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장 17절로부터 24절 까지 입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아멘
야곱의 도망과 라반의 반전
이제 야곱이 마침내 라반의 집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야곱의 도주와 라반의 반전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의 짝을 이루기에 함께 살펴보아야 하지만, 먼저 야곱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 속에는 그의 아내 라헬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봄, 양털 깎기, 그리고 야곱의 도주
여러분, 이제 LA에도 봄이 오고 있습니다. 날씨가 풀리는가 싶더니 다시 비가 내리고, 어젯밤에도 비가 왔지만 이 비는 어쩌면 반가운 봄비일 것입니다. 이처럼 봄이 확연하게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아는 중동 지방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두 개의 큰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두 강 사이의 땅을 ‘메소포타미아’, 즉 ‘강 사이에 있는 땅’이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이곳에도 봄이 찾아왔고, 라반의 가족들은 양털을 깎기 위해 양 떼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양털은 주로 봄에 깎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바로 그 틈을 타, 성경의 기록대로 ‘가만히’ 그곳을 떠났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는 야곱의 도주가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야곱의 변화와 가족의 소통
우리는 지난주에 야곱이 부자가 된 것이 자신의 방법이나 능력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달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은 이 놀라운 깨달음을 아내들에게 와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는 창세기 야곱 이야기에서 흔치 않은 모습이며, 그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보여줍니다.
이전의 야곱은 얼마나 퉁명스러웠습니까? 가장 사랑하는 라헬이 “나에게는 왜 자식이 없는가?”라고 물었을 때, “내가 하나님이냐? 그것을 나한테 어쩌라고 하느냐?”라고 매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 아내를 앉혀놓고 일의 전후 사정과 앞으로의 계획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소통하려는 그의 모습은 한 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줍니다. 아내들 또한 야곱의 이야기에 따뜻하게 반응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20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마음속 이야기를 서로 나누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20년이라는 기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졌을 수도 있지만, 짧은 기간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아내들은 “아버지가 우리 재산을 먹어버렸다”든지, “우리를 마치 이방인처럼 대한다”는 등 마음속에 품었던 속내를 야곱에게 털어놓습니다.
이 소통을 통해 야곱과 아내들은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야곱은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아내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당신에게 알려주셨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대로 행하라”라고 놀라운 응답을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처럼 아름다운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의 가정은 이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참으로 바람직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도망, 그 이면의 두려움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이 바람직한 가정에서,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첫 번째 일부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성경은 야곱이 ‘가만히 나갔다’는 것을 ‘도망했다’고 표현합니다. 야곱이 도망을 친 것입니다.
여러분,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을 누가 하셨습니까? 이는 야곱이 혼자 생각한 일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씀을 전달하시는 직통 계시는 더 이상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전달하실 모든 말씀을 다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조명(Illumin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깨달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때때로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기도 중에 음성을 들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조명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이 정말로 직통 계시라면, 그것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으니 어쩌면 성경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개인에게 들린 그 말씀이 진짜인지 아닌지 구별하고 확인할 장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성령님께서 나를 감화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직통 계시’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조명하실 때,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릴 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어쨌든 야곱은 이처럼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몰래 떠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라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는 야곱의 신앙이 성장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야곱이 여전히 잘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드러냅니다.
야곱은 결국 도망을 선택합니다. 라반이 두렵다고 했지만, 사실 라반이라는 사람 자체가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가 두려워한 것은 라반에게 자신의 재산을 빼앗길까 봐였습니다. 즉, 야곱이 두려워했던 것은 그가 소유한 재물이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 삶의 숨겨진 이유
우리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변명이나 삶을 합리화하는 이야기들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안에 숨겨진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야곱이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너무 바빠서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의 깊은 곳에는 사실 "돈을 더 벌고 싶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빠서 성경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돈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돈 버는 데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스스로에게도 말하지 않고 깨닫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처럼 자기 자신을 감추고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한 꺼풀만 벗겨보면 무엇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지 금방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가나안으로 향하는 야곱에게도 여전히 ‘이것만은 봐주십시오’라는 조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일만은, 이 시간만은, 이번만은, 이것만은’이라는 조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는 사실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 없지만, 우리는 늘 이 조건을 만듭니다. 때로는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대기도 하지만, 아주 정당한 이유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 이것만은 좀 생각해 주십시오”, “이것만은 주님께서 돌봐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하는 것들 말입니다. 자녀 문제, 급박한 경제적 문제, 심지어 개인의 건강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가 건강해야 주님을 위해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이유처럼 보입니다.
‘나를 따르라’와 죽은 자의 장례
성경에서 아주 정당해 보이는 이유가 거절된 경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의 배경입니다.
