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  1절로부터 7 까지 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아멘.

 

야곱의 삶에 대한 두 가지 사실

계속해서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는 가운데, 야곱이 숙곳과 세겜 땅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드디어 큰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두 주에 걸쳐 저희가 살펴보았던 디나 사건입니다.

 

정말 야곱의 생애에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야곱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야곱의 이야기에서 디나 사건을 다루면서 쉽게 놓치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입니다. 디나 사건이 일어날 때, 디나의 나이는 14, 15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사실 라반의 집에서 떠날 때 디나는 막 태어났거나 아주 어린 아기였습니다. 이는 에서를 만난 후에 자그마치 1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적어도 10년 넘는 시간 동안 야곱은 세겜과 숙곳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여러분이 어쩌면 읽으면서도 놓칠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야곱이 가족에게 명령하는 내용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여 년 동안 야곱의 집안에 우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반의 집에서 훔쳐왔던 드라빔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상들이 그의 가정에 10년 동안이나 있었습니다. 한두 해가 아니라 자그마치 10년을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35장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진 야곱

야곱은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났으나, 자신의 평안과 그에게 찾아온 샬롬에 빠져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피하거나, 문제를 그저 자신의 삶이 깨지지 않는 선에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죠.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인 할례조차도 복수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평안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에 빠져 있었죠.

 

이것을 보면 분명한 영적인 문제가 있었고, 영적인 침체가 이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영적 침체의 가장 무서운 부분은 자기들이 아무 문제 없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평안하다’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점점 영적 침체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일어나자 그게 드러난 것이죠.

 

야곱은 두려움이 있었고 그것을 피해 도망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 특히 아들들은 분노가 일어나 공격하고 싶어 했고, 결국 살인에 이르는 아주 비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뿐 아니라 그가 가장이었던 가족 전체, 이스라엘이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지가 일을 통해 드러나게 것입니다.

 

문제의 가장 밑바닥에는 분명히 야곱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어깨’라는 의미의 세겜까지밖에 올라가지 않았거든요. 그는 원래 벧엘까지 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세겜에서 한두 해도 아니고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았던 사람이고,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을 보았던 사람이며, 또한 하늘의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눈에 보이는 평안, 땅이 그에게 주었던 평안에 묶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하늘을 보는 삶과 그가 가야 하는 길을 사실은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길을 잃은 영혼

제가 미국에 와서 얼바인에 몇 년 산 적이 있어요. 그때 무슨 일이 있어 제가 이 교회에 오기 전의 일이었는데, 산타바바라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굉장히 옛날 일이죠. 그런데 얼바인에서 출발해 한 시간 동안 산타바바라가 있는 북쪽으로 갔는데, 좀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가는 동안 길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1시간 정도 갔는데 차에 문제가 있거나 제가 운전을 잘못한 것도 아니어서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고 계속 갔죠. 그런데 건물들이 LA와 좀 다르게 보였어요. 1시간쯤 지났으니까 LA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바다가 계속 옆에 있는 겁니다. LA 건물과는 다른 건물들이 계속 나오고요.

 

그때 제가 ‘내가 잘못 왔나?’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LA가 이렇게 변했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LA에 오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변했나 싶었던 거죠. 여러분, 생각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사실은 샌디에이고였어요.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간 거죠.

 

야곱이 길을 잃었다는 의미는 그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고 하늘을 향해 가야 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땅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1시간 정도 내려갔지만 야곱은 10년입니다. 10년 동안 얼마나 영적으로 가라앉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평안한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혹시 야곱이 정신을 차렸을까요? 가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지에 대해 굉장히 혼란을 겪고 있었던 거죠.

 

저 같은 경우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빌딩을 보고 안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본 것은 5번 사우스(South) 표지였어요. 표지판에 ‘사우스’가 나왔더라고요. ‘나는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고서야 ‘아, 잘못 왔구나’ 하고 깨달았죠.

 

 하나님의 표지판: 벧엘로 올라가라

야곱은 어떠했나요? 야곱에게도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표지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직접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우리가 말씀을 멀리한다는 것을 말씀을 잘 읽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멀리한다는 것은 심지어 말씀을 읽고 있어도 그 표지판을 지나친다는 뜻입니다. 말씀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면, 어느 날 날을 잡아 ‘오늘은 이제까지 안 먹은 말씀을 실컷 먹어야겠다’고 성경책을 펴고 열심히 읽는다고 해서 그날로 말씀을 깨닫고 아는 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주시는 표지판을 지나치는 것이, 사실은 내가 말씀으로부터 멀리 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죠.

