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2 24절로부터 30 까지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나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아멘.

 

야곱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여러분, 지난 시간에 있었던 야곱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야곱의 기도를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인생에 있어 참으로 커다란 전환점과 같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으니, 이제는 에서의 손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감동적입니다. 그는 자기 소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자손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약속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그의 자손이 결국 메시아적 약속과 연결되어 있음을 그가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야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아 이스라엘을 이루는 과정은, 그가 특별하거나 뛰어나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이상 자기 소유에 얽매인 자가 아니라, 메시아의 약속을 생각하는 자였다는 점에서 매우 감동적인 기도라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의도적으로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 장면은 잠시 생략했습니다. 부분은 다음 주에 잊지 않고 다룰 예정이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서의 이야기와 함께 다루게 것입니다.

 

얍복강 나루의

어쨌든 야곱은 에서에게 선물을 먼저 보냅니다. 적어도 무리를 만들어 선물을 조금씩 나누어 보냅니다. 이는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는 야곱의 술수라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지 않고 홀로 남는 것입니다. 선물을 모두 보냈으니 자신도 뒤따라가 에서를 만나면 텐데, 그는 홀로 남기를 택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야곱이 홀로 남은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설교를 기억하신다면 그리 어렵지도 않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처음 만난 이가 누구였습니까? 그리고 그는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군대 , 천사들의 무리를 만났습니다. 만남은 야곱에게 벧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는 꿈속에서 천사들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그들이 진을 이루어 다가오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비록 서로 대화는 없었지만, 천사들은 야곱을 환영하러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마 가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벧엘 사건이었죠. 그가 홀로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꿈이나 계시를 통해 “내가 너를 지켜준다”는 말씀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벧엘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남아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실 말씀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람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씨름,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상황은 이상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그를 가로막는 이는 비단 야곱뿐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족장인 야곱을 막으심으로써 구속 역사의 독특성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야곱의 부인이나 자식들은 막지 않으셨지만, 족장인 그를 막았다는 것은 그가 들어가려 누군가가 그의 적으로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 야곱에게 축복하고 지켜주러 것이 아니라, 그와 대적하기 위해 천사 혹은 하나님의 사자,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을 통한 존재가 야곱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자신을 막는 사람과 야곱은 어쩔 없이 씨름을 하게 됩니다. 거룩한 땅에 들어가기 위해 야곱은 자신의 죄와 직면하게 것입니다. 씨름은 야곱이 시작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먼저 시비를 거신 일입니다. 시비를 받은 야곱은 끝까지 버팁니다.

 

 

야곱의 힘과 깨달음

여러분, 야곱이 장사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예전에 라헬을 만났을 , 우물 입구가 돌로 막혀 있었죠. 여러 목자가 함께 와서 돌을 옮겨야 양들에게 물을 먹일 있었는데, 라헬이 오자 야곱은 점수를 따려고 돌을 혼자 옮겼습니다. 성경에 삼손처럼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야곱은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자신과 씨름하는 사람과 대적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가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고 있지만, 야곱은 아직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셨다면 축복과 복을 주시고 지켜주실 것이라 생각했을 텐데, 다짜고짜 싸움을 걸어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도 야곱이 그를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모세의 의도를 따라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점점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전개됩니다. 야곱은 적어도 밤이 새도록, 7시간은 버텼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가 이기지 못함을 보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예전 개역 성경에서는 ‘환도뼈’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개역개정에서는 ‘허벅지뼈’라고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의학적으로는 볼기뼈 결구 또는 비구라고 불리는 부분입니다. 골반과 고관절이 있는 부분, 엉덩이 관절이 들어가는 움푹 들어간 곳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단어 일부는 시간이 지나며 의미가 모호해진 경우가 있는데, 뼈의 이름도 그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많은 학자는 바로 뼈를 지칭한다고 동의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분을 쳐서 탈구시키신 것입니다. 뼈가 어긋나 버린 것이죠.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사타구니를 쳐서 충격에 다리뼈가 엉덩이 관절에서 빠져나온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술을 받아야 만큼 큰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승리의 이름, 이스라엘

야곱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때린 사람을 오히려 붙잡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는 교훈이 나옵니다. 야곱이 다리를 쓰게 만큼 맞았는데도 그를 붙잡았듯이, 하나님께 구할 때는 다리 하나 부러지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주님을 붙잡고 끝까지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결국 “네가 이겼다”고 하시며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기도의 중요한 모범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야곱이 먼저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끝까지 매달리고 버텨서 이긴 것이 사실이라면, 호세아서가 해석되지 않습니다. 우리 함께 호세아서 12장을 보겠습니다. 호세아 12 3절입니다.

 

호세아서는 이야기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겼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겼다는 뒤에 곧바로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창세기 이야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부분입니다.

 

이겼는데 울면서 간구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겼다면 기쁨에 차서 신나했어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야곱이 끝까지 버텨서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셨다는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야곱이 매달렸던 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길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그가 흘린 눈물은 승리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구였던 것입니다.

