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 43절로부터 49 까지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딸이요 자식들은 자식이요 떼는 떼요 네가 보는 것은 것이라. 내가 오늘 딸들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라반의 말에 오늘 무더기가 너와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아멘.

 

두려움 속의 야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

지난 시간에 저희는 밤낮으로 도망치며 두려움에 떨던 야곱을 살펴보았습니다. 무려 10 동안 그렇게 도망가는 동안, 과연 하나님은 어디 계셨을까요? 주님은 그때 그의 대적인 라반을 만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에 두려움과 실패와 절망이 닥칠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만 분주하게 움직이는 같지요. 우리의 건강과 문제들, 사업, 학업, 자녀와 가정, 아내의 모든 문제 때문에 혼자 바쁜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라반을 만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를 본문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라반이 야곱과 처음 나눈 대화 속에는 라반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요즘 흔히 쓰는 ‘빌드업’처럼 이야기가 차근차근 전개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야곱이 라반을 꾸짖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가져온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당신은 저를 쫓아와 힘들게 하십니까? 그러면서 그는 20 동안 고생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제가 당신의 것을 하나도 가져온 것이 없는데 당신이 저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바로 당신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라반은 말을 듣고 금방 수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기에는 상당히 황당한 답변을 내놓습니다. 제가 보기에 라반은 대목에서 아주 교묘한데, 그는 ‘내가 그런 적이 없다’고 직접적으로 부인하는 대신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네가 결혼한 딸은 누구의 딸이냐? 딸이다. 딸들이 낳은 자식은 누구 것이냐? 것이다. 네가 가진 모든 재산도 사실은 것이다. 것인데 내가 마음대로 했는데 말이 많으냐? 참으로 말을 잃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라반이 말을 하려는 진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라반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정당하게 자신의 재산을 불렸기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것이고 내가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내가 설마 자식과 딸들에게 해를 가하겠느냐? 마치 모든 것이 자기 소유지만 너그럽게 양보하는 것처럼 상황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빌드업’을 했기 때문에 그의 다음 말이 가능해집니다. “이제 우리 약속을 맺자. 경계선을 세우자. 지점까지 이르게 것입니다.

 

두려움에 라반의 모습

원래 라반의 마음은 상당한 두려움에 쫓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라반이 야곱을 쫓아간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죠?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오려고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야곱을 만나서는 태도가 변했습니다. 이토록 강팍하기 그지없는 라반이 변했을까요? .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 야곱을 가만두어라. 건드리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줄이지만, 안에 어마어마한 말씀이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라반은 말을 듣고 강팍했던 마음을 바꿨습니다. 자신의 계획도 포기했고, 행동도 바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두려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까?

 

그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대로 가다가는 하나님이라는 분이 자신의 재산까지도 몽땅 빼앗아 야곱에게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너 야곱 건드리지 마”라는 말을 들었던 라반은 오히려 자기 것을 지키려 하게 것입니다. 야곱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싶었던 것입니다.

 

불가침 조약을 맺으려는 사람들은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쟁을 겪은 오래되어서 기억이 희미하실 수도 있지만, 휴전할 양쪽이 힘들고 지쳐서 휴전을 하지만, 불가침 조약을 맺기를 원하는 쪽은 핵이 없는 사람이 핵이 있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입니다. 핵이 있는 사람은 ‘나는 언제든지 너를 혼내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거든요. 지금은 야곱이 아니라 라반이 약자인 것입니다. 라반이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에게 오히려 자기의 모든 것을 빼앗길까 그는 경계선을 긋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것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야곱이 얘기를 듣고 라반이 약간 두려워하고 겁을 내고 있음을 몰랐을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것을 가지고 라반을 어떻게 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돌을 하나 세우러 갑니다. 여러분, 야곱이 돌을 세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이것은 어디를 기억하게 합니까? 베델입니다. 베델에서 하나님과 약속하며 돌을 세웠습니다. 지금 야곱이 돌을 세운다는 것은 아무 말이나 답변 없이 묵묵히 돌을 하나 세우는 행위입니다. 여기서는 베델의 의미가 아주 강하게 느껴집니다. 지금 야곱의 마음에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돌을 쌓고 돌무더기 곁에서 밥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는 언약을 맺을 흔히 하는 하나입니다.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 화해하고 화목해졌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라반은 돌무더기에 ‘여갈사하두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는 아람어로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도, 할렐루야도 익숙하시겠지만, 이제 아람어도 알게 되신 겁니다. 라반의 말을 듣고 야곱은 히브리어로 똑같은 뜻인 ‘갈르엣’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렇게 이름을 지은 , 49절에는 다른 이름이 등장합니다.

