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4 27절로부터 31 까지 입니다.

 

“야곱의 여러 아들이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속의 물건을 노략한지라.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아멘.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 창세기 34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창세기 34장은, 여러분이 아시는 많은 훌륭한 설교자들조차도 굉장히 어렵게 만드는 성경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더 핑크(Arthur Pink)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실제로 장을 창세기 강의에서 뛰어넘었습니다. 과연 여기서 어떻게 교훈을 얻을 있겠느냐는 많은 질문이 본문에 있습니다.

 

디나라는 딸이 밖에 나갔다가 그곳 성읍 족장의 아들에게 눈에 띄어 그만 납치되고 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이 알려지자 그의 형제들, 오빠들이 참지 못하고 성읍의 모든 남자를 죽여버리는, 참으로 어마어마하고 비참한 사건이 바로 3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이 없어도 성경을 읽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뛰어넘는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저도 34장을 뛰어넘으면 좋겠지만, 34장의 주제에 대한 결론이 35장에 있습니다. 그러니 35장의 결론으로 가기 위해서는 34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제 34장을 읽는 가장 중요한 도구 하나는, 바로 이야기가 어떤 결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결론이 35장에 있는데, 짧게 말씀드리면 ‘벧엘로 올라가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장을 거쳐야만 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사건을 다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건을 다룰 우선 야곱을 중심으로 추적해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하몰과 세겜,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추적할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벧엘이 아닌 세겜에 머문 야곱

야곱은 이미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고, 그곳에서 유명한 씨름을 했으며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에서를 만나 길고 길었던 갈등의 시간을 드디어 해결하게 됩니다. 그가 강하거나 잘나서 그러한 복을 받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에서에게 무언가를 바쳤기 때문도 아니었고, 하나님께 대단한 순종을 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은 그가 자기의 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약함을 알고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았던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싸우셨던 것이죠. 그와 싸우기도 하셨지만, 사실은 그를 위해 싸우셨습니다. 에서를 이긴 역시 야곱의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결과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요단강 반대편 동쪽으로 갔다가 다시 요단강을 건너 도착했는데, 그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여러분, 세겜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처음으로 마주한 도시였고, 그곳에서 아브라함도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겜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벧엘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길을 걸어갈 같았던 야곱은 세겜에 도착해서 땅을 삽니다. 족장들이 하지 않는 하나입니다. 그가 땅을 샀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겜에서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34 전체의 사건이 바로 세겜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항상은 아니지만 분명하게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도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가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르실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우리는 야곱이 당연히 벧엘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야곱의 사다리’로 알고 있는 환상을 곳도 벧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잘할 있었습니다.

 

세상적 평안(샬롬) 유혹

그런데 그는 세겜에 머물렀을까요? 성경이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세겜이라는 단어는 ‘어깨’, 특히 ‘산의 어깨’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산어깨에 머물고 있었던 야곱의 모습을 저희가 지난 시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곳, 정상에 오르지 못한 곳에서 유명한 말을 합니다. ‘엘엘로헤 이스라엘’. (El) ‘하나님’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히브리어에 능숙해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로헤(Elohe)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을 대신하는 말이므로, 결국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고백이 중요했을까요? 야곱이 이제까지 번도 그런 형태로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그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게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본래 고백을 벧엘에서 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께 약속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겜에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야곱은 지금 세겜을 벧엘처럼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곳은 벧엘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벧엘은 세겜에서 멀지 않습니다. 이십 마일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사실 세겜은 벧엘에 비해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훨씬 의미 있는 도시이기는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심산과 에발산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산들은 지금도 사마리아인들에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금도 소수지만 남아 있으며, 유일하게 자신들의 방식대로 유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 제사를 드리는 곳이 바로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기에 이스라엘은 하지 못하는 일을 그들은 방식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겜은 오래전부터 종교적인 중심지였습니다. 사이에 있는 도시가 세겜이며, 교통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매우 발달한 곳이어서, 야곱의 입장에서는 밧단아람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마주한 크고 번성한 도시였던 셈입니다. 그는 그곳에 제단까지 쌓았습니다.

 

여기까지 본다면 야곱이 세겜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겜에 그토록 집착했는지를 알려주는 실마리가 하나 있습니다. 창세기 33 18절을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세겜 성읍에 이르러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야곱은 세겜 성읍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앞에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절에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밧단아람도, 가나안 세겜 성읍도, 장막도 아닙니다. 단어는 바로 ‘평안히’라고 번역된 ‘샬롬’입니다.

