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3장 1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아멘.
하나님과 다투신 야곱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야곱이 하나님과 더불어 싸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투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싸우셨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싸우실 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자신을 낮춘 사실이 야곱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의지하며 살았던 야곱이 허벅지 뼈를 맞고 자신의 약함을 깨닫자, 눈물과 간구로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매달립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이겼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죄 문제와 허벅지 뼈의 의미
또 한 가지 면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부분입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멈추게 됩니다. 사실 여호수아 역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여기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주님을 거역하고 나왔을 때, 주님께서 에덴동산을 천사들의 불칼로 막으셨습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거룩한 땅을 상징합니다. 마치 에덴과 같으며 또한 성전과도 같습니다. 이처럼 거룩한 땅이기에 우리가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한 그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가나안과 그 가나안이 상징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천사의 무리를 만납니다. 서로 대화하지는 않지만 야곱은 그것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야곱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서가 한참 저 밑에 살고 있는데, 그 에서를 굳이 만나서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인생 속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일, 즉 우리가 구원의 역사라고 부르는 그 일들이 지금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넓은 구조 속에서 이제 야곱의 이야기를 보게 되면,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 사건이 죽음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야곱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를 만나 죽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만났는데, 하나님이 야곱을 공격하십니다. 먼저 야곱을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야곱의 죄에 대적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매달리지만, 여전히 자신의 힘과 전략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에서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앞서 보내고, 가족들을 모두 앞서 보낸 뒤 자신은 뒤에 남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씨름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끝까지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허벅지 뼈를 치십니다. 허벅지 뼈는 생식의 능력, 즉 생명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생식의 능력이 있는 곳을 치셨을까요? 이는 그를 통하여 앞으로 하나님께서 창세 때부터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곧 약속의 후손이 와서 우리를 구원하실 그 상징을 담고 있는 부위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치셨다는 것은 그 일을 수행해야 할 메시아의 고난을 상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은 너무 성경을 짜 맞춘 것 아닙니까?"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허벅지 뼈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성경에는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허벅지 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종을 이삭의 아내를 찾아주기 위해 보낼 때, “내 허벅지 밑에 손을 넣고 맹세하라”고 말합니다. 이곳은 언약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이야기에서도 나중에 다시 나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내 해골을 반드시 가나안으로 가져가라”고 맹세시킬 때, 요셉도 똑같이 허벅지 밑에 손을 넣습니다. 이는 언약의 장소이며, 야곱에게 이 언약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언약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야곱이 하나님을 뵙고 죽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약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과 매우 흡사합니다. 하나님이 밤중에 아브라함에게 횃불로 나타나셨을 때, 고기를 쪼개서 앞에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와 언약을 맺을 텐데, 만약 그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이 고기처럼 쪼개져 죽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만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그 언약 사이를 지나가심으로써, 아브라함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내가 대신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생애에서 허벅지 뼈를 치신 것은 “네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내가 대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을 제가 읽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치사, 곧 죽이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참된 목적
야곱이 하나님을 보고도 살았다는 것을 감격적으로 이야기한 이유는 그가 십자가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 즉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이 히브리서를 보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이었으나, 사건을 일으켜 광야로 쫓겨납니다. 성경은 그 사건을 “모세가 그리스도를 세상의 어떤 보화보다 귀하게 여겼다”고 해석합니다. 당시 모세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성경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모세가 구원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홍해를 건넜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세례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정확하게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이 물로 들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내셨으며 살리셨다.” 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보여준다는 것을 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유월절 어린 양이 자기들을 위해 대신 죽음으로써 자기들이 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구약에서 보여주는 구속 계시, 곧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점점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계시가 점점 분명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해하기보다 나에게 필요한 말씀, 내가 은혜받을 말씀, 혹은 내 환경에 맞는 말씀을 찾게 됩니다.
사업이 잘 안 될 때는 “하늘 문을 열어 내려준다”는 말씀이 제일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두려운 일이 생겼을 때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는 말씀이 제일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해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장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알려주시려는 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통해 여러분을 어떻게 붙잡고 계시며, 무엇을 약속하시고, 어떻게 여러분의 삶과 함께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장엄한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을 붙잡는 것이지, 그때그때 필요한 말씀을 찾아 여러분을 붙잡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말씀이 때로는 여러분의 상황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말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공자의 말씀을 읽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성경은 사실상 아무런 능력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성경 말씀이 진정한 말씀의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말씀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이것은 구약 시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사실을 놓친다면, 야곱의 이야기가 그저 “우리는 얼마나 연약하고 교만한 존재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 울며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네가 이겼다’고 칭찬해 주실 것이다”라는 교훈으로 끝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런 내용들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성경 전체와 잘 조화되는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야곱의 이야기가 만약 그것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성경을 부족하게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단순히 교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훈과 함께 생명을 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지식은 여러분의 지식을 확장하거나, 교양이나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알지 못하던 정보를 제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알려주는 것이 목적도 아닙니다.