 

4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구절은 미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구절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가 훨씬 익숙하죠. 액자로도 만들어 걸고 말입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구절,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사이를 살피시옵소서”를 크리스마스카드나 결혼반지에 새겨 넣기도 합니다. ‘너와 내가 떨어져 있을 때라도 하나님께서 너와 나를 살피시기를 원한다’는 로맨틱한 의미로요.

 

올바른 신앙과 오해된 진리

우리가 알고 있는 욥기서의 “내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구절도 제임스 성경 번역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하나입니다. 제임스 성경은 훌륭한 성경이지만, 사람이 번역했기에 약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좋아하는 분들이 많지만, 지나치게 제임스 성경 외의 다른 모든 성경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한쪽만 너무 강조한 것입니다.

 

구절의 실제 뜻은 “하나님, 사람과 사이를 살펴주옵소서”가 아닙니다. 구절의 배경은 서로 전혀 믿지 못하는 라반과 야곱 사이에 있었던 말입니다. 의역하자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내가 믿을 없는데, 서로 없게 되면 얼마나 믿지 못하겠느냐. 서로 없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주기를 원하노라”는 뜻입니다. ‘감시해 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결혼반지에 만한 말입니까?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하나님께서 감시하기를 원한다”는 원래 그런 의미였던 겁니다. 라반이 두려움 속에서 야곱에게 약속을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너, 하나님이 보고 있으니까 괜히 딴마음 먹고 나한테 쳐들어오면 된다”는 것이죠.

 

 라반은 언약의 가지 내용을 제안합니다. 번째 내용은 기가 막힙니다. 라반은 마치 자신이 훌륭한 아버지인 것처럼 계속해서 얘기하거든요. “너희들이 간다고 했으면 내가 얼마나 성대하게 송별식을 해줬을 텐데 이게 뭐냐”고 했던 라반입니다. 지금은 빼앗으려고, 어쩌면 죽이려고 쫓아온 사람입니다. 야곱에게 “내 딸을 보호하고 박대하지 말라. 그리고 다른 아내 얻으면 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라고 얘기합니다. 마치 딸을 엄청 아끼는 같지만, 우리는 라반의 마음을 압니다. 딸들이 받아야 지참금까지 모두 착복한 사람입니다. 딸들이 “그가 우리를 이방인처럼 여겼다”고 말했던 아버지인데, 마치 딸을 위하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저는 구절을 보면서 우리도 이런 실수를 많이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라반의 말은 맞습니다. 그는 지식적으로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무척 성경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삶과 태도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위선이라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겪는 가장 문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옳은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진리를 이야기할 나의 삶도 진리 앞에 같이 두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진리대로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누구에게든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할 때는 말씀이 나의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만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도 필요한 말씀, 내가 바꾸고 회개해야 말씀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언제 라반처럼 실수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했던 말은 옳습니다. 결혼의 복을 누리고 있는 부부들에게,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말씀은 소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혼을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하여 언약을 맺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게 있는 말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결혼에 대해 얼떨결에 기독교적 문화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미국 결혼식에서 주례 목사님들이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지, 아버지가 딸을 신랑에게 건네주는지 문화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그래서 결혼을 예배처럼 하지 않는 겁니다.

