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6절로부터 15 까지 입니다.

 

 “야곱과 그와 함께 모든 사람이 가나안 루스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땅을 네게 주고 내가 후손에게도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기둥을 세우고 위에 전제물을 붓고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아멘.

 

야곱의 영적 침체와 벧엘로의 부르심

지난주에 저희는 창세기 35장에 숨겨져 있지만 지나치기 쉬운 가지 사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시간입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우리는 절을 읽는 동안 시간을 놓치기 쉽습니다. 기간 동안 야곱은 숙곳과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영적 침체는 하루아침에 것이 아니었음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에게 계속해서 표지판을 세워주셨겠지만, 그는 표지판을 제대로 보지 못하거나 지나치며 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의 눈앞에 분명한 표지판을 세우는 사건이 일어났고, 야곱은 그곳에서 멈춰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시고 그가 들은 말씀은 여전히 동일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우리가 놓치기 쉬웠던 하나는 우상이었습니다.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집에서 드라빔을 가지고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십여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야곱의 집안에는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야곱과 가족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을 , 길은 우상을 버리고, 정결하게 자신을 씻으며, 옷을 바꿔 입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제단을 쌓는 길이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벧엘로의 여정

야곱이 세겜에 있을 때도 제단을 쌓았는데, 하나님은 벧엘에서 다시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밧단아람은 라반이 살던 북쪽 지역으로, 야곱이 십여 년도 훨씬 전에 떠난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세겜에서 돌아왔다고 하지 않고, 밧단아람에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이는 이전에 있었던 세겜의 길과 연결하여 가지 길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세겜으로 때도 숙곳에서 세겜으로 옮겼다고 하지 않고, 밧단아람에서 세겜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밧단아람에서 세겜으로 길과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길을 비교합니다. 번째 길은 겉으로 보기에 평안한 길이었지만, 영적 침체를 겪게 했고 결국 엄청난 사건을 맞이하게 파멸의 길이었습니다. 길에서 야곱의 가족은 감당하기 힘든 치욕을 겪었고, 영육 간에 지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밧단아람에서 벧엘로 향하는 길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길이었습니다. 길은 분명 시작은 좋은 길이 아니었습니다. 힘든 길이었고, 실패와 함께 벧엘로 올라가는 길이었으며, 평안 대신 두려움이 있었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길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선언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가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길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침내 벧엘에 도착합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일은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단을 쌓은 그곳의 이름을 ‘엘벧엘’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벧’은 ‘집’을, ‘엘’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앞에 다시 ‘엘’(하나님) 붙어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이름이 됩니다.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 엘벧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어떤 장소에 이름을 짓는다면 '하나님의 ', '비가 내리는 ', '사람이 많이 사는 '처럼 의미를 담아 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엘벧엘’,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다시 짓습니다. 이름은 단순히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야곱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벧엘의 하나님’,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30년이 훌쩍 넘는 옛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과거 인생의 최대 위기,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치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사건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또다시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는 실패했고, 가나안 족속에게 붙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셨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그는 과거처럼 돌베개를 베고 잠드는 대신, ‘엘벧엘’,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예전에 제가 형을 피할 ,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주님, 이제 저에게 다시 한번 나타나 주십시오. 저에게 길을 열어 주십시오. 야곱은 ‘엘벧엘’이라 부르며, 자신을 구원하셨고 자신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다시 한번 만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름을 통해 ‘벧엘의 하나님’을 다시 한번 부르고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죽음의 등장

, 그렇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이 나와야 할까요? ‘엘벧엘’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야곱아, 내가 너를 구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 6절과 7절을 읽고 8절로 넘어가면 아주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야곱은 분명히 하나님께 길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호소에 대한 응답처럼 보이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죽음의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스토리 흐름에 전혀 맞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창세기 35장을 읽어보셨다면, 장에는 번의 죽음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첫째는 지금의 드보라의 죽음이고, 그다음은 라헬의 죽음, 마지막은 이삭의 죽음입니다. 죽음의 이야기가 야곱의 이야기와 함께 기록되었을까요?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내용입니다.

 

드보라의 죽음, 야곱의 인생

가나안 여정은 벧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세겜과 벧엘을 거쳐 결국 헤브론까지 갔던 것처럼, 야곱 또한 아버지 이삭이 있는 헤브론으로 가는 것이 마땅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10 넘게 가나안의 어귀인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벗어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표지판을 따라 벧엘로 왔습니다. 하나님께 길을 달라고 부르짖었지만, 그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놀라운 구조입니다.

