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4 7절에서 14 까지 입니다.

 

그들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그들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마음을 그들의 악에 두는도다.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너희 딸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아멘.

 

지식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다 보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절들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문명 사회에 살면서 스스로 문명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본질이 변했다고 착각하는 환상 속에 살고 있기에 이러한 불편함이 크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이어 호세아 4 말씀을 계속해서 살펴봅니다. 호세아 4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것이요, 네가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을 이끌던 제사장들에게도 함께 주어진 경고입니다.

 

'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 말은 단순히 아무것도 몰랐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절이 말하는 '지식이 없다' 것은 '너희가 지식을 버렸다'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을 버렸습니다. 버렸을까요? 그것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살기를 원하시는 방식과 그들이 살고 싶은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증언합니다. "나도 너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이라는 말씀은 바로 이로 인해 주어진 결과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우리는 지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받았음에도 그것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부분은 로마서 1장의 내용과 매우 유사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하고 불경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을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라고 논증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물을 통해 당신의 위엄과 능력, 오묘하심을 분명히 알게 하셨기에 아무도 핑계할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으며,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면서 사실은 어리석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과 바꾸었다" 바울은 지적합니다. 율법까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은 더욱 컸습니다.

 

죄책감과 복을 이용한 종교 장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그들의 길을 가게 되었을 , 오늘 본문은 굉장히 의외의 사건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들이 망했다는 곧바로 이어진 결과 대신, 지식을 버렸더니 제사장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인과관계가 쉽게 이해되십니까?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제사장의 수가 늘어난 이유는 제사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많이 드릴까요? 희생 제물과 속죄 제물을 많이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는데 제사는 많이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금 드리고 있는 제사와 하나님을 찾는 행위가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찾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수록 많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을 위한 신을 만들고, 자기가 지금 죄를 짓고 있는데 그것을 위로해 주거나 자기 편을 들어줄 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달래고 뇌물을 갖다 바치기 위해 속죄 제물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 많은 제물을 바치게 되고, 재물이 많아지니 제사를 많이 드려야 하고, 그러니 제사장이 많이 필요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를 하게 만듭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을수록 제사장들은 배가 부르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발견하는 장사이자, 굉장히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 하나입니다. 장사가 계속될 있는 이유는 적어도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책감이 있는 장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 있으므로 무언가에 찔리게 됩니다. 그리고 양심이 찔린다는 것은 내가 벌을 받을까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벌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덮기 위해 하나님께 보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보일 있을까요? 하라는 대로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죄를 덮기 위해 애를 씁니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 헌금도 열심히 하며, 심지어는 멀리 선교도 가고 착한 일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에 대한 감사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죄책감을 없애고 죄를 덮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 종교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보다 훨씬 몰두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갚아서 벌을 받지 않고 죄책감을 상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자신의 마음을 위한 신앙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보다 자신과 마음이 편한 것이 훨씬 중요해집니다. 교회에 와서도 마음이 편한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며, '내가 하나님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거나 '나를 부인한다' 것은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스스로 애쓰며 만들어내야 하는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며, 하나님이 자신을 봐주셔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뇌물을 바치듯 무언가를 갖다 바치게 됩니다.

 

결국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인격과 십자가는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마음에 드느냐가 중요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잘해 드리는 만큼 미래를 보장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중요해지지 않는 것은 무서운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상 크게 필요하지 않고, 그저 '예수 믿고 어떻게 하면 조금 착하게 있을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 개발이나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방편 하나가 있습니다.

 

죄책감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말할 없이 열심을 가지고 종교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는 대부분의 이단들이 사용하는 방법 하나입니다. 요즘은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쓰는데, 가스라이팅이 무서운지 아십니까? 당하고 있으면서도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죄책감을 가지고 여러분을 흔들 ,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당하고 있습니다. 예배 출석,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 , 성경을 읽지 않는 등으로 인한 죄책감과 싸우느라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예전에는 얼굴을 마주치면 고개를 숙이시는 어르신들이 계셨습니다. ' 고개를 숙이세요?'라고 여쭤보면 '목사님 얼굴 낯이 없어요. 지난주에 성경 장도 읽었어요'라고 말씀하셨죠. 순수한 마음은 좋지만, 그것을 죄책감으로 남기는 것은 올바른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 권사님에게 '눈도 보이시는데 성경 읽을 필요 없어요. 헌금만 열심히 하시면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홀랑 넘어갈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이것이 바로 '괜찮은 장사' 되는 구조입니다.

