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9 1절로부터 9 까지 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하나님을 떠나고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너희는 명절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죄악이 많고 원한이 큼이니라.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호와께서 악을 기억하시고 죄를 벌하시리라. 아멘.

 

형식만 남은 신앙생활: 이스라엘의 모습

차를 타다가 라디오를 켜면 이제는 크리스마스 노래가 많이 나옵니다. 어느 혼자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는 노래가 나오더군요. 한국 방송도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따라 부르면서, ‘벌써 정말 크리스마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래는 그리스도인들만 아는 노래가 아니지 않습니까. 일반 사람들도 알고 부릅니다.

 

일반 분들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부르는 분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믿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마 크리스마스도 포기할 같은데, 크리스마스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크리스마스를 포기하지 않는 , 이것이 바로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했으나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

그때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호세아는 계속 말합니다. “아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습니다. 제사도 드리고 형식은 갖추고 있었으며, 제사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여러분,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공동체를 바라보고, 마지막 12월에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도움이 것이라 생각합니다.

 

호세아서의 역사적 배경 변화와 초막절

여러분께서 호세아서를 읽다 보면, 호세아서의 기조가 어느 순간 바뀌는 것을 느끼실 때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하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나오지요. 이유는 호세아서 안에 기간에 걸친 역사적 배경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때부터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호세아 선지자가 계속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가 호세아가 어느 마음을 잡고 처음부터 끝까지 번에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여러 시기의 메시지들이 편집되어 하나의 책으로 묶인 것입니다. 그리고 9장부터는 배경이 조금 바뀝니다.

 

9 배경: 풍요의 , 초막절

그전까지는 여로보암 왕으로 인해 부유함을 누리고 모든 것이 풍족하던 시대였다면, 9장부터는 기조가 변하고 낯선 표현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타작 마당에서 제사를 했다’라는 말도 나오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지금 9장의 배경은 어떤 절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절기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초막절입니다. 왜냐하면 초막절은 가을 추수가 모두 끝난 , 특히 포도 농사가 마무리되어 포도를 거둬들인 다음에 지키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포도에 관한 표현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는 초막절 절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초막절은 1년의 마지막 절기입니다. 마지막 추수가 끝난 지키는 절기이기 때문이지요.

 

호세아의 준엄한 경고

물론 본문을 살펴보면 자세한 설명들이 이어지지만, 중요한 점은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세아가 갑자기(突如) 등장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기뻐하고 뛰놀지 말아라.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떠들며 즐거워하지 말아라.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고 춤추고 즐거워하며 초막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직접 기쁘게 보내라고 명하신 절기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추수감사절과 같지요. “너희가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기뻐하라”는 의미로 주어진 절기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오히려 “너희들, 기뻐하며 뛰놀지 말아라”라고 준엄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와 거짓된 평화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상당히 번영하고 어느 정도 부유해질 있었던 이유 하나는, 당시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이 내부 문제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들 내부에서 서로 싸우고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뿐 아니라 주변의 아람, 두로, 시돈 같은 나라들(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페니키아 지역입니다. 페니키아는 알파벳을 처음 만든 것으로 유명하지요. 우리가 ‘페니키아어 알파벳’이라고 말하는 지역이 바로 두로와 시돈입니다.) 모두 힘이 강해지고 간섭 없이 안정된 시기, 평화를 누렸습니다. 강대국이 잠잠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의 재등장과 주변국의 공포

그런데 이렇게 주변 국가들이 부유를 누리는 동안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앗수르가 다시 힘을 되찾기 시작했고, 디글랏 빌레셀이라는 강력한 왕이 등장한 것입니다. 왕이 나라를 재정비하고 군사력을 회복하자, 주변 국가들은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대국이 체제를 정비하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정복 전쟁을 벌입니다. 당시 제국은 스스로 생산한 것만으로는 부강해지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거나 조공을 받아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은 언제든 정복의 대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연합 제안과 유다의 거절

다들 걱정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람과 이스라엘은 베가 왕을 중심으로 연합군을 구성해 앗수르에 대항하자고 했습니다. 과정에서 이스라엘 베가는 남쪽에 있는 유다에게도 참여를 요청합니다. 유다는 처음부터 앗수르와 직접 충돌하는 위치가 아니었기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유다가 참여해 주면 좋을 같았지요. 그래서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연합군에 합류하자고 제안했지만, 아하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거절은 아하스 혼자 결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선지자였던 이사야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앗수르와 대적하지도 말고, 또한 그들과 연합하지도 마십시오”라고 충고했었지요.

