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장 36절로부터 42절 까지입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아멘.
야곱의 두려움과 불신앙
지난주에는 야곱이 도망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야곱이 도망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죠.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만은 놓칠 수 없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우리의 문제인지,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굳게 붙들고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시며 '이 잔만은'이라고 말씀하셨던 그분께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셨는지도 보았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승리하셔서, 그가 이루신 온전한 순종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입혀주셨습니다. 야곱의 연약함을 이겨내는 이는 야곱 자신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근원은 단순히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불신앙에도 있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분명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말씀하셨지만, 야곱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여러분과 저도 아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지식들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역사학자들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훌륭한 말씀을 가르치신 성인이라는 사실을 세상의 모든 학자들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분이 하신 일이 어떤 일인가를 우리보다 더 확신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믿고 있으며 떨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그는 구원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 말씀은 사탄이 의지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신앙의 표준으로 여기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참된 복음을 만나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평생 교회를 위해 애쓰고, 많은 수고와 열심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주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섬긴 것일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살았던 시간들을 주님으로 대체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남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저를 포함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더 두려운 것입니다. 야곱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라반에게 “외삼촌, 만일 제가 외삼촌에게 이야기하고 나오려 했다면 외삼촌은 분명 저를 빈손으로 보냈을 겁니다”라고 말하죠. 이는 정확한 판단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몰래 도망쳤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믿음의 고백
주님을 택하고 그분과 함께 가려 하면 분명히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길을 간다는 것은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부분에서 야곱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이 사건들을 겪으면서 믿음의 고백이 점차 분명하게 달라집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던 이가 나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제가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갔겠지만) 계셨기 때문에 저는 당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기에 조금 아쉬운 부분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야곱은 여전히 “아브라함 우리 조부,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었기에 그 사실을 압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 유명한 얍복강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삶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벧엘의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고, 자신의 인생과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이 세상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배우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한 번의 기도와 한 번의 결단만으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한번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나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참 복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 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서 뒷걸음질하는 듯하다가도 앞으로 나아가고, 또 앞으로 가는 듯하다가도 자신의 삶과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되며, 하나님께서 그 길들을 이끌어가시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과 같은 라반의 태도
야곱도 그랬습니다. 라반이 그를 추적하기 시작하자, 야곱은 20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을 합니다. 바로 추적자 라반을 꾸짖는 일입니다. 이는 야곱이 이제 세상이 아닌 하늘을 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구나.' 만약 여기가 끝이라면 라반의 인생이 훨씬 부러울 것입니다. 그는 잃어버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42절에 이어지는 43절을 보면 이렇게 나와요.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딸들은 다 내 딸이오, 자식들은 다 내 자식이요, 네가 보고 있는 이 양 떼도 다 내 것이라..." 라반의 사고방식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보는 것, 네가 보고 있는 모든 것,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자기 소유라고 생각했기에 야곱이 자신의 것을 훔쳐 달아났다고 여긴 것입니다.
라반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끊임없이 주의 자녀들을 유혹하고 붙잡으며, "너는 내 것이고 네가 가진 것도 다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세상과 매우 흡사합니다. 이는 성경이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다고 말하는 사탄의 태도와도 너무나 비슷합니다. 물론 라반을 사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그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거짓과 그가 야곱에게 행사하려 했던 힘은 결국 깨어지게 됩니다. 야곱은 이제 세상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라반이 자식들과 작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송별회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죠. 하지만 그는 마치 자식들을 매우 사랑하는 것처럼, 야곱과 그 가족을 아껴주는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네가 미리 알렸다면 내가 얼마나 성대한 송별회를 해 주었겠느냐?"라고 이야기하며 여전히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우리가 속는 이유, 욕심
이러한 모습은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뻔한 거짓말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사기 사건들을 보면 사기꾼들은 늘 이렇게 접근합니다. "내가 당신이니까 특별히 말해주는 건데, 나한테 돈을 맡기면 열 배로 불려주겠다."