 

성경에서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본문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앞으로도 다시 언급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그녀가 리브가의 유모였다는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리브가가 시집 그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처음으로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녀가 리브가 때부터 야곱 때까지 함께한 성실하고 신실한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있습니다. 게다가 야곱이 그녀를 위해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녀를 상수리나무 밑에 묻은 나무 이름을 ‘알론 바굿’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통곡의 상수리나무' 의미합니다. '알론' '상수리나무', '바굿' '통곡' 또는 '눈물' 뜻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여인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는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점에 그녀의 죽음이 성경에 기록되었을까요? 사실 그녀의 죽음은 창세기 이야기의 흐름에서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결과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삭의 아내이자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죽음에 대해서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야곱이 슬피 울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매우 의도적인 기록입니다.

 

드보라의 죽음이 언급된 것은, 그녀가 리브가로부터 야곱의 생애를 함께하며 그의 인생 여정을 같이 걸어온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통곡한 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유모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도 함께하지 못했던 그의 고난 가득한 인생을 끝까지 함께했던 드보라의 죽음을 보며, 야곱은 자신의 인생 여정 전체를 통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물을 담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드보라의 인생은 성경에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야곱의 인생과 동일한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구절과 통곡의 상수리를 보면 저는 시편 56편이 떠오릅니다. 비록 다윗의 시편이지만, 고백은 야곱과 다르지 않으며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의 방황을 주님께서 헤아리시고 내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두십시오. 나의 모든 사정이 주님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야곱은 자기 인생 전체가 눈물이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물 모두가 주님의 병에 담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슴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단을 쌓았던 곳은 죽음의 장소가 되었고, 눈물의 통곡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임하는 장소가 됩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약속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직접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10 자신이 들었던 복음의 소리를 다시 듣게 됩니다. “야곱아,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직접 부르신 것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야곱아,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아, 네가 나를 붙잡고 울지 않았느냐?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호세아서는 야곱이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아 이겼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간구와 눈물로 하나님을 붙잡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통해 그는 ‘승리한 자’가 것입니다.

 

‘알론 바굿’, 눈물의 상수리나무 아래서 주님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내가 너의 눈물을 알며, 눈물이 나의 가슴에 있다. 눈물이 너로 하여금 승리라는 이름, 이스라엘을 얻게 하지 않았느냐? 10 전에 야곱에게 주어졌던 이름이 다시 나옵니다. 여러분, 이보다 훨씬 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0년이 아니라 30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야곱이 다시 듣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샤다이).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생육하며 번성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언약이 너의 속에서 그리고 너의 자손에게서 이루어지게 것이다. 가나안 땅의 수많은 민족과 족속들이 너를 죽이려고 달려든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어떤 어려움이 닥치고 눈물이 흐르며 소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눈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너의 눈물을 나의 가슴에, 나의 병에 담았으며 내가 너와 함께했다. 여러분, 이것은 그저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약속했고, 내가 그렇게 말했으며,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동안 너와 함께하며 약속을 지켜 너를 여기까지 인도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앞으로도 인도할 하나님이다. 너와 자손에게 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야곱도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이렇게 묻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이 있습니까? 십자가보다 뜨거운 것은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고 피보다 진한 것은 없습니까? 주님, 나의 마음은 너무나 단단해졌고 굳어버렸습니다. 마음을 깨뜨릴 만한 것은 십자가나 예수의 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주님, 저는 말씀을 들어도 마음은 여전히 차갑고 단단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이 앞에 있고, 주께서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주님, 다른 것은 없습니까?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10 , 30 , 그리고 40 전에 여러분이 들었던 복음이 여러분에게 다시 울려 퍼질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나는 내가 너에게 선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너와 함께 이루어낸 하나님이다. 너를 지켰으며, 너와 함께했고, 너의 인생을 가슴에 담았다. 야곱은 가물가물해졌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주님은 복음을 지키셨고, 복음대로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그리고 복음대로 우리를 건지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복음을 이룰 것이다. 이것은 같은 복음이며, 같은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같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러분을 향하여 똑같은 은혜와 한량없는 사랑으로 오늘도 말씀하시는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그리고 야곱,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 10 , 30 , 그리고 모든 과거로 소환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고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고백’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사랑했었다”는 과거형도 아닙니다. “내가 30 전에 너를 좋아했어”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고백은 “내가 너와 했던 약속을 남김없이 지키고 있다. 약속을 이루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눈물을 알고, 너의 인생을 알고 있다. 얼마나 나를 떠나려 했는지, 마음대로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이 누구이신 것을,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 잊어버리고 그저 자기 좋은 것을 좇아 순간순간마다 자기를 위해 살아온 자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너의 눈물을, 너의 인생을, 너의 흔들리는 삶을 가슴에 담았다. 약속을 지켜오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야곱처럼 40 전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그곳으로 하나님은 그의 손을 인도하시고, 그를 붙잡고, 아니 여러분을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곳에서 너의 이름을 부르겠다. 이스라엘아, 나의 사랑하는 자야. 저는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는 순간이 마치 아가서의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아가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하나님과 함께하는 대화

