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4 14절로부터 23 까지 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남자가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민족이 되려니와 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소년이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아멘.

 

멈춰선 인생, 무너진 평안

우리가 지금 야곱이 가나안으로 들어와 겪었던 일들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야곱이 도착한 곳은 세겜인데, 세겜의 뜻은 ‘어깨’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상이 아닌 어깨에 다다른 것이죠. 머리 꼭대기가 아닌 어깨까지 왔을 , 성경은 야곱의 인생에 매우 신선한 단어인 ‘샬롬’을 사용합니다. 그토록 고단한 삶을 살았던 야곱에게 드디어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에게 드디어 평안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평안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을까요? 그의 선택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너무나 고단했던 그에게 달콤한 평안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는 본래 목적지였던 벧엘로 가는 길을 멈추고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평안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창세기 34장은 그가 추구했던 평안이 무너졌을 그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만약 그가 평안이 아닌 하나님을 추구했다면, 일이 일어났을 본문 34장처럼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평안을 추구했기에 사건이 발생하자 평안을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딸이 그토록 험한 일을 당했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찾아와 딸을 달라고 하고 아내로 삼겠다고 했을 때에도 야곱은 침묵했습니다. 야곱이 마침내 아들들에게 말을 했을 , 아들들이 그를 꾸짖으며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번역 성경에 따르면,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당신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까? 야곱의 침묵은 사실상 상황을 묵인하고 동의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이 자기 자신의 평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을 처음 꾸짖었을 ,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이 나를 싫어하게 되지 않겠느냐. 나는 수가 적은데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면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 않겠느냐. 그의 관심은 아들들의 행위나 디나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평안이 무너질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야곱의 침묵이었습니다.

 

디나의 호기심과 상처

그런데 그대로 두지 않겠다던 야곱의 자녀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먼저 디나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디나는 사실 굉장히 호기심이 많았던 소녀였던 같습니다. 그때 나이가 대략 14, 15살쯤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곱은 세겜이라는 성읍 밖에 천막을 치고 살았고 땅을 샀지만, 안에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디나는 성이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디나라는 이름의 뜻은 원래 심판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지만, 이름과 성읍 간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디나가 “이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라고 표현합니다. 표현은 쉽게 말해, 디나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히 구경하러 나간 것인데, 그게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창세기를 읽으면서 여기까지 오셨다면 보셨겠지만,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데리고 가나안 땅에 있을 무엇을 걱정했습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아내를 빼앗아갈까 걱정했습니다. 아내가 너무 예뻐서 그랬다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사라의 나이가 매우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모 때문에 그랬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이 염려했던 이유는 달랐습니다. 그가 미모 때문에도 그랬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였습니다. ,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고,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이방인의 땅에 가는 것이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나설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항상 기억해야 것은 세상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점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살다 보니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있다고 생각하고, 먹고사는 일에 많은 수고를 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일에 대한 자신감이 붙었을지 모릅니다. 디나 역시 매우 순수했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호기심을 보호해 있는 갑옷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상처를 입는 비극으로 호기심이 끝을 맺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힘을 내는 신앙

