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7 8절로부터 16절까지입니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는도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그들이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회중에 들려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아멘.

 

선지서 설교의 두려움

선지서를 강론하는 설교자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점이 무엇인지 짐작하십니까? 제가 선지서들을 주일 강해 설교 본문으로 택할 , 마음을 가장 불안하게 했던 것은, 호세아 강론이 모두 끝난 후에도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끝내 회개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였습니다.

 

호세아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너희가 회개하라’는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설교 시리즈를 완주하고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깊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이 회개에 이를 때까지 요엘, 아모스 등과 같은 선지서를 끝없이 이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이스라엘처럼 말라기까지 강론을 계속해야 하는 것일까요?

 

뜨거운 화덕과 뒤집지 않은 전병

이스라엘은 부유해질수록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더욱 심각하게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으로 병들고 썩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치료가 절실히 필요함을 아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난주에 다룬 것처럼 화덕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불길이 타올라 화덕이 충분히 달아 있었기에, 빵은 불과 2~3 만에 순식간에 구워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이 되는 화덕을 살펴보는 대신, 구워진 빵만을 바라봅니다. 이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서든, 신앙적인 문제에서든, 그리고 교회의 상황에서든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구워진 빵만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빵이 너무 타버렸는지, 혹은 제대로 익지 않았는지를 살피는 집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빵이 구워지기 위해 오랫동안 화덕이 탔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화덕에 엄청난 양의 땔감을 넣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 불신앙, 미움, 시기 등이 끊임없이 땔감으로 사용되었던 것이죠.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질문을 품게 됩니다. 도대체 우리는 그런 부정적인 요소들을 계속해서 화덕에 태울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좋은 땔감도 많은데, 하필이면 우리는 분노나 미움으로 우리 마음속의 화덕을 끊임없이 지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그것 외에는 다른 땔감을 택할 없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은 아닐지라도, 오늘 본문은 지난주의 주제에서 걸음 나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뜨거운 화덕일 뿐만 아니라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시간에는 바로 ‘뒤집지 않은 떡’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영적 의미에 대해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전병’ 혹은 ‘떡’으로 번역된 음식은 우리말로 이해하면 훨씬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음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떡과는 달리, 전처럼 얇게 펴서 뒤집어 굽는 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뒤집지 않은 떡은 윗부분은 익지 않은 채로 남고, 아랫부분은 새까맣게 타서 먹을 없게 됩니다. 쉽게 말해 설익은 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를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일컫습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의 의미: 혼합과 우상숭배

본문만으로도 비유가 설명하는 바를 충분히 짐작할 있습니다. 뒤집지 않았다는 것과 전병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상상할 있습니다. 본문은 오늘 구절을 통해 사실을 처음부터 아주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8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 혼합되니 그는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그렇다면 ‘뒤집지 않은 전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말씀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 가운데 섞여 있는 모습이, 마치 뒤집지 않은 전병처럼 겉은 익지 않았고 속은 완전히 설익은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싫어하셨던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 사이의 혼인 문제를 지적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제로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호세아서가 다루는 것은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입니다. 고멜이 계속해서 집을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고멜이 다른 남자에게 가는 행위는 단순한 사람과의 결합이 아니라, 돈을 주고 다른 남자에게 복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이들이 상징하는 바를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고멜이 다른 남편에게 가서 돈을 주고 섬기는 남편은 누구일까요? 바로 우상입니다.

 

결국 호세아서의 중심 주제는 혼인이나 민족 간의 결합이 아니라, 우상 숭배와 영적 배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문제의 근본은 바로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자기를 위한 , 우상 숭배의 땔감

그리고 바로 우상 숭배가 우리가 잘못된 땔감을 계속해서 화덕에 태우는가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좋은 것을 제쳐두고, 여전히 마음속 분노를 태우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우리 자신조차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란 바로 자신을 위한 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신을 만든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지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신을 위해 부른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위한 신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를 위한 것이니, 이것도 시도해 보고 저것도 시도해 보고, 걸리면 되고, 혹시 걸리면 다른 신을 찾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어떤 신이든, 소원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위한 신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만족시키는 땔감을 찾게 됩니다. 나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것이 미움이고, 욕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질투와 시기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태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을 사랑으로 이겨내고 은혜로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반면,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순간적으로 마음을 해소시켜주기 때문에 쉽고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순간에는 마음이 얼마나 무너지는지조차 깨닫지 못한 행동합니다. 대부분은 나중에 후회합니다. 그러나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순간적으로는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기 위한 바른 땔감을 찾지 않습니다.