먼저 한 서기관이 와서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공중의 새도 깃들 곳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다른 제자 한 명이 와서 “주님,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사를 지내고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고도 정당한 일 아닌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래, 큰일 났구나! 빨리 가서 장례를 치르고 오너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은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참으로 어려운 구절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은 회사 일이 바빠서요. 주님, 다음 주에는 꼭 교회에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주님이 “회사 일은 회사에게 맡기고 너는 와라”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우리는 누구의 장례식에도 갈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섬기고 따라가는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이죠.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 장례식에도 가지 말라고 하시는데, 친구의 장례식은 더더욱 갈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결코 말이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이 구절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비교 우선순위와 '예수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장례를 막으려 하신 것이 아니라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비교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모와 처자와 자식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을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교 우선순위를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만약 모든 것을 비교할 때 예수님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상당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저 또한 어려서부터 “과연 당신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살고 있는가?”라는 헌신에 대한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나는 주님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십니까? 성도를 섬기는 일, 교회 봉사, 이웃을 구제하는 일 등 여러 면에서 그렇게 하셨거나 그렇게 할 수 있으십니까?
우리가 인간이기에 마음은 원하지만 잘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의 현실이며, 이것이 우리의 변명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말씀을 ‘무엇을 하든 예수님이 우선이므로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 해야 한다’고 해석한다면, 현실적으로는 그 일이 곧 교회 일이 됩니다. “교회에 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교회의 일, 즉 하나님의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기준을 우리 스스로도 만족스럽게 지키지 못합니다. 이는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설명하기 위해 찰스 먼로 셸던(Charles Monroe Sheldon)의 유명한 소설 『예수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 책의 수많은 구호와 책갈피 문구처럼, 이 소설은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의외로 중산층에게 더 편안한 곳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정도 번듯하게 살고, 옷차림도 단정하며, 먹고 살 만한 사람들이 주로 교회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은 야고보서의 말씀과 달리 오히려 교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또는 “나는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어려운 곳이 바로 교회가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부분에 집중하여 “예수님이라면 그때 가난한 사람에게 어떻게 하셨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큰 도전과 경고를 던집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라는 이 질문은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질문을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도 곧장 달려가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루를 더 지체하셔서 그가 죽은 뒤에야 가신 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힘든 삶을 살고 있음을 아셨음에도, 한 제자가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라고 말했을 때, 심지어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발에 부은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정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 질문을 떠올릴 때, 대부분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선하고 착한 성인 예수’를 상상하고 그분이 어떻게 행동하실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질문의 진정한 주제가 아닙니다. 이 질문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이해되었을 때, 그 말씀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구약과 신약 전체에 걸친 구원의 역사에 비추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곧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내 양심껏 살아보려 하는 것이 ‘예수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라고 쉽게 여깁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오해하여 교회에 가장 좋은 것을 바치고, 모든 시간을 교회를 위해 쓰고, 다른 어떤 것보다도 교회를 위해 자신을 불살라야 한다는 생각을 쉽게 해왔습니다.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하면 부모, 형제, 자식보다도 교회가 우선이 되고 교회의 일에 온 힘을 다해야만 합니다.
저 또한 이러한 가르침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대대로 예수를 믿어 온 집안에서 자라며, 모든 일에 교회의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습니다. 어머니와 아버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이런 면에서는 기독교 신앙이라기보다 우리가 살았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노벨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코끼리표 전자 밥솥을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밥솥이 없었다면 저는 굶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교회 일 때문에 항상 바쁘셨고, 집에 계시는 날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달려가셨고, 교회 일이 모든 것의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며, 그래야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인 되시는 삶
하나님의 일에 교회가 우선이라는 말에는 일부분 진리가 있습니다. 혹시 ‘교회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라고 오해하실까 봐 다시 말씀드립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모인 곳이기에, 그들을 위해 여러분의 시간과 마음을 쏟는 일은 분명 중요합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가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장례식에 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삶과 죽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계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즉, 죽음을 죽음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아니다, 여기 삶과 죽음의 주인인 내가 있으니 그분과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든 일에 무조건 교회를 우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이시고 왕이심을 알고 그에 따라 어떻게 행할지 고민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흔히 “교회는 이렇게 한다”는 방식을 따르려 하고,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성경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와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며, 그분에게 우리가 순종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분이나 감정, 판단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열심과 열정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열심과 사랑이 무한히 크시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십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서 올바르게 어떻게 해석되고, 그 말씀을 충실히 이해한 만큼 말씀 앞에서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오해했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꾸짖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지식과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분이 주인이시기에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며, 귀하게 여겨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을 보십니다. 