 

예배는 ‘서비스’가 아니라 ‘워십’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것이죠. 사람을 위해 드리는 예배는 없습니다. 정식으로 말하면 예배를 드리고 결혼 서약을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만, 일반적으로 가지를 함께합니다. 그러나 결혼 예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약입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하여 둘이 서약을 하는 것이고, 그만큼 결혼에 무게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서에서도 구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결혼식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증인이 되셔서 그를 언약의 남편으로, 언약의 아내로 세우십니다. 이것은 성경적이며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내용입니다.

 

결혼 생활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지, 가정마다 아픔과 눈물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결혼 생활의 가장 하나는 기초에 우리의 사랑이나 결심, 좋은 성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며 언약을 함께 걸어가 주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됩니다.

 

참된 신앙인의 모습

라반이 말했던 번째 조항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불가침 조약입니다. “너는 넘어오면 된다. 나는 넘어갈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라반의 진짜 목적이었습니다.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것입니다. 라반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은 사람입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자기가 부를 누렸다는 것도 아는 사람입니다. 20 동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어떻게 복을 주셨는지 눈으로 사람입니다. 정도면 하나님을 믿을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라반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부인할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유신론자입니다. ‘나는 신을 믿는다’는 것이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고 복을 있는 분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 만족하거나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능력 있는 하나님인데 매달리지 않을까요? 자신이 겪는 모든 문제에 그때마다 자신을 위하는 , 자기 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쉬운 같지만, 여러분과 제가 그렇게 살고 있기에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부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편을 들어주실 때까지만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 같으면 그분은 이해가 되는 하나님, 주무시는 하나님, 따르기 힘든 하나님이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신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기 시작하기 때문에 여러 신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라반을 지나 야곱에게 가봅시다. 야곱은 조약을 통해 그의 인생에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다른 어떤 것보다 야곱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거룩한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세상으로부터 분리됩니다. 라반은 자기 것을 지키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조약을 통해 야곱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것처럼, 그는 이제 하란에서 분리되어 나오면서 드디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제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는 돌을 세우면서 자기와 약속했던 베델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베델의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땅으로 돌아오게 거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절대 떠나지 않는다.

 

감정을 대입해서 본다면, 돌을 다시 쌓으면서 야곱은 20년의 세월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며칠 만에 아내를 얻어 돌아올 알았지만, 20년이라는 고생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속아서 아내를 얻었고, 집안은 질투와 경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무엘서의 한나의 이야기보다 훨씬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짜증과 분노 속에 있었지만,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이루셨습니다.

 

12지파의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을 고난의 시간 속에서 이루어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곳에 그는 아무것도 없이 갔습니다. 얼마나 무시당했을까요? 이삭은 종이 수많은 물건과 낙타를 끌고 갔지만, 야곱은 혼자 빈손으로 갔습니다. 14 동안도 재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던 그가 지금은 부자가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갔던 그가 금의환향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민 오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오래된 분들은 200달러가 한계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들고 와서 공항에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던 ,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그런데 이곳에서 되어서 한국에 돌아가면 갈비 짝을 들고 갔고, 바나나 한다발을 들고 갔습니다. 미국에서 친척 맞이하러 사돈의 팔촌까지 나왔어요. 이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금의환향하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돼서 여기 오신 분들이 많았는데, 자수성가하여 돌아갔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지금 야곱이 그런 겁니다. 20 만에 처음 집에 가는 것입니다.