생명을 위한 말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설교를 하고 듣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생명을 앞에 두고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이 전파되고 서로 나누어지는 이 순간은 여러분의 생명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사의 설교가 귀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그냥 지나쳐도 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영원한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80년, 100년(혹은 120년)의 삶으로 끝낼 사람입니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곱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게 되고, “네가 이겼다”는 말이 야곱이 이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야곱은 살게 되었고, 야곱은 그것을 다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는 지금 깨닫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이 오실 때를 그토록 즐겁게 기다렸으나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아브라함과 야곱, 모세의 이야기가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이해합니다. 2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쓰여진 이 성경이 어떻게 놀라운 통일성을 갖게 되었는지, 그 기적과 같은 일들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2천 년 전에 죽은 나사렛 청년 예수가 오늘 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야곱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 그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지, 멀리 있는 하늘의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자신의 생명을 삼는 사람이며, 그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한국 사람도 아닌 유대인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이 모든 이야기들이 마치 구슬이 꿰어지듯 하나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떤 뛰어난 종교인이 좋은 책을 써서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모세 시대에 모든 사람이 모세오경을 갖고 있었을까요?) 쓴 글들이 기적과 같이 하나로 이어져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줍니다.
예수를 믿은 모든 사람들이 놀라겠지만, 뛰어났던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기독교를 부정하고 여러 종교를 혼합한 마니교로 귀의했습니다. 수사학의 대가이자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그는 기독교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구약 이야기가 어떻게 말이 되는가? 시아버지와 며느리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느냐”라고 부인했던 어거스틴이, 암브로스 주교의 설교를 듣고 바로 이 부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일관성 있게 전달하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셨구나.” 이에 너무나 놀란 어거스틴은 다시 신앙을 갖고, 자신의 삶을 회개하며 그 유명한 『고백록』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첫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다리를 절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를 볼 때마다 “내가 죽어야 했는데 살았구나”라고 느낄 것입니다. 볼 때마다 “내가 죄인이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죄인이지만 나를 살리셨구나”라고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와 같습니다.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학자 클라인은 이 사건을 '저스티피케이션 바이 페이스(Justification by Faith)', 즉 이신칭의를 보여주는 그림자라고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100%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이 이야기의 내용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표
이 일은 야곱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야곱과 같은 표, 곧 언약의 표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성찬입니다. 구약학자 이안 두기두가 쓴 책이 있다면 아끼지 말고 사십시오. 이분이 쓴 많은 주석과 해석은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분은 조직신학자가 아닌 성경신학자로서 성경을 한 권씩 해석하고 주석을 달아줍니다. 그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의 흔적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주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싸우셨던 십자가의 씨름을 기억합니다. 나를 위해 주님의 몸이 찢기시고, 나의 죄를 위해 그분의 피가 흘려진 것을 기억합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을 간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강한 군대가 우리를 위협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우리를 놓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먹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야곱은 다리를 절며 나중에는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그가 다리를 절며 매일 자신과 주님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 것처럼, 이 성찬은 우리가 어디에서 구원받은 자이며 무엇을 받을 사람인지 알게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씹어서 먹은 음식보다 더 가까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바로 그것이 되기를 기꺼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네 입으로 씹어라, 받아먹어라. 네 입으로 마셔라. 내가 너의 몸속에 있듯이, 내가 너에게 그렇게 가까이 있으며, 그렇게 함께하며, 그렇게 너를 사랑한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언약의 표입니다. 이 언약의 표를 행할 때마다 우리는 그저 성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고백하는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야곱이 만났던 또 다른 얼굴, 곧 하나님의 얼굴 이야기가 에서를 통해 한 번 더 나옵니다. 에서의 등장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멋있습니다. 야곱이 다리를 절며 아침 해를 맞으며 걸어갑니다. 얼굴은 환했겠지만 다리는 몹시 아팠을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브니엘이라고 불렀던 그 자리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해를 맞으며 저쪽에서 한 사나이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는데, 혼자 오는 줄 알았더니 뒤에 400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무리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영화로 치면 '두둥' 하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에서를 만났을 때, 야곱이 에서를 얼마나 두려워했습니까? 에서를 만나면 죽을까 봐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얼마나 변했는지, 강을 건너지 않고 가족들을 앞세웠던 야곱이 이제는 가족들을 모두 뒤로 보내고 자기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야곱은 분명히 변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축구의 신이라 불리는 손흥민 선수와 동네 축구라도 한 번 해봤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가 거기서 파고들어 손흥민을 제쳤다면, 다음에 어디 가서 축구를 할 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가 손흥민하고 같이 게임했던 사람이야. 손흥민을 내가 제쳤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만나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 야곱이 에서를 두려워할까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보자마자 달려가 일곱 번이나 절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야곱이 에서를 무서워해서 절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체 맥락을 무시한 것입니다. 야곱의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나는 이제 하나님을 이겼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에서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히려 일곱 번 절을 하며 에서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종이라고 말합니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났습니다. 그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며, 우리가 해석하기에는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는 언약의 표를 갖고 있었고, 다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이것이 내 목숨 값이구나. 내가 이래서 살아났구나”라고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지금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으로 자신이 신하가 되어 군주를 맞이하듯, 그 당시의 예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예물을 보내고, 자신을 종으로 칭하고, 에서를 주라고 부르며 일곱 번 절을 하는 모든 행동이 신하가 왕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는 사실 이 일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이삭은 야곱에게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축복했습니다. 이 축복에 의하면 에서가 야곱을 주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야곱이 에서에게 “주”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이삭과 에서를 속여 얻었던 복을 공개적으로 다시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을 속여 빼앗은 것이니, 당신에게 돌려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야곱은 장자권을 포기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회개를 생각할 때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진정한 회개와 축복
