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6장 4절로부터 11절까지 입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아멘.
조지 워싱턴의 고별 연설과 현시대의 무시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미국 상원에는 가장 오래된 전통이 하나 있습니다. 매년 2월마다 상원 의원 중 한 명이 나가 똑같은 연설을 낭독합니다. 45분이나 걸리는 이 긴 연설을 굉장히 오랜 기간 동안 매년 반복하고 있습니다.
1800년대부터 시작된 이 전통은 그 역사가 깊습니다. 이것은 바로 1796년 9월 19일에 있었던 조지 워싱턴의 고별 연설을 매년마다 한 번씩 낭독하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은 두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다시 한번 대통령을 하라는 주위의 권유를 모두 물리치고 고별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연설에는 그의 지혜와 아름다운 작별의 말들, 그리고 매우 귀중한 정치적 성명들이 동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원은 더 이상 이 연설을 낭독하지 않지만, 상원은 여전히 매년마다 모든 상원 위원들 앞에서 이 연설을 읽습니다.
연설의 내용은 여러분과 제가 다 알기에도 벅찰 정도로 방대하며, 놀랄 만한 내용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당 정치가 가진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직업 군대를 만드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한, 헌법은 절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진정한 기초가 종교와 도덕에 있음을 설파했던 시대의 가장 훌륭한 명연설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유명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연설은 지금 현재 미국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연설이기도 합니다. 지금 미국은 도덕적, 종교적 면에서 많은 자유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풍요한 나라에 살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가 옳고 좋은 나라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면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회와 나라에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를 항상 묻게 만드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조지 워싱턴의 연설은 오늘날 가장 무시되는 연설이라고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무시당하는 하나님의 호소: "돌아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호세야서 6장 1절부터 3절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많은 말씀과 설교 가운데 아마 가장 호소력이 짙고 위대한 말씀이며, 여러분이 좋아하는 구절일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오 우리를 치셨으나 싸메어 주실 것이니라. 이틀이면 살리시고 사흘이면 일으키시리라. 그러므로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런데 이 위대한 문장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다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이 애절한 사랑의 호소는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 백성들에게 정말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돌이키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실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이 말씀 안에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가 돌아오면 너희를 치유하고 생명을 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완전히 무시당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탄식: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하나님의 이토록 간절한 말씀을 무시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4절 말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 말씀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느냐’라고 묻는 물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말만 해라, 내가 다 들어줄게!’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와는 완전히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말 너희는 방법이 없구나. 내가 너희를 이토록 사랑하고 아끼고 돌이키고 다시 오라고 이야기하건만, 너희는 어떻게 이렇게 오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너희는 어떤 모습이기에 이토록 나를 거역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호세아는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구나.’
인애(헤세드)의 의미
여기서 ‘인애’라는 말은 상당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도 여러 단어로 번역되는데, 첫째는 ‘인애’입니다. 또 다른 번역으로는 ‘사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변함없는 사랑’(steady love)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또한 ‘헌신’이라는 단어로도 번역됩니다. 언약의 사랑이라 하여 언약과 관련하여 번역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인애라는 말은 변함없이 그 언약을 지키는 사랑을 의미하며, 이는 물론 하나님의 사랑인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쉽게 사라지는 열광과 변명
그런데 그 사랑이 아침 이슬과 같이 해가 뜨면 사라져 버린다고 성경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처음부터 그 ‘인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인애’가 있었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했던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땅 앞에서 모세에게 이렇게 약속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지키겠나이다.’ 그들은 자신 있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의 고백은 억지로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너무나 기뻐서 이야기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흥분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즐거웠고,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구나’라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준행하리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약속들은 아침 이슬처럼 해가 뜨자마자 사라졌습니다. 즉 그들이 다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자마자, 햇볕 아래서 뜨거워지자마자,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겪자마자 그 모든 맹세는 모두 다 사그라지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께 열광하고, 진리를 듣고 흥분했으며, 잠시 동안은 하나님 말씀을 좋아하고 사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처음에는 그들이 말씀을 듣고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그 말씀대로 살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오래지 않아 말라버리더라.’ 그런 모습과 비슷한 것입니다. 해가 나자마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를 수많은 변명들로 채웁니다. ‘하나님, 가나안에 들어가 보니까 저들은 철병거를 가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이깁니까? 