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7장 1절로부터 7절 까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라. 과자 만드는 자에 의해 달궈진 화덕과 같도다. 그가 반죽을 뭉침으로 발효되기까지만 불 일으키기를 그칠 뿐이니라 우리 왕의 날에 지도자들은 술의 뜨거움으로 병이 나며 왕은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하는도다. 그들이 가까이 올 때에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 같으니 그들의 분노는 밤새도록 자고 아침에 피우는 불꽃 같도다. 그들이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아멘.
호세아서를 통해 되돌아볼 두 가지 핵심
저희가 호세아서를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호세아서를 계속 읽고 말씀을 들으시면서, 서론에서 제시하는 두 가지 중요한 핵심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의 실체를 살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묵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너희는 죄를 떠나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지, 우리의 속마음에는 어떤 모습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고 스스로 믿는 자임을 잘 알고 있기에, 때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잊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시간이 갈수록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이 호세아서를 통해 다시 상고하려 합니다.
둘째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우리들을 여전히, 끊임없이, 변함없이 부르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이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를 여러분이 깊이 깨닫기를 소망합니다.
나아가 더 중요하게는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를 여러분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멀어져 가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그토록 끝없이 부르실 수 있는지,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놓지 못하시는지를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 가려고 합니다.
혹자는 간단히 ‘그거야 하나님이 사랑이시니까’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그것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무조건 무슨 짓을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또 부르고 또 부르셨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두 가지 핵심과 그 중요한 관계를 잊지 않고 이 호세아서를 함께 깊이 공부해 가기를 원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번영과 그 이면의 상처
이스라엘은 당시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는 이미 요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이스라엘을 돌보는 이가 없구나. 이들이 계속 압제당하고 고생하며 아픔과 슬픔뿐이구나. 그래서 내가 여로보암 2세를 통하여 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주님께서 그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와 치료가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감사로 응답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주셨다면,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아와야 할 것 같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오히려 ‘더 악을 행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다시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이는 우리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하시자, 오히려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더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번영 뒤에 숨겨진 상처
일단 우리는 이스라엘이 지금 건강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치료를 하려 하시는 것이겠죠. 그들의 실상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강적이었던 앗수르와 아람은 자체적인 문제 해결로 인해 바빠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거나 괴롭힐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자 무역의 주도권이 자연스럽게 이스라엘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유한 항구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 유명한 ‘왕의 대로’가 이스라엘을 통하여 애굽까지 이어져 있었으므로, 그들은 말하자면 앉아서 돈을 버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주변 강대국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으나, 그런 일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어 생각지 못했던 부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겉과 속의 불일치
그러나 그러한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내면은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다.”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다시 때릴 곳을 찾기가 어려웠을까요?
이는 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고난을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 또한 엑스레이를 찍어본다면 수많은 상처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며, 더 이상 때릴 곳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잠시 기다리고 계신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매를 맞았는데도 더 때릴 곳이 없을 정도로 상했고, 그만큼의 상처가 있었지만, 그것을 싸매고 기름을 발라줄 위로자마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지금 죄로 인한 고통과 아픔 속에 신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를 누리고 행복한 듯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교회 내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일, 우리는 집에서 가장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골라 입고 교회에 오며, 얼굴 표정을 관리하고 웃으며 인사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분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염려를 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 하며, 안부 인사에도 힘들거나 부정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치료를 필요로 하는 상처 입은 자이며 아픈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가 이들을 싸매고 치료하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주님, 여기가 아픕니다’, ‘주님, 저는 여기가 힘듭니다, 돌봐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 제발 저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외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따지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혹은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신 것 아니십니까? 도대체 제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라는 생각을 먼저 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그들은 오히려 죄와 악으로 하나님께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회복되고 적이 물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이 안정과 번영 속에서 거짓을 말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본문은 ‘안으로는 도둑질이요 밖으로는 떼를 지어 강도 짓이다’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전 국민이 도둑질과 강도 짓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살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우리는 ‘주님, 감사합니다. 이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자입니다’라고 깨닫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것 하나 가지고는 부족하니 한 개를 더 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또한 은혜를 받게 되면, 그전까지 간절했던 신앙인들조차 그다음부터는 너무나 편하게 하나님 앞에서 ‘이 정도면 내가 잘하고 있는 거다’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자신이 받았던 징계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망각합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신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립니다.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
🤔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 (퇴고)
사람이 자기중심이 되기 시작하면 모든 세상이 나의 논리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 모두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진단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잊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잊으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조차 스스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재물을 바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잊었다는 말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곧 무지(無知)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성경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두 가지 무지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1. 자신에 대한 무지
