터 사실은 제사장들, 지도자들에 대해서 상당히 아주 통렬하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의 속에는 바로 그러한 분노와 교만이 들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 책임이 아니다'라는 착각

결과로 단어를 조금 넓혀 해석하면 뜻이 분노를 넘어 저주까지 이르게 됩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을 향해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 자체가 주로 하나님과 연관된 단어이기에 하나님까지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죠. 이는 죄의 특징이므로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 책임입니다"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은근히 책임을 미루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한테 착하고 그리고 신실하고 좋은 성도들만 주셨으면 제가 얼마나 잘할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착각은 목회자가 성도의 고난을 보며 '교인들이 속을 썩여서 목사님이 힘들다' 생각하는 것처럼,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구절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하고 나면 회개는 누가 할까? 그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너희 지도자들 제사장들아!" 혹은 오늘날로 친다면 "교회의 지도자들아"라는 구절에 너무 부딪혔습니다. 그들이 사실은 교회에서 많은 일과 어려움 속에서 가장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책임만 가진 것이 아니라 너무나 쉽게 흔들리거나 죄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한국 교회를 아니라 우리 교회 안에서도, 우리 모두의 모습 속에서도 너무나 쉽게 발견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우리가 깨닫지 못할 때도 아주 많고, 깨닫더라도 회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누구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이 얘기였기 때문에 저는 말씀을 전하며 흥분했었습니다.

 

자신이라는 화덕

말씀이 저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는 호세아를 나가기 전에 회개해야 했습니다. 저도 정말 많은 땔감을 땝니다.

 

옛날에는 제가 "나도 훌륭한 목사가 있고 훌륭한 목사의 길을 걷겠다"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것이 탐욕이고 욕심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목회를 해보고 싶었던 시절이 지나,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누구보다도 괜찮은 목사가 되는 "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이름만 바꾼 거지 똑같은 것인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알았는데요, 아니었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니까, 억울함, 속상함, 그리고 헐뜯긴 자국들, 상처들 같은 것들을 땔감으로 쓰는 것입니다.

 

어느 제가 기도를 하는데, 이제까지 어떤 교회에서든지 상처 입었던 말들이 하나도 잊어버리고 생각나더라고요. 저는 잊어버린 알았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울면서 기도하다 보니까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래, 맞아. 인간이 그랬지. 아우 그래, 맞아. 그때 장로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때 알았습니다. , 내가 화덕을, 이것이 이렇게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내가 그렇게 태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나는 관리하고 그저 따뜻하게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한 알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그때 알았고 정말 회개합니다. 제가 바로 시기와 질투와 욕심과 탐욕을 수시로 때는 바로 화덕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폭파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소리를 높여도 장로님들은 바를 모르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게 화덕을 땝니다. 어느 날은 터지겠습니까? 어느 전병이 '' 하고 튀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만 아니라고 생각하시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뒤집지 않은 전병의 위험

뿐만 아니라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이 있습니다. 끝까지 타는 줄도 모르고 뒤집어지지 않으면서도 뒤집어진 알고 **"나는 그래도 항상 조화 있게 균형을 가지고 누구 편도 들지 않으면서 홀로 길을 가겠다"** 생각합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양쪽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집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어 흔들리는 것입니다. ,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저의 경우는 목회자로서 많은 분들이 여러 가지 일로 고생하겠지만, 저는 설교가 제일 힘든 일입니다. 설교에 대해서 저만큼 자신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라는 일을 시키시기에 제가 설교를 합니다. 저는 정말 날짜를 꼽습니다. "며칠만 있으면 드디어 내가 설교 걱정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일이 매일 부담인데, 하나님께서 매번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니, 매주마다 이곳에 세워 놓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제가 설교를 진짜 어려운 것은, 특히 이렇게 호세아서를 설교하면 "저거 얘기하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생길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 준비를 때마다 고민입니다. "내가 이렇게 얘기를 하면 저분이, 내가 얘기를 저렇게 하면 이분이 속상하지 않을까?" 그것이 걸려서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살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정말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인데, 잘못된 길로 가는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사람 하나 아낀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전하지 못하는 길에 자기도 모르게 가는데 회개도 합니다. 제가 잘하는 알았습니다.

 

", 그래도 내가 성도들을 그렇게 아끼면서 생각해서 말도 빼고 말도 빼는 잘하는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으니 여러분, 정말로 회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저러면 되지"라고 생각되신다면 제발 속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제발 오셔서 **" 목사님,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나중에 저처럼 화덕을 크게 만드시다가 어느 터져서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시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것은 오해일 ,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너무나 오래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는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여기 말하는 속이는 활입니다. 그들은 혀에 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겠습니까? 자기들은 잘못이 없는데, 저들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저들이 나를 알지 못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는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럴 가능성이 언제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건 정말 회개해야 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맞습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세우시는 일에 우리 모두에게 **"정말 주님 앞에서 내가 화덕인지, 뒤집지 않은 전병인지, 속이는 활인지, 정말 어리석은 비둘기인지 생각하라"** 주시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중에 한두 정도 걸릴 알았는데, 가지 걸립니다.