 

죄책감만큼 강력한 다른 요인은 바로 ''이라는 단어입니다. 기독교는 복의 종교이며, 시편 1편에서도 ' 있는 ' 누구인지 말하고,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팔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복과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복은 영광과 기쁨의 복이 아니라, 세상에서 인정받는 복을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 가치를 땅에서 얼마나 소유했는가에 두는 것입니다. 학력, 경력, 재산, 자동차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소유물로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의 인생 가치가 그런 것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며, 이것을 '탐심'이라 하고 세상의 가치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돈이 목적이 때의 위험

이것은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건가?' '열심히 일해서 나은 가정을 만들고 싶은데 그냥 상태에 만족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은 기준을 잘못 두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기준을 두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려고 하는가, 아니면 가진 것이 목적이냐?"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돈이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속에서 어떻게 세상을 섬길 것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얼마나 가져야 괜찮고, 얼마나 가지면 된다' 식으로 계속 가면 답을 찾을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그것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복을 세상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교회는 장사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 됩니다. 복을 주고 세상의 것들을 준다는 말에 우리가 얼마나 약합니까?

 

저는 설교자로서 많이 느끼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말에는 분만 '아멘' 하는데, 아픈 사람이 기도를 해서 병이 나으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아멘' 터져 나옵니다. 물론 당장 아픈 병이 낫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정말 기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아니면 지금 당장 아픈 것이 나았다는 때문에 이토록 기뻐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적어도 한번은 생각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바로 거기서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 교회 장사가 실패하지 않고 계속 되는 것입니다.

 

50 100

성경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를 먹고산다고 표현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죄를 더욱 부추겼습니다. 이러한 일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중세 시대의 면죄부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마틴 루터가 1517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사건은 호세아 말씀을 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바티칸은 화려한 베드로 성당을 짓는 드는 엄청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라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내어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이용하고 천국이라는 복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루터는 95개조 반박문 21조에서 "그러므로 교황의 면제부로서 인간이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면제부 설교가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24조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차별적이고 허울뿐인 약속에 의하여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으로 신앙과 삶이 변할 있거나 구원 얻을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까지 와서 돈까지 내면서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27조에는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 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을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루터는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32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의 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참된 보물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1517년에 루터가 이같이 외쳤지만, 문제는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백성과 제사장의 동일한 마음

그때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그런 종교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는 점점 늘어나고 들어오는 돈은 점점 많아졌으며, 재물로 나온 짐승들이 쌓이고 쌓였습니다. 이러한 제사장들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라면, '아무래도 우리보다는 목사님에게 맞는 이야기 같다' 생각할 있습니다. 맞습니다. 목사야말로 진짜 문제일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호세아서 4 9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번역은 뜻이 맞기는 하지만, 풀어서 말하면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다를 바가 없더라' 뜻입니다.

 

여러분, 제사장들의 장사가 번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장사는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기에 이런 장사가 가능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 하나님께 뭔가 갖다 바치면 주시는 것이 맞는 거야'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갖다 바치고 그러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보다, 하나님께 적당히 바치고 종교 생활이라는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를 속이든, 어떻게 살든 신경 쓰지 마시고 내가 갖다 바칠 테니 하나님은 거기서 만족해 주시고, 나는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십시오'라는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들과 손발이 맞았던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뭐라고 없이 '도토리 재기'이며, ' 나물에 '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50 100'라고 정했습니다.

 

말씀에서 멀어지면 생기는 문제

맹자의 양혜왕 편에 나오는 '50 100' 고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혜왕이 맹자에게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자랑하자, 맹자는 전쟁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전쟁 적군에게 밀려 도망치는 병사들이 있었는데, 병사가 100걸음을 도망갔고 다른 병사는 50걸음을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50걸음 도망간 병사가 100걸음 도망간 병사를 보며 '비겁한 '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양혜왕이 '100걸음이나 50걸음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라고 하자, 맹자는 '왕의 나라나 이웃 나라나 50 100보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와 성도가 서로 죽이 맞아 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지도자들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많이 배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했으니 당연합니다. 하지만 물건을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장사를 하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러한 방식이 편하고, 예수 믿는 것이 마음에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합니다. 모든 것의 표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목사는 자신도 모르게 '교회 장사' 시작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우리는 딴짓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수요가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사람들이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멀어지면 여러분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 되고, 저는 사기를 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럴듯한 목사 하나 세우고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회개하지도 않고 말씀으로 돌아오지도 않으면서 자기 자존심과 배만 채우는 일이 가능합니다. 마치 예수 아니면 죽을 같이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있습니다.