저는 오늘 본문 13절이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구절을 읽으시면서 많은 생각을 하시겠지만,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앞부분,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입니다. 부분의 영어 성경을 보면 Where he had spoken with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spoken to him’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과 ‘함께’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모세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만 기록했고, 야곱이 하나님께 어떤 말을 했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과연 야곱은 이때 하나님께 무슨 말을 했을까요?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우리는 분명히 짐작할 있습니다. 자신의 눈물을 그치게 하고, 아픔과 인생을 당신의 가슴에 담으신 하나님으로 인해, 야곱은 비로소 아픔이 감사로, 과거가 상처가 아닌 감동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가 있는 그곳은 하나님으로 인해 만족하는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인생을 돌아볼 , 자리야말로 그의 가슴이 떨리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주께 가까이 가는 것이

시편 73편은 아삽의 시이지만, 야곱의 시이기도 하고 우리의 시이기도 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떨고 있지 않았을까요?

 

“나의 가슴이 쓰리고 심장이 찔린 듯이 아픕니다. 나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지키심과 보호를 받으면서도 살았던 순간순간들이 가슴을 쓰리게 하고 심장을 찌르는 아팠습니다. 나는 우둔하여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그때 주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나는 다만 주님 앞에 있는 마리 짐승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와 함께 계셨기에 나의 오른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주님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나를 주님의 영광에 참여시키실 것을 내가 알고 믿습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주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확장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리에 무엇을 보러 오셨습니까? 가디나의 구석,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이곳, 구석의 건물 속에서 주님을 예배하러 오신 여러분은 무엇을 보러 오셨습니까? 하나님의 위로입니까? 하나님의 격려입니까? 무엇을 보러 오셨습니까?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있겠습니까? 땅에 있더라도 제가 주님 외에 무엇을 바랄 있겠습니까?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의 든든한 반석이시요, 제가 받을 모든 것의 전부이십니다. 나의 몫에 전부이십니다. 주님을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이요, 주님 앞에서 정절을 버리는 자는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저의 복이니, 제가 하나님을 저의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일을 전파하렵니다. 아멘.

 

여러분의 인생이 야곱의 인생만큼 슬프고 아프고 쓰리겠습니까? 아니면 너무나 우둔하여 하나님의 손길조차 모르고 내가 잘난 알고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가끔 주님을 기억했다는 것으로, 가끔 주님을 찬양했다는 것으로, 가끔 주님을 생각했다는 것으로 위로를 삼으며 여기까지 것이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마리 짐승과 같사오나, 주께서는 나를 이렇게 기억하시고 사랑하사 나의 눈물을 병에 담으셨으니, 주께 가까이 가는 것이 저의 복입니다. 고백이 도대체 누구의 말입니까?

 

그래서 야곱은 이곳을 다시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 부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집이요, 인자와 자비가 베풀어진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나의 이름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 나의 아들, 나의 , 나의 자녀!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생육하라는 말은 열매를 맺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새로운 이름을 가진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당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창조를 받아 하나님과 함께 창조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보라,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새로운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게 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나님의 영광의 깃발을 여러분의 속에 꽂아 나가십시오. 당신의 마음에, 당신의 욕심에, 당신의 생각에, 우리들의 가정에, 우리들의 교회에 하나님의 통치를 꽂아 나가십시오. 이곳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가나안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여러분이 앞으로 정복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을 꽂으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의 깃발을 꽂으십시오. 이곳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곳이요, 교회는 누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곳이니, 교회의 모든 구석구석에 우리가 생각하는 어두운 곳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곳이 있다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도, 여러분의 욕심에도, 여러분의 냄새나는 쓰레기에도 하나님의 깃발을 꽂으십시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깃발을, 십자가의 영광의 깃발을 꽂으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죽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깃발을 기억하며 생명을 전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지금도 잃어버린 우리의 가족들, 주님의 백성들을 찾고 계시며,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실 것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여러분은 바로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며, 여러분의 눈물을 하나님의 심장 속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잊은 적이 없으시며, 여러분을 다시 소환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지 않았느냐? 너의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냐? 내가 너의 모든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나에게서 떨어지지 말고 나와 함께 길을 가자. 이것이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길이요, 주님의 음성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여, 나의 어여쁜 자여, 나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자.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를 부르신 주님 앞에 우리는 무엇이라 답하겠습니까? 나의 눈물을 가져가신 주님, 제가 무엇으로 주님과 함께 걷겠습니까? 나의 과거와 아픔을 가져가신 주님, 십자가 아래에서 저는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이 되신 주님, 저는 지금 어디로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에게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마땅히 전해야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기심과 편안함에 깃들어 세겜 땅에 지금도 머무르고 있다면 주님 손을 펼치사 우리에게 말씀해 주옵소서. “사랑하는 자여, 어여쁜 자여, 나와 함께 일어나 올라가자. 나의 나라를 함께 세우자. 주님, 말씀해 주옵소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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