 

가지 한심했습니다. ", 내가 목사니까 그런가 보다. 가지나 걸리는구나." 하지만 제가 말을 하고는 도저히 넘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저의 한계일 것입니다. 제가 정도인데,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서로를 알고, 여러분이 " 목사가 무슨 얘기하는지는 조금 알겠다" 혹은 "나도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 서겠다" 마음이 , 우리가 일로 모든 것을 잃기 전에, 여러분의 마음과 신앙이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기 전에, 이렇게 함께 서로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말할 회개합시다. 돌이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내가 돌이키며 회개하는 속에 있다는 것을 서로가 숨기고 그저 마음으로 화덕만을 태우고 있다면, 여러분, 나오는 것은 시커먼 연기밖에 없을 것입니다. 타버린 전병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속이는 활밖에 박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소망이신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호세아서 자체가 사실은 그래서 소망이 없습니다.

 

너무 어두운 것처럼 보이지만, 매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면서도, 그러나 역시 말씀을 함께 여러분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하며 준비할 제가 다시 힘을 얻었던 구절은 바로 우리가 아까 보았던 **"너를 위하여 너를 속량하는 이가 나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 전에 임한 하나님의 사랑

모든 것을 사실은 아시는 하나님, 이러한 , 이러한 이스라엘을 아내로 맞아 결혼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가지를 깨달아서 회개하고, ", 회개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정말 지도자로서 이것은 말이 됩니다. 제가 상처를 입힌 형제와 자매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말로 없습니다. 저도 잠이 오지만, 아픈 사람은 아플 것입니다. 그리고 믿었던 일들이 믿음대로 되지 않을 , 그것으로 인한 실망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큽니까? 그리고 모든 것이 어떻게 누구에게 짊어지게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넘어가고 그냥 지나갈 있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다고 해서, 그것들을 우리가 회개했다고 해서 결국 " 잘못했다" 이것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조차, 나조차, 내가 회개도 하기 , 내가 정말 나의 죄를 깨닫기도 , 내가 상처 입은 이들 때문에 그저 고민만 ,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그저 오해려니,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고, 목사니까 당연히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서 음탕한 고멜 같은 나를 하나님이 결혼으로 아내로 맞아주셨다는 , 그리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

 

여러분, 호세아는 바로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끝까지 아내를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끝까지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복음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서 말하는 어떤 방식이나 어떤 상식이나 어떤 것보다, 우리가 적어도 여러분과 제가 복음 안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이 주는 용서와 희망

우리가 복음을 들었고 알고 있으며,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넘어질 있으며, 실수할 있고, 쓰러질 있으며, 서로 상처와 아픔을 있는 그곳에서도 우리가 일어날 있고,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 때문에 우리가 용서할 있고 사랑할 있다고 정말 믿습니다. 정말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코 값싸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끈질기게 사랑하고 계시니까요.

 

여러분, 복음 없이 호세아서를 읽는다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매주는 매우 암울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책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페이지마다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요, 꾸짖음이요, 진노요, 저주입니다. 저도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화덕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무엇이 마음이 좋았겠습니까?

 

나도 내가 진짜 이렇게 속이는 활인가, 하나님께 이렇게 진정성이 없었나... 그러나 ' 있을진저'라고 쓰여진 호세아서의 진짜 메시지는 여기에 있는 아니겠습니까? "내가 너희를 백성이 아니라고 바로 그곳에서 너를 나의 백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너희가 나를 버린 바로 그곳에서 나는 너희와 결혼하고, 너에게 장가 들어 영원히 것이다. 내가 너를 죄의 노예로부터 건져낼 것이다. 내가 값을 치를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피로 값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것을 치르셨습니다. 내가 너를 데리고 와서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품에 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아, 이제 일어나라. 이제 돌이켜 너의 상처와 아픔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러한 우리를 아내로 삼아 장가 드신 나를, 하나님을 보아라. 나의 얼굴을 보아라. 나의 사랑아, 나의 사랑아.

 

기도합시다.

주님, 그렇게 우리를 불러주신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목이 곧은 저희를, 아니 저를 주님 불쌍히 여겨주시고 용서하시며, 다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그리고 회개와 용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회복할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프고 힘든 형제와 자매들, 가정에 주님 평화를, 주님의 안식을, 주님의 위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회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으로도 막을 없는 복음의 능력을 짐짓 무시하고 우리 자신만을 쉽게 생각하는 저희들을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사람의 마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그토록 무서운 일일진대,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마음 아파하고, 상처를 입었다면, 얼마나 아픈 일이 되겠습니까?

 

또한 우리 가정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 안에서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주의 자비와 긍휼을 베푸사 회복시켜 주옵소서.

 

구원의 기쁨을, 하나님의 자비를,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주님, 저희가 고백했던 것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했던 고백대로, 주여 저희가 일어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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