 

유다의 실수와 앗수르의 개입

아하스가 참여를 거절하자, 여러분 말에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말처럼, 연합군 입장에서 가장 적은 앗수르였지만, 뒤에서 협조하지 않는 유다가 오히려 미운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연합군은 화살을 돌려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유다가 그것을 감당할 있었겠습니까? 아하스는 순식간에 피해를 입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나라를 이끄는 왕이라면, 유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앗수르와 싸우지 않겠다, 가만히 있겠다’고 했는데 연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도움을 요청하겠습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아하스는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앗수르는 이미 틈을 노리고 있었고, 전쟁을 일으킬 명분만 필요했는데 마침 명분이 생긴 것이지요. 앗수르는 즉시 군대를 움직여 공격을 시작했고, 결과 이스라엘과 다메섹(아람), 두로와 시돈 같은 나라들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대국의 군사력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이스라엘 역시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역사적 사실과 고고학적 증거

와중에 일어난 사건들, 제가 지금 말씀드린 내용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역사성을 강하게 의심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이든 증거를 요구했지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태도가 당시 일반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물론 과학을 연구하면서 인간의 한계를 깊이 느끼고 겸손해져 신앙을 갖게 과학자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으면 믿을 없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문서의 부재와 '성경은 신화'라는 주장

그러다 보니 어떤 이들은 성경을 읽다가 “다윗 이야기는 믿기 어렵다. 다윗 왕이 실제로 존재했을까?”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다른 고대 문서에서는 다윗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굉장히 독특한 문서입니다. 당시 존재했던 많은 문서들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앗수르라는 나라조차 실제로 존재했는지 의심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다윗이나 유다 왕국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위해 만들어낸 신화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시대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기록이 마치 ‘삼국지 같은 소설’처럼 꾸며진 이야기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지요.

 

앗수르 비문의 발견과 역사적 증명

그런데 19세기, 정확히는 1870년경부터 고고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앗수르 지역에서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니느웨 성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앗수르의 비문이 발견된 것입니다. 제가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들(이스라엘 백성) 그들의 베가를 몰아내고(베가는 실제로 숙청당해 죽었습니다), 나는 호세아를 그들 위에 왕으로 세웠다. 나는 그들로부터 달란트와 달란트, 그리고 곡물을 조공으로 받았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유다 왕국, 왕들의 이름, 심지어 아하스라는 이름까지 성경 외의 문서에서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성경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성경이 단순한 신화나 민간전승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앗수르 비문은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을 기록한 것이기에 더욱 상세합니다. 비문에는 “우리가 13,520명을 포로로 잡아왔고, 다메섹 주변의 600 도시를 파괴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도 시기에 없을 만큼 많은 도시가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향한 믿음의 확증

발굴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모술 지역입니다. 이라크는 앗수르와 바벨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라이지요.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역이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의해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습니다. 지금도 발굴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성경의 수많은 기록이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정확하게 일치하는지 많이 확인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 일치 때문에 성경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다만 고고학적 증거들이 성경의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실제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확인해 준다는 것은 믿는 사람에게 기쁨이고 은혜이지요.

 

앗수르 의존과 기쁨의 이유

그런데 끔찍한 시기에 앗수르가 와서 이스라엘을 모두 파괴해 버리고 사람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호세아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호세아는 누구를 섬기게 될까요? (1 애굽, 2 앗수르, 3 섬기고 나는 길을 간다.) 답은 2, 앗수르였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는 앗수르를 택한 것입니다.

 

거짓된 평화 잊힌 재앙

그렇게 앗수르를 택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 마치 우리가 6·25 전쟁을 잊어버리는 것처럼, 혹은 일제 강점기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태도가 급변한 것입니다. 앗수르를 택하니까 앗수르가 가장 강국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제 염려가 없어졌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고 조공을 바치는데 쳐들어오겠습니까?

 

그러고 나니 사람들이 다시 재물을 축적할 있게 것입니다. 부자들이 생기고, 이스라엘이 다시 부유해지면서 적군의 침략도 없으니 마음도 편안해져서 거짓된 평안을 누리게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지금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절기를 즐기고 있어요. 풍성한 추수를 하고 자신들이 부유해진 것을 보며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끔찍했던 일들은 이미 잊혀져 버렸습니다.

 

여호와가 아닌 타작마당을 기뻐한 이유

그렇게 춤을 추고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그때 호세아가 나타나서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엉뚱한 곳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다.

