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야서 6 1절로부터 3절 까지 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아멘.

 

황금기 이스라엘의 죄와 교만

호세아 선지자가 선지자 노릇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참 무겁고 힘든 말씀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신앙적으로는 부패하고 있었지만, 가장 황금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 왕국은 부유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되자 대부분 그렇듯이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나 혹은 자기 마음대로 남을 속이는 일조차도, 자기의 부와 소유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어렵지 않게 행했던 시절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그때 선포되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구절을 이해하지 않으면 이 구절에 대한 내용들은 굉장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룰 호세아서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좋아하고 많은 분들이 아는 구절이지만, 그렇게 아주 만만한 구절은 아닙니다.

 

죄의 본질: 구원의 목적을 망각함

호세아서 5장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북 이스라엘 죄의 근본적인 부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승리했었고, 그들은 강국이었으며 심지어 그 주변 국가들에게 조공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특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무엇 때문에 죄에 빠져 있으며 무엇이 그 죄의 본질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누리는 복이나 그들의 승리가 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왜 그들을 구원하였는가를 잊었던 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했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왜 구원을 받았는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 복을 주시는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 정도라도 건강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시간들을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왜 내 인생에 혹은 영원한 나의 인생에 무엇을 준비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이러한 것에 대한 의식이 없을 때 우리는 거룩한 삶을 바라볼 이유가 없어집니다. 내가 가진 것,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 혹은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성공이라고 여기는 것에 우리의 눈이 당연히 쏠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것이고, 둘을 가지면 셋을 갖고 싶고, 점점 편안해지기 때문에 그것이 성공으로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앙에 갇힌 가난한 기독교

그래서 우리는 사실상 자신이 죄에 빠지면서도 죄에 빠지고 있는 것도 모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기보다는 우리는 자기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도 항상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그것을 우려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신앙이 내 힘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해왔던 교회에서의 봉사가 내 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옛날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던 응답들이 내 인생과 내 삶에서 항상 얘기하는 간증의 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나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열매를 어떻게 맺느냐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의 모습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할 밖에는 다른 것이 별로 없는 겁니다. 기독교가 얼마나 가난해졌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건물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곳에 선교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돈과 예산을 가지고 있는지가 심지어 일반 신문에서조차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이는 정말 부끄러워할 이야기입니다. 만약 기독교가, 혹은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그런 것들로 설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엉뚱하고 전혀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로 하나님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은 가장 가난한 일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어떻게 기독교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뭐라고 얘기합니까? “너 자신이 너의 믿음에 올무가 되고 그물이 되었다.”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또 다른 면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과 승리를 누리는 것도 좋고, 또 그것을 감사하는 것도 좋은데, 그것을 하느라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손에 들려 있는 것에만 우리의 관심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한은 결국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만족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족을 채우는 유일한 분, 여호와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셔서 이제까지 인생을 사시면서 ‘아, 내가 그래도 참 만족스럽게 이 시간을 보냈다’라는 시간들이 있으실 겁니다. ',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라는 시간이 있겠죠.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날 때는 어땠을까요? 그때는 별로 만족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만족을 구하려 한다면 여러분이 만족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구멍을 채울 수가 없어서 우리는 그것을 평생 원하고 구하게 되며,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사는 동안에는 그 만족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만족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성경은 단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세상에서 힘이 없는 신앙의 현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정말로 찾지 않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과 이러한 관계를 사모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믿고 있는 이 신앙이라는 것은 정말 세상에서 힘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돈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고요. 여러분의 신앙이 좋다고 누구나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좋다고 해서 여러분의 집이 언제나 모든 일이 그리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이 되는 적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쩌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여러분을 별로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우리에게 이 땅에서 너희가 예수님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세상은 너희의 편이 아닐 때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만일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내 인생에서는 참으로 소중한 분이다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 신앙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만족이 되실 때

, 물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어떤 때는 여러분에게 재물로, 어떤 때는 건강으로, 어떤 때는 여러분에게 그 많은 기쁨과 또 여러분이 소원하는 것들을 조금씩 이뤄 주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필요를 채우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그 필요를 채워서 그것에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로도 영원히 채울 수 없는 하나님이 나의 만족이 되신다는 것을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 이 세상 것들은 잠시 만족을 주지만 또 떠나가는구나. 이런 것들은 나에게 잠시 기쁨을 주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의 영원한 만족은 바로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는 거죠.