 

야곱을 위한 싸움, 하나님의 잔인한 자비

이야기는 루터가 구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건이 끝난 야곱이 받은 복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의 뜻은 무엇일까요?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이스라’는 ‘다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흔히 ‘야곱이 하나님과 다투었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주어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 '하나님이 다투셨다' 의미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다투었다’와 ‘하나님이 야곱을 위해 다투셨다’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야곱을 대적해서 다투신 것일까요, 아니면 야곱을 위해 싸우신 것일까요? 가지 의미가 이야기 속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야곱을 위해 싸우셨다는 것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세상과도, 라반과도, 에서와도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위해 일하고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 자신과도 싸우시게 것입니다. 이는 야곱의 성장을 위한 싸움이자, 그의 신앙을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향해 싸우시는 것을 영어로 Severe Mercy, ‘잔인한 자비’라고 부릅니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자녀답게 하기 위해 매를 드시거나, 그가 사랑하며 하나님보다 아끼는 것을 빼앗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매를 드는 일을 망설이지 않으십니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가 아이를 바로잡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빼앗으려다가도, 아이가 울면 결국 주고 마는 부모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위해 일하시기 때문에 칼을 절대로 쥐여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잔인한 자비’ 또는 ‘잔인한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마음을 다해, 정말 열정적으로 사랑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야곱을 위하여 다투시는 모습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 생명이 위협을 받고 모든 것을 잃고도 여전히 너만 의지하며 살겠느냐? 여전히 너의 힘으로 나와 싸우고 너의 힘으로 살아가겠느냐? 야곱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기도했지만, 그의 삶의 모습은 정반대였습니다. 여전히 자기 힘을 유지하고, 잔꾀를 부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그의 엉덩이뼈를 치신 것입니다. “이래도 너는 정말 생명을 잃고 모든 것을 잃어도 힘대로 살겠느냐? 야곱은 그제야 비로소 깨닫고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의 승리

엉덩이뼈가 탈구되어 다리가 어긋났을 , 야곱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에서를 만나는 길에서 자기 힘을 의지해서는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다시금 절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아, 그렇지. 내가 이것이 두려워 그토록 많은 짓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다시 능력과 힘을 의지해 그와 싸우려 하는구나. 맞고 쓰러졌을 , 그는 이분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으며 간절히 매달립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대로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야곱이 이처럼 복을 구했을 ,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시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뒤에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더불어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라는 해설이 따릅니다. 언제 이긴 것입니까? 자기 힘으로 싸울 때는 얻어터지고 모든 것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히려 하나님을 붙잡으며 성경대로 울며 매달렸을 ,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이겼다”는 칭호를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위해 싸우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야곱과 밤새 씨름하며 그를 놓아주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손은 은혜의 손이었습니다. “이기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힘이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야곱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의 뼈를 치셨을 , 야곱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신자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든지 반드시 기억해야 내용입니다.

 

교회 문제든, 가정 문제든, 혹은 신앙의 정체기 속에서 돌파를 원하는 어떤 상황이든, 여러분은 문제에 직면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바로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 좋은 신앙 서적을 읽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쉽게 나아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실력을 키우고 실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내가 너무 몰라서 그래, 알아야 ,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공부하고 기도를 하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족보를 외우거나 남보다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이 외우기를 원해서 성경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성경을 공부하면 “하나님, 제가 정말 죄인이며 힘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없이는 어떤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를 철저하게 깨닫기 위해 기도를 시켜 놓으셨는데, 우리는 기도를 자기 능력으로 삼아 하나님을 이겨 먹으려 합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들어주시냐”고 따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진 것이라도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때마다 기회만 나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실력이 아닌 겸손함

여러분, 우리는 번째 일에 진심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내가 나의 연약함을 깨닫고,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자체가 너무나 교만하구나’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알기를 원하오니, 저의 마음을 낮추시고 다른 사람을 저보다 낫게 여기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성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이겼다! 네가 높임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야곱의 이야기에서 배우는 다른 진리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것이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위해 싸우셨지만, 동시에 야곱을 대적해서도 싸우셨습니다. 분명히 씨름하셨고, 그를 가지 못하게 막으셨으며, 우리가 환도뼈라고 알고 있는 그의 허벅지뼈를 치셨습니다.

 

귀한 말씀 속에 담긴 다른 진리를 가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을 이해하는 분들에게는 쉽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죽음과 삶의 이야기

야곱이 하나님을 뵙고 나서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였으나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기뻤으리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은혜의 시대’, ‘새 언약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쁨으로만 여기지만, 하나님께는 무서운 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재하셨을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제발 혼자 올라가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저들을 가까이 오게 하지 말라. 내가 돌격해서 저들을 죽일까 하노라. 우리가 지금 은혜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는 죽음과 삶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씨름: 죽음과 삶의 이야기

야곱을 성장시키는 이야기로만 보기에는 사건이 지닌 의미가 너무나 깊습니다. 이야기는 야곱에게 죽음이냐 삶이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야곱의 죄를 다루고 계시며, 그가 거룩한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심판하고 계십니다.

