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3 12절로부터 20 까지 입니다.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가 이르되 내가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세겜 성읍에 이르러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아멘"

 

하나님의 약속을 좇는 : 야곱과 우리의 이야기

저희가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사실 이삭의 장례식 사람이 만나지만, 실질적인 이야기는 본문에서 마무리됩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야곱은 속여서 얻었던 땅에 속한 것이라 여겼던 것을 사실상 에서에게 돌려줍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이며, 약속이 진정으로 붙들어야 참된 장자의 권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하늘에 속한 것들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땅의 것에만 마음을 두었던 그의 전체가 드디어 변화를 갖게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얍복강 사건이 바로 그의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깁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내가 당신의 얼굴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같다"라고 말한 것은 놀라운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야곱이 이미 이야기했듯이 '내가 죽을 같았다'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얼굴을 보면서 단지 영광을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얼굴을 보고 내가 죽을 알았다" 고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살았습니다. 그가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가 아는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나 살았다' 얍복강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당연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었으나, 그의 죽음 대신에 오히려 허벅지 뼈를 맞고 살아났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본문에는 예수님의 이름이나 그분이 하실 일이 적혀 있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야곱도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었던 사건을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마다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확신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분명히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너희가 영생을 얻는 알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여기서 성경은 예수님 당시의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을 너희가 읽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냐.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모든 가족을 데리고 아비와 친척을 떠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온 사건도, 단순히 아브라함의 대단한 신앙이나 순종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읽는 중요한 태도라고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의 왕인가, 하나님의 왕인가

브니엘을 겪었던 야곱은 이제 '브니에서', '에서의 얼굴' 보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브니엘' '' 하나님, '브니' 얼굴이라는 뜻인데, '브니에서' 물론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아니지만 브니엘과 짝을 맞춰 설명한 것입니다. 살아난 야곱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야곱은 오늘 본문 12절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에서가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라고 말합니다.

 

아마 에서가 좋은 의도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야곱아, 내가 자리를 잡은 형이다." 그는 자기 이름을 , '에돔'이라는 나라와 '세일'이라는 도시까지 가질 정도로 성공했습니다. '에돔' 붉다는 뜻이고, '세일' 털이 많다는 뜻으로, 모두 에서 자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도시와 땅의 이름이 그의 이름을 따서 생길 정도였으니, 에서는 그곳에서 왕초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야곱이 주는 모든 물건을 "괜찮다" 일언지하에 돌려보낼 만큼 부유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가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을 하나님의 땅은 약속을 통한 유업인 가나안 땅입니다. 에서는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약속의 땅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약속은 받았지만 자기 땅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야기의 중요한 측면을 알기 위해서는 에서가 말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12절에 나오는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동사 앞에는 '앞에'라는 전치사가 붙어 있습니다. , "내가 앞에서 동행하리라" 뜻입니다. 동행은 함께 가는 것인데, '앞에서 동행하리라'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동행한다' 단어에는 '간다' 뜻도 있으므로, 좋은 번역은 "내가 앞서 가리라"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내가 너를 앞서 가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앞서 가리라,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말투는 누가 가장 많이 씁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말입니다. 에서가 지금 하나님의 말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엇갈린 , 그러나 이어진 구원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이나 절하고 선물을 바친 것은 마치 자신의 왕에게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고대 애굽 문서에 따르면, 왕에게 가장 중요한 예절 하나가 절하고 선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이 자신을 낮추자, 에서가 "이제부터 내가 너를 인도하겠다, 내가 너와 동행하겠다" 말합니다. 에서는 지금 야곱에게 "내가 너의 노릇을 하겠다" 제안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른 것은 몰라도 가지는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얍복강 사건을 통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20 동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오히려 생명을 얻은 자가 되었으니, 그의 대답은 분명해야 합니다. '형님, 저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겠습니다. 같이 가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예상과 달리 매우 애매한 답을 합니다. " 주도 아시거니와, 우리 자식과 가축들이 약하니 천천히 가서 세일에 있는 주를 뵙겠습니다." 그는 분명히 '간다' 말했지만, 그의 마음은 행동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뒷부분에서 있습니다. 많은 학자는 모습에서 '야곱이 버릇을 버리고 머리를 쓴다'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야곱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번째 이야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에서가 다시 제안을 합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여기 종을 그냥 놔두고 테니까 종들이 너를 도와서 오게 해라" 말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 그렇게까지 하시 다뇨"라고 대답하며 다음 말을 덧붙입니다. " 주여, 나로 하여금 주의 은혜를 얻게 하옵소서." 여기서 '' 에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쉽게 읽어 '은혜'라는 말만 나오면 좋아하지만, 말은 문맥상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당신에게 내가 잘못했는데, 선물을 드렸으니 나에게 은혜(용서)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관되게 야곱을 해석한다면, 대답은 완곡한 거절을 표현하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있겠습니까? 저는 없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도움을 받을 없으며 당신이 원하는 대로 없으니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는 전체 문맥을 해석이 조금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야곱스럽다' 하는 번째 해석이 전혀 틀렸다고 수는 없습니다.