우리는 보통 회개를 말로만 하거나 사과로 끝내려 하지만, 성경은 회개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그 결과에 대해 책임감 있게 대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말로 끝내는 것은 성경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대가 지불을 통해 교만을 꺾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 또는 회개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히 원상 복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이만큼 잘못했으니, 이만큼 갚아주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이제 상대방에게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판단해서 내 마음에 드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끝까지 걸어가는 것, 그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회개는 원상 복구로 끝날 수 없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에게 회개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장자권을 돌려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을 속여 빼앗았으니 돌려주겠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끝까지 추적하며 씨름하신 이유는, 야곱이 장자권이 주는 복을 통해 이 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복을 누리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것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변한 것입니다. 에서가 “네가 보낸 이 짐승 떼는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야곱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여기서 '예물'은 새번역 성경에서는 '선물(gift)'이라고 번역했지만, 원문에 가장 가까운 번역은 '축복(blessing)'입니다. 이 단어는 이삭이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선물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때 받았던 그 축복을 당신에게 줍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았던 축복 모두를 줍니다.”
야곱은 자신이 추구했던 것이 이 세상에서 누릴 복이었고, 장자권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원했던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당신에게 줍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짜 장자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의 삶 20년을 통해 그는 무엇이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이며 어떤 것이 진정한 복인가를 깨달았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의 진짜 의미를 알았기에, 오히려 에서를 섬겼던 것입니다. “내가 죽음이다.”
하나님의 응답과 사랑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는 모든 이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이요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너희를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너희를 섬기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기 왜 오셨습니까?
“나는 구원받았네”라고 외치기 위해서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만을 외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야곱과 같이 “내가 추구했던 것들이 왜 내 마음을 공허하게 했는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과 영혼을 충만하게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기 위해서입니까? 이것을 깨달은 야곱에게 장자권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에서를 보았을 때 “내가 당신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파님 엘로힘(P'ney Elohim)’인데, 줄이면 ‘파니엘(Paniel)’입니다. 야곱이 그 지명을 ‘브니엘(Peniel)’이라 부른 것처럼, 에서의 얼굴에서 ‘브니엘’을 본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면, 에서를 보며 “당신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말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이 일이 기쁨과 영광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순간입니까? 왜냐하면 에서가 그를 보자마자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죽이려고 달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껴안고 목을 맞대며 입을 맞추고, 서로 얼싸안고 울었습니다.
야곱에게 에서의 행동은 단순한 형제의 만남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시는 응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자신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회복했는지, 그리고 에서와 어떻게 관계가 회복될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응답이자 사랑이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하나님과 같다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보여주는 이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얼굴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자신을 살리신 하나님, 그의 죄를 이기신 이스라엘 그 하나님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자권이 혈통이나 육정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정한 장자권은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후손”이라는 것을 온전히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약속의 후손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것이 진정한 장자라는 것을 깨달은 야곱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복
이 복은 세상에 머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그네였고 라반에게 속았던 야곱에게 이 사건은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시작했는지를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다툼을 끝냅니다. 더 이상 큰 자와 작은 자의 싸움도 끝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의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큰 자를 섬김으로써 오히려 참된 장자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이루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복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도록 도와주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우상으로 삼았다면, 이제는 자신의 죄와 싸우시고, 자신을 위해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분은 그저 함께 걷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고 공허함을 채워주시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나를 위한 나의 신, 곧 나의 우상을 섬기던 야곱은 이제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제 나의 죄와 싸우시고, 나를 위해 승리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저 나와 함께 걷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 내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고, 공허한 내 영혼에 하나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나는 너와 함께한다”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달려와 우리를 껴안고 입 맞추시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위해 언제든지 싸우고 있으며”, “언제든지 그 승리를 나누고 나의 모든 것을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종이 아니라 나의 친구이며”, “너는 외인이 아니라 나의 아들, 나의 자식, 나의 새끼들이다. 내가 너를 결코 놓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 야곱은 바로 브니엘, 그 얼굴을 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만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러분을 결코 놓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앞으로 함께 걸어갈 야곱의 인생은 여전히 파란만장합니다. 그러나 이제 알겠습니다. 확신 없이 라반의 집에 거하며 20년을 속고 속으며 살았던 야곱의 인생이, 이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인생에 들어갔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복인지를 저희도 함께 누리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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