 

이야기는 가나안 입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 하나님은 여리고성을 공격하기 전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할례를 받으면 전투력이 떨어져 싸울 없게 되지만, ‘피의 할례’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죽어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죽음에 대한 깊은 고뇌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받은 은혜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잘살고 있는데 구원까지 덤으로 얻었다’고 생각하면 구원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할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직면한 존재였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내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맞은 뼈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이제 생각해 봅시다. ‘은혜를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고백한 야곱이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의 근원이고, 때문에 죽어야 엉덩이뼈를 맞았습니다. 그는 맞은 뼈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지만,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쳤다’고 번역된 단어는 ‘때렸다’, ‘맞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어는 이사야서 53 4절에도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여기서 하나님께 ‘맞았다’는 표현은 누구에게 쓰였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죽어야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랬을까요?

 

그가 맞은 뼈는 자신이 맞고 죽어야 자리였지만, 동시에 자녀를 낳는 생식의 능력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은 바로 '여인의 후손' 나올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치신 것이 아니라, 야곱을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치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야곱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덕분에 그가 엉덩이뼈가 어긋난 후에야 비로소 매달렸고, 복을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일을 해내려 하고, 힘을 키워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우리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걷기를 기뻐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동참하는 자를 성경은 승리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도, 받아서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고, 세상과 싸우시며, 나의 죄와도 싸우십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결단과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함께 싸우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으로는 죄와 싸우기는커녕 죄를 너무나 좋아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편한 사람들입니다. 거짓말이 편하고, 진실을 말하는 일은 힘듭니다. 이는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선하게 살아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해라, 하나님을 의지해라’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어색합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괜찮은 존재인지’ 증명하며 살았고,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치고 알아주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속상해하며 어쩔 몰라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할 진정한 승리자요, 성공자’라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이름

그러나 야곱은 복을 달라고 매달릴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약함뿐만 아니라, 자격 없는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남아 이런 은혜를 누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받았는지 모든 것이 눈물 없이는 도저히 받아들일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실 죽어야 했는데 살았습니다. 이때 울지 않으면 언제 울겠습니까?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어찌 놀라움과 감격과 눈물 없이 자신의 생명을 바라볼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만 그럴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자신을 위해 엉덩이뼈를 맞으신 메시아로 말미암아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심판받아 마땅했습니다. 그는 아무 자격이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께 매달릴 있었습니다. 여인의 후손을 치신 그분 때문에 자신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밤은 죽음의 밤이었지만, 아침은 승리의 아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엘’은 하나님을, ‘브니’는 얼굴을 뜻합니다. ,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입니다. 해가 돋았고, 그는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희미한 얼굴조차도 그에게는 죽음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을 뿐만 아니라, 영광의 빛이 여러분에게 비추인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마에 새겨진 이름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 그의 '펼쳐지는 신비(The Unfolding Myster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야곱의 귀에 너무나 경이롭고, 여호와의 얼굴은 야곱의 눈에 너무나 영광스럽다. 그러나 야곱이 그를 알도록 여호와께서 친히 오셨다.

 

주님께서 야곱에게 오신 것은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여호와의 얼굴을 희미하게 보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이 비춰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 하나님은 대답해 주지 않으시고 그저 야곱에게 복을 주었다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하늘에서 땅까지 계단을 만드셨지만 내려오지 않으셨는데, 얍복강에서 그에게 직접 내려오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경험했지만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감추어졌던 비밀과 신비가 우리에게는 열려졌고 보여졌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름은 그저 여러 이름 중에 하나가 아닙니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름 위에 지극히 높으신 예수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라는 아버지의 이름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쉽게 부르지 못했던 이름을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게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하지만 마지막으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으로 인해 여러분도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이름은 세상의 어떤 이름도, 심지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저주받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마에 이름을 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요한계시록 14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것이 있더라. 여기서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666 두려워하면서, 정작 우리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름을 써주셨는데,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666, 777, 999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의 이마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 12절에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 말씀은 옆에 있는 집사님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 예루살렘의 이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대체 땅에서 여러분을 흔들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심지어 야곱처럼 에서의 칼에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만족하며 아침을 맞이했듯이 여러분도 그러할 것입니다. 사탄이 여러분을 흔들고, 답답함과 불평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까? 삶의 변화가 없어 지겨울 , 병이나 다른 문제들로 인해 사는 자체가 무겁게 느껴질 , 그래서 쓰러지고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의 이마에 새겨진 이름이 여러분을 넉넉히 구원하며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성부의 이름, 성자의 이름, 성령의 이름이 여러분의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저희가 가졌으니, 주님, 거룩하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의 주님의 이름을 저희가 가졌으니, 주님,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지혜의 이름을 가졌으니, 주님, 저희로 분별하게 하여 주옵소서.

, 주님, 놀랍고 놀라우신 영광의 이름을 저희가 가졌으니, 저희로 빛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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