 

가지 해석을 모두 생각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에서는 "내가 왕이니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고 있고, 야곱은 "그럴 없습니다"라는 것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따라가지 않았음에도 에서가 아무 없이 자신의 길인 세일로 돌아간 것을 , 야곱이 완곡한 거절을 했고 에서가 그것을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어울립니다. 어쨌든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속에서 야곱의 행동이 말하는 바를 확실하게 있습니다.

 

세일은 사해 남쪽 끝에 있는 에돔 땅입니다. 지금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요단강 근처의 북쪽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 헤어질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고 곧바로 북쪽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이는 '나는 당신이 나에게 제안한 것을 전혀 따를 의도가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의외의 길로 향합니다. 그가 곳은 아주 애매한 곳입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가장 먼저 가야 곳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야곱이 제단을 쌓으며 돌아오면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던 벧엘입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로 가는 대신, 성경에 '숙곳'이라고 불리는 장소로 갑니다. 숙곳은 요단강을 다시 건넜다는 뜻입니다. , 왔던 길을 되돌아 건너편으로 것입니다. 에서와는 반대 방향이고, 원래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것과도 반대 방향입니다. 그가 단순히 실수해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그곳에 집과 짐승 우리를 지었다는 사실에서 있습니다. 집을 지었다는 것은 그곳에 살겠다는 뜻이고, 오랜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도입니다. '숙곳' '초막'이라는 뜻으로, ' 집을 지었다'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내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다' 말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름, 인생: 야곱과 이스라엘

처음에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을 , 야곱은 그곳에 기둥을 세우며 " 기둥으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겠다"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하나님의 집이 아닌 자기 집을 먼저 짓고 있습니다. 북쪽으로 올라간 것은 분명 "나는 에서를 왕으로 섬길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믿음의 반응이었지만,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는 참으로 독특합니다. 독특함은 그의 이름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원래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고, 사라의 이름은 사래였죠. 이름이 바뀐 성경은 다시는 그들을 원래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바울이 다시 사울로 불리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계속해서 '야곱' '이스라엘' 함께 사용합니다. '야곱' '속이는 '라는 뜻이고, '이스라엘'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워주신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다른 인물들처럼 단순히 이름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이름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름은 그의 삶에 평생 따라붙게 됩니다.

 

이처럼 야곱은 어떤 때는 '야곱'답게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어떤 때는 '이스라엘'답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모습은 루터가 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지만 동시에 죄인이다"라는 진리를 너무나 보여줍니다. 야곱은 분명히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임을 고백했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난 구원의 영광을 체험했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숙곳에 머물며 자기 집을 먼저 지으려 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우리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이 어떤 모습인지를 야곱을 통해 보여주실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본성을 직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야곱의 이야기를 깊이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흔들리는 믿음: 불안과 방황의 시간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얼마나 많이 고백합니까? "내가 성전입니다"라는 진리를 깨달았을 "주님, 내가 주님의 거룩한 전으로 지어져 가기를 원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조금만 편한 길이 보이고, 두려움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금방 넓은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요단강을 다시 건넜다는 것은 그가 에서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믿음이 있었다면, 그렇게 멀리까지 도망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야곱이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브니엘로 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브니엘로 가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야곱이 몹시 불안해하며, 자기 집을 세워 스스로를 보호하고 삶을 다시 세우고 싶어 했음을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야 길을 가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찬송하면서도 우리처럼 의심과 불안 속으로 들어갑니다. 야곱의 삶의 순간들은 단순히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어 외면할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숙곳에 집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 끄집어내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요단강을 다시 건넌 야곱은 이제 당연히 벧엘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이 아닌 세겜으로 갑니다. 아브라함도 갔던 곳이니 세겜이 나쁜 곳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세겜에서 땅을 샀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곳에 정착해 살겠다는 뜻입니다.