하나님조차 의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말은 의심 없이 쉽게 믿고 자기 전 재산을 잃어버리는지 모릅니다. 물론 처음에는 수익을 돌려주니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결국 전 재산을 갖다 바치게 되는 것이죠. 나중에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그들은 기자에게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지 못하면서 세상은 이렇게 쉽게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을 가장 생각하고 아끼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기꾼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안 속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람이 주된 표적이 됩니다. 우리가 언제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까요? 바로 세상의 것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인 것처럼 이야기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세상에서 끝날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복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의 의미
만약 사업이 잘 안되다가 어떤 계기로 갑자기 잘되면, "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사업이 잘 안될 때는 하나님의 저주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물질을 맡기실 때가 있고 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복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나님이 그러한 일들을 주신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지 않습니까?
어떤 기적을 통해 병과 아픔이 나을지라도, 인생에는 또 다른 아픔과 새로운 산, 새로운 터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 영원한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반대로 세상을 통해 영원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이제 압니다. 그가 많은 부와 양떼를 거느리게 되었지만, 그것이 자기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확실히 압니다. 그 주인이 누구인지가 분명해진 것이죠. 그의 인생에서 부가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에서를 만날 때 곧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에서에게 주는 일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인생의 방향과 방식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아직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다른 인생입니까? 라반의 거짓은 결국 깨어지게 됩니다. 라반은 자기 말이 통하지 않자 포기하지 않고 전략을 바꿉니다. 그래서 야곱을 고소합니다.
사탄의 고소와 우리의 죄
30절에 라반은 야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아버지 집을 그리워 돌아가는 것은 이해한다. 잘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의 신을 도둑질했느냐?" 그가 훔친 것은 바로 드라빔이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다시 묻습니다. "네가 죄가 없다고? 너는 도둑이다. 지금 내 것을 훔쳐가고 있지 않으냐? 너는 본래 도둑이었어. 에서의 것도 속여 빼앗았고, 이제 내 것도 훔쳐가고 있는 것 아니냐?" 이 고소는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동안 끊임없이 사탄에게 듣는 고소와 같습니다. "네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 뒤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정말 믿느냐? 하나님이 너를 돌보실 것을 확신하느냐? 네 손을 보아라. 여전히 드라빔이라는 우상이 쥐어져 있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지 않으냐? 하나님께로 향해 가고 있다면서 뒤를 돌아보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냐? 생각과 손에 이 우상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네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너는 죄인이다."
야곱은 사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드라빔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그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라빔을 통해 야곱과 그의 가족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라반은 바로 그 드라빔을 요구하고 있었죠.
여러분, 정말 슬픈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탄이 우리를 고소할 때, "너 이렇지 않으냐?"라고 말할 때, 그 고소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고소는 거짓이 아닙니다. 우리 손에는 여전히 우리가 움켜쥐고 있는 '떡'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내 생명, 내 건강,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
그런데 야곱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도둑질'이라는 라반의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찔려야 할 사람은 야곱이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이라는 이름이 맞지 않습니까? 그가 저를 속여 저의 장자권을 훔쳐갔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20년간 고생한 야곱에게는 찔림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라반을 꾸짖습니다.
야곱이 라반을 꾸짖는 말에는 분명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애썼고, 정말 눈 뜰 틈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점도 있습니다. 그가 큰소리치는 근거는 "내가 당신에게 잘했으니, 내가 수고했으니, 하나님이 나의 고생을 보시고 나를 지키신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는 성실했고 신실하게 살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돌보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베델에서는 왜 돌보셨고, 광야에서는 왜 돌보셨습니까? 그 20년 동안 하나님은 왜 그를 돌보신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말에는 진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제가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고난과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 외삼촌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말에는 사실과 함께 야곱의 거짓도 섞여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손과 수고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지키셨다는 부분입니다. 그는 아직 더 배워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키신 것은 그의 고난이나 수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드라빔을 훔치고 수많은 우상을 버려야 할 그의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떠나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진정한 사랑이자 구원입니다. 자신이 드라빔을 훔친 줄도 모르고, 아내 라헬이 가져온 줄도 모르고 큰소리치는 야곱은, 자신이 깨끗하고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편을 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이 함정에 쉽게 빠집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제 편을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할 때는 늘 "그래도 제가 예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를 가장 중요한 이유로 내세웁니다. "그래도 저는 예수를 믿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보다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그래도 예수를 믿었어. 쟤들과는 달라."