 

여러분이 아는 샬롬입니다. 단어는 야곱의 생애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야곱의 생애는 그야말로 ‘폭풍의 언덕’이었습니다. 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고, 마음 편히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쫓고 쫓기며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아왔던 야곱의 삶을 이야기하는 처음으로 등장한 단어가 바로 샬롬입니다. 얼마나 달콤한 단어입니까? 야곱은 이제껏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평안을 세겜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이 샬롬을 경험한 이곳 세겜에 이르자 마음속으로 확신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셔서 제단을 쌓고 머무르게 하신 곳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내게 이런 평안함을 허락하셨겠는가? 이것이 그의 확신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벧엘 대신 세겜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감정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바로 야곱이 세겜에 머물게 과정을 추적해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당히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추진할 ,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면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확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희 교회에 등록하시는 분들 중에도 “교회에 왔더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마음이 평안한데,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물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확신할 있는 근거는 아닙니다. 지금 야곱이 ‘내가 이토록 평안을 느끼는 이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는 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경험하는 , 스스로 생각하고 확신하는 것보다 중요하고 우리 삶의 모든 것보다 앞서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벧엘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자신의 감정과 환경, 그리고 확신에 따라 세겜에 머무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 조건, 환경은 모두 중요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통해 얼마나 유익을 얻는가도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좋아 보이고 괜찮아 보이더라도, 우리는 우선적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확신이 말씀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것이다’라는 선입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끌리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길 때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마음에 맞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말은 참으로 어렵고 무거운 말씀입니다.

 

말씀을 알아야 하는 이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왜냐하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너무 모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계십니다. 너무 몰라서 하나님의 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어떤 사람이 말씀을 모르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고 한다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말씀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10, 20 믿었으면서도 “제가 정말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혹은 “저는 아직 성경을 번도 읽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른 직업의 세계에서 20 동안 계산원으로 일했는데 “저는 버튼을 어떻게 누르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시면서도, 고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성경을 읽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 지식을 쌓아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거나 ‘나는 성경을 이만큼 안다’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모두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배울수록 우리는 영생이 무엇인지 더욱 확실하게 알아가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며 어떤 것을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물론 성경을 전혀 모르고도 신앙생활을 수는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래왔듯이, 그저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정도만 알고, 필요할 기도하고 응답받으며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일을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힘들 위로해 주시고, 함께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고 여길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신앙은 거짓 신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것일 있습니다. 혹은 이미 길에 들어섰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헛된 신앙의 모습 하나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필요한 하나님,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필요한 하나님은 원하지만, 이상의 하나님은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외에 무엇이 필요한가? 이토록 두꺼운 66권의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사랑이시라는데, 정도만 알면 되지 않는가? 여러분, 정말 그럴까요? 성경이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사람을 만나 10 동안 사랑한다고 말하며 연애했는데, 정작 사람의 이름도, 사는 곳도,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랑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기 좋은 것만 먹으며 ‘분명 사람도 좋아할 거야’라고 생각해왔다면, 상대방은 “당신은 나에 대해 아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얼마나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아십니까? “그거야 말씀대로 기뻐하시죠. 그렇게 아시는 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그토록 싫어하십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을 그토록 힘들어하십니까?

 

아마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말일 것입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기뻐하는지는 알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나의 소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을까요?

 

흔들리지 않는 반석, 하나님의 약속

그렇기에 우리는 말씀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는구나, 하나님을 배워야 하는구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순종해야 하는구나. 모든 것이 항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처럼 보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반대 또한 사실입니다. 이보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짐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이 하신 말씀을 어떻게 지켜내시는지, 우리 인생 속에서 어떻게 당신을 보여주시는지, 우리를 어떻게 붙들고 계시는지를 말씀을 통해 더욱 깊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환경, 내가 생각하는 성공과 유익, 내가 의지하는 조건과 상황, 모든 것이 흔들리고 사라져 버릴 , 모든 것이 나에게서 멀어지고 아무 의미 없어 보일 ,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는 약속이 우리를 붙들고 있기에, 우리는 그때 비로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구나.