그들은 산 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 올라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저들은 키도 크고 아주 힘도 셉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모든 것이 변명으로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나를 의지하여 들어가면 이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한순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아침 이슬 같은 모습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처음으로 주의 말씀과 은혜를 알았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았을 때 얼마나 마음속에 뜨거움이 있었습니까? 그때 ‘말씀을 내가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올해 안으로 성경을 꼭 일독하리라’는 결심도 수도 없이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어떻습니까?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쁘십니까? 한때는 성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을 것처럼 이야기했고, 내 일생을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살 것처럼 다짐했던 우리의 모습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회에 왔는데 여러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일이 너무 많은 겁니다. 내 마음대로 잘 안 되고,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뭔가 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십니까? 결국 여러분은 제자리걸음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리고 그 자리를 변명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뭐든지 다 변명거리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공동체 내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내 마음을 괴롭힌다는 이유로 교회를 섬기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말도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내뱉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 혹은 어떤 때는 교회 일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여러분이 여러분의 환경과 마음,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허락하는 한, 여러분은 모든 핑곗거리 뒤에 숨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진실하다는 그 고백 하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물어보신다면,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어떤 시간이었으며,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내가 보낸 나의 삶의 시간들이 어떠했는지를 대답하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다와 같은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너무나 연약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제 두 번째 문제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인애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는 꾸준하게 하나님을 끝까지 섬기는 삶에 너무나 연약하며, 그 인애(仁愛)라는 것은 너무나 쉽게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제사와 깊은 연관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말로는 '예배'라는 말로 완전히 대체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내용을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유다도 자신이 가지고 올 수 있는 많은 재물들을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사를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쫓아 틀림없이 그대로 수행했습니다. 물론 가끔 그들의 마음이 신실하지 못하여 수준에 맞지 않는 재물을 가져오기도 했으나, 재물을 바치는 순서나 제사를 드리는 순간, 제사장을 통해 거행된 그 모든 형식적인 일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릇'은 참 좋았으나, 그들이 담아야 할 것을 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이것을 받지 않겠다. 이것은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 명령대로, 말씀하신 대로, 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 필수적인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릇은 있었으나 담긴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절기를 미워하시며 너희 성회를 멸시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오늘 본문도 아주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미가 선지자가 말하는 참된 요구
여러분이 이 말씀을 좀 더 풀어서, 그리고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선지자 미가의 말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미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갖다 바쳐볼까?’
그러고 나서 미가는 곧바로 참된 요구를 밝힙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를 쓰고 예배만은 어떻게든 참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귀중한 것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습니다. ‘예배가 망하면 우리 인생도 망한다’는 말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예배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미가의 말씀에는 예배 행위보다 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잘못된 예배 인식의 문제
우리는 종종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예배를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치는 행위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래서 쉽게 이 예배를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든 섬기려는 행위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을까 염려하여 예배의 자리로 오려고 노력합니다. 이는 우리가 처음부터 예배에 관하여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에서 예배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모으시는지를 우리는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리시며, 여러분을 섬기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주시기 위해, 그리고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여러분을 예배로 부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 예배를 우리의 공로로 여기며, 이를 위해 예배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모르셨다면, 이제 여러분은 적어도 오늘 이후로는 정말로 예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미가의 네 가지 요구와 호세아의 두 가지 핵심
미가서의 말씀에서는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정의를 행하라’입니다. 이 정의는 좀 더 풀어 말하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라는 의미, 즉 하나님의 옳은 진리를 따라 살라는 명령입니다.