 

우리가 나이를 먹고 그리고 인생에 많은 쓴맛과 단맛을 본 다음에야 이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만족함이 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이 ‘아, 내가 무슨 일을 겪든지 어떤 어려움 속에 있든지 믿음이라는 건 정말 위대한 것이구나. 정말 엄청난 은혜이며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징계 속에서 찾는 잘못된 해결책

여러분, 우리는 이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점점 우상으로 채우며,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손에 들려 있는 것만 자꾸 구하니까 우리 마음은 계속 허전해지고, 그 허전한 마음은 다시 우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결국, 하늘의 복보다는 세상의 복을, 고난이나 눈물보다는 승리나 성공을, 겸손과 사랑보다는 교만과 이기심을 당연히 찾게 됩니다. 호세아서는 이를 두고 ‘이스라엘아, 네가 교만해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거나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있는 것만을 바라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징계의 아픔, 그리고 앗수르를 찾는 마음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당연히 징계하십니다. 자식이 엉뚱하고 잘못된 곳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부모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 징계로 인해 우리가 아프고 힘들고 어려움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병과 상처를 보게 됩니다. 아픈 것을 안단 말이죠. 내 상처가 보인단 말이에요. ‘아, 힘들구나. 내가 옛날에 신앙이 좋은 줄 알았는데 이런 문제를 당하고 나니 내 신앙의 현실이 여기까지구나’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라고 자조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아, 아니지, 내가 일어나야지’라고 다짐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힘들 때 비로소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이스라엘과 같은 쪽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문제의 원인을 보기보다는, 사실은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 자체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기에 문제 원인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 죄이며 무엇이 우리의 연약한 점이고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나왔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병을 낫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상처를 덮을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가 막힌 결론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에브라임이 자기 병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결론을 기대하지만, 5 13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 갈 줄 알았는데 왜 앗수르에게로 갈까요?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군대가 약합니다. 그럼 더 강한 군대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이성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합니다.

 

성경에 사실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애굽에 가서 도움을 청하라는 말씀을 하세요. 애굽의 도움을 청하거나 앗수르의 도움을 청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에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느냐가 문제였던 거죠. 그들은 무엇을 의지한 겁니까? ‘사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더라.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더라.’ ‘하나님, 나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 달려가는 이는 하나도 없고, 전부 다 당연한 듯이 앗수르를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상 성경이 우리에게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내 병과 내가 겪고 있는 상처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의 아픔, 내 속상한 것, 그리고 나의 이러한 문제들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병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 앗수르에게로 간 것이지요. 물론 이들은 고칠 수 없었습니다.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사자 아슬란

주님은 이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이번에는 사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그 목을 움켜잡습니다. 그러면 정신을 차릴 줄 알았죠? , 그런데도 정신을 안 차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포기하시느냐? 이 마지막 5 15절이 저희들에게 정말 복음인데,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이제 내 자리로 돌아갈 거다. 언제까지? 내가 내 얼굴을 구할 때까지. 내가 너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올 때까지. 내가 내 자리로 가겠다. 내가 너를 그때 만날 거다." , ‘회개할 때 너를 만날 것이다.

 

호세아 6 1: 불성실한 회개

여러분,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6 1절을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성경에서 저와 여러분이 읽을 수 있는 구절 중에 가장 간절한 호소 중 하나일 겁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너무 은혜롭죠?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이 세 구절은 사실상 누가 이 말을 했는지가 상당히 불분명합니다. 호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처지를 이야기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이렇게 말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인지 조금 불분명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주님께로 돌아가자는 간절한 호소로 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호세아서 6장의 소제목은 ‘백성들의 불성실한 회개’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구절인데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바는 정 반대의 의미인 것입니다. 본문 1절의 ‘찢었으나 내가 너희를 고쳐 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 찢어지기 전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사실상 종말적인 선언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계속해서 썩고 있으며 부패하고 있으며 결국 너희에게 닥칠 나의 공의는 너희들이 찢어지는 것이다’라는 선포이십니다. ‘사자가 너희를 찢듯이 찢을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사자는 그냥 멋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위험한 존재이며 무서운 짐승이에요. 그것에 걸리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공의와 선하심의 왕, 아슬란