말씀은 디나가 밖으로 나간 것이 무조건 잘못된 것이니, 신앙인들이 세상에 관심을 갖지 말고 참여하지도 않으며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이유는 성경 공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위해서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가 땅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지혜를 배우고 능력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을 종종 잊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신앙생활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반대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는 시간이 중요한 것처럼, 어쩌면 중요하다고 있는 것은 예배를 마치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여러분의 대화와 세상을 향한 시선, 직장에서의 태도, 그리고 가정에서의 삶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많은 크리스천 부모님들이 자녀를 키우기 위해 크리스천 스쿨에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계획하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분명 좋은 일이 있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교회에서만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게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성경을 많이 암송하며,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선생님들에게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지식과 말씀을 배우는 것은 축복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그곳에서만 머물지 않고 험난한 세상과 만나게 것임을 반드시 준비시켜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게 “무조건 하지 말아라” 혹은 “이런 것은 늦게 배울수록 좋다”라고 말하며 막는 것만이 항상 가장 좋은 보호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들이 “왜 내가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가”, “왜 내가 이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별력과 사고력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훈련이 없으면 자녀들은 통계적으로도 크리스천 스쿨을 졸업하고 세상에 나갔을 많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같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세상은 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내게 됩니다. 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많은 부모님들은 걱정이 많습니다. 최근 뉴스나 기독교 유튜브, 혹은 여러 매체에서 학교가 얼마나 심각하고 위험한지를 자주 접하기 때문에,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서도 걱정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부모님들께 현실적인 제안을 드린다면, 부모님 스스로가 교회와 보다 가까이서 협력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비록 자녀를 직접 교육하고 훈련하지만, 교회 지도자나 교사들, 그리고 교회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세상의 학문과 가치관을 만났을 ,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겪는 것보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겪는 혼란과 아픔은 훨씬 심각하고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공격을 받거나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선생님과 부딪히거나 친구들과의 많은 문제 속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 때문에 성적이 좋고 부모님 말씀만 들으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범생들조차 위험할 있는 세상에 우리가 자녀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과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과 만났을 자신이 누구이며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배우는 것을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단순히 학문의 영역을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독교 세계관은 신칼빈주의(Neo-Calvinism) 같은 학문적인 분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아브라함 카이퍼나 헤르만 바빙크 같은 분들이 모두 속했던 신칼빈주의는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있는지에 관심을 가졌던 학문 분야입니다. 또한, 재건주의(Reconstructionalism) 같은 운동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으며,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많은 분들이 노력하고 있는 운동입니다. 이분들 역시 개혁주의에 속한 분들입니다. 개혁주의의 스펙트럼이 생각보다 훨씬 넓기에, 성도가 사회와 교회 속에서 어떻게 부딪혀야 하는지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일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본질

하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는 것은 어떤 학문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하게 로마서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자녀들과 함께 어떻게 실천해 나갈지 고민하자는 뜻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세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유튜브나 세속적인 상식, 혹은 책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기준을 가지고 분별할 있도록 알아야 합니다. 세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무엇이 진정한 문제인지, 그리고 우리가 겪는 죄악과 문제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본질적 근거를 알지 못한 그저 "이것도 나쁘고 저것도 나쁘다" 판단하는 우리의 지식은 대부분 유교적 배경을 가졌기에,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양반의 사고방식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녀가 우리의 기준과 다른 행동을 하면 굉장히 거슬리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기준이 성경적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반대가 없는 사회에서 유교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랐기에, 무의식적으로 그런 잣대를 적용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가치관을 무조건 깨뜨려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가치관을 여러분 스스로가 먼저 공부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을 갖게 하여 세대를 분별하고 본받지 않게 하려면, 여러분 또한 세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먼저 세대와 다르다는 것을 아이들이 있도록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어야 합니다. 로마서 12 2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가장 강력한 메시지

오늘날 많은 자녀들이, 심지어 크리스천 자녀들까지도 결혼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의 주변 친구들이나 세상을 보았을 ,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 있을지에 대해 전혀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아이들이 이기적이거나 자녀 양육을 싫어해서 생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들이 진짜로 받는 최고의 공격은 사회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가정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부모가 행복하지 않은 모습을 보았을 , 아이들은 자기의 결혼과 미래의 삶에 대해 당연히 의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결혼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차라리 홀로 사는 것이 나은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자녀와 가정에 있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와 함께 성경을 읽고, 성경 공부를 시키고, 밤에 잠들기 전에 기도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여러분의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장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아빠와 엄마가 서로를 아끼고, 잘못했을 사과하고, 서로를 용서하며, 서로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가르침입니다. 물론 저에게 상담을 찾아오는 부부들은 대부분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기에, 그분들이 토로하는 가장 문제는 자신이 결혼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고, 우리가 함께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는 조금 알지 몰라도, 진정한 삶에서 자녀들이 그것을 보게 하는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진정한 성공의 기준