 

모두가 나를 떠날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했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주가 무너져 내려도 내가 안전하다고 말할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약속 위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말씀에 무슨 능력이 있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매일 ‘우리 집은 무너지지 않을 거야’ 혹은 비행기를 타며 ‘이 비행기는 떨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믿는 것보다, ‘내일도 태양은 뜬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억만 배는 확실한 것이 바로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너와 함께한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억만 배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얼마나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까? 그처럼 많은 공격을 받은 사도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만약 바울이 오늘 강단에 서서 설교한다면, 어떤 이들은 소문만 듣고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기까지 사람이라는데, 저런 사람이 어떻게 설교를 있나? 이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만약 저의 과거를 아는 분이 자리에 계신다면 “한 목사 내려오게. 내가 아는데”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저를 모르시기에 ‘이제까지 보니 괜찮은 사람 같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속을 아는 분들이야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그러한 과거를 지녔던 바울이었기에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았겠습니까? 그의 구원 자체를 흔드는 말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를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인생에는 수많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너희는 율법으로 돌아가지 마라.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냐, 아니면 믿음의 은혜냐? 다시는 종노릇하지 말라”고 은혜를 외치자, 바울을 시기하던 거짓 교사들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저 자는 은혜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자다”라며 그를 반대했습니다. 또한 “너희도 할례를 행하고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신자가 누려야 자유를 빼앗는 일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갈라디아서 6장에서 이렇게 선포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말은 ‘내게 예수의 흔적이 있으니 건드리지 마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이런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나를 붙들고 있다. 그러니 내가 복음을 잘못 전했다는 지적이 아니라면, 어떤 것으로도 나를 이상 괴롭게 하지 말라. 나를 흔들 있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고백은 마르틴 루터의 말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루터는 당대 존경받던 주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네가 책을 불태우고 너의 믿음을 번복한다면 용서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교황의 명을 받은 주교들이 그를 정죄하고 있을 루터가 얼마나 떨었겠습니까? 하룻밤을 지낸 그들 앞에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잘못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나는 주님의 말씀을 떠날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주장을 번복할 없습니다.

 

그가 본래 용기가 넘치고 담대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루터는 마음이 매우 약한 사람이어서, 그의 아내가 남긴 일화가 많습니다. 그가 하도 쉽게 절망하고 좌절하니, 어느 아내가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는 시늉을 했습니다. 루터가 “누가 죽었는가? 하고 묻자, 아내는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루터가 “그게 무슨 말인가!”라고 하자, 아내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당신이 이토록 떨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합니까?”라고 말하며 그를 깨우쳤다고 합니다. 루터는 소심한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칼뱅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담대할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타고난 용기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때문에 그들은 담대해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믿음이 좋은 사람만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담대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세상은 이렇게 것이다”, “하나님을 믿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나님이 하실 있는 일이 무엇이냐”라며 우리를 조롱할 , 우리는 이렇게 말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롱이 당신들 눈에는 사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말씀 위에 서겠습니다. 당신들의 말은 결국 사라질 것이며, 허공으로 흩어져 당신들의 죽음과 함께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의 훌륭한 말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결국 사라집니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말씀 위에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확고하며, 말씀 위에 있기에 우리는 담대할 있는 것입니다.

 

평안의 땅에서 만난 폭풍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세상의 평안 속에 자기 발을 두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샬롬 속에 발을 담그고 있었기에, 그는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알아야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단단한 말씀 위에 있다 할지라도, 세상의 샬롬이 아닌 하나님의 샬롬 속에 거한다 할지라도 폭풍은 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야곱의 생애뿐 아니라 모든 신자의 생애에서 발견되는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평안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샬롬의 땅이 가장 위험한 땅이 됩니다. 그곳은 분명 약속의 땅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죄와 싸워야 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주님의 복음과 함께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없는 놀라운 평안이 우리 안에 숨겨져 있음을 언뜻언뜻 보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힘들고 절망적일 , 세상의 어떤 말로도 위로받지 못할 ,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달콤한지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눈물 흘리며 울고 있을 , “성령께서 말할 없는 탄식으로 너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는 말씀이 마음을 뜨겁게 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쳐 아무것도 없을 , 주님께서 함께 우시며 괴로워하시고, 한숨 쉬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우리는 분명히 폭풍을 만납니다. 세상이 주는 샬롬, 세상의 평화는 결코 우리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폭풍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누리고자 했던 세상의 평안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의 가사는 어떻습니까? 가사에는 폭풍우도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 영혼 평안해. 영어 원문 가사는 It is well with my soul’입니다. 우리말로는 ‘평안해’라고 번역되었지만, 이는 사실 극적인 고백을 담고 있는 가사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허망한 샬롬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진짜 샬롬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샬롬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붙잡아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조차 사실은 끊어져 나갑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고 풍파가 일어도 맥없이 끊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돈을 벌어본 적도 있고, 잃어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건강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압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 한두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약을 먹게 됩니다. 역시 해마다 약이 늘어나는 같습니다. 우리의 몸은 약해지기에 우리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정신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우리를 지켜줄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묻습니다. 무엇이 너를 지켜줄 있겠느냐고.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 얼마나 똑똑했는지가 중요할까요? 얼마나 성공했는지가 중요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때 우리를 붙잡아 주실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분뿐입니다.