여러분, 혹시 나니아 연대기 영화를 보셨거나 소설을 아실 겁니다. C. S. 루이스가 자기 조카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 주기 위해 쓴 청소년용 소설입니다. 그 소설에 나오는 큰 사자의 이름이 아슬란입니다. 골든게이 같은 유명한 구약 학자는 호세아서에서 C. S. 루이스가 아슬란의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호세아서에 등장하는 사자는 무서운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 사자인 아슬란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럼 그 사자는 정말 안전한가요?’ 그때 말합니다. “안전하다고요? 사자가 어떻게 안전합니까? 누가 안전하다고 했나요? 당연히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합니다. 그는 왕입니다. 공의를 행한단 말이죠.” 그 사자는 선하게 공의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목덜미를 붙잡는 사자와 같이 움켜쥐고 우리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우리를 언제든지 벌줄 수 있고, 영원한 형벌에 빠지게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한 것들과 우리 인생을 살펴볼 때 우리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아무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가 공의를 행할 때 우리 중에 그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죠.

 

제가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감명 깊게 봤던 전도지는 아주 싸구려 전도지였습니다. 전도지 겉면에는 새빨간 지옥 불이 막 그려져 있고요. 그리고 글자도 좀 이상한 모양으로 질문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할까요?’ 흔히 보는 전도지에 쓰여져 있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당신을 기다리십니다’와 같은 내용이 아니라 ‘지옥에 가려면 어떻게 할까요?’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아무런 글자가 없는 백지만 존재했습니다. 전도지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 아무것도 안 하시면 우리는 모두 거기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게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수 있는 당연한 결과였어요. 우리 모두가 그 결과 앞에서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사자입니다. 우리의 목을 움켜쥐고 우리의 목숨, 생명을 당장 끊어도 우리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하시고 자비하시며 인애로우시다’라고 성경이 말하는 거죠.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 우리는 징계를 받을 때 다른 곳을 기웃거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품이 안전하다고 왔는데 하나님 품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통해 배우는 참된 위로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체벌을 받아보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매일 칭찬하고 이르시는 게 아니라 '이건 배워야 한다' 하시며 징계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혹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가 있나?'라는 마음을 품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여러분을 품에 안으실 진짜 선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십니다. 징계를 받을 때 우리는 모두 다 비슷합니다. '내 편이 어디 있나?', '내 기쁨은 어디 갔나?' 그러다 보니 누가 조금만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기만 해도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는 분명히 아프지만, 그러나 여러분을 아프게 하려는 것이 목적의 전부는 아닙니다. 여러분을 잘하게 하고 바르게 하고 일어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다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 이 설교는 결국은 나를 겨냥하는 것이구나'라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이 설교를 아주 잘 듣고 계십니다. . 바로 여러분을 겨냥한 거예요. 저 자신도 겨냥하지만 바로 여러분을 겨냥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만 아니라, 여러분 곁에 있는 여러분의 성도들도 겨냥한 것입니다.

 

