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8 1절로부터 7 까지 입니다.

“나팔을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언약을 어기며 율법을 범함이로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은과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사마리아여,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아멘.

 

잊을 없는 태풍의 기억

한국에서의 기억과 달리, 이곳 캘리포니아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강력한 태풍이나 허리케인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반면 한국은 매년 태풍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기에, 저에게도 그와 관련된 기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84년에 있었던 태풍 ''입니다. 당시 저희 집이 완전히 침수되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물에 잠긴 집을 뒤로하고 학교가 있는 언덕 위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이재민이 되어 집을 내려다보며 한숨 짓던 분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아마 제게는 가장 피해를 주었던 태풍이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1959년의 '사라호' 태풍으로 많은 분이 희생되었지만, 인생에 가장 깊이 각인된 태풍은 1972년의 '베티'였습니다.

 

당시 저는 어린 시절을 서울 마포에서 보냈는데, 한강 물이 범람하여 집들이 잠기고 위로 소와 돼지가 떠내려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뗏목을 타고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강둑에 새까맣게 모여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이틀간 내린 비로 모든 것이 휩쓸려 내려갔던 공포는 정말 컸습니다. 당시에는 수해 방지 시설이 부족했기에 피해가 컸을 것입니다. 뉴스 화면이 아닌, 눈앞에서 소와 돼지가 떠내려가는 재난의 현장은 어린 제게 충격으로 남았습니다. 무서웠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미풍이 광풍이 되기까지

여러분, 그토록 무서운 태풍도 시작은 아주 미약한 바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엇이든 시작은 작기 마련이지만, 태풍은 특히 그러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구름이나 바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해수의 온도가 상승하고, 수증기가 에너지를 공급하며,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점차 우리가 아는 거대한 광풍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처음에는 초속 10미터도 되지 않던 바람이 나중에는 초속 60미터의 강풍과 직경 킬로미터에 달하는 크기로 변해 나라 전체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일본도 자주 겪지만, 우리나라도 수없이 겪어온 일입니다. 시작은 작고 미약한 바람이었으나, 결국 거대한 광풍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협하는 사소한 바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8 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이스라엘은 별것 아닌 조그마한 바람을 심었으나, 결국 감당할 없는 광풍을 맞닥뜨려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심었던 사소한 바람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기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파국을 불러온 것일까요?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습관이 인생을 결정짓곤 합니다. 작은 좋은 습관은 평생의 건강을 지켜주지만, 작은 나쁜 습관 하나가 평생 우리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습관들은 고치기 어렵지만, 우리의 인생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결코 사소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훗날 광풍이 되어 우리 신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있는, 가지 ‘사소한 바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착각

번째 위험한 바람은 본문 2 말씀에 나타납니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있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할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8장의 마지막인 14절을 보십시오. 구절은 서두와 짝을 이루어 이스라엘의 실상을 폭로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를 잊어버리고...

 

성경은 그들이 창조주를 잊었다고 선언합니다. 아예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망각했다는 것입니다. ,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부르짖던 그들이 실상은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스스로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로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잊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합니다. 3절은 이러한 그들의 상태를 정확히 지적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선’을 버렸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그들에게 행하신 은혜의 역사를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들이 종교적인 행위까지 모두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겉모습은 하나님을 아는 듯했으나, 중심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참된 믿음과 신뢰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에녹의 이야기를 통해 참된 믿음을 설명해 줍니다.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음을 언급한 , 성경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경은 여기서 ‘알아야 한다’거나 ‘깨달아야 한다’고 하지 않고, ‘믿어야 할지니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단순히 지식 습득을 넘어 의지하고 의뢰하는 관계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드는 예를 통해 차이를 있습니다. 누군가 '오늘 시험을 보면 100점을 맞을 있다'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사람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시험 결과를 알기도 전에) 망설임 없이 자동차를 사서 집에 가져다 놓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이처럼 상대방의 말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행위를 수반합니다.

 

신뢰는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합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우리가 대상을 분명하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일 , 우리는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머리로는 사실을 인지하고 깨닫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속에서 의지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깊이 숙고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때로는 '아저씨'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아버지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평안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동원하는 , 기복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은 항상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비위를 건드리면 복을 주지 않고 언제 벌을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눈치를 봐야 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에게는 전적으로 의지할 없습니다. 오직 달래고 아부해야 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너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말했을 , 이는 단순히 그분의 존재 자체를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의 신앙 고백이 실제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목회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 것은 에녹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이 누구이신지, 자신에게 무엇을 행하셨는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 속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흔적을 남기셨는지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나 논리적 사실이 아니라, 삶으로 알고 맛본 지식인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나는 하나님