제가 여러분께 거창하게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은 여러분의 속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혹시 마음속에 “목사님, 저는 이제 너무 멀어진 같아 회복할 있을까요?”라는 염려가 드신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시는 용서는 앞으로도 영원합니다. 계속해서 노력할 있습니다. 걸음, 걸음이라도 조금씩 나아가십시오. 자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여러분이 완벽한 부부로 사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녀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여러분이 주님을 진정으로 주인 삼아, 하나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으며,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마음을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연약함을 알며,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극복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간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자녀들은 훨씬 은혜롭게 바라봅니다. 물론 자녀들이 보기에 “와, 우리 엄마 아빠는 정말 서로 사랑해”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말을 듣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세상에서 우리 아빠를 제일 존경해”라는 말은 너무나 기분 좋은 말이지만, 그것이 전부 성공의 기준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받아낼 있는 최고의 찬사는 어쩌면 이런 말일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무척이나 부족하고, 우리 세대처럼 배우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없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같지만, 마음속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셨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우면 다투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짜증 나는 생활 속에서도 다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다시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다시 주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우리 부모님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과 제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간다면, 물론 우리보다 훨씬 훌륭한 자녀들이 많아서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자녀들이 주님의 보호를 받아 우리를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저와 여러분은 그것에 만족해서는 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시간이고 사명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100분의 1밀리라도 앞으로 나아갔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지만,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어차피 거야’라고 포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할 없습니다. 길은 신자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녀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이루어가야 가장 사명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신앙 vs. 종교적 신앙

말씀은 당연히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제자 훈련을 받거나, 예배에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거나, 심지어 십계명을 줄줄 외운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을 세상에서 지키고 여러분의 자녀를 보호해 있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너무 쉽게 보신 겁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에 가지고 계시는 확고한 관점들, 세계관을 배워야 합니다. 나의 현재, 과거, 미래를 성경적으로 보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날 것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인도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어떠한 길을 약속하셨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점을 치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똑같은 불안과 똑같은 두려움, 인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속에서 매일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과 평안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야곱과도 다르지 않고 세상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답할 있어야 합니다. 잠시 동안 여러분의 감정이나 고통, 외로움을 위로하고 해결해 주는 신앙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정말 장성한 굳건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당연히 추구하고 알아야 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종교적 신앙의 함정

우리가 흔히 종교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에서만 통하고 개인적인 일에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개인 기도는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능력이 없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지 않습니까? 경험을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평생에 새벽 5 이전에 일어나 적이 없는데, 부모님께서 어려서부터 항상 새벽 기도를 데리고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님과 새벽 기도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었을 가장 싫었던 일이 무엇이었냐면, 어머니와 새벽 기도를 마치고 시장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에 가시면 콩나물 움큼을 가지고 지구가 무너질 것처럼 실랑이를 벌이셨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결국은 이겨서 싸게 오시곤 했습니다. 심지어 콩나물을 받으면서 줌을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어머니와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싶었습니다. 멀리 다른 곳에 가서 있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습니다. 새벽 기도회 “주여,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통곡하며 기도하시다가도, 동네 담장에 있는 호박을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무엇이 없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치관과 세계관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천국에 가는 방식이거나,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다가 나중에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신앙으로의 부르심

하지만 세상 속에서 힘을 내는 신앙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순간적으로 깨달아지고 이루어질 있지만, 자녀답게 사는 , 성경의 표현대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잊지 말아야 것은, 여러분은 이미 과정 속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께서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어떤 수준에 이르게 될지는 모르지만,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강하다면 마음대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처럼 잠잠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까지도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점들을 통해,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성경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여러분의 말과 생각까지도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단순히 선한 행동을 하는 것뿐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의 생각까지도 구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옛 사람과 행위를 벗어버리고 사람을 입었으니” 여러분의 정체성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 옷을 입으려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옷을 벗지 않고 위에 옷을 겹쳐 입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옷을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죠. 저도 성격상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고 아내가 말하곤 합니다. 집에 가보면 오래된 물건들도 여전히 제가 들고 다니는데, 이와 비슷합니다. 버려야 하는데 1 동안 번도 찾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짐처럼 들고 다니는 경험을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나 일이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여러분은 생각과 모든 지식에 이르기까지 새로워졌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니 마음만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생각까지도 새롭게 함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문제를 보는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불행이라 여겼던 일이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람이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는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인 알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눈이 변화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겪는 일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이 인생 속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사람만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손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된 위로와 격려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세상의 잣대에서 벗어나다

