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32 1절에서 12까지 입니다.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이 세일 에돔 들에 있는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주께 알리고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떼를 치면 남은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이르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고향,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없사오나 내가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씨로 바다에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멘.

 

창세기 32장에 대한 설명

창세기 32장은 야곱과 하나님이 씨름했다는 이야기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내용입니다. 구절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면서도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로,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 역시 구약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 고백한 있습니다.

 

거룩을 마주한 야곱

라반과 헤어진 야곱은 약속의 가나안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뜻밖에도 하나님의 군대, 천사들의 무리를 만납니다. 그는 그곳을 마하나임, ' 진영'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것이 갑자기 등장했을까요? 사실 하나님이 야곱과 씨름한 것도 우리가 전체 이야기에 어디다 끼워 맞춰야 할지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하셔서 야곱은 돌아갔습니다. 이제 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는 옆에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사실상 시비를 거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야곱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사들이 군대로 진을 치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20 벧엘 사건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때 천사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으니까요. 같은 천사들입니다. 구역별로 일하는 천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같은 천사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가장 기억나는 것은 그때 하나님이 그에게 했던 약속일 것입니다. 그때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어디를 가든지 떠나지 않을 거고, 내가 너에게 허락한 대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 천사들을 만난 사건은 ',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야곱을 지키시는구나'라고 당연히 생각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생각한다면 천사들을 만난 사건은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천사들은 가나안을 지키는 천사라고 있는데, 왜냐하면 '군대'라고 번역할 있기 때문입니다. 군대는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전투를 위한 것입니다. 무슨 전투를 하고 있을까요? 가나안이라는 곳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 가나안에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고, 아직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변변한 땅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곳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그리고 땅을 지킨다는 의미는 가나안이 성경에서 상당히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이 상징하는 의미는 후에 모세의 성막에서도, 그보다 앞서 노아의 방주에서도, 그리고 이전의 에덴동산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실 약속의 땅은 멀리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이루려고 하셨던 에덴과 맥이 닿아 있는 땅입니다. 에덴으로부터 아담과 하와가 쫓겨났지만, 하나님이 포기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았고, 에덴에서 내가 이루려고 하는 나의 뜻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지으셨던 창조의 구조와 아주 유사한 3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곳에 물이 있고 성령이 위에 운행하시는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시는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등장한 것이 바로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땅을 떠나 천국에 간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에덴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 바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노아의 방주도 모든 이들이 죽지만 온전히 구원받은 안에서 안식과 평화를 누리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구원의 방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많은 분들이 성경이 그저 이렇게 쓰인 것처럼 생각하실 있겠지만, 사실은 굉장히 정밀한 하나입니다. 오랜 기간 동안 책이 통일성을 가지고 기록되었다는 것은, 서로 만날 수도 없고 책을 전달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정말 성령 하나님께서 책의 저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실 하나입니다.

 

여호수아와 야곱의 공통점

결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시작에서 야곱이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일은 야곱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후에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할 , 앞에 누군가가 나타납니다. 여호수아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 정복 전쟁이 시작될 눈을 들어 보니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칼을 차고 것이 아니라 이미 칼을 뺐다는 것은 싸우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묻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군이냐?" 그러자 그가 "나는 여호와께서 보낸 군대 장관"이라고 대답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엎드려 절하고 "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군대 장관은 "내가 너를 대신해서 싸우러 왔다"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의 신을 벗으라" 말합니다.

 

이는 바로 가나안 땅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정복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으니 사실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자 하나님의 자녀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자신의 전쟁을 통해 정복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거저 얻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어떻게 함락되었습니까? 여호수아가 뛰어난 검술로 적들을 물리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성을 돌았을 뿐입니다. 성을 돌아서 무너졌다는 것은 여호수아와 제사장들이 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발을 세게 굴러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곳에서 전쟁을 치르기를 원하셨지만 말입니다. 이는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보세요. 그래서 우리는 야곱이 거룩한 땅에 들어갔음을 알게 됩니다. 라반이 세상을 대표한다면,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야곱은 거룩한 땅에 들어온 자의 모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의 진영과 하나님의 군대의 진영이 만나게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호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만약 우호적으로 왔다면 엘리야를 만났던 천사처럼 물과 양식을 갖고 왔다든지, '너희를 환영한다' 플래카드를 들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대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긴장감의 고조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이야기가 갑자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전개되는 것입니다. 번째가 바로 여호수아를 만났던 군대 장관처럼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는 것입니다. 거룩을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지키실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야곱이 지금 거룩한 땅에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이름을 마하나임, ' 진영'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야곱의 무리와 하나님의 무리가 서로 아무 말도 없이 만나는 순간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긴박한 배경 음악이 깔리는 그런 순간과 같습니다.