 

사사기와 출애굽기의 교훈

사실 이러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본인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십시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위하여 신을 하나 만들어 달라" 말했습니다. 저는 이때 아론이 가장 이해가 갑니다. 아론이 "무슨 소리냐, 기다리라" 한마디만 했어도 얼마나 멋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론은 오히려 나서서 "너희 목걸이와 장신구를 가져오라. 내가 녹여서 만들어 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며칠 후에 날을 여호와의 절기로 삼고 지키자"고까지 말합니다. 모세가 없는 틈을 타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무슨 죄를 고백했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그리고 화목제까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만나 주시지도 않을 텐데 화목 제물을 드리고, 제물을 먹고 마신 흥겨워 춤을 추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교회에 있다' 생각하는 순간, 교회 장사로 빠질 가능성이 아주 높아집니다. 말씀으로부터 ' 정도면 됐다' 생각하는 순간이 우리가 겪는 문제의 시작점일 때가 많습니다.

 

사사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을 데려다가 우상 숭배를 하면서 제사를 드리는데, 성경은 '그게 잘되었더라' 기록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차렸는데 교인도 많이 늘고 헌금도 늘면서 '너무 되는 거예요.' 얼마나 되었는지 지파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저렇게 하면 같은데"라고 말하며 제사장을 유혹했습니다. "당신이 조그만 데서 이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가자. 우리가 대우를 잘해주겠다"라고 하자, 그는 곧바로 따라갔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얼굴을 뜨겁게 하는 이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오늘날은 과연 그때와 크게 다를까요?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영적 공허함

성경은 우리가 올바른 자리에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호세아 말씀은 "너희가 잘못됐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을 , 그들은 고기가 사이에 정도로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너희의 자손이 번성하지 않을 "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언약과 관계가 있으며, '열매 맺지 못할 '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기준이다

교회가 얼마나 잘되고 있는지, 건물이 얼마나 번듯한지, 헌금이 얼마나 풍족한지, 선교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기도를 얼마나 잘하고 찬양을 얼마나 대단하게 하는지, 혹은 말씀을 얼마나 강조하는지 같은 외적인 것들은 중요한 요소일 수는 있지만, 정확한 척도는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런 것들로 '우리 교회가 올바르다, 잘하고 있다' 판단해서는 됩니다. 진짜 정확한 표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고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말씀을 열심히 배우는 것이 교회가 건강하다는 표지가 아니냐?' 물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저들이 배우기는 하지만 욕심에 이끌려 죄에 눌려 살고 있다" 말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데 삶에 아무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푯대는 성령의 열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것도 말씀과 분리된 열매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항상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니 말씀에 근거한 열매들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아는 것처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와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맺고 있는지, 혹은 맺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우리의 말과 삶이, 그리고 교회가 이런 것들을 추구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열매가 여기저기 넘쳐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우리의 푯대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푯대가 성령의 열매에 있는지, 아니면 교회라는 조직이나 우리가 원하는 어떤 환상에 있는지, 혹은 우리의 생각에 있는지, 정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에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설교가 올바르게 선포된다는 것만으로 교회가 건강하다고 없습니다. 교리가 완벽하고 정확한 것도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건강한 교회의 표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계시는지를 잊고 푯대가 사라지면, 밥을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쉬고 일하기 위해 밥을 먹는 것처럼, 말씀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됩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아는지, 교리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목적이 되어 버리면 신앙생활의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는 올바르게 예배한다' 자체가 목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기뻐하시지만, 예배를 통해 결국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기뻐하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 영광 받으옵소서'라고 외치고 뒤돌아서 다른 짓을 한다면, 아무리 멋진 예배를 드리고 완벽한 순서를 지키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하고 훌륭한 설교를 하고 아름다운 기도를 한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 또한 굉장히 고급스러운 교회의 장사가 있습니다.