점심 식사 시간이 되어 손님을 모시고 "같이 식사합시다"라고 , 가장 어려운 것이 메뉴를 정하는 일입니다. 어렵사리 식당을 정해도, 그다음에는 메뉴 무엇을 고를지 또다시 고민하게 됩니다. 무엇이 맛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때 대개 사람들은 " 집은 순두부가 맛있습니다"라고 알려줄 것입니다. 제가 어떤 분을 모시고 가서 " 순두부가 맛있다고 하더군요"라고는 말할 있지만, "순두부가 정말 맛있습니다"라고 확신하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먹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순두부를 직접 맛보았다면 다릅니다. " 순두부는 매콤하고 정말 맛있다. 뒷맛도 시원하며, 이왕이면 버섯, 조개, 해산물 순두부를 먹으면 아주 시원한 맛을 느낄 있다"까지도 자세히 말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안다' 고백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분이십니까? 저는 가끔 점이 궁금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참된 선의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고 계십니까?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사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신 그분을 지금 순간 마음 깊이 생각하며 예배하고 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질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제단에서 짐승을 잡고 있는데, 짐승을 잡는 진정한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피를 흘리는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피가 당신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고 있습니까? 성전 안의 지성소와 법궤를 단지 복잡한 종교적 시설로만 여기지 않고,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짜 이야기를 기울여 듣고 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십자가를 만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십자가가 여러분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로 인해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고통과 죄를 대신하여 변명 한마디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신 하나님을 여러분은 지금 만나고 계십니까? 그분을 참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외로움, 억울함, 눈물, 분노—이 모든 감정을 파고들어 가보면 결국 우리의 욕심, 이기심, 자존심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까지도 가슴에 품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여러분은 지금 알고 계십니까? 진정으로 여러분을 위로하시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계십니까?

 

자신의 거룩한 옷을 우리에게 입히시고, 의와 지혜와 영원한 생명을 아낌없이 부어주신 주님을 향해 여러분은 “그래, 그분이시다. 바로 그분이셔.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수록 나에게 참된 위로가 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고 계십니까?

 

일주일 동안 피곤하고 힘들었으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씨름하며 답답함 속에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부르짖을 때—여러분의 의지나 감정과 상관없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를 위하시는 그분' 떠오르십니까?

 

모든 일들도 결국 선한 결과를 만들어내실 것을 길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며 “그저 은혜를 받아라” 하시는 그분, 그토록 따뜻하게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인격적으로 알고 계십니까?

 

잊혀진 하나님과 우리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바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지키셨으며, 전쟁터에서 승리를 주시고, 가나안에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하셨으며, 다윗을 세워 나라를 보호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은 데는 크게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감당하기 어려운 적과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할 없자, 하나님을 찾기보다 강하고 현실적인 힘을 찾아 의지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온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흔아홉 가지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때문에 전체를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짧은 어려움과 고통이 닥쳤을 , 하나님을 버릴 있는 마음 상태가 것입니다.

 

혹은 반대로, 가진 것이 너무 많아져 하나님이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모세가 신명기에서 "너희가 부유하고 배부르게 되면 하나님을 잊고 찾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듯이, 풍요는 필연적으로 영적 망각을 초래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마음이 어그러진 이스라엘에게 심판과 진노를 보여주실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처럼 어그러진 마음의 결과는 4 이하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어떤 나라인지 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면,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스스로 왕을 세우고 지도자를 임명했습니다.

 

4절은 실상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왕을 세웠으나 내게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은과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이 왕이시라는 사실을 마음대로 무시했음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북이스라엘은 피로 얼룩진 쿠데타와 폭력이 난무하는 불안정한 왕위 교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으나, 실제로는 손에 피와 악이 가득했습니다. 정권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 인정이 필요했습니다. 때문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며, 자신들의 행위를 신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했습니다. 은과 금으로 우상을 만든 역시 자신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었을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북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가는 것을 막고 백성을 통제하기 위해, 여로보암은 단과 베델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후대에 등장한 모든 이단의 행태와 유사합니다. 본질이 아닌 좋은 것을 가져다 쓰고, 여러 예배처를 만들어 혼란을 야기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자기를 위한 ' 필요했기 때문이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정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셔서 "나의 나라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나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완성된 이후, 땅에는 이상 문자 그대로의 신정국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을 기독교 국가라 부르거나 과거 가톨릭이 '신정 로마' 주장했으나, 진정한 의미의 신정국가는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킨다고 말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땅에서 폭력과 권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는 모든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전쟁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적 책임과 시민의 의무를 가지고 사회 참여를 수는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거룩한 전쟁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수행해야 진정한 거룩한 전쟁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과 신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왕이