첫 번째는 자신에 대한 무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것 같습니다’라고 지적받으면, ‘맞습니다, 제가 성경을 조금밖에 못 읽어서 하나님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라고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말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거나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부르고 제사를 드리고 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기도 하지만, 구약적으로 말하면 성전의 마당만을 밟고 있을 뿐입니다. 성전에 다녀왔다는 사실은 기억하지만, 내가 마당만 밟고 왔다는 것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더욱 아픈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도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아끼시며 사랑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우리는 너무나 쉽고 자주 망각합니다.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인지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무언가에 쫓기며,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다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 자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내가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었다”라고 전 성경을 통틀어 인간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피를 토하듯이’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나는 너무나 부족하다, 하나님은 저 옆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시면서 왜 나는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게 하실까?’라는 불평과 푸념을 끊임없이 늘어놓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는 왜 이토록 부족해 보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불행할까요? 이런 삶을 사는 우리 자신을 여러분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여러분의 목자가 되어주시며, 여러분이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을 잘 몰라서 내가 어떤 것을 누리고 있고, 또 내가 뭘 가졌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이 틀릴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실수를 하실 수도 있을까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지만 내게 조금은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내가 쓸 것이 조금은 부족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조금 실수하신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모르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모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살면서도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물론 있지만, 우선은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가 너무나 큽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세상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그 평가는 하나님의 평가를 이길 수 없으며 그 하나님의 평가가 우리에게 찍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시는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에 대한 무지
두 번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서 참 기쁨과 만족이 점점 약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이시고,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그리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려고 하는 노력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그 하나님만을 생각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그 만지는 부위에 따라 서로 다르게 코끼리를 묘사하는 것같이, 우리들은 각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하나님이 너무나 다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을 절대로 좋아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벌을 내릴 생각부터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입 밖으로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께서 내 삶을 사는 동안 가장 선한 길로 나를 인도하시고 매일 쏟아붓듯이 나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다’라고 확신하고 있다면, 여러분과 제가 지금 예배하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데도 이러한 슬프고 힘없는 표정을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놀라운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요? 너무나 기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초대하여 그 은혜를 부어주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주고 있을 때, 왜 우리의 만족은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이토록 멀게만 보일까요?
오늘 이 본문은 여기에 대해서 정말 통렬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위하셔서 하나님의 거룩을 향한 일을 나와 같은 자를 통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라는 것에 대한 놀라운 확신과 그 기쁨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에, 사실은 감사가 적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부하는 모습: 지도자 암살의 시대
여러분, 하나님의 진정한 관심과 은혜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관심사와 생각은 사실 너무나 명확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몰두하고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소유했는지,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내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지, 이것들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사회에 살면서도 생계를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제로 먹고살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남보다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은데, 자신이 생각하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 있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악으로 그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이는 아부(阿附)한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세상에게 아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
본문이 언급하는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네 번에 걸친 암살이 시도된 혼란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왕국 말기에 40년 동안 네 명의 왕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암살이 일어났습니까? 한 명이 왕이 되면 아부하는 자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은 주위에서 ‘당신이야말로 최고의 왕이다’라며 아부를 시작하고, 왕이 안심했을 때 뒤에서 암살하고 스스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되는 표면적인 이유는 물론 정권과 권력에 대한 욕심이지만, 항상 내세우는 명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 악한 왕을 처벌하고 이 세상을 선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사실 이는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조선 시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합니다. 스스로는 의로운 자라고 여깁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정치적인 내용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우리 역시 이들과 같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이들이 ‘저렇게 자기밖에 모르고 악한 왕들이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하는 거다’라고 하면서 지도자들을 욕하고 손가락질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 대해 조금 다른 견해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다거나 지도자들이 말씀을 떠나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에서 문제의 주어는 왕이나 지도자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주체, 혹은 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호세아는 네 가지 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너희들의 모습이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이러한 일들이 너희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모습을 화덕으로 비유합니다. 화덕은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드는 화구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도 그 화덕에서 전병을 구워 먹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화덕에서 요리되는 뒤집지 않아 설익은 전병의 비유입니다. 완전히 익지 않은 떡인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는 비둘기이고, 네 번째는 속이는 화살입니다. 이처럼 호세아서는 네 가지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이 누구이며, 나아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그중 첫 번째인 화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미지: 화덕 - 오랜 시간 뜨거워진 마음
아래의 이미지는 떡을 만드는 화덕입니다.