 

다양한 열매, '50 100' 우리

만약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하고 믿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안에서 거룩한 일을 시작하셨고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거룩한 일을 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순서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한동안 떠나 있다가 갑자기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교회 왔어?', '그동안 했냐?'라고 묻습니다.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처럼 ' 왔다', '기다렸다', '보고 싶었다', '우리 같이 먹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우리가 이런 것에 인색한 이유는, 이곳이 하나님이 모든 인생을 거룩하게 이끄시는 곳이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가 마음대로 돌아가야만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똑같이 자라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크며, 어떤 것은 느리게 자랍니다. 오이는 7~10 만에 열매를 맺지만, 사과와 배는 5~6개월이 걸립니다. 포도나 무화과는 4개월이 걸립니다. 똑같은 같지만 다릅니다. 어떤 사과는 크고 어떤 사과는 작지만, 집에서 먹을 때는 작은 사과도 귀합니다. 아무리 조그만 사과라도 사과나무에 달려 있으면 사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영과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모두에게 일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어버리면 예배하고 성경을 읽을수록 죄만 짓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잊어버리고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면, 우리는 반드시 그쪽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부족함을 인정하는

우리가 얼마나 실력이 없는 사람들인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일을 하면서 ' 모든 것이 우리의 실력이었군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을 원합니까? 정말 성령의 열매를 귀하게 여깁니까?

 

예로, '헤세드' 같은 사역을 , 번역하고 편집하고 인쇄하고 접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보면 얼마나 힘이 빠지겠습니까. '다시는 일을 하지 않겠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실력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우리에게 인내를 허락하시며,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들 속에서도 어떻게 사람 사람의 영혼에게 다가가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생각할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정말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를 푯대로 삼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까? 아니면 편하고 걱정 없고 속상하지 않은, 마음이 쉬는 교회를 원하십니까? 천국에 가기까지 그런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교회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난에 대해 그렇게 설교를 듣고 알면서도, 조금만 고난이 와도 이렇게 연약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력이고 밑바닥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없을까요? 당연히 인정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 내가 어느새 교회 장사에 빠지고 있구나'라고 말입니다.

 

목사나 장로나 성도나 집사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50 100보입니다. 서로 짓는 일에는 마음이 아주 맞습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려고 하면 그렇게 힘듭니다. 마음을 맞추기 어렵고, 수많은 의견 차이로 인해 시험과 어려움에 빠집니다. 시기, 질투, 비난, 뒷담화, 욕심을 부리는 일은 마음이 맞습니다. 하지만 선한 일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 그리스도께로

이러한 설교를 들을 마음이 불편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마음이 찔리기도 하고, 어떤 분은 화가 나거나 '목사님,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화를 내고 기분이 나빠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이만하면 잘하고 있지 않나'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야단 맞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떤 감정을 느끼든, 다시는 ' 자신'에게로 돌아가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감정으로, 상처로, 억울함으로, 기분으로 돌아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엉망으로 망가진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가, 찢어지고 상처 입은 것들을 뜯어 맞춰 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우리의 소망이신, 참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번제단에 드리신 진정한 제사장께로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와 자매들이여,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처음 그분을 믿었을 주신 확신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말씀 앞에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쪼개지도록 내어놓으십시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상처를 입으셨고, 우리와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억울함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넉넉히 도우시는 분이기에,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으로 살았으니 이제 성령님으로 행해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열매를 포기하지 맙시다. 길을 걸어갑시다. 힘들더라도 항상 때를 따라 우리를 도우시는 은혜를 구하고 얻으십시오. 지혜가 부족하다면 예수님의 지혜에서 물을 길어 마시고, 사랑이 부족하면 예수님의 사랑에 몸을 담그십시오. 인내가 부족하다면 창세전부터 우리를 참아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가십시오. 지치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달려가도 고단치 않고 뛰어가도 피곤치 않게 하시는 예수님을 갈망하십시오.

 

그렇게 우리를 참으신 주님과 같이, 친절과 온유, 겸손과 자비, 성령의 열매를 기필코 함께 맺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이토록 선하십니다. 열매를 맺을 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며, 우리를 끝까지 참으시고 버리지 않으시며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자신조차도 부끄러운 우리를 주님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아들이라, 딸이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희가 주님의 말씀과 함께 은혜의 길을 걷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푯대를 잃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맺히는 놀라운 열매를 가지고, 나의 모든 면류관과 함께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바치며 영광을 돌리는 그날까지, 주님 저희가 지치지 않고 길을 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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