 

벧엘까지 갔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은 넘었지만, 벧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세겜에 머무르려 했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읽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께서 가시는 데까지 저도 가게 하시고, 멈추는 곳에서 멈추게 하소서'라는 찬양도 부르고 고백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멈추라고 하시는데도 잘났다고 앞서 나가고, 가자고 하시면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는 같아, 우리는 이야기를 보며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제단을 쌓겠다고 약속해 놓고, 엉뚱하게도 세겜에서 제단을 쌓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아 제단을 쌓았는지 모르지만,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름이 바로 '엘엘로헤이 이스라엘'입니다.

 

''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엘로헤이' '나의 하나님' 됩니다. '이스라엘' 야곱의 이름입니다. '엘엘로헤이 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며, 나아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야곱이 말을 처음 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는 이전까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만 불렀을 , '나의 하나님'이라고 직접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창세기 28 21, 벧엘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20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비로소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고백 속에는 벧엘과 라반의 집에서 겪었던 모든 수모와 아픔 속에서 자신을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키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하나님이 이제 자신을 지키시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결코 잊어서는 가장 중요한 고백 하나입니다.

 

우리의 고백, '나의 하나님'

김보은 씨가 작곡한 찬양 중에 '엘리야의 하나님'이라는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쌓은 번제물을 불로써 태워버린 여호와여"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곡의 후렴에는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엘리야가 불렀던 하나님, 제단을 불로 태우셨던 하나님이 엘리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전율하게 됩니다.

 

지금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나 이삭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생 속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 내가 눈물을 흘리고, 답답해하고, 쓰러지며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에도 끝까지 나를 붙잡아주신 하나님, 바로 '나의 하나님'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약 고백을 벧엘에서 했더라면 얼마나 완벽했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세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 이런 고백을 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야곱은 정말 불성실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숙곳으로 갔다가 세겜에서 땅을 사고 정착할 생각을 한단 말이냐? 야곱아, 야곱아, 벧엘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만도 한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고 결국 벧엘로 인도하십니다.

 

십자가의 , 그리고 참된 은혜

그러나 세겜에서 그렇게 고백했던 야곱에게는 오늘 이야기인 33 이후, 34장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모두 "주님,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든 했든,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길을 어떻게 걸어왔습니까? 생각할수록 자신을 돌아볼수록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 약속해 놓고, 조금만 부담을 주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을 돌리고, 힘들게 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에게 X표를 긋습니다. 때로는 마음속에 미움으로 가득 차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은 네가 져야 십자가가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앞에서, 우리는 "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라며 버리고 던져버리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내가 실수할 때마다 일으켜주시겠지"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 함께 가는 속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약속의 유업을 받을 때까지 어떻게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다시 제단을 쌓으며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진정한 이름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처럼, 세겜이라는 장소 또한 이야기의 중요한 중심입니다. '세겜' '어깨'라는 뜻으로, 산의 어깨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정상이 아닌 어깨에 머물렀습니다. 벧엘이라는 정상까지 조금만 올라가면 되는데, 그는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야곱을 다루고 계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나의 하나님' 이야기를 남기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야곱이 드디어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는구나"라고 감동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겜에서 나온 고백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하셨겠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드리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외침

그분만이 부르신 '나의 하나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야곱이 자랑스럽게 불렀던 '나의 하나님'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우리 때문이 아닙니까? 야곱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모세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외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 하나님께 드릴 것은 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주님 안에 들어와 있기에 "나의 모든 드리리"라고 찬양하며 " 밖에 드릴 없어 드립니다"라고까지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 밖에 있을 ,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있는 것은 죄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죄밖에 드릴 것이 없는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가 되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외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부활의 새벽, 예수님은 여인에게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고, 나의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다." ' 엘리오이' 아니라 ' 아비', '나의 아버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과 아브라함도 그토록 바라왔던, 세상이 감당할 없는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것은 우리에게 " 아버지가 이제 너의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놓아 그분을 부를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싸우실 것이며, 땅에서 여러분의 '나의 하나님' 되어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 부르게 되었습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오늘도 살리시며, 영원한 평강과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 버림받으심으로 저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제 저희가 주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옵소서. 인생과 함께하신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심을 알게 하옵소서. 저희를 품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모든 유업을 상속하시고, 심지어 생명까지 주시는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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