이 사진은 고증을 통해 재현된 고대 근동 지역에서 많이 사용되던 화덕의 모습입니다. 이 화덕은 진흙이나 점토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후 둥그런 입구를 만듭니다. 이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크기가 이보다는 조금 더 컸으며, 밑쪽에는 장작을 넣고 불이 잘 탈 수 있도록 공기가 통하는 아궁이와 같은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불이 붙게 되면 화덕은 뜨거워지고, 그 옆면에는 사진에서 보여진 것처럼 떡 반죽을 붙여서 화덕의 열기로 굽게 됩니다. 보통은 장작이 거의 다 타들어가서 꺼질 때쯤 반죽을 붙입니다. 불을 끈 후에 이 떡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빵처럼 누룩을 넣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죽을 납작하게 하여 화덕 벽에 붙이면 약 2~3분 만에 전병이 완성되게 됩니다.
화덕이 뜨거워지는 원리
오늘 본문에서는 이 화덕이 북이스라엘과 매우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화덕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강조합니다.
하나는 이 화덕에서 요리를 시작할 때, 한국의 아궁이처럼 가마솥을 올려놓고 물을 끓여 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밤새도록 나무를 집어넣고 불을 때워서 화덕의 온도를 높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장작을 넣고 불만 때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화덕을 뜨겁게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의 화덕 비유는 요리를 하기 위해 이 화덕을 어떻게 뜨겁게 달구는지를 그 핵심적인 비유 포인트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
우리는 때때로 욱하는 성질로 화를 내어 본의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은 나의 본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당사자에게 사과하며 진심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서 말과 행동이 나올 때, 그것은 마치 화덕과 같이 오랜 기간 동안 나무를 때워서 뜨거워진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욕심이 쌓이고 쌓여서 마음이 그 욕심으로 뜨거워지고 뜨거워져서 그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이런 표현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이 화덕을 세상과 세상의 욕심으로 태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 불을 일으켜 그 화덕을 데워야 하는데, 만약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가까이하지 않고 계속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떠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세상과 수많은 세상의 것들이 그 마음속에서 불타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새도록 우리 마음속의 화덕은 그러한 세상의 것들로 계속해서 불을 피우게 됩니다. 여기서 불을 피운다는 말은 깨어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불이 꺼지지 않고 깨어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가 땔감을 가져다 집어넣습니다.