 

과거와 죄를 마주한 야곱

하나님의 군대를 만난 다음, 야곱의 행동과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사자를 보냅니다. 야곱이 만난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이지만, 이번에는 야곱이 에서에게 '사자', 전령을 보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에서에게 일부러 전령을 보냈다는 자체가 야곱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지금 야곱은 터키에 인접한 북쪽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은 갈릴리 바다가 있는 호수입니다. 그리고 요단강이 남쪽으로 흐른 다음에 밑으로 내려가면 사해가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북쪽에 있는 갈릴리바다 근처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에서가 있는 남쪽 끝의 사해 밑자락에 위치하는 에돔지방의 세일까지 의도적으로 전령을 보낸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에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본래의 야곱이라면 잔꾀를 써서 어떻게 하면 피할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도망가 숨거나 다른 곳으로 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러 서울에서 광주를 가는 길에 부산행 KTX 타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답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에서에게서 돌아온 응답 또한 좋지 않습니다. "에서가 사백 명을 이끌고 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할 동원한 병력은 318명이었습니다. 당시 인구를 생각하면 사백 명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에서는 '세일'이라는 곳에서 오는데, 세일은 '털이 많다' 뜻으로 에서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에돔' '붉다' 뜻으로 역시 에서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에서가 지역의 주인, 패권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죽도록 고생하다가 겨우 재물을 모은 반면, 에서는 민족 국가를 이룰 정도로 성공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형과 인사하는 일이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생애가 하나님을 믿고 거룩한 땅에 들어가는 순간, 그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거룩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자기의 과거를 만나는 것이고, 정확하게는 자기의 죄와 만나는 것입니다. 죄는 무섭습니다. 떠날 알았고 지워질 알았고 사라질 알지만, 죄는 우리를 찾아옵니다. 만약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마지막 죄가 우리를 따라와서 고소할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들을 고소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잊어버렸고 알지 못하는 같으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가 낱낱이 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이성과 상식으로도 맞습니다. 우리가 모두 동의하는 권선징악이라든지 인과응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똑같다는 거죠. 야곱은 바로 그것을 해결해야 자리에 서게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죄와 만나야 했고, 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리를 떼로 나누고 떼가 공격받으면 남은 떼는 피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 야곱이 머리를 쓰는 것처럼 보일 있습니다. '역시 야곱답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야곱다운 행동이 아닙니다. 야곱다운 것은 모두와 함께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로 나누겠다는 것은 에서를 만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변화의 시작입니다. 그는 피하지 않고 자기의 과거를 마주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진정한 장자권을 이해한 야곱

야곱은 사자를 보내며 에서에게 '' 부르고 자신을 '주의 '이라 칭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하나님을 ''라고 부릅니다. 야곱에게는 명의 주가 생긴 셈입니다.

 

우리는 흔히 야곱이 에서에게 보이기 위해 서비스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야곱이 20 동안 고생한 이유였던 장자권이 완전히 물거품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권의 축복은 '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말씀처럼, '형제들이 너를 주라고 부를 '이었습니다. 그런데 20년의 고생 끝에 돌아와 야곱이 에서에게 ''라고 부르게 되었으니, 모든 것이 '말짱 도루묵'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야곱이 훨씬 깊은 훈련을 통과한 내뱉는 최고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구절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작은 자가 자다. 섬기는 자가 자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지금 야곱은 진정한 의미에서 장자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자리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받을 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기가 지금 약속의 땅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애석하게도 에서는 사실을 모릅니다. 에서는 자가 되었고, 섬김을 받는 자가 되었으며,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여기서 복을 받은 자는 사실 야곱인 것입니다.

 