 

잘못된 반응: 평안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야곱

여러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는 산어깨와 같은 안주하는 삶에서 문제를 만납니다. 그냥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매우 깊은 상처를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것은, 우리가 마주하는 진짜 문제는 폭풍이나 상처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진짜 문제는, 고난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붙들고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실질적인 내용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주치는 수많은 문제는 결국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막상 닥쳤을 때는 인생 최대의 문제 같지만, 지나고 나면 그렇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때는 대입 시험이 인생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살던 아파트에서 시험 전날 함께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새벽에 신문 배달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래층에서는 , 신문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가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친구 집이 있는 5층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 하는 소리만 났습니다. 신문을 놓는 소리였는데, 아이가 발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을까요? 집에 3 수험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3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세탁물을 수거하는 분들조차 3 있는 앞에서는 조용히 해야 정도였습니다.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일이 지금 와서 보면 어떻습니까? ‘왜 그때 그렇게까지 했을까? 조금 놀고 재미있는 일을 걸’ 하고 생각하지 않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그토록 대단해 보였던 시간도 결국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정에서 하나님을 놓친다면, 그것은 정말 모든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문제 자체를 해결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통해 하나님을 찾는지, 그분을 붙잡는지, 십자가로 나아오는지, 하나님이 인생의 전부임을 알아가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기에, 우리는 누구나 문제를 통과할 있습니다.

 

만약 문제 자체를 푸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 능력으로 해결할 없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버는 것이 쉽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서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책을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문제가 사실은 ‘너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하나의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아느냐’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은, 야곱이 세겜 땅의 평온함에 안주하다가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약할 주님을 붙잡았던 그가, 평안 속에서 스스로 강한 자요 가진 자가 되었을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디나의 사건입니다. 당시 열다섯 정도로 추정되는 디나는 야곱의 유일한 딸이었을 있습니다. 야곱 가족은 성읍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살았는데, 소녀였던 디나가 성안이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구경을 나갑니다.

 

어떤 학자들은 당시 결혼 적령기의 여성이 보호자 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고 말하지만, 명확한 자료가 없어 모든 학자가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디나는 아버지를 닮은 셈입니다.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나갔다는 것은,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구경하러 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읍의 족장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브라함의 가문은 대대로 미인이 많았던 같습니다. 레아를 제외하고는 딸이나 자손 중에 미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던 같습니다. 디나 역시 대단한 미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디나를 보고 정식으로 교제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족장의 아들이었던 그는 힘이 있었기에, 강제로 그녀를 끌고 갔습니다. 본문은 ‘욕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폭력적인 사건의 끝은 매우 비극적입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죄질이 매우 나쁜 범죄입니다. 그런데 사건의 결말은 우리의 예상과 조금 다릅니다. 세겜은 일이 있은 후에 디나를 더욱 사랑하게 되어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했습니다. 여러분은 속으로 ‘불행 다행이다’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결혼하겠다고 하니 그나마 나은 일이 아닌가 싶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불행 다행이 아니라, “네가 우리 누이에게 수치를 안겼고 우리 가문을 욕되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수심에 불타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들의 복수는 세겜 사람을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성읍의 모든 남자를 죽이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도무지 정당한 복수라고 없습니다.