두 번째는 ‘인자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말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인애(헤세드)와 그분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포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러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 즉 우리가 옳은 것을 배우고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을 깨끗하게 믿고 순수해지고 주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섬기려 애쓸 때 가장 쉽게 나타나는 사탄의 유혹, 바로 교만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보다도 올바르게 찬양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이처럼 무서운 교만이 없습니다. '나는 어떤 교회보다도 더 올바른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듯이 우리는 그러한 교회를 교회로서 살고 싶은 것이지, 우리 중 누구도 그러한 교회를 소유할 수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성 남포 교회'라는 이름은 헛깨비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실체가 없어요. 실체는 여러분이거든요. 여러분이 완전하십니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자랑할 만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저는 올바른 교회입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올바르게 하려고 애쓸수록 가장 큰 유혹에 항상 직면하는 겁니다.
그렇게 애를 쓸수록 우리는 교만해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틀린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것을 분별하여 내가 경계로 삼고,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옳은 길로 인도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좋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마음은 그렇게 쉽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잘난 것을 항상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결국 우리는 쉽게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세 번째가 무엇입니까?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너희를 낮추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연합’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네 가지 미가의 신자에 대한 요구는 오늘 호세아 본문에서는 두 가지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 인애, 곧 변함없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지식과 사랑이 분리될 때의 위험성
미가의 네 가지 요구는 절대로 한 가지만을 강조해서도 안 되며, 서로 분리될 수도 없습니다. 설교 시간에는 본문의 내용에 따라 이 중 하나가 더 강조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심판과 죄가 무엇인지를 강조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요소들은 절대 한 가지 사실로만 이야기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진리가 없는 사랑이 되고, 진리가 없는 사랑은 당연히 잘못된 사랑이 됩니다. 이는 진리가 없는 헌신과 같습니다. 어떤 결과와 같을까요?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열심은 있으나 지식이 없어서 결국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게 되더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참으로 열심히 하고 있으나 지식이 없으면 결국 자기의 영광을 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아닐 것 같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또 반대로 지식은 있는데 인애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차가운 지식이 되고 당연히 교만해집니다.
이러한 현상은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모습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 비슷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녀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식이 없이 감정적인 사랑만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아이는 부모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만 키우려고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모르게 됩니다. 자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으므로, 그 아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 아이에게 있어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어떤 것들로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런 부모들은 그 사랑을 자녀에게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 지식이 없어서 사랑하면서 어떻게 됩니까? 결국 망하게 됩니다.
그 부모는 항상 아이에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가 너한테 못 해준 게 뭐냐? 엄마 아빠 때는 그 전쟁통에 학교에 가고 싶어도 못 갔다. 너는 이렇게 편하게 학교 보내주고, 등록금 내주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러느냐?’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지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잘못하면 그대로 가다가는 자녀들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하시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과 지식이라는 두 가지가 함께하지 않고 분리될 때 우리가 항상 겪게 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둘을 어떻게 한꺼번에 같이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지식과 사랑을 하나로 묶는 영적 예배: 산 제물로 드림
성경은 지식과 사랑의 문제를 해결할 놀라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지식이 있으면서도 인애(사랑)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직면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사랑도 열심히 실천해야지'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배운 것만큼 우리가 행하자'라는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평생 이렇게 해보려 했지만, 그것이 잘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운 것만큼만 살면 우리는 지금 모두 성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대학교까지 나올 필요도 없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만 제대로 다녀도 '바른 생활' 시간에 다 배우는 아주 기본입니다. 이것만 사람들이 지킨다면 우리는 지금 평화로운 세계에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해 끼치지 말아라. 