 

그러한 분들의 대부분은—저를 포함해서—내가 지금 가야 할 길이 어딘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으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보다는 바른 길에 지금 가려고 애쓰고 있고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운전을 잘하고 있고, 내 차는 고장도 나지 않았고,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괜찮아 보여도 방향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여러분이 간 것만큼 멀리 가는 것입니다. 간 것만큼 놓치는 것이고, 간 것만큼 여러분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의 눈이 표지판을 보지 않고 지나칠 때마다 그 거리만큼 여러분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1절에 분명히 나타나시죠.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떠나는 것처럼 반대 길을 가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하나님의 표지판을 우리 앞에 두신다는 것이죠.

 

정상에 오르는 길: 올라(olah)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세겜은 ‘어깨’까지인데, 정말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은유적인 표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올라’(olah)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번제는 제물을 태워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리는 거죠. 그래서 번제를 히브리어로 ‘올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너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은, 번제와 관계된 일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모든 것을 다루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다음 주에 예배에 대해 다루면서 함께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올라’라는 단어는 시편에서도 자주 사용됩니다. “너는 여호와의 산에 오르라.” 바로 이 ‘올라’라는 단어를 쓴 거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 너는 지금 어깨에 있지 말고 정상으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어깨와 정상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산으로 친다면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지 않고 중턱에서 계속 맴도는 사람은 계속해서 나무는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정말 정상에서 볼 수 있는 가슴이 탁 트이는 그림을 끝까지 볼 수가 없잖아요. 정상으로 올라갈 때 우리는 변화를 경험하고, 시야가 달라집니다.

 

진정한 변화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안두기드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그렇게 일어나지 않는가. 영적 탄생, 즉 거듭남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갱신 즉 영적으로 다시 부흥하는 첫 번째 단계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스스로에게 맡겨두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얼음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빠르게 타협에 빠지고, 거짓 목표에 흔들리며, 우상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물질은 항상 질서에서 무질서로 나아간다는 열역학 제2법칙…” 과학자들이 중력의 법칙도 믿을 수 없지만, 이 법칙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가장 믿는 법칙입니다. 모든 물질은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없는 모든 물질은 당연히 무질서로 향하게 됩니다. 이 법칙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한다면, 우리의 영혼에도 하나님이 붙잡아주시는 것이 없으면 우리는 질서로부터 무질서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반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택하신 자, 언약을 맺은 자를 놓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셔서, 그분은 야곱에게 오셨고, 그것처럼 우리에게도 오셔서 우리를 다시 부르시고 그분과의 동행을 새롭게 하신다.” 야곱의 침체가 하루아침에 온 게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주세요. 10여 년에 걸쳐 왔습니다. 그것을 야곱이 스스로 깨닫거나 눈치채기는 참 어려웠을 겁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신앙을 돌아보지 않고 매일 점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침체에 빠진 것조차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주일날 예배하고, 찬양도 하고, 때로는 감동도 받고, 말씀을 들으며 깨달음도 있죠. 여러분의 신앙이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다시 한번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침체는 잘 보이지 않거든요. 만일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혹시 나에게도 그런 침체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냥 넘기지 마시고 경고음으로 듣고 다시 한번 여러분을 살피셔야 합니다. “너희가 성령 안에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피라”고 얘기하죠. 그것은 여러분을 흔들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확신하며 안다고 생각할수록, 우리 모두는 우리의 연약함을 알기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죠.

 

정상의 경험이 있는 우리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야곱도 그랬습니다. 그 삶 속에 벧엘이 있었고, 브니엘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죠.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갈 때 네게 나타났던 곳으로 가라.” 벧엘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도 그 벧엘이 있고, 또 야곱이 겪었던 브니엘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문제를 보는 시각이 한순간에 바뀌었던 정상의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의 오해

많은 분들은 이것을 ‘첫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내가 옛날에, 왕년의 그리스도인일 때는 봉사도 열심히 하고 많은 것을 했는데 지금은 신앙이 식은 것 같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아닙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신 겁니다.

 

여러분이 이제는 다 아시겠지만, 70이 넘으신 분들께 제가 여러 번 여쭤봤습니다. “장로님, 집사님, 혹시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면 좋으시겠어요?” 저는 좋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 90%는 ‘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로 돌아가서 그 일을 또 하라고? 스무 살에 돌아가서 또 지지고 볶고 싸우라고? 거기서 또 여기까지 오라고?’ 그 말이 일리가 있잖아요.