신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그런데 세상만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도 다르게 봅니다. 그전까지 나는 이것은 있고 이것은 없는 사람이고, 이것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나 혹은 나는 이것도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보다 창조적인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제가 하는 말을 모르시는 같은데, 만약 “나는 사람들과 사귀지 못합니다”라고 생각한다고 합시다. 과거의 여러분은 그렇게 말할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생활하면서 “사람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에게는 어려움이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성격 테스트도 해봤는데, 저는 바로 그런 타입이에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을 보는 눈을 그것에만 의존할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모든 것을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당장 다음 날부터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상 여러분을 제한하고 있는 제한으로부터 묶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래서 새로운 일을 마음대로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은 그러한 것들에 의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만으로 자신을 판단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과 말을 잘하지 못하는 때문에 답답하고 힘든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주는 판단에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도 아니고 외향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로 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판단할 이유도 없으며, 세상의 잣대로 여러분의 마음을 괴롭게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있습니다”의 진정한 의미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되든 되든,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감당할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모든 일을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나는 모든 일을 있으니, 내가 하지 못하는 일도 무조건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낮은 곳에 처할 줄도 알고 높은 곳에 처할 줄도 알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는 것도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으며, 누가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고 해도 그것이 나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진짜 의미를 결정합니다.

 

인생이 귀하며 살아온 인생이 의미가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아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에 대한 고민과 갈등에 빠져, “나는 이것밖에 하지 못하는가” 혹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인가”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세상과 똑같은 잣대로 보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반드시 예수님의 눈을 통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불신앙

오늘 번째 내용은 디나를 넘어선 아들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들들의 가장 문제는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문제를 정확하게 보았다는 점입니다. 야곱은 침묵했습니다. 하몰과 세겜은 디나를 아내로 삼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거절해야 했습니다. 그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시키지 않기 위해 밧단아람까지 보냈는데, 이제 와서 이방인이 딸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자기의 평안을 위해 반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 우리 동생을 없다”라고 말하며, “할례를 받는다면 우리가 너희와 하나가 되겠다”라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절대 금하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금하신 이유는 이방인이 이스라엘보다 못해서가 아닙니다. 가지 이유,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무조건 이방인과 결혼하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신앙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오류와 같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남보다 열심히 봉사하고 예배를 빠지지 않는 것으로, 혹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산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누구와 같을까요? 바로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신앙을 증명하려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신앙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그런 곳에서 증명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지금 야곱의 아들들처럼 있습니다. "할례만 받으면 다른 괜찮다"거나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으면 괜찮다"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마태복음의 족보에 마리아를 포함해 다섯 명의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중 명은 확실히 이방인입니다. 다말, 라합, 룻이 모두 이방인 여성이었으며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문제 삼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인가 아닌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들들은 이것을 마치 하나의 법처럼 “할례만 받으면 우리와 하나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조차도 그들의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게 하여 전투력을 약화시킨 다음, 그들을 모두 죽이려 했습니다. 이들의 모든 행동과 살인은 가장 비참한 일이었으며, 그들 자신이 얼마나 불신앙 속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들들의 모든 제안에 선한 의도는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루는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

여러분, 거룩한 분노는 분명히 필요합니다. 문제를 제대로 보았던 아들들은 "저들은 할례받지 않은 자들인데 어떻게 우리와 하나가 되겠느냐"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것은 옳았지만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전혀 옳지 않았습니다. 점은 우리 신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본문에서 세겜은 아들들에게 "나로 은혜를 입게 하라"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과 에서가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표현으로, "나를 봐달라, 용서해 달라" 뜻입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전혀 용서할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상황을 이용해 그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세겜과 하몰 역시 할례를 받겠다고는 했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은 디나를 얻고 싶었고, 동시에 야곱이 가진 소유를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들과 야곱의 아들들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할례를 이용하여 한쪽은 디나와 재산을 얻으려 했고, 다른 한쪽은 복수를 하고 모든 재산을 약탈하려 했습니다. 똑같이 이들은 어느 누구도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세겜의 죄가 분명했듯이, 교회 안의 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행동하며 침묵으로 모든 것을 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 죄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타락한 가장 이유 하나는, 우리가 수많은 죄악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목회자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죄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민감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를 발견했을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하나님의 뜻대로 어떻게 죄와 싸울 것인가 하는 태도와 방법입니다. 우리는 쉽게 자신이 가장 의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있고, 상처가 얼마나 큰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죄를 다루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상처를 입게 됩니다. 물론 죄가 드러났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잘못했을 교인들이 “목사님,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처음부터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자존심 때문에 상처받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다면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을 인정하며 회개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성도들이 그러한 목회자의 모습을 보고 소위 말하는 ‘시험’을 받아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여러분이 상처받을 일이 아니라, 목회자가 회개해야 일입니다.