야곱의 진실한 고백

여러분, 야곱은 부자가 되어 재물을 모았지만 결국 자신의 죄와 부딪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일을 통해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알려주십니다. 에서를 만나는 일이 야곱에게는 매우 두렵고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에서와 화해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무리를 이끌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형의 모습에 그는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라반과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충분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통해 그는 하나님을 예전보다 훨씬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제가 그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그가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서는 생애 최초로 진짜 기도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전에 기도를 번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겠지만, 성경은 중요한 기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가 정말 코너에 몰려 죽음 앞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하는 기도의 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절에 야곱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 고향,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저는 구절이 읽는 분들께도 감동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지금 20 동안 말로 없는 고생 끝에 자리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잃어야 하는 입장에 놓였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생명까지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가 하나님께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고향, 족속에게로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그래서 도망가지 않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에서를 만나려고 합니다." 제가 마음과 용기가 그의 신앙을 통해 이런 고백을 하게 것입니다. 단어들은 생각할수록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도를 시작할 있었을까요? 그의 기도는 약속으로 출발하지만, 다음 구절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없사오나." 이는 번역이 다소 문자적이지만,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에게 베푸신 많은 은혜(헤세드) 모든 신실하심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야곱이 많이 겸손해졌네'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 그리고 제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저는 가질 자격도, 누릴 자격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에서 ' 착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가' 대한 가장 명백한 대답 하나입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살아 있다는 자체, 하루라도 살아 있다는 자체, 여기에 와서 예배한다는 자체, 모든 것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포함하여 우리에게 과연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빼앗긴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할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지금 야곱처럼 "주님, 그렇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빼앗길 입장에 있습니다. 생명도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여기까지 생명을 유지한 것도 저는 그것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깨닫지 않고는 절대 없는 고백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죄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말 깨닫기 전에는 이러한 고백을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모든 것을 누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단어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야곱이, 그토록 치열하게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 인생을 살았던 그가, 이제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하는 말이 "하나님, 내가 여기까지 쉬고 있는 것도 그걸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는데 지금은 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어떻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주시옵소서' 없는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기도하겠습니까? 제가 한창 교만했을 때는 '주시옵소서' 나쁜 기도라고 생각하여 '주여, 주시옵소서 하지 않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되는 거구나. '주시옵소서' 없이는 기도가 되는 거구나. 우리는 끝없이 하나님께 달라고 수밖에 없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동시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주님,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사실은 제가 가질 자격도, 생명조차도 누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이 여러분의 기도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것이 있으니, 1초를 산다고 해도 하루를 산다고 해도 이것은 은혜요 감사요 감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에는 60 이상 오랜 세월을 사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내가 하루를 누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사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라고 불평하며 사셨습니까? 야곱을 보면 마치 후자처럼 '하나님, 이것밖에 됩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정도밖에 됩니까?'라는 기도를 같지만, 20년간의 하나님의 손길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겸손한 이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서 "주님, 나의 코에서 나오는 숨결 하나, 나는 그것을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아들이 와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하루하루, 집에서 먹여주고 입혀주셔서 제가 이렇게 어엿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아버지,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와서 그렇게 말한다면 감격의 연속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께는 그렇게 나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야곱이 자기 구할 것을 구하는 장면은 다른 백미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이는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평범하고 당연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환경을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같이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를 되돌아보십시오. 가끔은 좋은 핸드폰으로 기도할 살짝 녹음해 보십시오. 그리고 한번만 들어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지. '주시옵소서' 하는 것도 좋습니다. 모든 기도는 좋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렇지만, 우리의 기도는 대개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 제가 너무 아파요. 그러니까 저를 낫게 주세요." 이것이 우리 기도의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픈데 낫게 해달라고 기도할까요? 하나님, 정말 두렵습니다. 고통이 무섭습니다. 정말 하나님, 제가 이렇게 인생의 시간들을 보낼 것이 너무 겁이 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지금 야곱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에서가 나와 가족을 죽일까 두렵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게 보면 마치 비즈니스 같지 않습니까? 있는 상사에게 부하 직원이 ' 일을 해결해 달라' 프레젠테이션하고, 그로부터 좋은 소식을 듣고 감사하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아니면 정말 아버지에게 "아버지, 나의 마음이 찢어질 같습니다"라고 토로하는 것과 같습니까?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 원수가 나에게 이렇게 상처받는 말을 합니다. 나를 조롱합니다. 뼈를 긁는 같이 아픕니다. 아버지, 아들이 이렇게 아파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기도로 우리의 진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할까요? 여러분이 진짜 무서워하는 것은 병에 걸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은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 목숨, 그리고 고통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질 , 그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숨기려 하십니까? 야곱은 자기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마음을 보여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저 문제들만 나열하다 끝이 때가 많습니다. 환경, 속상한 , 답답한 일만 얘기합니다.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얘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 인간,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기도 해보신 있습니까? '목사님, 사실은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 인간이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우리의 진짜 마음이지 않습니까? 마음에 머물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진짜 마음을 표현하기보다 항상 하나님과 비즈니스처럼 얘기하십니까? 심지어 개인적인 문제를 얘기하면서도 "하나님, 우리 자식 공부 잘하게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진짜 원하십니까?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 100 맞는 것을 원하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이가 험한 세상에서 과연 살아갈 있을까요? 엄청난 경쟁 속에서 학교 공부조차도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것이 진짜 여러분의 마음이 아닙니까? 마음을 토로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 정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항상 멀리 떨어져서 능력이 좋으신 분이니 능력과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실 거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마음을 토하십시오. "두렵습니다, 아픕니다, 하나님 힘듭니다, 외롭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열어 기도하십시오.

