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야서 5 1절로부터 15절 까지 입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그들을 다 벌하노라.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아멘.

 

말씀을 대하는 태도: 논리적인 역설

저희가 지금 호세아서 1장부터 4장까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만일 4장의 내용을 조금 기억하시면서 5장의 부분을 유의하여 읽으셨다면, 장이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말씀이라 생각될 것입니다.

 

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아, 너희는 정말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구나. 이제 너희는 나를 버리고 우상과 연합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너희는 망하게 것이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망한다는 말입니까, 흥한다는 말입니까? 망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4장까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돌이켜야 한다. 너희가 지금 지식이 없어서 망하고 있다. 말을 들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셨는데, 백성은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4장에 와서도 듣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5장쯤에 이르러서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너희들 정말 이렇게 나오면 내가 너희를 멸할 것이고 완전히 버릴 것이다’라고 나오는 것이 사실상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서는 5장쯤에서 끝나도 괜찮습니다. 성경에 짧은 책도 많은데 굳이 길게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호세아서는 5장에서 끝나지 않고 오래 이어집니다.

 

그런데 5 부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시금 말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너희에게 다시 말할 테니 다시 듣고 깨달아라. 귀를 기울여서 말을 들어라. 4장에서는 부패한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마지막에 온전한 제사장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하였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5장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실 만도 하거든요. 이제는 너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논지를 따라가면 아시겠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라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죠. ‘깨달아라. 참으로 기막힌 상황이 아닐 없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1절에서 이어집니다.

 

승리 자체에 머무르는 신앙의 위험

“너희에게 심판이 있다.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그물이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평소에 성경 공부를 하겠습니까? 이런 설교를 들을 도움을 받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죠.

 

여러분이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된다’라는 구절을 들으시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실 성경을 조금 읽으셨거나 아시는 분들은 제가 조금만 설명을 드려도 금방 아실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설교나 성경 공부를 어렵고 힘들어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위 말하는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들조차 너무나 많이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실상 성경에는 어려운 이야기도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프로야구 경기를 구경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스포츠를 구경한다고 해도 일단 규칙을 알아야 재미가 있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말씀을 땅에서 열심히 배우는 이유 하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스바라는 단어가 나오면 아마 대개는 사무엘 선지서에 나오는 미스바를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장소가 바로 미스바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미스바는 조금 다른 장소에 있습니다. 이는 ‘베냐민 미스바’라고 해서 이스라엘에 있는 ‘길르앗 미스바’라고 하는 곳인데, 미스바는 사사였던 ‘입다’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입다는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명의 사사입니다. 입다가 이스라엘 민족들을 데리고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미스바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승리의 장소입니다. 뒤에 나오는 ‘다볼’도 사사기의 유명한 여선지자인 드보라와 바락이라는 사사가 가나안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한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장소에는 가지의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모두 사사와 관계가 있으며, 하나는 전쟁에서 승리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었고,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주위에 있는 나라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여 이스라엘이 고통을 받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고통을 받다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죠.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사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사사는 다른 번역에는 판관(Judge)이라고도 합니다. 사사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전쟁을 이끌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고 승리하는 이야기가 바로 사사기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해 주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 딴짓을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쳇바퀴를 돕니다. 딴짓해서 하나님이 다시 보내시고, 그러면 소리 지르고, 그러면 사사를 보내시고. 이것을 계속하는 이야기가 사사기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내용이 여기 나오냐면 바로 지금 이스라엘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절입니다.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하고 여러 가지로 문제가 없고 너무나 편하고 지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뜻대로 살고 있는데, 상황 속에서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던 그곳을 올무가 되게 하고 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일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 복을 너희 스스로가 그물망이 되어서 덫으로 바꾸고 있다. ,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땅에 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너희들 때문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덫이 되고 있고, 그물이 되고 있고, 막고 있는 올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승리 자체에 머무르는 신앙의 위험