다른 사람을 생각해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방법이 여러분에게 이것을 완전하게 살아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헌신, 열심, 사랑 이 모든 것조차도 제사로 드려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식, 올바른 교리, 성경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지식 이 모든 것을 거룩한 제사가 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 전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알고 있는 모든 지식, 그리고 마음속에 감추었던 모든 눈물과 아픔까지,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들까지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아름다운 성경의 표현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말하는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몸'이라고 번역되는 단어가 여러 개 있지만, 이 구절의 경우에는 여러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여러분의 중심, 그 모든 것을 포함하여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지식도 그 모든 것도 주님께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 번제의 제물로 드림으로 그 모든 제물을 태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 지식을 태워야 합니다. 그것을 내 자랑으로 남겨둘 수가 없습니다. 나의 것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원천적으로 교만할 수 없는 그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죄와 여러분의 연약함조차도 같이 번제단에 올려놓게 됩니다. 같이 태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경험
여러분은 예배의 자리로 올 때에 무엇을 하기 위해 오십니까? 혹시 오늘도 좋은 찬양을 하기 위해 오셨습니까? 아니면 그럴듯한 말씀 하나, 그리고 내가 일주일 동안 살 수 있는 감동적인 말 한마디를 건지러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죽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 순서에 왜 죄의 고백이 있으며, 왜 사죄의 확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배 때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죽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나의 죄와 나의 모든 가진 것들, 내가 똑똑하다고 여겼던 나의 삶,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들, 시간만 되면 잘난 척하고 싶은 나의 인생, 그리고 시간만 되면 좌절하고 싶은 나의 아픔,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 내어주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왜 여기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산 제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재물이시니 그 재물 안에서 같이 태워 불사르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왜 온다고요?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배의 성공은 부활의 깨달음
여러분이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여러분의 감정이나 지식, 혹은 알고 있는 것을 조금 느끼면서 ‘오늘은 예배를 제대로 했다’라고 느끼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배의 많은 순간들 동안, 아무리 우리가 열심을 내어도 어떤 때는 정신을 잃을 때도 있고, 일주일간의 피곤 때문에 잠깐잠깐 졸 수도 있으며, 어떤 때는 찬양에 참여하지 못하고 찬양을 구경할 그런 일들도 생깁니다. 모두 다 분명 우리가 고쳐야 할 부분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예배가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예배가 망했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산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찬양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 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부활의 기쁨이 있으며, 부활의 생명이 있으며, 부활이 주는 놀라운 위로와 은혜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곳에서 예배를 통하여 부활하여 나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죽은 자로 들어오지만, 산 자가 되어 주님과 함께 나아갑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가 부활하여 나아가고 있는데, 무엇이 여러분을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이 여러분을 좌절시키고, 무엇이 여러분을 흔들고, 무엇이 여러분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배에 처음에는 우거지상을 하시더라도, 예배 시작에서 회중 기도를 할 때는 ‘일주일 동안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우리가 한탄하듯 올 수 있지만, 주께서 마지막에 여러분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에는 ‘내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서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 죽음의 자리를 벗어나게 되며,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 땅을 살아내리라’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내 생명이 마지막 되는 그 순간까지 나는 이 예배를 통하여 또다시 한 번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고백이 입에서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예배이며 영적인 예배입니다.
찬송과 선행, 나눔이 곧 제사
그래서 히브리서 13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을 제사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을 제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찬송만이 제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찬송이 제사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입술의 열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모든 인생을 사는 것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우리의 삶의 제사, 곧 진정한 영적인 예배에 있어서도 중요한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저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를 격려하며 그를 칭찬하고 그의 모습을 기쁘게 하고, 그를 마음속에서 사랑하는 언어를 구사하게 되면 그것이 비로소 제사가 됩니다. 나의 영적 예배인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선을 행하고 서로를 돌봐주고 서로를 생각하고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이 모든 일들을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찬송하고, 말씀 읽고, 손 들고 기도하는 것만 제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하여 나의 것을 내어놓을 줄 알고 그를 기억하여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또 그에게 나의 삶과 시간을 내어주는 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예배에 참되고 진리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주님을 높이는 마음으로 와 계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의 형제와 자매에게,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에게 어떻게 대하며 살고 계십니까?