오늘날 신정국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지상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여러분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시며, 여러분이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신자의 문제를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중 99% 바로 주권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여전히 부인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가 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야기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유명한 대로, 주님께서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장면입니다. 많은 이들은 구절을 두고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시니, 이제 내가 예수를 믿게 주실 것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이미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인생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자 주인이 아니셨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있는 풍성한 복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주인 없는 삶의 결과

만약 여러분이 예수를 열심히 믿고 봉사도 하며 바른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쁨이 없고 신앙의 깊은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왕이자 주인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누리는 기쁨을 종이 누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지금 기쁨의 원천이시며, 여러분 때문에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왕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왕이 되면, 우리의 감정과 생각,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니 감정은 요동칠 수밖에 없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이기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속상하고 답답합니다. 작은 문제가 생겨도 극복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며, 오랫동안 믿어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무런 능력도 없어 보입니다.

 

그럴까요? 실제 삶의 자리에 그리스도의 참된 주권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얻었으나, 사람을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포장하고 빛나게 하기 위해 수많은 성경 구절과 신앙 경험을 끌어다 쓰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왕이 삶을 내려놓으십시오

만약 지금 "내가 예수를 정말 제대로 믿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면, 과감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붙여왔던 모든 훈장과, 예수를 믿고 배웠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혹시 그것이 옳은 교리나 경험일지라도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라도 부여한다면,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올바른 교리', 여러분의 '경험과 지식' 하나님이 아닌 여러분의 왕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국 내가 이룬 것들—내가 경험, 내가 드린 기도, 내가 읽은 성경, 내가 느낀 감정—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갖다 붙여서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으며, 붙일 것이 있겠습니까?

 

반대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그리스도께 덧붙이고 있습니다. 수가 너무 많아서 평생을 긁어내도 끝이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이것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내려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붙잡고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붙잡고 살았던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었으니, 주님이 주시는 축복을 누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서가 반대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미 주신 축복을 내가 어떻게 막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막힌 곳마다 어떻게 하면 뚫어낼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깊이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반대로 살아서는, 참된 기쁨과 축복이 결코 우리 삶에 온전히 임할 없습니다.

 

말씀 아래 거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가장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과 같습니다. 설교를 듣고 계신 분들에게 말이 억울하게 들릴 있습니다. "아니, 지금 제가 듣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라고 생각하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태도에 따라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말씀 아래에서 듣는 사람이 있고, 말씀 위에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 아래에서 듣는 사람은 말씀이 자신에게 왕이 됩니다.

 

반면, 말씀 위에서 들으면 어떻게 될까요? 말씀조차도 자신이 평가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물론 설교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는지를 살피는 것은 당연히 해야 일입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이 올바르게 해석되어 " 말씀이 맞구나"라고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 마음에 든다," 혹은 " 생각에는 그렇지 않아.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우리를 고난에 빠뜨리실 있어?"라고 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너희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말합니다.

 

이때, 우리가 말씀 위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와 우리 삶의 현실을 분리하여 인식하게 됩니다. 만약 예수 믿고 나서 "저는 너무 행복해요. 고난이 없어요. 주님은 언제나 저를 기쁜 길로만 인도하세요"라고 말한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과 다르기에 '가짜'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배웠습니다'라는 모든 지식과 경험 또한 반드시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라

어릴 때부터 배운 신앙의 습관이나 지식은 오래가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반복적으로 겪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말씀 아래에 있는가? 아니면 감정, 생각,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기독교의 틀을 기준으로 말씀을 재고 있는가?"

 

사실 이것은 과거 로마 가톨릭이 말씀보다 전통과 인간의 판단을 위에 두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을 왕으로 인정하기에, 그분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살피고, 뜻이 나를 다스릴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자신을 어떤 안에 가두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를 자유케 하는 말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에게는 공포였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자신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기고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올바른 태도는 "나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가자"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알고 있는 '조금의 지식'으로 "기독교는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말씀에서 나오지 않은 모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거짓이고 우상입니다. 말씀에서 나오지 않은 기독교에 대한 모든 지식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결국 여러분의 영혼을 혼탁하게 만들고,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게 만들면서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게 만들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을 판단할 반드시 "이것이 정말 말씀인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말씀은 일치하는가?"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비로소 우리는 " 말씀이 나를 위해 주신 말씀이구나," " 말씀이 나의 선과 나의 거룩과 나의 기쁨과 나의 자유를 위해 주신 말씀이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이 작은 것으로 보이는 것들까지도 하나하나 말씀에 비추기 시작하면, 그동안 "나는 정도면 알고 있다. 나름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 생각했던 교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여러 일을 보거나 판단할 때도 스스로 '잘하고 있다'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지치고 피곤한 마음을 가졌을 때에도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우리가 평안과 안식을 누릴 있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시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고도 마지막에 왕궁과 견고한 성읍들을 쌓았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요?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보호할 새로운 방편들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왕국을 짓고, 스스로의 의를 증명하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자주 범하는 실수입니다. 우리 역시 종종 우리의 신앙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많은 간증이 나오듯,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찾고 싶다" 마음으로 "이런 힘든 일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결해 주셨습니다"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이유가 여러분이 겪은 놀라운 일들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떤 상황 속에 있든 결코 여러분을 놓치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하는 환경은 사람마다 다르며,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우리를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놓이게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이 자신의 자녀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과 교제하며 함께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무조건적인 아버지의 시선