이것을 보면 이상합니다. 승리를 경험하고 나면 대개는 감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며 ‘주여, 저희가 주님께 잘하도록 하겠습니다.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니 참으로 까다로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가지, 승리 자체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승리의 장소에서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승리뿐인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 그들이 어떻게 부르짖었는지, 눈물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그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그때 자신들에게 해결해 주게 하셨던 사건들입니다. 그것들은 계속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그때 기도를 들으셔서 이렇게 나에게 응답하셨지’라는 사실은 남아 있는데, 응답하셨는지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씀드리면 조금 이해하기 쉬우실까요?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는지는 모르고 우리는 그저 구원받은 사실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사실만 기억하게 되면, 지금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거기에 머물고 있게 되면 결국 자신이 받은 구원을 가지고 뭐가 되는 것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올무가 되고 그물이 되고 덫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덫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승리한 장소만, 내가 구원받은 사실만, 내게 응답하셨던 그것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승리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우리를 승리하게 하셨는지도 중요합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분명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저들을 불러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건지사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하며, 주님을 예배하게 하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주님의 백성으로서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한 이유인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기억이 남는 것은 그저 바다를 지났던 홍해 사건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 그때 우리가 바다를 지났지’ 그것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 그때 우리가 애굽에서 많은 물건을 갖고 나왔지. , 그래 광야에서 우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었지. 만나를 주셨는지, 만나로 우리를 먹이셨는지, 가지고 나왔던 짐승을 잡아먹게 하신 것도 아니고 매일 만나를 주셨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사실상 관심이 점점 없어진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응답만, 우리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승리만을 계속해서 우려먹고 사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서 내가 믿은 신앙만 우려먹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그들에게 미스바와 다볼이 오히려 올무가 되고 그물이 됩니다. 자신이 누린 응답이 자신을 막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곳이 어떤 곳인지, 우리 신앙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는 이미 잊어버리고, 지금 이곳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 누릴 있는 , 내가 받은 것만을 생각합니다.

 

죄를 가리는 ‘나뭇잎’: 위선적인 제물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간증이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내가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지금은 문제들이 이렇게 해결됐습니다.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된다면, 만약 경험과 기쁨과 승리와 응답이 전부가 되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그것을 주셨는지를 잊어버린다면,

 

여러분을 자리에 예배하게 하는지를 모르고 여러분이 예배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사 자리에서 우리가 서로 알지 못하던 이들을 함께 앉게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응답하며 예배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신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예배에, 내가 부르고 있는 찬송에, 내가 기쁜 기쁨에, 그리고 내가 있는 이곳에 여러분이 만약 모든 관심과 만족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점점 스스로의 신앙이 나의 올무가 되고 나의 그물이 되는 곳으로, 나의 덫이 되어서 나를 결국은 잡아내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리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스바라는 자체가 ‘지켜본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켜보신다. 너희를 보호하신다. 적들로부터 너희를 분명히 경계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뜻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우리는 뭐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인도에 거스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덫이 됩니다.

 

여러분, 다볼이라는 단어의 뜻은 ‘깨끗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에 내가 올무와 그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지요. 내가 지금 거룩을 추구하고 살고 있는데, 거룩을 추구하는 내가 그것을 막고 있는 그물이 되고 올무가 된다는 , 이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는 놀라운 일이 수밖에 없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손길에 거스르는 올무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에 덫을 놓는 자가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마음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기억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로 지금도 땅에 있게 하시고, 자리에 오게 하셨으며, 예배하게 하는가? 내가 직장에 있으며, 내가 일들에 부름을 받고 있으며, 나에게 이러한 자녀를 주셨으며, 나에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고난과 아픔, 어떤 때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는가? 기쁨과 즐거움에 감사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받은 것을 좋아하는 그리고 그것에 만족해 버리는 존재가 됩니다. 어쩌면 결국 그것이 여러분을 사실은 신앙의 진정한 정진을 막아버리는 올무가 되는 자리에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나’에게 집중하는 신앙