 

신앙의 땔감: 사랑, 겸손, 인내

예를 들어, 우리는 “주님, 저를 주님의 형상으로 만드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정작 형상을 빚기 위해 깎아내야 하고, 연단을 위해 속에 넣어지더라도 그대로 주님께 맡기겠다는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반면, 속에 들어간 후에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제가 여기서 견딜 없습니다. 빨리 건져주십시오”라고 간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뜻대로 저를 빚으시기 위해 고난의 길에 넣어주십시오. 감사함으로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땔감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진리, 친절, 겸손, 인내 같은 덕목들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우리와 친숙한 것은 오히려 분노, 미움, 질투, 욕심입니다. 미움은 사랑보다 훨씬 쉽고, 우리의 본성에 가까운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길은 바로 사랑, 인내, 겸손과 같은 땔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눈앞에 당장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에서는 나의 감정과 욕심, 시기, 혹은 자랑을 만족시키는 것이 쉽고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가까운 땔감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한 ' 섬기는 교회

자신을 위한 신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가 타락했다고 비판하고, 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모습을 잃어간다고 염려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무섭지도 않느냐”고 묻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저토록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할 있는가? 하고 의아해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이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상인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 이름만 하나님이라고 붙여놓은 신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있는 신이니까요.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경외와 거룩함이 없고, 전체를 주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의식도 희미합니다. 자신을 위한 신은 편의를 봐주는 신입니다. 힘들면 “오냐, 오냐” 해주고, 간섭은 하지 않으며, 그저 빨리 숨겨주고 유산만 물려주면 되는 신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조차 뻔뻔스럽고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을 서슴없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잘못된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삶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들은 때로 양심을 통해, 때로 말씀을 통해, 때로 환경과 주변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간섭하시고 우리를 바르게 세우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진정한 증거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거나 경험하지 못한다면, 바로 지점이 우리가 안타까워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문제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예배와 기도의 문제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 “아, 저들은 이제 기도도 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으며, 자기 마음대로 사는구나”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호세아가 지적하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뜻도 아니고,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심지어 정성껏 예배하지 않았다거나,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배했고, 기도했으며, 말씀을 공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정말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복음을 접할 때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정성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진심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진심이나 정성으로 우리 자신을 증명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종교’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의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걷는 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정성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심이 우리를 구원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단 집단의 사례를 보더라도, 그들에게 진심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정성스럽고 진심으로 자신들의 교주를 믿고 따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심의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진리 안에 있을 , 진리가 여러분을 어떻게 자유롭게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심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뒤집어지지 않은 떡의 위험성

결국 우리가 아무리 진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임한다 해도, 끊임없이 자기 중심에 머물러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예배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호세아가 지적한 “뒤집어지지 않은 떡”입니다. 한쪽은 타고 다른 한쪽은 설익은, 겉보기에는 완성된 듯하지만 속은 여전히 익지 않은 떡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이 가장 거룩한 형태로 나타날 있습니다. 경건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가장 거룩한 이름으로, 세상에서 가장 뜨겁게 자기 중심의 예배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빠지기 쉬운 가장 무서운 함정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것을 드리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배를 드리고 있을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헌금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을 읽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모든 행위는 분명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명하는 증거가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성경에 아주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은,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이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가 쓸모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마음은 나의 것이 아니며, 힘과 능력으로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없고, 공로가 아닌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나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이며, 주님 없이는 없는 자입니다. 바로 마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

여러분, 이번 주에도 “나는 하나님께 왔고, 예배도 드렸으며, 출석부에 도장도 찍었으니, 신자로서 가지 책임은 했다”라고 생각하는 신앙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참으로 가난한 신앙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아가는 마음이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주님, 모든 삶이 주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고 무너지는 저를 지금도 붙잡아 주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온전케 하시며, 주님의 사랑으로 붙들어 주십시오.