 

타작마당이 아니라 어디에서 제사를 드려야 할까요? 성전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택한 곳에서 초막절을 지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절기의 시기조차 자기 마음대로 바꿨습니다. 날짜도 임의로 정했습니다. 이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가을 어느 시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다와 경쟁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날짜도 똑같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어쨌든 이때의 날짜는 정확히 없지만, 그들은 장소도 시간도 자기들 마음대로 정했던 같습니다. 그들은 타작마당을 즐거워했습니다. 성전이 아니라 그곳에 그들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기뻐했지만, 여호와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뻐한 것일까요? 타작마당이 좋았던 것입니다.

 

쌓여 있던 많은 이삭들이 너무 좋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수고하여 거둔 풍성한 포도의 열매들이 좋았던 것입니다. 무화과 열매들이 너무 좋았던 겁니다. 석류도 그때 많이 땄는데, 그것들도 너무 좋았던 것이죠. 그것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풍요와 쾌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재산이 지금 하나님의 꾸짖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쁨이 먼저 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이 먼저 보입니까? 조금 나아가 볼까요? 여러분은 자리에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어서 오셨습니까? 뒤의 말이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운해하시지 않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오신 것입니까? 내가 예배를 드려드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찬송도 불러드리고, 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떨어드려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려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좋아서 오신 것입니까?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이 좋은 어떡합니까?

제가 옛날에 좋아했던 복음 찬양 하나가 있는데, 원래 국악 스타일의 찬양입니다. 찬송가에 들어갈 알았는데 들어가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가사가 항상 부를 때마다 좋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예수님이 좋은 어떡합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그래서 자리에 오셨나요?

 

우리에게는 어렵고 힘든 일이 많습니다. 속상할 때도 있어요. “하나님, 오늘은 정말 집에서 쉬고 싶어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도 힘들어요.”라고 생각될 때도 있죠. 그리고 어떤 때는 기도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데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어요. 설교를 듣고 있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있을 때도 있습니다. 어르신들 표현을 빌리자면, ‘콩밭에’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여러분,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은 이것 하나는 동의하시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마음도 분산되고, 속상한 일도 많고 고통과 환난 속에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이 좋은 어떡합니까? 그래도 하나님이 나의 소망인 것을 어떡합니까? 그래도 나는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만 있는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자리에 주님 앞에 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 해도, 기도를 한다 해도, 말씀을 붙들고 있다 해도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 있는가

설교를 듣다가 중간에 놓치는 순간이 있어도, 찬양할 오늘처럼 모르는 곡이라 따라가느라 어려울 때가 있어도, 기도 중에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드리다가도 나도 모르게 기도로 빠져버릴 때가 있어도, 여러분 안에 이런 확신이 있으십니까?

 

“저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저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래도 하나님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모르신다고 하실지라도 저는 하나님이 좋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은 없으시겠지만, 여러분 마음에 그런 진심이 있으십니까?

 

이스라엘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동원해 제사를 드렸고, 가장 좋은 것을 많이 가져왔으며, 재물도 풍성히 쌓아 놓았지만,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과거의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3절을 보면 에브라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다. 말씀은 정말 충격적입니다. 여러분이 배경을 들으면 ‘아, 정말 충격적이구나’ 하고 느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막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거의 모욕에 가까운 말이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의 참된 의미와 저주

들어보십시오. 초막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 23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자는 모두 초막에 거주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너희로 하여금 대대로 일을 알게 하려 함이라.

 

초막에 거주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애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고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너는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다. 너희는 애굽으로 가게 것이다.

 

이것은 거의 저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저주에 해당하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광복절 행사에 참석한 일본 대사가 단상에서 “여러분, 이제 다시 일본 치하로 돌아갑시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상조차 없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였습니다. “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시 종이 것이다. 노예가 것이다.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광야에서 보살피시고 인도하셔서 약속의 가나안까지 데려오신 모든 이야기를 너희가 지금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

여러분의 인생에도 지나온 시간 속에 그런 순간들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기도했을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던 , 주님을 생각하며 기뻐했던 ,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살던 시절에도 하나님께서 몰래 역사하셨던 순간들… 나중에 돌아보고 감사했던 기억들… 여러분 정말 하나도 없으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이루셨습니까?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까?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눈앞의 고통만 보고, 마음속의 욕심만 따라 살고, 조금 좋아진 것·조금 편해진 것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소중한 이야기들을 정말 기억하고 계십니까? 오늘 함께 기도한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살리신 주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은혜를 다시 생각하며 가슴에 새기고 계십니까?