 

우리는 자주 잊지만, 죄는 반드시 다루어야 합니다. 죄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지혜가 필요하겠지만, 죄가 다루어질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의 멸망을 원하는 것처럼 죄를 다루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일하시고, 오래 참으시며, 끝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됩니다. 우리와 똑같은 죄인인 우리가 함부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해서는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며,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어떻게 죄를 해결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할례의 진정한 의미

여러분,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가장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할례를 가지고 일을 벌였습니다. 할례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살게 되었다는 표식이었습니다. 할례는 남자의 표피를 자르는 행위로, 피를 흘리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잘라내듯이 피의 언약을 세우는 일이며, 죽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네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이것으로 대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너를 위해 죽을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임을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나는 죽어야 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실 것이다”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5장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쪼개 놓은 짐승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이는 ‘이 언약을 어기면 너희는 죽는다’는 의미인데, 사이를 하나님만이 지나가셨습니다. 이는 ‘네가 언약을 지킬 없음을 알기에 내가 죽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이룰 없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대신하여 죽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례는 바로 이러한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할례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들들은 할례를 가지고 남을 죽이려 했고, 복수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구원에 대한 우리의 책임

자신의 평안을 위해 침묵했던 야곱이나, 자신의 분노와 탐욕을 위해 칼을 휘둘렀던 아들들이나 모두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했던 속에 사실은 답이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걷지 말았어야 길이 있었고, 걸어야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가 말하는 내용입니다. 진심으로 세겜과 하몰, 그리고 세겜 성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는 길이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했을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심판을 면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나만 구원받았다’는 구원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 생활을 해서 다른 영혼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는데도 그것이 죄인 모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는 깊은 진리, 깊은 말씀,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개인적인 경건이라고만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 깊이 있는 은혜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이들을 향한 사랑이 커진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신앙이 좋아지고 있구나. 교회에 왔더니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있구나. 말씀을 많이 알게 됐구나”라고 느끼는데,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전혀 커지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배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여러분의 삶과 생각과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변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한 것을 보고 얼마나 통탄했습니까? “하나님, 내가 이럴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오지 않으려 했던 겁니다. 저들이 회개하면 어떡합니까? 그는 자신의 생각이 정당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죽을 자들이라고 생각했음에도 하나님이 명의 악인이라도 다시 돌아오기를 그토록 원하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까지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신앙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가 변하지 않으면

죄의 대가는 분명 죽음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소식은 바로 죽음을 대신하실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사 우리의 죽음이 되신 그리스도가 사건의 해답이었고, 그분은 그래서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그저 호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을 훈련시키지도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어제도 오늘도 똑같이 인생에서 조금 편안한 것을 즐기며, ‘그래도 우리 교회는 문제없는 교회다’, ‘재정 문제가 없는 교회다’, ‘목사님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라고 만족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은 있지만 정도 교회도 어디 있어’라고 만족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교회가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 되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교회는 그래도 괜찮은 교회’라고 생각하며 만족한다면,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교회는 괜찮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정도에 머물러 있다면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정도 마음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족하지 마십시오. 우리 목사도, 역시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우리는 뒤에 것을 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줄이라도, 글자라도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내가 사는 동안 숨결 하나라도 하나님과 가까이 가기를 소원으로 삼고 생명을 바쳐 사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님과 가까이, 구주와 함께 죽으십시오. 그리하면 구주와 함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는 야곱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야곱의 아들들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인데,

어찌하여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까?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희의 믿음이 어느 자리에 있는지,

제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깨닫게 주옵소서.

어느덧 집사가 되었고, 어느덧 장로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목사가 되었고, 이제는 담임 목사라는 말로도 불립니다.

주님, 저는 과연 누구입니까?

저는 주님 앞에 올곧게 있는 사람입니까?

진정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주님, 우리는 누구입니까?

참으로 성도, 거룩한 사람들입니까?

 

만약 우리가 거룩한 사람들이 맞다면,

주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주님, 저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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