 

여러분, 자꾸 하나님과의 첫 만남을 첫사랑이라 부르며 연애할 때가 제일 좋았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니요. 지금의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잖아요. 연애할 때 좋았죠. 하지만 지금의 아내와 남편을 아는 것과 연애할 때 알았던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는 아는 것을 가지고 선하게 쓰지 않고 악하게 쓰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얘기하면 ‘홀라당 뒤집어진다’거나 ‘마음을 긁을 수 있다’거나 ‘무척 싫어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아는 게 문제죠. 하지만 분명한 지식이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왜 첫사랑으로 자꾸 돌아가신다고 하세요? 다시 연애를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이제는 성숙한 지식을 바탕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많이 아는 자리에 선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뒤로 돌아가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옛날에 예수를 참 열심히 믿었는데…’가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을 더 많이 아시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시고 동행하시며 이 구원을 시작하셨는데, 여러분이 ‘통뼈’가 아닌 이상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인도를 무시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아는 자리에 와 있습니다. 훨씬 더 신앙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에 더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거지,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아는데도 그대로 살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그전으로 돌아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러니 첫사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정상을 경험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과 함께 걸었을 때, 우리가 중턱에 머무르지 않고 어깨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과 함께 가더라는 겁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

산에 오르면 중간에 멈추면 아쉽지만, 정상까지 오르면 정말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그 모든 것을 아래로 볼 수 있다는 거죠. 저기 집이 아주 작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 작은 집 하나를 갖겠다고 매달 모기지론(mortgage)을 갚아가며 애쓰는 우리의 모습을 그 산 위에서 보면서 느끼게 됩니다. “야,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았나?”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하늘을 보게 됩니다. 늘 차 속에, 건물 속에 갇혀 하늘을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 하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멀리 보게 되죠. 마음이 탁 트인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내 인생이 저 땅바닥에 붙어 있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여러분의 시각과 마음에 상쾌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정상에 오르는 길 동안 숲도 즐기고 꽃도 보며 걸어가는 것 자체를 즐기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왜 그럴까요? 체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입니다. 실력이 있으니까요. 제가 아주 옛날에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청봉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 외에 올라간 모든 기억은 딱 한 가지입니다. 제 앞에 갔던 사람의 뒤꿈치, 그것 외에는 아무 기억이 없어요. 너무 힘이 드니까 옆에 나무가 있었는지, 돌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앞에서 낙오되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려고 앞 사람의 발꿈치만 보고 갔습니다. 그래서 대청봉까지 올랐다는 것 외에는 아무 기억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질 체력으로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니 그 길을 어떻게 즐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것은 체력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며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력을 기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들을 우리가 기쁨으로 받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동행하여 그 정상에 올라 우리가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 경험들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는 야곱을 보면서, 야곱도 처음에는 물론 정상을 향해 갔겠죠. 그런데 지금 그는 땅만 보고 있습니다. 영적 체력이 바닥난 것입니다. 벧엘도 잊어버린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벧엘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명령하십니다.

 

예배를 향한 첫걸음: 우상을 버려라

,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야곱이 하나님의 표지판을 읽은 것입니다. 여러분,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 북쪽으로 가야 하는데 남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샌디에이고로 가자’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히 길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다시 돌아서 가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입니다.

 

야곱이 지금 그 표지판을 보니까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잊어버렸는지를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이제까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았던가? 내가 평안이라고 알았던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상상하지 못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벧엘로 올라가라.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말을 듣고 가족들을 모아놓고 “우리 벧엘로 올라가자. , 짐 싸! 가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이방 신상들, 우상들 다 가져와!” 야곱 심정의 이 변화와 그가 들은 메시지를 여러분이 이것을 통해 알게 되지 않습니까? 지금 야곱이 어떤 메시지를 듣고 있고 무엇을 발견했는지, 우리에게도 이 부분이 어쩌면 가장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안경이 우상이다

할례받은 하나님의 백성, 그런데 라반의 집으로부터 가져왔던 드라빔도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얻었던 수많은 우상들, 그래서 우상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였던, 우상들이었죠. 하나님이 우리의 전부가 아닐 때 우리는 반드시 우상을 만들거나 찾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도 분명히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전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죠. 그때 그들은 우상을 찾고 만들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나는 그래도 하나님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분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기 때문에, 제가 조금 다르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을 찾는다는 말은, ‘내가 무언가 더 대단한 것을 만들어서 섬긴다’고 생각하기보다 이것이 더 가깝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이라는 안경을 끼고 이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다가, 그 위에 또 다른 안경을 하나 더 올리는 것이 우상입니다.