문제의 뿌리: 하나님께 대한 반역
우리가 예배에 관하여 쉽게 빠지기 쉬운 위험은 '예배 순서는 이러해야 한다' 혹은 ‘예배에서는 이런 순서는 꼭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관습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찬양곡이 복음 성가인지 찬송가인지를 문제 삼아 복음성가를 부르면 마치 우리가 잘못하고 실수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조그마한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잘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 실력이 없어 이것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자책하며 무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교회의 일이건 집안의 일이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풍파가 조금만 닥치면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는 우리는 속상한 마음에 빠져 스스로를 자책하며 그런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하기도 합니다. ‘주님, 저는 너무 연약해서 지금 속이 너무 상하네요. 기도도 안 나와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와 갈등이 심해지면 ‘내가 너무 아이를 내 입맛대로 키우는 게 아닌가,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힘든 일이 생기면 ‘아, 내가 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구나, 나의 말을 좀 더 상냥하고 친절하게 고쳐야지’라고 결심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들이고, 우리는 그러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은 그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아프게 이 문제들을 지적하십니다.
‘아니, 너희의 진짜 문제는 너희의 제사의 문제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너희의 예배의 문제이다. 영적 예배의 문제이다.' 훨씬 깊은 사실을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오해가 생겨서 오해만 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심으로 이 일을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내가 마음을 다하여 많은 시간을 사용하여 진심으로 이 문제에 매달리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마음속으로는 비록 그렇게 노력하여도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계실 것이며, 그러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 깊이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지금 이스라엘과 유다가 딴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아담의 언약을 어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아담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조금은 하나님께서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일이 아담에게 무슨 상관이며, 아담의 일이 또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요? 이때 살던 사람은 아담이 어느 시대 사람이었는지도 몰랐을 것이며, 이는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아담의 언약을 언제 거역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담의 언약을 깨뜨렸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했다’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의 잘못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반역죄에 걸린다고 생각하며 억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멈췄을 때, 그 대가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섭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도 진실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아내를 사랑하는 일을 멈추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너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면 너는 나를 반역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남편을 존중하지 않고 여러분 마음대로,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세상의 지식으로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반역하고 있다.’ 자녀를 노엽게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는 나의 말을 업신여기고 있으며 나에게 반역하고 있다. 네가 드리는 너의 영적 예배는, 너의 제사들은 너무나 가증스럽구나.’
죄의 심각성: 손에 피가 가득하도다
성도의 삶에서 우리는 죄를 용서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가끔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죄를 너무 크게 생각해서 죄책감에 빠져 살듯이, 죄만 강조하면서 죄를 옆에 끼고 살듯이 하는 것도 신자로서 잘못된 일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하지, 그냥 죄만 계속 얘기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구원이 없고 부활이 없는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오히려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죄를 조금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심으로 노력도 하지 않고 그 오해를 풀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서도, 이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 이길 수 있고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제대로 나서기만 하면 된다고, 금방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치거나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고 있다거나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멈출 때, 우리가 미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가 시기하고 질투할 때, 우리가 남을 헐뜯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조금이라도 멸시하고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우리의 입 밖에 내며 우리의 마음속으로 죄를 짓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제사장도 백성도 누구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성경의 표현대로 이야기할까요?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도다’입니다. 누구를 해하려고 칼을 들지도, 피를 손에 묻힌 적도 없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네가 형제를 향하여 바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형제를 업수이 여긴다면 너는 살인한 것이다. 