마치 어린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습니다. 어린 딸이 시장 놀이를 하면서 "오늘 사장님, 제일 맛있는 뭐예요?"라는 질문에 다섯 살짜리 꼬마가 "오늘은 수박이 맛있고, 상추가 들어왔습니다"라고 어른 흉내를 냅니다. 부모님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거워합니다. 모습이 귀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 하나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래, 너는 죽음이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구원하셨는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신 대가(代價)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을 놓치실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겪는 아픔과 슬픔, 방황과 혼돈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역시 해결할 없는 문제에 부딪혔을 , 스스로 그것을 넘어서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기쁨과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나를 바로잡으시며 다시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운 '아저씨'처럼, 매일 두려워하고 공포심을 느껴야 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릴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증명은 하나님 손에 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두려움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남이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답답하고,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느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안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증명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과 삶의 가치 증명은 오직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자기 힘과 업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광풍에서 생명의 바람으로

호세아서가 경고하는 '바람으로 시작하여 광풍으로 끝나는 ' 인생의 결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출애굽 불어왔던 동풍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심판의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이르렀을 , 바다는 죽음을 의미했고 그들은 죽음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광풍이 불었고,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앞에 두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놀라운 말씀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멈춰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과 무엇을 것인지를 알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가만히만 있었다면 바다를 건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은혜를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다는 의미로 오해하지만, 바다를 혼자 건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겠다고 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마른 땅처럼 바다를 건넜습니다.

 

알지 못해도 누리는 은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제가 길을 함께 걸어갑니다. 당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간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중에도 놀라운 은혜를 함께 누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만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을 배우고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시편의 고백처럼 "하늘에서 손을 펴서 나를 붙잡으셨도다"라고 고백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걸어가는 동안 이것이 무슨 일인지 당황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손길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그때 많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두려움과 놀람에 떨며 울면서 걸어간 사람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아이들은 무엇을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십시오. 이것이 광풍으로 끝나지 않는 생명의 바람이 이유입니다.

 

생명이 있는 바람

깊이 생각해 봅시다. 겨자씨처럼 작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겨자씨가 자라 모든 새가 깃드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주님도 작은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호세아의 경고와 무엇이 다릅니까? 바로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람은 생명이 없었기에 결국 광풍이 되어 모든 것과 자신을 멸망시켰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바람은 성령의 바람이었고 생명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힘을 내어 여러분과 저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위험과 능력을 보여주었을 , 우리는 놀라운 생명을 얻고 사람이 되었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심으신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뜨거운 바다 위로 있게 하십시오. 그래서 은혜의 수증기를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 담으십시오. 문제가 여러분을 괴롭힐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근심과 걱정이 아무리 심해도 머리카락 하나도 변하게 없습니다. 거기에 여러분의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나의 나의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나를 은혜롭게 대하시며, 그분의 은혜가 나와 함께 있으며, 나의 인생이 문제로 결정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제발 기억하십시오. 나는 주님과 함께 걷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바로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광풍처럼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바람이 아니라,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거룩한 바람이 되어 주십시오.

 

새들이 깃들일 있는 나무가 되어 주시고, 만물이 생동할 있는 바람이 되어 주십시오. 태풍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내의 바람, 자비의 바람, 기쁨의 바람이 되어 주십시오. 생명의 바람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리고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길을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누가 있어 이보다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고, 깊은 사랑을 알려 주실 있겠습니까?

 

저희는 여전히 안다고 착각하면서도, 정작 참된 것을 모르는 가운데 겸손히 "주님, 저는 모릅니다"라고 고백하기보다 끝까지 안다고 고집하곤 합니다. 이런 저희조차도 주님의 손길 아래 온전히 맡기오니, 주님, 저희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에 세우시고, 주님과 함께 마른 땅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길을,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다시 깨닫는 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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