 

여러분, 바로 마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알기에 우리는 기뻐하며 찬양하고, 은혜를 알기에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자리에 우리가 가져야 마음은 바로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예배를 드리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적인 삶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돌이키지 않고, 한쪽 방향만 계속 태우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상: 세상의 가치

우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배 대상이나 신적인 존재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가정에는 특별히 신상을 모시거나 그것을 섬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우상이 훨씬 위험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사실 우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가치가, 내가 주님을 알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확신과 나의 영원한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 속에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바로 순간, 여러분은 사실 가장 세속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우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장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가장 세속적인 상태에 놓일 있습니다. 새벽 기도를 드리고 집에 돌아가면서 부부가 심하게 다투는 일이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연약함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내가 죄인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내가 최고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말을 듣지 않느냐!”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세상적 가치가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 가치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혹은 가치에 유혹당하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부른 이웃과의 다툼

제가 가정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은 담을 마주한 이웃이었습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사 와서 친한 친구가 되었고, 자녀들도 같은 또래의 중학생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들끼리 아주 친밀했습니다. 아이가 반에서 37등을 하면 옆집 아이는 38, 시험 점수 차이가 60점과 59점처럼 비슷했기 때문에, 부모는 서로를 위로하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아이가 갑자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하더니 반에서 10등을 했습니다. 옆집 어머니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성적표를 들고 와서 서로 기뻐하던 순간부터 집의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10등에서 5, 그리고 마침내 1등까지 올라갔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얘기만 했습니다. 예전엔 “당신 아들이나 우리 아들이나 언제 사람 될까” 하며 웃던 사이가, 이제 이쪽 어머니는 매일 “우리 애가 어제 1시까지 공부하더라” 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어머니는 속상했고, 점점 마음속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칭찬하던 사이가 결국 서로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사이에는 아보카도 나무가 있었는데, 가지가 양쪽으로 뻗어 매년 열매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어머니가 ‘얄미워서 복수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아보카도 나무 가지를 잘라버렸습니다. 자기 쪽으로 넘어오는 가지를 몽땅 잘라내며, “너희에게는 준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옆집 사람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속이 좁을 있나 싶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수도관 문제로 또다시 싸움이 붙었습니다. 상대 집의 수도관이 자기 집을 통해서 들어간다는 이유로 “절대 용납할 없다”며 격렬히 맞섰고, 결국 둘은 원수 사이가 되었습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송까지 갔고, 멈추지 않아 끝내 대법원까지 사건이었습니다. 변호사 비용만 엄청나게 들었을 것입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보카도 주인 어머니는 너무 힘들고 답답해 기도하러 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가려고 시동을 걸어 나오는데, 마침 옆집 어머니도 성경책을 끼고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사람 모두 열심히 교회 다니던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경까지 왔을까요?

 

제가 이야기를 각색한 부분도 있지만, 수도관 때문에 대법원까지 것은 실화입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변호사비가 35 파운드가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상황이 어처구니없지만,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가장 거룩해야 하나님의 백성도 자기 아이가 남의 아이보다 잘되는 것을 아파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가치입니다.

 

남이 조금 나누어주고 같이 먹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 작은 성공을 보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모든 것이 미움이라는 땔감이 되어 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서로를 태워 서로를 망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와 백발: 힘을 잃고도 알지 못함