 

구속의 역사를 향한 기도

여러분, 야곱의 기도가 아름답고 놀라운 이유는 모든 것이 우리의 기도에 모범이 되기를 바라며, 마지막에 너무나 놀라운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12절에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씨로 바다에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언뜻 괜찮은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뒤를 연결해 보십시오. 야곱이 기도할 일반적으로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애썼습니까?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14년을 지참금으로 일했고, 6년을 재산을 모으기 위해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겨우 모은 재물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대하는 야곱은 그것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기도를 당연히 포함했어야 합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지금 모든 것을 에서에게 그냥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기도 속에서도 그가 재물을 구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과 가족, 자손의 생명을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가 '재물이 뭐가 중요해, 생명이 중요하지'라고 생각할까 야곱은 뒤에 기도를 덧붙입니다. "하나님, 만약 우리가 사라지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주의 자손들이 바다에 모래처럼 많아질 거라는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고차원적인 기도이며 '역시 야곱이 머리가 좋다'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생각한다면 이는 그가 기도하는 내용을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바로 그리스도와 메시아를 바라보는 기도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언약을 그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지만 그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니 우리의 생명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야곱이 하나님 앞에 어떤 수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그저 약속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왕에게 나라가 망하게 같다고 물었을 ,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이 전능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거의 600 후에 일어날 , 예수님이 오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왕에게 그것이 위로가 됩니다.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왕조가 망하지 않아야 아들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지금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자손의 생명을 지켜주셔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나의 기도와 하나님의 영광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바로 자리까지 와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당연히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구하는 것이 어떻게 구해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를 지켜주십시오"입니까, 아니면 그저 " 지켜주시옵소서"입니까? 여러분, "하나님, 저를 성숙하게 주시옵소서"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저에게 이루어진다는 약속을 이루셔야 하니 저를 성숙케 주십시오"입니까? 여러분 혼자 성숙하고 싶다면 그저 자신을 치장하고 꾸밀 뿐입니다. '나는 남보다 성숙한 사람, 괜찮은 사람,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 그래서 남보다 위에 서서 '그래, 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도 이것밖에 못하느냐'라고 있는 사람'으로 남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과 비교하며 자랑할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성경을 이만큼 안다. 나는 이만큼 기도한다. 나는 이만큼 예수를 믿는다.' 이것밖에 자랑할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기도가 자리까지 오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니 주께서 속에서 역사하사 저로 빛과 소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를 악에서 건져내 주시옵소서." "주님, 예수님이 저의 지혜가 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주님, 제가 생각하고 판단할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지혜에 참여하게 주십시오." "분노와 감정에 지지 않게 주십시오." 제가 분노와 감정에 지는 것이 그렇게 큰일이겠습니까? 제가 화를 낸다고 지구가 망하겠습니까? 내가 성질을 부린다고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저만 손해일 뿐입니다. 진짜 대단한 일은, 하나님께서 성내며 화내기 좋아하고 게으르며 마음대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저에게, '주님,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인생을 바꾸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주십시오. 예수님이 저의 의가 아니십니까? 예수님이 저의 자랑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저의 모든 것이 아닙니까?'라고 고백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다른 의미

여러분, 이것이 오늘 말씀의 끝입니다. 하지만 예고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일어나는 때문입니다. 다음 말씀의 예고편이 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멋있게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는 대포와 같았고, 정말 간절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할 것인데, 우리는 당연히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생각합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하우 스윗 사운드(How sweet the sound).' 얼마나 달콤합니까. 정말 '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가사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달콤한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말 은혜가 달콤하기만 할까요? 야곱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그에게 시비를 거셔서 그와 씨름하셨던 사건이었습니다. 폭포와 같고, 험하고 힘든 은혜가 그에게 임하게 것입니다.

 

여러분, 스토리가 등장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다음 주에 반드시 읽고 오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정리해 오십시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함께 따라가 봅시다. 과연 야곱은 갑자기 하나님의 방문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고 계신지.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놀라우신 주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며 우리의 기도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아름다우신 주님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저 '주시옵소서' 기도가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 야곱의 기도를 통하여 저희도 거룩한 땅에 들어선 주의 자녀로서, 우리가 마주해야 과거를 어떻게 대해야 하며, 우리의 죄를 해결하신 주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통해 배우게 하소서.

 

저희가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주님 앞에 모든 심정을 토로하고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아는 주의 백성, 주님의 아들과 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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