 

혹시 우리가 은혜를 잊은 것은 아닙니까? 마치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광야에서 우리를 낮추시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던 손길을…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는 어리석음

호세아의 경고를 그들은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시겠어.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잖아. 당신 같은 사람들 우리 이제까지 수도 없이 봤어. 와서 전부 무슨 경고니 징계니 말하지만 결국 아무 없었잖아.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까지도 살려주셨잖아. 이스라엘 아직 괜찮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랬을까요? 지금 눈앞에는 먹을 것이 있고, 앗수르는 쳐들어오지 않고, 사방이 평안해 보이니까요. 우리가 어리석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있었던 것이죠. 그들도 자기 앞의 풍요와 안전만을 보고 안심했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고 먹을 있고 일하고 있으니까 괜찮다.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하는 마음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가? 질문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앗수르가 강국이니까, 그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의지하게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소유와 재산을 의지하는 것과 다를 무엇이겠습니까?

 

포도와 올리브를 풍성하게 거두고 먹을 것이 넘쳐나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이유가 점점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겠죠. “아니,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았으면 우리가 이런 풍요를 누릴 있겠어? 하나님은 우리 편이야.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거야.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진짜 마음은 어떤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벌이 없고, 특별한 심판도 없고, 사는 어려움이 없으니까, “괜찮은가 보다. 하나님이 아직은 편인가 보다” 하고 스스로 안심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마음이 어떤가였죠.

 

선지자를 조롱하는 백성의 태도

이들이 선지자를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는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서에는 정말 가슴에 절절히 와닿는 장면이 많습니다. 번역의 한계는 있지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사야에게 말합니다.

 

“야, 이사야야. 너는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려는 거냐? 누구에게 도를 전해서 깨닫게 하려는 거냐? 떼고 품을 떠난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이냐? 애들한테나 법한 뻔한 이야기 하지 마라. 우리 아는 말이다.

 

설교를 들을 여러분도 비슷하게 느낄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좋은 하겠지. 그래서 주무시는 분도 있죠. “목사님이 틀린 하겠어? 믿어. 그러니까 편하게 잠이나 자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사야에게 했던 말이 바로 이런 태도였습니다.

 

“왜 이렇게 잔소리를 하느냐? 경계의 경계, 경계의 경계, 교훈의 교훈, 교훈의 교훈…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아는 얘기만 잔뜩 말하는구나.

 

이것이 이사야에게 던진 조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음을 닫는 어리석음

하지만 설교가 짧든 길든, 깊든 단순하든,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말씀은 위대한 설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자가 말하는 모든 설명보다도, 설교 전에 읽는 성경 구절 자체가 가장 위대한 설교가 되기도 합니다.

 

말씀이 들려질 우리는 삶을 돌아보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는 화려한 언어나 뛰어난 설교에는 반응하면서, 정작 담백하고 ‘뭉툭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마음을 닫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나를 감동시켜 봐라” 하고 있는 것이죠.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일입니까?

 

이스라엘은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풍요롭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처럼 느껴지고, “왜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말합니다. “너희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너희의 죄악이 많고, 원한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한’은 적대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호세아를 향한 적대감, 그리고 이스라엘이 유다를 향한 적대감도 있었습니다.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한 것이죠.

 

그들의 문제는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자기들의 삶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누리는 잠깐의 풍요는 그렇게 좋아했고, 앗수르가 주는 거짓 평화는 그렇게 달콤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금 순간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돌보셨고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그 모든 은혜를—그들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삶의 중심을 잃은 신앙과 세상의 가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추수 감사 주일과 추수 감사절을 지내셨습니다. 그날 하루 편히 쉬고 감사할 있었던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지만,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기억하셨습니까?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면 기억하고, 신경 써야 일들도 잊지 않고 챙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셨습니까?

 

여러분,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중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찾고 구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없으면, 조용히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나 자기계발, 교양을 높이려 합니다. 때로는 이러한 일들이 육체적·사회적 유익을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본인은 느끼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에 집중하게 됩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눈을 길러야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 말씀과 가까이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만 읽고, 영화도 드라마도 책도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보호하려 했습니다. 미국 기독교 학교에서도 아이를 온실 속에서 보호하며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교사들은 성경 암송과 칭찬으로 아이들을 지도했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 일반 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를 떠나는 비율이 높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매우 컸기 때문입니다.

 

정작 교회가 해야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죄와 욕심 속의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학교와 사회에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경 말씀을 알고 외우기는 하지만, 그것이 속에서 폭발하지 않습니다. 힘이 없는 것이죠. 따라서 세상의 가치가 성경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속에서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상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 기쁨이 중심입니다.