원래는 경건이나 거룩이나 사랑이나 말씀이나 인내로 우리가 그 땔감을 대서 태워야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점점 덜 민감해지게 되고,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킬수록 우리는 엉뚱한 땔감을 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땔감은 너무 많아서 일부러 구하러 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땔감들의 이름은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불안이라는 땔감을 우리는 언제든지 갖다가 피웁니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우면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초조라는 땔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가져다 태웁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땔감도 수없이 많습니다. 남을 시기하는 땔감도 있고, 미움이라는 땔감도 있습니다. 그러한 많은 땔감들로 우리는 오랫동안 조금씩 우리의 화덕을 데워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니까 정말 조그만 것들이 하나둘씩 화덕의 화구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은 이웃에 대한 미움이 우리도 모르게 들어가서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잘못된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있고,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고, 거짓으로 우리의 입술이 물들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화덕은 우리가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데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시기와 질투와 불만족하는 마음들과 그 모든 것들, 내 주위에 있는 욕심들을 거기다 하나씩 집어서 넣습니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죄의 열매
그렇게 이스라엘과 우리들의 마음은 잘못된 것들로 불타올라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화덕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렇게 뜨거워진 화덕 속에 주인이 반죽을 넣으면 2분이 채 되지 않아 떡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두 번째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비유가 시사하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오랜 시간이 경과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끊임없이 나의 욕심과 자기중심적인 마음들이 이 화덕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의 땔감들입니다. 우리 자신도 그러한 것들이 땔감으로 사용될 줄을 몰랐습니다. 무심결에 잠시 어떤 사람을 욕하거나 미워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것들이 어느새 땔감이 되어 나의 마음속에서 뜨거운 화덕을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의식하지 못한 순간에 말이 튀어나오는데, 그 말 속에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칼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좋은 뜻으로 이야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그럴 때 상대방이 오해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동안 나도 모르게 너무나 많은 이 땔감을 태워서 우리의 화덕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상태였습니다. 그 불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나의 입 밖으로 나갈 때는 모든 것이 선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본심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핑계를 대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미 이제까지 타오르던 그 뜨거워진 화덕이 있었고, 그 속에서는 나의 모든 죄와 욕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그 외의 많은 세상의 것들로 불타올랐으며, 그 결과 우리의 입을 통해 내뱉어진 단어 속에는,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는 그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립니다. 터질 때까지, 그 뜨거움이 다른 사람을 삼킬 때까지. 그리고는 그때 드디어 반죽이 들어가 순식간에 떡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것은 갑자기 나온 말실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순간적인 욕심을 이기지 못해서 판단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끊임없이 화덕을 뜨겁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은 우리의 마음이 계속 조금씩 불타오르고 있었고 밤새도록 화덕을 뜨겁게 하고 있었습니다. 땔감은 계속 공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야망과 탐욕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 이 모든 것들, 수군거림과 우리가 품었던 모든 마음의 생각들,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았던 시간들, 그리고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나 자신을 생각했던 그 많은 일들이 실질적으로 이 화덕의 땔감들입니다.
그러다가 떡으로 확 나타나니까 우리는 전부 떡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떡이 잘못됐구나, 그때 조금 더 반죽을 잘할 걸, 누룩을 조금 더 넣어야 되는 거였는데, 밀가루를 좋은 걸 써야 하는데’와 같은 변명들을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했던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왕의 문제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40년 동안 무려 네 번이나 왕을 암살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오래 집권한 사람도 10년밖에 못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왕이 바뀌거나 없어진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왕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영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 혹은 여러분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있다면, 지금 이 비유의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 화덕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으로 나의 땔감을 가지고 있었던가? 나는 과연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이었는가, 아니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도 그저 이 세상에서 나쁜 짓 안 하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그나마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한 수많은 땔감들이 타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성찰을 하게 할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음
그래서 본문 7절에서는 문제의 진짜 핵심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 화덕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여기서 재판관은 사실 재판만 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관리들을 함께 지칭하는 표현이므로, 그냥 지도자라고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Ruler’(통치자)라고 많이 번역합니다. 왕들도 다 엎드러지고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이 되기는커녕 문제의 진정한 핵심을 다 놓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로운 일을 했습니다. 틀린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잘못된 왕을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판단을 잘못하는 재판관을 빨리 내쫓아 버리면 모든 일들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단순히 일반적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영적인 전쟁을 훨씬 더 깊이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눈에 보이는 잘못된 것들을 없애고 누르면 될 거라고 생각하거나, 그것들을 피하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들이 했던 일들이 틀리거나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그 문제를 하나님께 나와 부르짖는 자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이 나오면 그냥 하나님 앞에서 통성으로 기도를 하면 되는구나 하고 여러분이 이해하실까 염려스럽습니다. 단순히 나의 기도가 부족했으니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해결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실까 봐 걱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한 기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는 것이 좋은 일이며 당연한 행동이지만,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오늘 본문이 다루고 있는 근본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삶의 추구
제가 이 부분에 설명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여러분, 경건하고 올바른 통치를 하는 왕이 필요하고 그것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왕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누구보다도 탁월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과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일,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너희의 마음을 다해라”라고 보증하는 일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역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 신실하구나’라는 말을 듣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하며,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이러한 인정을 받아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그 말이 듣기 어려운 말이며 모든 이들에게 칭찬을 받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분야에서 여러분은 최선을 다할 당연한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이 가진 사명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은 감사와 존경과 존중을 받아 마땅합니다.