 

20 만에 처음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는 많은 것을 가질 있었고, 나올 때는 도망치듯 두려움 속에 나왔지만, 이제는 라반을 야단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도주를 도주로 끝나게 하지 않고 당당한 출애굽처럼, 당당한 출하란으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면을 세워주신 아닙니까? "네가 나와 함께 했는데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하시고 라반을 꾸짖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야곱은 정말 오물더미 같은 인생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그런데 이것보다 대단한 일을 여러분이 겪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야곱은 오물더미 같은 곳에서 건져져 부를 누리고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지옥 속에서, 죽음 속에서, 모든 실패 속에서, 아무 소망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선을 이루어내신다는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구절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오물더미 같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안에서 야곱이 부자가 되고 그의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것과는 비교할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서 8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하리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 가난, 낙타, , 자식들 모두 훌륭한 복입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와 비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들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라반에게 쫓겼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누가 너를 대적하리오? 사탄인들 어떤 것인들 너희를 건드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비교가 되는 이야기입니까? 야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주셔서 돌아가는 것에 감동하셨다면, 여러분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셨고, 어떻게 사랑하시며,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비교할 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개의 식탁, 우리의 선택

라반이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대는 방법은 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데서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말은 시제나 복수, 단수가 불분명해서 나타나지 않지만, ‘판단하옵소서’는 복수입니다. 동사가 복수라는 것은 주어가 복수라는 의미입니다. , 라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나홀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여러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의 조상들은 이방 신을 섬겼다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라반은 신들까지 불러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은 사실 “그 조상들의 신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라반은 자기를 위한 , 아브라함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여러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은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합니다. 야곱에게 증인은 분이십니다. 그에게는 베델의 하나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타협 없는 신앙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고집을 부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협하지 않으려면 하나님도 좋고 하나님도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에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지식을 알고 있다면, 사실에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맡길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기에 나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사랑은 나를 놓지 않을 것이고, 나를 붙드실 것이며, 나와 함께하신다는 그분의 약속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헌신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유신론자들도 알지만, 우리는 나를 위해 자기 아들까지도 주실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우리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전체와 연결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만든 신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만든 모든 신은 가짜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신은 가짜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신을 몰라서 가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뒤틀려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바른 하나님을 찾을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고, 말씀을 주셔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이 아닐 , 우리는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고 우리 인생 전체를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가져다 쓰는 , 내가 필요한 만큼만 인정하는 신이 뿐입니다. 모든 중심에는 ‘나’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신앙을 고집하며 타협하지 않고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알게 되었는지, 아니면 ‘나는 이런 신이라면 믿겠다’고 생각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거는 진리는 그분이 하나님이기에 헌신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반을 분노 대신 선으로 대하지만, 라반의 맹세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대해 말씀대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이 “왜 당신은 선을 추구하며 양심적으로 살려 하냐”고 묻는다면, 분명하고 담대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공로도, 능력도, 결심도 아니며, 내가 다른 사람보다 선하고 양심적이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진리이신 하나님에 대한 저의 사랑의 고백입니다. 저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지만, 내가 섬기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과 이야기한 제사를 드리고 식사를 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세상의 식탁이 아니라 주님의 식탁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초대하죠. 라반과 그의 형제들은 성경에서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결말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그들도 야곱의 만찬에 참여했지만 끝까지 돌아서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도전과 경계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학자 모리스 교수는 라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라반은 하나님을 알았고 말씀을 들었으며 심지어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오직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에게 주어지는 복만을 원했다. 그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지만 자기중심적이었고 자기를 숭배하는 자였으며, 이는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많은 사람을 향한 엄숙한 하나님의 경고다. 세상은 라반을 좋아하고 야곱을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야곱은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주님이 기다리시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라반은 세상을 가졌고 자기 몫을 챙겼습니다. 야곱은 같은 세상과 구별되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라반은 세상의 식탁을 받았고, 야곱은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합니다.

 

십자가의 식탁, 부활의 식탁,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눌 식탁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식탁에 앉으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잊지 않고 베델의 하나님을 기억하듯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주님, 저희를 돌아보게 하시고 신앙이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자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가 오늘 주님의 식탁을 받습니다. 우리가 식탁을 받을 때에 진정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어디로 부르시며, 무엇을 베푸시는지를 다시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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