 

일을 주도한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의 친오빠들이었고, 모두 레아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이 일을 저지른 , 나머지 아홉 명의 아들들도 성읍에 가서 재물을 약탈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일어난 , 야곱이 아들들을 꾸짖는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엄청나고 비참한 사건입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평안을 기반으로 살아가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엄청난 사건 앞에서 야곱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5절입니다. “야곱이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디나에 관한 소식을 들은 야곱은 아버로서 분노하며 당장 쫓아가야 마땅했지만, 그는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절만 보면 아들들이 돌아오면 함께 복수하려는 것처럼 보일 있지만, 반대입니다. 여기서 ‘잠잠했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들들은 소식을 듣고 분노하며 복수를 꾀했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겜과 그의 아버지가 결혼을 논하러 왔을 때도 야곱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아느냐”는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들들의 보복심은 커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방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평안에 빠지기 시작하고 평안을 잃을까 두려워하게 되면, 눈앞의 죄를 보고도 죄라고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죄를 방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분명히 보이는데도 그것을 방관하는 역시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야곱의 모습에서는 디나에 대한 걱정이나 근심을 전혀 찾아볼 없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오직 자기 자신의 평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30절의 말씀에 드러납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큰일을 저지르는 바람에 내가 화를 입어서 죽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야곱의 유일한 걱정이었습니다.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야곱이 평안함에 빠져 자기 유익과 안위만을 추구하기 시작했을 , 그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했을까요? 평안함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자기가 가진 것을 세상에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정도까지 축복해주셨으니 이제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새벽 기도도 가고, 헌금도 테니, 이상 삶에 간섭하지 마시고 가진 것을 빼앗아가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제가 조금 과장했지만,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이 주는 평안에 젖어, 그것이 흔들릴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문제의 핵심: 하나님을 놓치는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의 소유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배웠고, 그래서 천사를 붙잡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땅이 주는 평안을 맛보자마자 그는 흔들렸습니다. 평안을 빼앗기는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말해볼까요? 그가 두려워하고 빼앗길까 무서워했을까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약자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나는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는 진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들이 쳐들어오면 나는 죽는다’는 그의 판단은 정확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그분이 누구신지를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가장 잊어버리십니까? 우리는 그토록 불안해하며 우리의 영혼은 두려움에 떱니까? 앞날을 그토록 알고 싶어 하고, 하는 일에 자신이 없으며, 일이 잘되기를 보증받기 위해서만 기도하고 매달립니까? 우리가 근본적으로 누구의 손에 있으며, 우리 인생이 어떤 길을 가고 끝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모르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어떤 길로 인도하실지를 정말 모릅니까?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부러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내가 누리는 것들을 계속 누리고 싶어서, 내가 가질 있는 것들을 갖고 싶어서, 세상이 주는 행복을 놓치기 싫어서 우리는 일부러 하나님을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이며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약속하셨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답답한 하루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과정임을 배우고, 그분으로 인해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려야 하는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일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평강은 붙잡으려 하면서 평강의 주님을 놓친다면, 결코 참된 평강을 누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지키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진 평안, 직장, 사업, 통장, 건강, 젊음,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시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시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중에 더욱 마음을 지키라. 무엇을 지키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향한 눈길을 번도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눈을 맞추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좋은 것이 그분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왕을 붙들라

사랑하는 여러분, 마지막까지 야곱은 자기의 생명과 유익을 지키기 위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의 모습은 우리를 참으로 안타깝게 합니다. 그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들을 죽이는 바람에 내가 화를 입게 되었다. 가나안 족속들이 일로 나를 치러 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들이 나를 죽이면 너희도 끝장이다. 세겜 땅에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그가 번이라도 “나의 아들들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야곱이 하지 못한 일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십니다. 그것이 35장의 내용입니다. “야곱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평안이 아니라 평안의 , 평강이 아니라 평강의 왕이신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에 감추어진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바라볼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은 실패하는가’, ‘왜 일은 풀리는가’, ‘왜 이렇게 답답한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지,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는지를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자녀를 키운 부모님들께 여쭤보십시오. 대학까지 보낸 부모님들은 자녀를 키울 어땠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아이가 영원히 곁에서 흡혈귀처럼 붙어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제법 그럴듯하게 자라 용돈도 줍니다.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과정을 통해 배우는 것이 고작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구나’ 정도라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봐야 것은, 모든 시간이 흐르고 모든 상황이 바뀌어도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며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여전하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구나.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마주한 문제가 아니라 문제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죄를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 죄를 바르게 보지 못하는 죄를 깨닫게 하옵소서. 제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분노하며 그토록 불안해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놓쳤기 때문이 아닙니까? 주님, 이것이 저의 진짜 죄임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저를 붙잡고 계시며 ‘벧엘로 함께 올라가자’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생각하는 평강이 아니라, 평강의 왕이신 하나님 안에, 주님 안에 거하는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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