너의 손에 피가 가득한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너무나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피가 가득한 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으며, 그래서 이런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가증한 것이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우리의 코앞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아버지를 반역했고 아버지를 멸시했다’라고 말합니다. ‘너는 이웃의 피를 흘렸으며, 너의 남편과 아내의 피로 너희의 손은 지금 가득하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올바른 길을 걷지 않고 불의를 눈감아주고, 그리고 마치 모든 것이 잘될 것처럼,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마치 아무 책임이 없는 것처럼, 나는 그저 천국 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그 모든 태도에 대해서 성경은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정의를 폭포수처럼 흘리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너희의 손은 지금 피로 가득하구나. 너희의 제사를 내가 어찌 받을 수 있단 말인가.’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
그래서 우리는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도와주옵소서.’ 우리는 우리가 이것들을 다 해결할 실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혹은 우리는 이것들을 그래도 우리 방식대로 어느 정도는 풀어가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좀 더 노력하면 뭔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나 많이 보아오셨습니다. 조그만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는데 그것들이 얼마나 눈덩이처럼 커져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주고 있으며 줄 것인지를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그 문제들이 우리 사이에 언제나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도 우리의 본성으로도 압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유일한 해결책: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자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도대체 너희를 어떻게 하랴." 우리가 만일 오늘 이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을 진정으로 대하며 우리 자신을 보았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고, 호세아를 통해 주신 설교로 다시 가야 합니다. 반드시 가야만 합니다.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둘째 날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는, 그리고 그 첫 열매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영적 예배의 회복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우리의 마음이 심히 상했으나, 우리의 마음이 소망이 없을 정도로 너무나 힘들고 피곤하지만 도로 낫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는 우리 사이에 분열이 있어 보이고, 마음이 안 맞는 일이 생기는 것 같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더 잘 해보려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말다툼이 일어나고, 사랑했던 자녀들이 오히려 말을 듣지 않아 마음의 상처가 되고 어려움이 생기는 그 순간에, 그저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더 잘해주면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영적 예배에서 잘못하고 실패하고 있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나의 모든 것을 드리지 않는구나. 정말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함께 드리지 않고 있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인생 전체를 드리지 않고 있구나. 여전히 그 자식은 내 것이고, 여전히 내 마음은 내 것이고, 여전히 내 물건들과 소유들도 모두 나의 것이구나’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돌아가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오, 우리를 살리시며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나님의 간절한 초청
여러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냐고요? ‘어찌 할까, 내가 어찌 할까’ 그리고는 어떻게 하시나요?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 내가 너를 싸매어 주리라. 내가 너의 마음에 비가 되어 너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진정 떠오르는 해가 되어, 너의 마음에 빛이 되어 너의 어둠을 없애줄 것이다. 내가 잔치를 베풀 것이고, 너에게 다시 가락지를 끼워줄 것이고, 너를 나의 아들이라고 안고 울 것이며, 너를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주고, 내가 너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너야말로 나의 사랑이며, 너는 나의 기쁨이다. 그러니 돌아오라, 회개하라. 돌아만 오라, 돌이켜 오라.’
기도합시다.
주님,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아침 이슬 같은 존재인지도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그토록 떠들썩하며 마치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릴 것 같았던 그들의 음성들이 다 사라지고 도망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왔으니까요.
저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희는 예배를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안심입니까? 어찌 우리가 안심할 수 있습니까?
진정한 영적 예배는 우리에게서 떠나가 버렸는데, 우리의 마음은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가득 차 버렸는데,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으로 가득 차 버렸는데, 주님, 아내를 사랑하며 남편을 존중하기보다, 자녀를 진정 말씀으로 키우기보다, 우리 자신이 이 세상에 이토록 물들어 버렸는데, 주님, 저희가 어찌 돌아가지 아니하고, 그저 수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바치며 문제가 없는 듯이 살고 있는 저희를 보시옵소서. 주여, 용서하시옵소서.
주여, 저희로 하여금 주님께 우리를 간절히 부르시는 그 말씀, "내가 너를 다시 낫게 할 것이며, 다시 싸매어 줄 것이며, 내가 너의 생명이 될 것이며, 너를 살릴 것이며,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시겠다는" 그 주님 앞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도 나의 기쁨이 되게 해 주시고, 주님도 나의 사랑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주께서 나에게 고백하시고 호소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저의 심령에도 부딪히며, 나의 마음에 정말 모처럼 깊이 박히게 하시고, 그 주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뿌리가 되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주여, 주께로 돌이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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