교회에서 교역자들이 자신들이 맡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잘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혹은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그것을 고쳐 나가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신들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노력들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교회에서만 그렇습니까?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어디서 완벽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정 내에서 아내와 남편으로서 가정을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그 일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사랑과 존중을 주어야 합니다. 그 가정을 지키기 위해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애쓰고 노력하는 남편과 아내에게, 비록 그가 부족할지라도, 배우자와 가족들은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은 부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비록 여러 가지 일들에서 철이 없고 하는 일들과 말들은 부족하며 부모가 보기엔 너무나 어릴지라도, 그 자녀들이 부모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을 부모가 알고 있다면, 그 자녀를 존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잘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충분한 칭찬과 존중을 보여주어서, 그 아이들이 노여워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자식 교육을 잘못했거나 아이들을 잘못 기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존중하고, 그 아이가 노여워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뻐하고 존중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그런 잘못을 하셨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고, 다시 서로 화해하고 마음을 하나로 해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 가정의 당연한 의무이자 특징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서로를 용서하며, 받아주고,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된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만 보고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또 그들이 우리만 보고 모든 것을 용서하기에는 우리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당연한 사랑과 존중을 서로에게 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
그러나 현실은 우리가 항상 그렇게 잘하고 탁월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아이가 먼저 바뀌기를 기대하고, 심지어 그 아이를 고치기 위해 야단을 치기도 하고 아이와 싸우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을 탓하는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하게 우리는 아이들을 탓하는 잘못을 행합니다. ‘야, 내가 안 해준 게 뭐가 있냐? 엄마 아빠 때는 이런 것도 없었고 저런 것도 없었다’라는 말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쉽게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은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문제와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 정도는 아시게 된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그 아이를 보면서 나도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되고, 그것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서 아이와 함께 그 문제를 같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가정 내에서 남편과 아내, 아이들과의 문제들, 그리고 교회에서 성도들 간, 그리고 많은 교회 내의 사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어려움과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 모든 일에 무엇으로 나가야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잊고 있었구나,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부모님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원했었고, 그래서 자신의 아이도 도달하기를 원하는 그 자리에 자기의 분신인 자식들이 가기를 원하는 부모의 탐욕이 그런 일들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은 포기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탐욕이 문제이니까 탐욕만 잘라내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모든 욕심을 버리고 아이를 그냥 순수하게 대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제 정말 하나님을 찾아야 되고 하나님을 갈망해야 되며, 지금 나에게 세상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화덕이 불붙고 있었고 세상의 많은 땔감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욕심들이 타오르고 있었고 그것들이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 같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생각되고, 어떤 때는 주의 말씀을 위해서 온 힘을 다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사실은 나는 뒷문으로는 끊임없이 세상을 향한 내 욕심을 불태우고 있었고 화덕을 뜨겁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신앙이 좋고 기도에 열심이고 전심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의 입과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상하게 하고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 나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화덕이 뜨거워지는 과정을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화덕을 돌아보라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이 전하는 이 경고를 쉽게 지나치지 마시고 우리의 화덕을 다시 한번 깊이 들여다보시기를 권면합니다.