호세아서 5 3절은 이러한 마음을 더욱 자세히 설명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말씀은 ‘너희가 죄를 지었으나, 너희는 나에게서 숨을 수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러분, 죄를 짓고 숨는 것의 원조가 있습니다. 바로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꼈고 부끄러웠기에 자기 자신을 숨기고 가렸습니다. 나뭇잎으로 가렸던 것이죠.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도 분명히 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의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들이 깨닫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몰랐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죄를 짓고 있는데도 너무나 오랫동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 거룩에 대해서 잊어버린 지가 오래되어, 자기가 지금 안에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 있는지조차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겠습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이것이 옳은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틀렸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일이 오늘 본문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방 신을 섬기고 거짓 신들에게 가서 예배하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냐고 나와 있냐면, ‘너희들이 떼를 몰고 것이고 떼를 몰고 와서 하나님께 재물로 드릴 것이다’라고 합니다. 성전에 재물들을 떼로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께 보이려 합니다. 죄를 감추기 위해 뇌물을 바치듯, 열심히, 많이 제물을 가져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진심은 하나님 앞에서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씀드렸던, 하나님께 예배하며 예배의 주체가 되시는 주님께 우리의 관심이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이 집중되는 현상입니다. 기도하고 있는 나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내가 참으로 대견스럽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는 여러분을 기쁘게 여기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공부를 합니까?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더욱 겸손해지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아닌가요? 영광을 바라보려고. 그런데 그것이 없이 우리는 지금 예배하고 있는 내가, 찬양하고 있는 내가, 설교하고 있는 내가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관심이 쌓이게 되면, 우리는 지금 내가 죄를 짓고 있는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깨닫기 어려워집니다. 나에게 완전히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지식에 머물러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비극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의 양심은 대부분 이야기해 줍니다. 호세아 5 4절은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구절만 읽으면 마치 그들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돌아가기 미안하다는 뜻으로 들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러한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간다. 우리의 죄가 너무 깊어서 하나님께 돌아갈 없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틀리게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이제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더 숨기는 모습을 보여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행위가 있는데 행위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여기 음란한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섬기고 있습니다. 안에 그것이 있는데 그것을 지금 가리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의 마음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있으면 반드시 우리에게 수치가 느껴지는데, 수치를 다른 것으로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음란한 마음으로 다른 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감추기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는 잎사귀로 자신들을 가렸습니다. 하나님께는 직접 가지 못하고 잎사귀를 가지고 자신을 가렸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자신의 죄를 가리려는 인간의 모습에서 항상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를 회개하고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는 그것을 내가 가진 것으로 가리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공로라고도 표현합니다. 내가 있는 , 우상이 되었건, 돈이 되었건, 열심이 되었건, 능력이 되었건, 그것으로 가리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일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그것을 행하면서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저는 제가 개혁 신앙을 만난 것을 항상 감사합니다. 제가 그전에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에 대해서 정말 몰랐던 것이 많았고, 올바르지 않은 신앙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았는지 너무나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최고의 권위로 삼고 말씀 속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려고 하는 개혁 신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중에서도 그러한 경험들을 가지신 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저는 개혁 신앙에 입문하여 올바른 교리와 성경을 배우고 말씀 안에서 사는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럴 수가 없는 같은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로 말미암아 자기의 잎사귀를 만드는 것을 너무나 많이 것입니다.

 

여러분, 교리가 여러분의 잎사귀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소위 말하는 여러분과 제가 올바르게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분의 잎사귀가 있습니다. ‘나는 이만큼 올바르게 믿고 있으며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러분을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성령의 열매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의 잎사귀가 되어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는 지금 잘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기의 공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실해 보이는 믿음조차도 자기의 공로가 있는 것이고, 여러분이 그토록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여러분이 열심히 찬양하며, 여러분이 힘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조차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숨기는 잎사귀가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와 감격의 회복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일에 너무나 쉽게 빠질 있는 것입니다. 신학으로 가려보고, 교리로 가리고, 그리고 내가 읽은 성경의 분량으로 가리고 가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이단들이 처음 시작했을 교주가 되었던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던 사람들이고, 소위 말하는 성경을 정말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박태선 , 문선명 모두 그랬습니다. 박무수 씨도 설교할 보면 성경 구절을 거의 50개까지도 줄줄이 외워서 인용하던 사람들입니다. 김기동 씨는 자신이 젊었을 때에도 성경을 200 이상 통독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 200 통독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나뭇잎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며 열매를 맺는 것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말로를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신앙을 의지하게 합니다. 내가 읽은 성경을 의지합니다. 내가 드리고 있는 기도를 의지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찬양을 의지합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와서 예배하는 예배를 하나님 앞에서 하는 예배를 의지하여 나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전부 아담과 하와의 잎사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으로 나갈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래서 예수께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그래서 열심히 예배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열심히 기도를 하여서, 그것으로 여러분을 치장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옷이 되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있다면, 여러분과 저는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으로 사실상은 우리의 신앙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로 여러분을 감추고 싶은, 그리고 여러분이 뒤에 숨고 싶은 나뭇잎일 뿐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말하기를, 그것이 바로 너희의 올무와 그물이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그래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성경을 그렇게 읽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기적과 이사를 해도, 여러분 박태선 씨가 부산에서 집회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몇만 명씩 모였죠. 그리고 강대상을 치면 정말로 불이 나갔습니다. 진짜로 거기에 있었던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를 목격한 것입니다. 강대상에서 번쩍하고 불이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직접 보신 분이 아주 많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간 것입니다. 상상하실 있습니까? 성경을 그토록 가까이하면서도, 내가 예수를 믿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안타깝게도 성경을 이야기할 나뭇잎을 의지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오지 않으시는 분들은 집에 가시면서도 고민을 합니다. 놀러 가서도 고민을 해요. ‘오늘 예배인데 빠지면 되는데, 내가 우리 성도들과 함께 주님을 예배해야 되는데’라고 갈등하면서 예배를 빠진 분들은 하루 종일 고민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회개합니다. 교회 와서 예배를 하고 가시는 분들은 ‘나는 오늘도 예배했어. 하나님께 나와서 그래도 인사는 드렸고, 출석부에 도장은 찍었고, 예배도 했으니까’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굉장히 부요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갑니다.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일까요? 애매한 질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도저히 예배할 없는 저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 부르사, 나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기울이게 하고, 마음에 성령님께서 감화하사 조그만 말씀 조각이 인생과 속에서 다시 나를 따뜻하게 하는 순간을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내가 자리에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 그리고 주님을 향해 나로 하여금 지금 비록 손톱만큼도 작은 분량이지만 나아가게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집으로 가는 , 예배하는 순간에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없는 감사와 찬양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정말 진정으로 원하고 원합니다.