 

도수가 전혀 없는 선글라스를 제외하고, 여러분의 눈에 맞는 안경을 썼는데 그 위에 아무리 좋은 안경이라도 안경을 끼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이 뒤틀려 보일 것입니다.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우상은 여러분이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쉽게 도망가려 합니다. ‘나는 그래도 하나님이 우선이지. 오늘 얼마나 피곤한데 교회에 나왔어. 졸지만 그래도 예배는 하잖아’라며 도망가시죠. ‘성경 공부는 왜 안 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집에서 성경 읽습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단지 하나님보다 더 먼저 사랑하는 것도 우상이지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안경 위에 안경을 하나 더하는 것도 우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눈으로 나 자신을 보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으로 나를 보기 시작하며, 그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가

신앙이 좋은 분들과 이야기하고 신앙을 나누는 일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분은 신앙이 정말 좋구나’ 하다가도 어느 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함께 얘기를 나누는데 “집사님, 정말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해서 “무슨 일인데요?”라고 물었더니, “글쎄요, 우리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하버드에서 입학 통지서가 왔네요. 제가 자랑하려는 말이 아니고 왜 왔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분의 가치관에 안경이 하나 더해지기 시작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실제로 감사할 일이기는 하죠. 그러나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감사하겠죠. 자녀들이 잘되는 일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폐쇄된 사회 속에서 자녀 한 명이 잘되기 위해서는 수백, 수천 명의 아이들이 고생해야 합니다. 1등 하나를 위해서 한 반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며 부모님의 잔소리와 아픔을 견뎌야 하는 61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입니까? 우리는 대개 자녀들이나 우리에게 문제가 생겨 어려워지면 마치 세상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안경이 아닌 다른 안경이 함께 걸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도 모르게 우상을 섬기고 있죠. 세상이 흔들리면 여러분도 흔들립니다.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아주 잘 흔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의 안경이 하나님의 안경이었다면 우리가 왜 흔들리겠습니까? 오히려 주님을 의지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저는 우상을 붙여놓고 그 위에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을 구하는 것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큰 시험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평안이나 복을 받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우상을 먼저 떼어버리고 거기서부터 내려와야 합니다. 그것이 우선입니다.

 

우상을 땅에 묻으라

오늘 본문을 읽으면 야곱의 말을 따라 우상을 가져올 때 귀걸이도 가져온다고 합니다. 이 부분은 명확하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두 가지로 가장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 가나안에서는 귀걸이에 신상을 새기거나 어떤 글을 적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적과 같은 것으로 가져왔다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출애굽기 32장과 34장 사이를 읽다 보면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귀걸이를 가져다 바칩니다. 어쩌면 이 사실은 귀걸이를 모아 또 다른 우상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 귀걸이는 우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 우상을 우리는 자주 만들며 또 항상 가지려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정확한 표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을 땅에 묻었다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받아서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묻었다고 하니 ‘이제 드디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내려놓는다고 말하면서, ‘나는 내 욕심을 내려놓는다. 세상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는다. 더 이상 돈이나 물질에 대한 것을 내려놓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실 성경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세상의 것들을 내려놓아 세상과 관계없이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지, 먹고 마시는 것들이 다 소용없는 짓이라거나 매일 기도만 하라고 하거나 먹지 말고 금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물질과 모든 것을 묻는다는 것은 우상을 묻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모든 것을 함께 묻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려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다시 물어보셔야 합니다. 그는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돈이 있고 돈을 벌려는 사람은 무조건 세상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가진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세상을 가장 청렴하게 살겠습니다. 나는 돈과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그 옆에 사는 사람의 속을 터지게 합니다. 자기만 깨끗하게 살 뿐이죠. 옆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먹여 살리느라 크게 고생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좀 했습니다. 제가 한씨인데, 한씨들이 약간 선비 기질이 있습니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으시지만, 저희 아버님이 좀 그러셨습니다. 아버님이 굉장히 성실하고 좋으신 분이었지만, 돈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셨지만 제 생각에는 어머님이 훨씬 더 생활력이 강하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버님은 고고하셨기 때문이죠. 아버님은 평생 장로를 받지 않으셨는데, 집사로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 나에게 충분하며 장로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처음부터 너무 철저하게 생각하셔서 어머님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조금 더 걱정이 많으셨거든요. 마지막에 연세가 드시니 아버님이 고집을 꺾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정말 장로의 역할을 하시려고 받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은 크게 고생하거든요.

 

오히려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과 단절하여 가장 고고하게 살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저분한 곳에서 연꽃을 피우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을 찾으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흙탕 속의 연꽃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연꽃처럼 피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옷을 바꾸어 입으라

야곱의 말 중 우상을 버리라는 명령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으로는 ‘옷을 바꾸어 입으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 다음이 바로 예배입니다.