‘아, 내가 지금 태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태우고 있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것들로 달구어지는 화덕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분, 이 하나님의 경고가 가장 두려운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저입니다. 제가 가진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저의 화덕은 항상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까, 그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니까, 말씀과 가까이 있으니까 내 화덕은 당연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뒷문이 활짝 열려 있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미움이 들어오고, 어느새 교만이 들어오고, 어떤 사이에 나 자신을 높이는 마음이 들어왔는지도 모른 채, 그 사이에 내 화덕은 뜨거워져 있고, 상처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한마디 말은 어떤 이들에게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도 물론 소중한 말씀이 되기를 바라지만, 저나 말씀을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다음 비유: 뒤집지 않은 전병
본문이 보여주는 두 번째 비유는 뒤집지 않은 전병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고 가리키는 바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화덕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뒤집지 않은 전병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잠깐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섬기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지금 이방인과 섞여 있기에 너희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
여기서 이방인과 섞여 있다는 말은 그들이 이방인과 결혼 관계를 맺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이 우상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우상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신을 섬긴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더 많이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할까요? 정성껏 예배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찬송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러한 열심이 여러분의 신앙의 흔적이나 표지, 혹은 여러분의 신앙을 결정적으로 알 수 있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뒤집지 않은 전병으로 비유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으로 표현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시겠지만, 진짜 중요한 말은 이겁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부자인 줄 아는데 그러나 가난하고 헐벗었다.’
여러분, 호세아서는 선지서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불편한 말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항상 이것을 우리들에게 전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것과 싸울 수 있으며, 그것들을 떠나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다른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화덕을 다시 한번 살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그 화덕 속에 태우고 있는가? 지난 한 주 동안 내가 내 인생을 위하여 태운 것이 무엇인가? 내가 갖다 집어넣은 나의 땔감들이 무엇인가? 나의 분노와 나의 불만족과 나의 두려움과 나 자신을 향한 연민뿐이던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가려고 하고, 주님의 은혜에 가까이 가려고 하며, 이 모든 것 속에서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며, 이 모든 것 속에서도 내가 의지할 분이 있으며, 그 모든 것 속에서도 내 눈물을 닦아주는 분이 계시며, 그 어떤 것 속에서도 그 분노와 아픔과 나의 상처 속에서도 나를 싸매시며 나를 부르시며, 나와 함께 그 불 속으로 같이 들어가셔서, 나와 함께 그 모든 것을 태우시는 그 그리스도가 나의 땔감인지를, 나의 인생이 주 안에 있는 나의 인생이 진정 나의 땔감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 대하여 참된 위로와 진정한 기쁨이 이 한 주간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지금 무엇을 찾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우리의 인생 속에서 너무나 쉽게 우리는 그저 한 번의 실수인 것처럼, 그렇게 내가 말한 것은 내 본뜻이 아니라고 그저 그렇게 넘어가려고 하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니,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 죄가 저를 찾게 해 주십시오. 제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십시오.
그리하여 그 죄를 주님 앞에 진정 깨닫고 주님께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고, 그 은혜 속에서 다시 힘을 얻게 도와주시옵소서. 어찌하여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이 어찌하여 비틀릴 수 있으며, 어찌 기쁨을 잃을 수 있으며, 어찌 우리가 고통 속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우리가 어찌 고난으로 끝날 수 있겠습니까? 환난으로 끝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환난 중에 즐거워하며,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라면, 주여 저희를 다시 돌아보게 하사 우리의 화덕이 무엇으로 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호세아서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호세아-12-비둘기와 활 (0) | 2025.11.07 |
|---|---|
| 호세아-11 – 설익은 전병 (0) | 2025.11.04 |
| 호세아-9- 어찌하면 좋겠느냐 (0) | 2025.10.19 |
| 호세아-8-그의 앞에서 살리라 (0) | 2025.09.30 |
| 호세아-7-참진단 오처방 (1) | 2025.09.2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