바로 이것을 신앙 양심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갖는 양심에 의해 결정한 것이라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신앙 양심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그를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그 사람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우리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교회는 이렇게 하는데 왜 당신은 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아 이 일을 결정했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에게 “왜 그렇게 행동했느냐”고 묻기 전에, “그것을 결정하고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주인이셨으며, 그분을 왕으로 생각하여 결정한 것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겉보기에 아무리 훌륭한 행동을 했더라도, 만약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고 행동했다면, 우리는 스스로 왕이 된 것이며 결국 그토록 많이 말하는 ‘나의 자랑’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시기에 이 결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전가의 보도(傳家寶刀)’처럼 휘두르지만, 그 말씀이 삶에서 성령의 역사와 함께 깊은 고민과 갈등을 통해 올바르게 해석되고 결정된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만약 그 결정이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당신의 주인이십니까? 그분이 당신의 왕이십니까? 그분의 음성을 찾기 위해 애썼습니까? 그분의 말씀 안에서 결정하려 애썼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이 예화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too close to home)라 1부 예배 때도 괜찮을까 고민했지만, 여러분의 오해가 많아 말씀을 드립니다. 어제 저희 교회가 교회 앞을 청소했습니다. 많은 분이 오셔서 정말 열심히 도와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오지 못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에게 “여러분도 교인입니까? 어떻게 교회 일에 이렇게 열심을 안 보이십니까?”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청소에 참여한 분들은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반응한 것입니다. 남이 어떻게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께 반응한 것입니다. 바쁘고 힘들어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 분들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이 나의 왕이심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성실하게 하고 있었다면, 그분들은 청소에 와서 땀 흘려 수고한 분들만큼이나 주님 안에서 평강을 누리실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적은 것을 보니 그런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지만, 여러분 자신에게 “과연 나는 그 시간 동안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셨는가?”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선을 베풀 때, 구제할 때, 어떤 일을 할 때도 이 사실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엉뚱한 구덩이를 팔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있다면, 그 구덩이는 결국 여러분이 열심히 파서 여러분 자신이 들어갈 구덩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야곱도 지금 바로 그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에게 던지셨던 이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가는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의 문제가 이것이 아니었다면, 주님께서 장례에 가게 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문제에서 그들이 ‘생명의 주’이신 주님을 알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지, 특정한 행동만이 항상 정답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성경에 있는 바울의 지혜, “믿음의 분량을 따라 살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믿음이 적으면 적게 살고 많으면 많이 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신실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마지막 예시를 통해 말씀드리고, 여러분이 위안을 얻고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에 대해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부터 드릴 이야기는 저의 경험도, 여러분의 경험도 아닌, 우리가 감히 따라갈 수도, 그분의 삶을 논할 수도 없는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기에 십자가를 지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과 같은 지옥의 고통을 겪으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셔도 아무 문제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조차도 ‘이것만은’이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것만은’이라는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고민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조건을 다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만은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분의 결론은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였습니다.
이 문제는 얼마나 어렵고,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문제입니까? 내 인생이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바라시는 주님과 우리가 연합했기에, 우리도 똑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내가 “이것 하나만, 내 바쁜 시간 하나만, 내 사업 하나만, 내 자식 하나만, 혹은 내 인생 하나만”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수많은 고민과 힘든 일 속에서 “이것만은”이라고 말할 때 반드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신가? 그분이 주인이신가? 그래서 나는 지금 이 문제에 그분의 뜻으로 접근하고 그 앞에서 응답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을 가장 큰 위로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길을 걸어가시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생각과 결단과 고민을 해도 여전히 부족하여 넘어질 수 있고 결과에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문제를 이겨내셨을 뿐만 아니라 승리하셨고,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그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넘어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짧은 지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할수록 더 깊어지고 어려워지는 말씀을 알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 나의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셔서, 나의 양심이나 지식, 경험, 고집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서, 주님의 말씀 속에서 이 문제를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두고 갈등하고 고민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묻는 유일한 질문
저는 여러분에게 “금요일에 와서 함께 기도합시다. 왜 안 오십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늘 있습니다. 금요일에 모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 대부분은 집에 있으면 기도 잘 안 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너무 잘 알아서 드리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것보다는 누워서 쉬는 것이 편하고, 기도할 시간은 잊어도 텔레비전을 볼 시간은 기억하는 것이 우리들 아닙니까? 그러니 “금요일이라도 와서 기도합시다. 아니면 토요일 아침에라도 기도합시다”라고 이야기하고, 혹시 안 오시면 출석부도 정리하고 감점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다 복 받으시라고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으시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된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지로라도 끌려 나와서 기도하는 게 좋겠지요?”라고 하신다면, 한편으로는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이 질문에 답하시기를 원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이 여러분의 유일한 양심이며, 유일한 결정이며, 하나님 앞에서 유일한 응답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만든 조직, 규칙, 시간,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묻는 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주인이며, 내가 너의 왕이며, 그리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기도합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야곱과는 달리 우리는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하란을 떠나고, 애굽을 떠나고, 죄를 떠났습니다. 주님, 주님 안에서 저희가 기쁘고 즐겁게, 당당하고 감사하게 살게 하옵소서. 저희 인생의 모든 문제 속에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왕이시기에, “이것만은”이라는 유혹을 이겨내게 하시고,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가 저의 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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