 

여러분의 속에 열매가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예배를 하러 것이 아니라 그저 예배를 보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이고, 그리고 목사의 원맨쇼를 보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와서 제가 예배 인도도 하고, 찬송도 제일 크게 부르고, 그리고 설교와 마지막 축도까지 제가 합니다. 마지막까지 하니까 여러분은 앉아서 그냥 구경만 하면 되는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예배가 그런 것이라면,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생각합시다.

 

여러분은 예배에 1초도 참여하지 않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개혁파에 있는 여러 목사님들은 인도자를 없애 버렸습니다. 인도자 없이 그냥 찬양하고 순서대로 그냥 가는 것이죠. 왜입니까? 인도자를 바라보기 시작하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만의 정의: 말씀 위에 놓는

여러분, 교회에 오고 예배하는 목적이 대부분 설교를 듣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여러분 정말 자신을 다시 살피고 회개해야 합니다. 설교를 듣기 위해 오셨다면 차라리 집에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여기까지 이렇게 힘들게 오셔서 겨우 설교를 듣고 가십니까?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지, 말씀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말씀이 정말 나를 살리는 것인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내가 사는 것인지,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그토록 애를 써야 합니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여기 앉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찬양도, 우리의 기도도 전부 나뭇잎이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이요, 책임을 면피하는 것이고, 그렇게 주를 지내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안에 그런 모습이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마시고, ‘나는 그것밖에 된다’고 도망치지 마시고, ‘그래, 내가 인간이라서 이것밖에 하는데 어쩌겠어’라고 제발 저에게 그렇게 질문하지 마시고, 회개하십시오. 돌이키십시오. 신속히 돌이키십시오. 제발 다음 주로 미루지 마시고 오늘 돌이키십시오.

 

여러분, 설교가 끝난 다음에도 여러분이 똑같은 찬양을 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예배가 지금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도, 여러분이 여전히 나와서 기도하며 찬양하고 하나님의 예배에 참여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이 시작했을 때와 똑같다면, 우리는 도대체 모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 우리는 똑같은 모습으로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변할 없는 존재라는 것을 너무나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변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변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기에, 변하지 않는 나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들이며, 어떤 것으로도 깨어지지 않는 나의 고집스러운 마음을 주의 말씀 앞에 놓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이며, 들으시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을 향한 헌신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랑하는 여러분,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장난도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이 땅을 사는 동안 종교 하나를 가지고 있어서 여러분의 마음이 힘들 위로받으며 종교 생활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으면 여러분의 영혼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목사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죽음과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여러분의 땅에서의 100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영원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요. 여러분의 삶이 앞으로 영원히 어떠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것인가를 지금 여러분은 질문받고 있는 것이니까요.