여러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우상들과 싸우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예수님을 믿고, 기쁨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고,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제자 훈련을 마쳤다고 해서 완성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끊임없이 주님이 누구신지를 고민하며, 우리의 신앙이 결코 완성되지 않았고 앞으로 주님께 나아갈 길이 너무나 길고 멀다는 것을 매일 깨닫는 삶입니다. 매일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기쁨을 누리면서도, 돌이키고, 돌이키고, 돌이켜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단번에 변화되고, 단번에 기뻐하며, 단번에 찬양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단발적인 경험은 신앙 안에서 사실상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성령의 은사와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며, 하늘의 빛을 보고 엄청난 일들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신앙을 논할 , 단번에 깨달음을 얻고 “드디어 알았습니다. 이제 어제와는 다른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한 변화일 있으나, 아직 모든 것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비유로 말하자면, 뒤집기는 했지만 0.001 정도만 뒤집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뒤집어야 하는 , 우상과 맞서 싸우며 끊임없이 돌이켜야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결단하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택하여 살아야겠다”라고 순간 선택해야 하는 영적인 시간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호세아서의 백발과 연결할 있습니다. 본문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힘을 삼켰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백발이 무성함에도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백발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힘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함을 나타냅니다. ,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침체된 상태, 세월만 흘러갈 돌이킴이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잃어버린 , 삼손의 교훈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힘을 삼켜버렸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진정한 힘은 무엇입니까? 영토나 성전, 혹은 군사력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먹어버렸다”는 말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 성전이 함락되거나 땅이 빼앗긴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보다는 훨씬 중요한 교훈이 삼손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삼손에게 힘이 있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삼손의 힘이 머리카락에서 나온다고 배웠으나, 이는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머리카락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에게서 나오는 능력이 힘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힘이 머리카락에서 난다고 생각하도록 스스로를 속이면, 삼손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힘을 주신다고 믿고 살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결국 머리를 잘려서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기 때문에 힘을 잃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삼손의 머리가 조금 자랐다는 것을, 우리가 “머리가 조금 자랐으니까 이제 힘이 있구나” 하고 생각해서는 됩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삼손이 살아온 삶에서 블레셋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이고 기둥을 무너뜨리려면 훨씬 많이 자라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머리가 정도 자랐을 ,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힘임을 깨달아 마지막으로 기도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 주께서 저에게 마지막 힘을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여러분, 삼손 이야기는 지금 호세아가 말하는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합니다. 호세아는 선포합니다. “너희는 너희 힘을 잃고도 알지 못한다. 너희는 백발이 되어도 모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힘의 근거로 살고 있는지를 잊는다면, 우리는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과 같습니다. 익지 않으며, 맛이 없고, 결국 먹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 모름과 돌이키지 않음

여러분, 우리의 속에서 힘이 근거가 되고,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자꾸 잊어버리며,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조차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힘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찬양할 때만 하나님이십니다. 외의 시간에는 우리의 힘이 의사 선생님이 되고, 약봉지가 되고, 돈다발이 되고, 경력이 되고, 우리가 세상에서 갖고 싶은 자리나 성공하고 싶은 위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힘을 잃어버린 삼손과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법궤를 가지고 블레셋과 싸웠던 이스라엘을 떠올려 보십시오. 법궤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비로소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법궤를 가지고 나가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패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법궤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는 힘을 잃어버린 삼손처럼, 이미 힘을 잃었는데도 사실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처럼 사는 것입니다. 뒤집어지지 않은 전처럼, 익지 않고 영적으로 맛이 없는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영적 침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조차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힘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내가 엉뚱한 것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상황을 극복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침체입니다.

 

영적 침체가 반드시 고난이나 환난, 아픔, 어려움, 직장 문제, 시험, 기쁨 없음 같은 외적인 상황 때문에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런 고난과 어려움들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고 완성하는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는 순간은 하나, 그것이 영적 침체라는 것을 모르고,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으며, 뒤집지 않는 , 바로 이것이 영적 침체의 핵심입니다.

 

교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문제는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고, 다들 겪고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인이 외부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 때문일 때도 있고, 여러 사람 때문일 때도 있으며, 어떤 때는 자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인을 우리가 이미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상담을 하다 보면 대부분 답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답을 목사가 고개 끄덕여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아, 나랑 똑같이 생각하시는구나.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겁니다. 대개 답을 알고, 심지어 본인이 답까지 이야기하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와서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속마음을 토로하다가, 한참 이야기한 뒤에 “그렇죠, 목사님. 그냥 제가 기도해야죠, 참고 살아야죠”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가버립니다.