 

여러분이 아침 식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눈을 뜨는 이유도, 침대에서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이나 ,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삶이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일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있습니다. 성경책을 보면서 먹어서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먹어서만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기쁨과 하나님의 의로움을 드러낼 영광이 됩니다.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최악의 상태일 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은 진실을 반드시 알아야 했습니다.

 

최악의 부패, 기브아 시대와 같은 오늘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성찬절을 지내기 때문에 기브아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기브아의 이야기’인데, 이제야 기브아 이야기 부분에 도착했습니다. 짧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브아는 여러분 대부분이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유명한 ‘열두 토막 사건’입니다. 지금 호세아는 너희들의 상황을 보니 시대와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의 타락과 베냐민 지파의 불의

어떻게 같을까요? 그때 주인공은 레위인입니다. 거룩한 제사장 계열이지요. 그런데 그는 아내도 아닌 첩을 데리고 여행을 하다가 베냐민 지파가 살던 기브아에 도착해 어느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됩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매우 이상합니다. 그런데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밤이 되자 동네 불량배들이 몰려와 레위인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레위인의 첩이 아니라, 레위인 자신을 내놓으라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합니까? 자기 첩을 내줍니다. 결국 첩은 밤새 성폭행을 당하고 죽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레위인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거나,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이 회개했거나, 베냐민 지파가 책임을 인정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레위인은 시신을 열두 토막으로 잘라 지파에게 보냅니다.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지파는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고 경악합니다. 거기까지는 좋습니다.

 

하나님이 부재한 문제 해결 방식

그러면 다음이 어떻게 이어져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베냐민 지파는 회개하라”라고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군대를 모아 베냐민을 치러 갑니다. 협박부터 시작합니다. “그 불량배들을 데리고 와라. 우리가 처리하겠다. 여기까지 오도록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호세아가 말하는 그대로입니다. 부패하고, 부패하고, 완전히 부패한 상태입니다.

 

그러면 베냐민은 어떻게 했습니까? 당연히 잘못을 인정하고 범죄자들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냐민은 내놓지 않고 오히려 숨겨줍니다. 결국 전쟁이 벌어지고, 베냐민은 거의 몰살당할 뻔합니다. 저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분명한데 숨겨줄까? 내놓지 않을까?

 

그런데 요즘 미국이나 한국, 또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근대 정치사를 보면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절대 내놓습니다.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의 역사를 훑어봐도 ‘잘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자기 논리가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아, 이게 인간이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안타깝지만, 지금 현실을 보면 이런 일이 충분히 반복될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입니다.

 

지금은 총체적 난국, 완전한 부패의 상태입니다. 누구도 선함이 없습니다. 열두 지파도, 베냐민도, 불량배도, 레위인도,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다루거나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이 없습니다. 회개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은 사람도 없습니다.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

그들이 선택한 해결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의 절기를 이용해 남자만 남은 베냐민에게 아내를 구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남자도 600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을 보내 춤추게 , 남은 베냐민 사람들이 보쌈해 가도록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방법입니까? 정도면 베냐민을 위했던 걸까요? 전혀 아닙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뿐입니다.

 

총체적 난국의 시대를 두고 지금 호세아는 말합니다. “너희가 기브아의 시대와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왕은 누구인가

우리는 아닐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니까 다르다고 생각할까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아마 우리보다 열심히 불렀을 것입니다. 재물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많이 바쳤을 것입니다. 종교적 의무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자신들이 고백한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만 유일하게 비난받아야 민족입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우리는 실수를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반대로 좋은 결정을 내려 좋은 결과를 얻을 때도 있습니다. 즐거움과 자부심을 누릴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보나요? 잘못되면 ‘잘못한 사람’을 바라보고, 잘되면 ‘잘한 나’를 바라보고, 얻은 이익만 바라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신자로서 수많은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번도 생각하지 않을 있습니다. 우리 입술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하나님이 없고 우리가 ‘왕’이 되어 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바라보아야

누가 되었든, 어디에 있든,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울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말과 생각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들어온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마음을 살펴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거짓된 음성에 속고 있습니까?

 

어렵고 힘든 시간에 여러분을 붙잡으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감사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눈앞의 현실만 보고 하나님을 잊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여전히 산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구절을 들으면 산을 향해 눈을 드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산은 우상을 섬기던 산당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음 구절이 무엇입니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만약 산이 맞다면 “산에서로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도움은 어디서 옵니까? 나를 사랑하사 아들을 주신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짧고 스쳐 지나가는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십니까? 우리를 영원히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인생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눈과 마음을 다른 곳에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음을 압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말씀을 따라 저희 자신을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아무리 짧고 아무리 간단하고 아무리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저희를 살려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다시 돌이키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힘을 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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