 

옷을 바꾼다는 말은 구약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옷’의 상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옷을 입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그 옷의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성전과 성막에 제사장의 옷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중 하나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해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서의 여호수아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말한 내용입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이 말씀처럼, 더러운 옷을 입고 있던 대제사장의 옷을 벗기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벗기는 행위를 ‘내가 너의 죄악을 제거했다’고 표현하며, 이제는 ‘내가 너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겠다’고 말합니다.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은 단순히 새 옷만 입는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이야기는 신약에 와서 바울을 통해 이렇게 표현됩니다. 에베소서 4장의 말씀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새사람을 입은 자의 능력

여러분은 이미 새사람을 입은 사람입니다. 과거에 ‘옛사람을 계속해서 벗고 새사람을 계속해서 입으라’는 식으로 설명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요소가 우리 삶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습관은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한국에 목욕탕이 있지 않습니까? 목욕탕에 가서 입던 옷을 벗지 않고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까? 새 옷을 입으려면 먼저 벗어야 합니다. 지금 성경이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미 새사람을 입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옛사람에게서 오는 옛 관습들이나 중력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남아 있습니다. 가던 길을 갑자기 멈추면 그 방향으로 가듯이,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 죄의 습관이 우리를 붙잡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새사람을 입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고 표현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이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성령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잘 이해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 여러분의 지성이나 실력, 성경 지식, 기도 실력을 많이 의지합니다. 하지만 사실 기도를 할수록, 성경을 공부할수록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방법, 즉 ‘내가 얼마나 약한지,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하나님을 의지해야겠구나. 예수를 만나야겠구나. 십자가를 붙들어야겠구나.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의지해야 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매일 결단하기보다 성령님께 매달리십시오. “성령 하나님, 저는 정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저에게 역사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너희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린 아픔

우리는 이것을 통해 벧엘로 올라가자고 한 야곱의 마지막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배하는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땅만 보고 있었기에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도 몰랐습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잃어버렸고, 심지어는 정상으로 가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나무를 잘라서라도 표지판을 만드십니다.

 

야곱은 10년이 넘는 기간을 걸었지만, 산 중턱만 맴돌았습니다. 세겜에서 왔다 갔다 했죠. 거기서 살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며, 매우 힘든 순간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아는 디나 사건은 그의 인생에 큰 아픔을 남겨준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무엇일까요? 그가 그 산 중턱을 걸어 다니면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구덩이에 빠진 것, 이것이 정말 가슴 아픈 일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가슴 아픈 일은 그가 정상을 앞에 두고도 하나님을 찾지도, 그분을 보지도, 그분께 매달리지도, 그분을 의지하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것, 그것이 진짜 아픔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쓰라린 상황입니다.

 

그는 정상으로 가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했고 자기 신발만 걱정했습니다. 그것이 진정 마음 아픈 일입니다.

 

야곱만 그랬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을 볼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생활고 때문에 힘들어서만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서도 아니며, 좋은 직장을 잃고 고생하는 것 때문만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아픈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일들이고, 여러분이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을 누리지 못해서 제가 마음이 아픈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럴 때, 하나님께서 산 중턱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가장 귀한 길을 표지판으로 보여주시며 그 길로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을 따라 정상에 가지 않고 쓰러져 조금 피가 난 무릎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찢어진 옷만 보기 때문에, 집에 물이 들어왔나만 보기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 없는가만 보기 때문에 이것이 가장 가슴 아픈 것입니다.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 앞에서 오늘도 표지판으로 서 계십니다. “너 지금 남쪽으로 가고 있다. 빨리 북쪽으로 돌이켜라. 너는 지금 산을 내려가는 것이다. 방향을 돌려서 산으로 올라가라. 나를 바라보라.”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고 오히려 우상을 덮어쓰고, 세상을 내 마음대로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라스트 호프(last hope)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를 끝까지 붙잡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신실하셔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10년입니다.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10년입니다. 5년입니다. 어떤 사람은 1년이겠죠. 어떤 사람은 20년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주님은 여전히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자.” 주님은 그곳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시며, 함께 걸어가실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토록 주님을 배반하고, 말씀을 듣지 않으며 우상만을 섬기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우리를 인내하고 참으시며 오늘도 표지판이 되어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인내가 무궁하시기에 우리가 진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새롭게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님께 나아갑니다.

 

오 주님, 저희가 산 중턱에 머물러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는 눈을 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놀라운 표지판을 읽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나와 함께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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