 

왔냐고요? 그게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답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영적 침체 상태에 머물러 있느냐 하면,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회개하기는 싫고, 돌이키지 않으려 하며, 뒤집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뒤집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법궤를 들고 나가는 이스라엘처럼, 힘을 잃어버린 삼손처럼 세상 속에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신앙 안에 있는 것처럼 막연히 생각하지만, 사실은 힘을 잃은 상태의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뒤집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어쩔 없습니다. 한쪽 불만 계속 타오르게 되므로, 한쪽만 수밖에 없고, 그러면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데도 계속 뜨거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뒤집지 않은 전병, 설익은 떡의 마지막 특징은 바로 이스라엘의 교만이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단순히 잘난 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자기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를 알기에 누군가를 나보다 낮게 보거나, 누군가를 시기하게 , 그때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교만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 이것이 바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까,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자신을 의지합니다. 그래서 뒤집지 않은 전병이 되고, 설익은 떡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떡은 떡이니까, “나는 떡이 있다, “나도 신앙이 있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는 익지 않은, 잃은 상태의 떡일 뿐인데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불로 연단한 '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 아는 요한계시록 3장의 구절을 기억해 주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경고하십니다. “네 금은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금이 조금 섞여 있을지는 모르나 아무 쓸모가 없다.

 

물론 여러분의 신앙 고백, 여러분이 믿는 믿음, 모든 것이 완전히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를 있는 , 주님께 기댈 있다고 생각하는 , 그것조차도 얼마나 축복입니까?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지금 돌덩이를 가지고 금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입니다. 돌덩이를 금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나는 이만큼 신앙이 있습니다”라고 내세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제단에 올려 태우고, 녹이고, 연단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여,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이 맞습니다. 주님이 옳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확신이 없는 채로 있는 겁니다. 그저 괴로움과 속상함 속에만 머물러 방법을 찾기 어려워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 깨닫지 못한다면, 돌덩이를 들고 있는 것이니 빨리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옷도 깨끗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더럽고, 눈이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자리에 있을 , 정말 여러분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아니면 돌덩이를 금이라 우기며 있는 것에 불과합니까?

 

하나님을 향해 뒤집으라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내가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잠시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제가 지금 길을 가고 있으니, 조금 도와주세요’라고 간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하여 정확히 뒤집는 ,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뒤집지 않은 떡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떡이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익지도 않았고, 타버릴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길을 찾으려면 주소와 이름이 중요하듯이, 저도 옛날에는 길눈이 너무 어두워서 지도 없이는 집을 찾을 없었습니다. 동서남북을 구분하고 길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운전을 하면서 “서쪽으로 가고 있는 건가,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건가? 고민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GPS 나오면서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길을 몰라도, 표지판을 보지 않아도, GPS 따라가면 됩니다. 운전은 제가 하지만, GPS 모든 길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가기만 하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있습니다.

 

여러분, 설교를 듣고 스스로를 돌아볼 , “내 길이 맞나, 다른 사람은 좋은 길을 가는 아닌가, 내가 배운 것이 충분한가?”와 같은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모든 , 우리의 삶의 , 우리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붙잡으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면 됩니다.

 

여러분, 길이 희미하게 보여서 “다시 지우고, 다시 쓰고, 맞춰볼까? 하는 고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길이 옳은 길이다. 그분을 바라보고, 뒤집으라는 것입니다. 뒤집지 않고, ‘어떻게 하면 태울까, 어떻게 하면 맛있게 익힐까? 아무리 고민해도 소용없습니다. 여러분, 뒤집어야 합니다.

 

바른 : 주님을 붙잡는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여러분이 안다고 생각하는 길이나 주소가 아니라, 주님을 찾고, 주님의 뜻을 구하며, 나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이 나를 굳건히 붙잡으시는 손을 의지하고, 손을 함께 잡고 걷는 바로 , 길이 바른 길이며, 그것이 진짜 주소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길이나,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길이 진짜 길이나 주소가 아닙니다.

 

길이 보이고 희미하게 보여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걷고 있는 자신에게 너무 관심 갖지 마시고,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와 같은 생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직 나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분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분에게 관심을 가질수록 내가 무슨 힘으로 길을 걷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다리만으로는 길을 끝까지 걸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어떤 달란트나 기질로도 길을 완주할 없습니다. 오직 손을 잡고 계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만이, 여러분을 끝까지 함께 걷게 하실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평강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평강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하시고, 저희도 주님의 평강을 깨닫고, 평강의 길을 걸을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뒤집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진정한 떡임을 오늘 함께 떡과 잔을 나누며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