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이 여러 번 부르시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진정한 겸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끌고 오셨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선택했다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은 한결같습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야곱은 지금 이 사실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지키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야곱의 일생을 알기에 더 잘 이해합니다. 야곱을 살린 것은 그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의로우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사다리'라고 번역하는, 계단과 같은 환상으로 야곱에게 다가오셔서 천사를 통해 그 위를 오르내리게 보여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어느 날 야곱에게 오시듯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야곱은 그 계단을 스스로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우리의 성막이 되시고 우리를 지키셨습니다. 세상의 고소, 곧 사탄의 고소는 우리의 노력이나 실력으로 깨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주님께 헌신하여 선교사가 되거나, 오지에서 자신의 삶을 다 바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사탄의 고소를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주님을 더욱 신실하게 섬길수록 우리의 양심은 더 예민해질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더 깊이 깨닫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서에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쓴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그가 무너졌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알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의 고소는 우리의 의로는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만 깨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더러운 옷과 같지만,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의, 곧 그리스도의 의가 사탄의 고소를 깨뜨립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1절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누구도 우리를 죄인이라 부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선하고 옳지만, 옳기 때문에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율법이 우리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라반을 만나셨다
그렇게 라반이 추구했던 고소, 세상의 고소, 사탄의 고소는 하나님 때문에 깨어지게 됩니다. 라반이 마지막으로 꺼내 든 것은 자신의 능력과 힘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너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으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힘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반에게는 야곱이 아니라 전능자가 나타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힘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열흘 길을 홀로 도망가고 있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자식들과 재산을 이끌고 사흘 먼저 출발했지만,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쉼 없이 도망치는 힘들고 어려운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전에 한 번 나타나셨으니 또 나타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야곱이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 혹시 저를 잊으신 건 아닙니까?"라고 생각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이 아니라 라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지쳐 광야에 천막을 치고 쉬려 할 때, 라반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도착하여 반대편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성경이 '진지'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라반에게 이것이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라반아,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라고 번역되어 있어 "잘잘못을 따지지 말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관용구는 "내 아들 야곱을 건드리지 마라"라는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영어로 "Don't screw with my son"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 아들 야곱을 건들지 마라"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이 일이 벌어진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라반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당연히 알 리 없었죠. 아들은 이 사실을 몰랐고 지쳐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에 가득한 아들과 딸
여기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우리말 표현대로라면 '바위'처럼 무뚝뚝해서 평생 말수가 적은 분이셨죠. 어릴 적부터 해외 생활을 하던 아들은 아버지를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녹음기에 노래를 부르거나 편지를 보냈지만,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으니 아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습니다. 그저 어머니가 시켜서 하는 일이었죠.
나이가 들어 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둘 사이는 어색했습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할 말이 없었죠. 아들은 속으로 "아버지는 내가 자라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나를 어떻게 아시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아들이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식 날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가방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아들과 며느리는 함께 그 가방을 열어보았습니다.
가방 속에는 아들이 유치원 때 받은 상장과 졸업장, 초등학교 졸업장, 그림, 글짓기 원고와 상장까지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가슴에는 아들이 가득했던 것이죠.
마찬가지로 야곱은 아버지를 여전히 몰랐지만, 아버지의 가슴에는 야곱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라반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에는 그분의 아들과 딸, 바로 여러분이 가득합니다. "내 아들, 내 딸을 건드리지 마라."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을 위해 라반을 만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병, 자녀, 실패, 유혹, 눈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여러분의 죽음까지도 주님께서 먼저 만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죽음아, 내 아들을 건드리지 마라.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딸이다." 주님께서는 결국 죽음까지도 여러분을 위해 만나실 것입니다. "내 아들과 내 딸을 건드리지 마라. 내 가슴에는 그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에게 들려주신 이 복음의 음성이 저희를 사로잡게 하옵소서. 아버지를 잊고 심지어 원망할 수 있는 저희 자녀들을 위해, 주님은 그 시간에도 라반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죄와 싸우셨고, 나의 눈물과 싸우셨으며, 나의 실패와도 만나주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시오니, 주님, 주님이 저희를 가슴에 가득히 품으신 것처럼 저희도 그 아버지를 가슴에 품게 하옵소서. 저희의 가슴 또한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차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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