한 몸인 공동체의 연대

기억해 주십시오. 유다와 이스라엘 모두가 징계를 받습니다. 공동체 모두가 아픕니다. 신약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책망할 때 많은 이들이 얼마나 억울하다고 여겼겠습니까? '나는 아닌데 내가 무슨 바울 파야?'라며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이 그 편지를 보내면서 얼마나 마음이 떨렸는지 '내가 다시는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너무 불안하고 힘들어서, 자신의 서신을 읽고 그 많은 사람들이 실족할까 봐, 그들이 그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너무 뼈아프게 아파할 것이 보이니까 엄청난 마음의 부담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서신을 고린도 교회에 보낸 것은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죄를 짓지 않으며, 우리 모두는 다 다른 상황에 있고, 어떤 이는 힘든 상황에 있고 어떤 때는 눈물의 자리에 있고 어떤 이는 기쁨의 자리에 있을 수 있으나 우리들은 한 몸이라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당했을 때 오히려 '나는 아니다.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바울은 오히려 꾸짖고 있는 거죠. '아니, 너희들은 한 몸이 아니냐? 어디 손가락이 아프다고 너의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아무렇지도 않더냐?' 팔이 망가지면 목과 다리 모든 곳이 고생을 하는 법이거든요. 다리가 아프면 걷지 못하면 여러분의 온몸이 고생을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일들을 같이 지지 않으며 같이 아파하지 않을 수 있느냐? 그것이 지금 사실상 우리 모두에게는 너무나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저희가 찬양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이며 저도 참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찬양을 하게 된 그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숙제를 우리가 참 잘 못 풀었음을 고백합니다. 어렵게 풀었고, 지금도 푸는 과정입니다. 찬양을 앞으로 하실 분들도 마음이 편치 않고, 앉아서 찬양하는 우리들의 마음도 마냥 흡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를 훈련하시는 과정이며, 우리가 이 일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더 자라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을지, 우리의 성품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일입니다. 찬양 팀이 다시 서는 것이 소중한 일이기는 하지만, 과연 우리는 찬양을 어떻게 해 왔으며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여야 하는지, 우리가 이것 때문에 아팠고 힘들었던 이들과 어떻게 어깨를 같이 하고 눈물을 같이 흘리며 그들을 어떻게 같이 보듬을 것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함께 가려고 하는 이 일에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역사하실 것인가를 우리가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꾸짖음을 받고 이렇게 징계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그저 '좋은 곳에서 예배할 수 있고, 좋은 환경에서 예배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왜 감사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것 때문에 우리는 편하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이러한 일에까지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주시는 것에 감사'하기 때문 아닙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곁에 있는 성도들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는지, 무엇으로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지, 무엇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가야 하는지도 생각하며 그러면서 우리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짐을 지려고 하고 눈물을 같이 흘리는 마음이 없으면 같이 기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모습과 하나님의 선하심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이 모든 과정들이 여전히 우리에게는 다 숙제로 남아 있는 많은 부분이 있으며, 우리는 계속 그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길인가를 찾을 것입니다. 저희가 믿는 것은 사실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선하심에 우리가 겪고 있는 어떠한 일이든지, 그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우리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안에서 내가 어떤 힘을 다하든지 모든 노력을 다하여 주님께서 맺고자 하시는 그 열매를 맺기 위해 나도 그리고 우리도 모두가 다 함께 짐을 지며 그 길을 걸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속에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실 것인가? 어떤 주님을 나는 또 배우게 될 것인가? 나는 과연 그 주님과 하나가 될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가야 되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참된 건강한 교회란

건강한 교회는 모든 것을 잘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 이 교회는 선교도 잘해, 구제도 잘해, 말씀도 좋아.'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가 딱 그 짝이었어요. 은사가 얼마나 많았는지, 성경은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아볼로, 바울, 심지어는 베드로, 예수님 파도 있었습니다. 이런 곳이 건강하지 않았어요. 건강한 교회는 형제가 서로가 은사를 왜 우리에게 줬는지, 이 좋은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을 우리에게 왜 허락하셨는지, 내가 그 말씀대로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내가 이 수많은 은사들이나 있으나 내가 너에게 가장 좋은 길을 보일 것이다.' '이 은사조차도 사랑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하여 우리들이 사용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의하여 우리가 이 일들을 여전히 행동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오며 주님께 매달리며 주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주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호세아 6 2절에 담긴 부활의 예표