 

압니다. 아이들, 내일 당장 먹을 음식들, 페이먼트(지출), 그리고 내가 다니는 직장,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연약함을 압니다.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여러분의 나뭇잎이 되지 말게 하십시오. 그것으로 여러분을 가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병조차도, 여러분의 어떤 연약함조차도, 여러분 그것으로 여러분을 가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속일 없습니다. 감출 없습니다. 주님 앞에는 그저 우리는 있는 그대로 가는 방법 외에는, 나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방법 외에는, 나의 연약함을 그저 안고 가는 방법 외에는, 나의 모든 것을 열고 가는 방법 외에는,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수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나뭇잎은 던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를 입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늘의 옷을 입으십시오. 입으십시오. 여러분을 여러분이 가진 나뭇잎으로 가리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십시오.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시며,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물어보시며,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누구냐고 하시거든, 여러분의 얼굴로 얘기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옷으로 서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서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로 서십시오.

 

죄를 보지 못하는 교만함

호세아가요,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에게 직설을 합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스라엘아, 너희는 교만하구나. 교만하구나. 죄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신의 죄가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가 자꾸 보인다면, 말을 기억해 주십시오. 당신의 죄가 보이지 않는다면, 죄는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너무 가까워서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찔림이 없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을 치십시오.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듣고도 여러분의 마음에 ‘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 없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을 치십시오. 여러분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니 ‘나 같은 죄인이 어찌 자리에 있을 있겠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 나를 떠나십시오. 나는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입술과 마음에 마음이 있다면, 찬송하고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멀지 않으며, 여러분이 주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 여러분을,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십시오.

 

교만은 여러 가지로 말할 있겠지만, 오늘 우리 본문과 관계하여 가지를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 위에 놓는 모든 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전통이 수도 있고, 여러분 자신이 수도 있고, 선교가 수도 있고, 자식이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봉사가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위에 놓으면 모든 것은 교만이요 우상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과 제가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너무나 분명한 우리의 삶에 대한 현실이 있고, 그리고 교훈이 있는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방식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자기가 경험했던 것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우리가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도대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의 일을 하는 , 여러분의 경험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지금껏 겪어 왔던 여러분의 경험이 도대체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옛날에 교회에서 이렇게 행했던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옛날에는 교회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했던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러분의 경험과 여러분의 판단과 여러분의 생각이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까? 아니라면 이제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기십시오.

 

영원을 향한 헌신

여러분의 섬김에 끝이 있습니까? 여러분, 저는 바울이 번도 ‘내 달려갈 길을 마치며 내가 관제와 같이 기름 부음이 때까지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산다’는 것에서 조금도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는 것을 성경에서 항상 배웁니다.

 

도대체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디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려 하십니까? ‘적당히 내가 좋아하는 때까지, 적당히 내가 원하는 때까지’ 주님을 섬기려거든, 다른 성경을 믿으십시오. 제가 아는 성경에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앞으로 가는 시간 동안 만약 ‘아, 나는 내가 바쁘고 내가 너무 일이 많아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나중에 잠시 하도록 하겠어’라는 것이 성경이 만약 여러분에게 그렇게 보증하고 있다면, 여러분 기쁨으로 그렇게 사십시오. 아니라면 제발 돌이키십시오.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겨 주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방식과 여러분이 결정한 방법과 여러분의 경험과 여러분이 자신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주님을 섬기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내가 무엇을 위해서 자리에 왔으며, 끝까지 무엇을 위해 가야 되는가를 제발 생각해 주십시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성경은 여러분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 여러분과 저는 죽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에 죽을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인생을 계획하는 사람들이지, 이제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은퇴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원히 어떻게 것인가를 고민하셔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내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인생을 지금부터 어떻게 것인가를 고민하고 자신을 어떻게 드려야 할까를 생각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점점 나이가 들며 힘이 약해지니 나도 이제 죽음을 준비한다. 성경에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오려내고 이야기하세요. 그거 잘라내고 그다음에 ‘아, 나는 이제는 이상, 이제 이만큼 했으면 됐지’ 그렇게 하시려거든 그거 제발 잘라내고 이야기하세요. 만약 여러분이 ‘아, 나는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성경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물어보시고 하시면 되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 하나님의 말씀 위에 다른 것을 올려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하고 맞습니다. 여러분의 경험하고 틀립니다. 우리가 준비하는 것과 다릅니다. 어느 것이 맞을까요?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참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존벌레가 되기까지 참으셨고, 자신을 썩어지는 곰팡이가 때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듣지 않았고, 주님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자가 되셨습니다. 그들을 움켜쥐셨고, 고통과 고난의 바벨론 포로 길로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변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기다리시겠다고, 기다리시겠다고 호세아 5 마지막 절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말씀하신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어디까지 참으십니까? 예수를 우리에게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