여러분과 제가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바울이 책망했던 고린도 교회가, 에베소 교회가, 데살로니카 교회가, 베드로가 그토록 걱정했던 그 많은 교회들이 왜 모두 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동시에 건강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에 집중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을 향해 가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 앞에 있는 문제만을 본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만을 본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상처만을 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처를 짊어지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사실은 이 호세야서 6 2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얼마나 놀라운 구절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많이 말씀하시잖아요. 내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기초로 성경을 찾기 시작하면 구약에서 3일 만에 누군가가 부활한다는 얘기가 거의 없을 겁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요나의 뱃속에서 3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 또 하나는 바로 오늘 본문인 호세아서입니다. 이틀 만에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은 셋째 날에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북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시는 말씀 같지만 사실은 이스라엘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굉장히 종말적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이 해답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것이 바로 이 문제의 해답이라고 얘기하는 거죠. 이 메시아의 부활을 예고한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동시에 예고합니다. 우리의 죽음을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생명을 위해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죽음을 말하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형벌은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우리의 힘이나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고 우리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며, 경고를 들어도 우상과 앗수르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의로우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렇다면 성경이 물어보는 거죠. 누가 이걸 고칠 것이냐? 누가 이것을 낫게 할 것이냐? 아무리 순결하고 지고한 신앙을 가졌던 존경하는 신앙인들도 수많은 시험과 유혹에 빠지고 연약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들을 살리겠느냐? 하나님께서 이들을 싸매시고 이들을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이냐? "내가 이튿날에는 너희를 살릴 것이고 셋째 날에는 너희를 일으킬 것이다." 누구와 함께?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메시아의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저 ‘내가 너희를 건지겠다. 얘들아 거기서 나와서 가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렇게 너희 힘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너희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죄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숨이 멈추고 죽어서 가라앉고 있는 너희들과 함께 그 안으로 내가 들어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가서 주님도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주님을 잡고 있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모두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 때문에 오는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우리를 삼키는 죽음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는 길이었기 때문에 모두 다 죽었습니다. 그 죄를 함께 품으신 주님도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 후부터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남김없이 지키신 분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이겼습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들을 위하여 죽겠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고 그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지키셔서 죽으셨습니다. 이걸 의인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의로우셨습니다. 의로운 자를 죽음이 붙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죽음은 그리스도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토해낼 수밖에 없죠.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토해낼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상처 대신 그리스도를 볼 때

그 부활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분 안에 품으시고, 그때 죽으시면서 기억하시고 말씀하셨던 그 많은 이름들을 다시 찾으십니다. 그 이름들을 그 심장에 새기셔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며 부활하시는 거죠. 우리는 그것을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소망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그 소망에 관심 없는 것처럼 제멋대로 살았던 이스라엘은, 마지막 징계까지도 겪었지만 그래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가장 큰 관심이 나 자신과 내가 가진 복과 그리고 내 상처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처의 목적: 그리스도의 몸을 깨달음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자기의 상처를 먼저 보지 말고, 너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그대로 새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고 말입니다. 나의 상처를 자기의 몸에 새기신 예수를 보십시오. 당신의 상처만 보고 있다면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 낫더라도, 당신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두껍게 딱지가 얹어서 넘어간 것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여러분의 상처가 아니라 여러분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새기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면, 여러분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는지를 알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마음을 알게 되면, 그 상처를 내 것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상처를 짊어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내가 교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구나. 이것이 교회이고, 내가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내가 왜 우리 성도들 중에 누가 힘들다고 하는데 내 마음이 힘들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라는 것을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증명해 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참된 위로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상처의 목적입니다. 나는 나의 상처와 내 병과 내 고집과 내 연약함과 나의 죽음까지도 다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갔으며,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몸에 새겼습니다.

 

고백: 나의 가장 큰 위로

우리는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나는 예수의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 이것을 여러 번 고백하셨습니다. 나에게 내 인생의 참된 위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인생 모두가 주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 없으니 이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했으므로 저는 여러분이 그 고백처럼 사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위로는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조차도, 우리 아픔조차도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에 새겨지고 있으며, 그것조차도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거기서 우리는 위로를 받고, 그곳에서 승리를 이야기하고, 그곳에서 힘을 내고, 그곳에서 일어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을 넉넉히 승리하게 하시며 붙잡을 줄을 믿고 또한 믿습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 모두에게는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 일입니다. 더구나 주님, 이제 저희가 기쁜 마음을, 또한 위로받는 마음을, 주님 안에서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피에 저희가 연합하려 합니다. 주님, 저희가 잔과 떡을 받게 주시고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우리가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하늘의 영광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놀라운 은혜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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