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1장 1절로부터 16절까지 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아멘.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는 구원 이야기
리브가가 야곱에게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잠시 머무르라 했을 때, 그 '며칠'은 어느덧 14년이 지나고 6년이 더 흐른, 총 20년의 세월이 되었습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야곱은 11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셉을 낳고 나서 라반에게 "이제 돌아가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이 묻습니다. "야곱아, 하나님이 너를 통해 이렇게 복을 주고 있는데 왜 여기를 떠나려 하느냐?"
이 말에 야곱이 대답합니다. "장인어른은 부자가 되셨고 모든 복을 받으셨는데 저는 언제 저의 집을 세우겠습니까?"
야곱의 말은 일견 맞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집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의 집을 세울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미 야곱에게는 11명의 아들과 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생각하는 '자기 집'의 기준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달랐습니다. 그는 재물이야말로 집을 세우는 기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아내들을 얻기 위해 14년을 일했지만, 당연히 받아야 할 지참금은 라반이 두 딸의 몫으로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6년 동안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식들과 아내들만 남은 인생이었기에, 야곱은 스스로 재물을 얻을 방법을 궁리하게 됩니다. 그는 양 떼를 얻기 위해 "가지의 껍질을 벗겨 알록달록하게 만든 곳에서 교배하게 하면 거기서 알록달록한 양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방법으로 흰 양들만 가져가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무런 능력이 없는 행동이었죠. 게다가 라반은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여러 얕은 수를 썼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자신을 열 번이나 속이며 품삯을 바꿔갔다고 말합니다. 이는 야곱 스스로 자신의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야곱은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반의 방해가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방법이 통했던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이 본문이 흥미로운 이유입니다.
야곱이 부자가 되자, 그 집안에 긴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야곱이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야금야금 라반의 재산이 야곱에게로 넘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색깔 있는 양을 갖겠다고 했는데 새끼가 거의 다 야곱의 것만 태어나자, 라반의 아들들이 먼저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그가 속여서 빼앗아 간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라반이 그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고, 자신의 재산은 줄어드는데 야곱의 재산은 계속 늘어나는 것을 보며 라반의 낯빛이 변했습니다. 야곱이 후에 말한 것처럼, 이것은 아주 부드러운 표현일 뿐이었고 야곱은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이러다가는 양 떼는 물론, 딸들까지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야곱은 겁이 났습니다.
바로 그때, 성경의 이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31장 3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옛날에도 야곱에게 하셨던 것이지만, 지금 갑자기 나타나 돌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순종과 은혜로운 마음으로 읽지만, 잘 생각해보면 야곱이 6년 전에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는 잠잠하시다가 가장 힘들어지는 지금에야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이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집'의 기준
그 첫 번째 의미는 우리 모두가 조금만 성경을 읽으면 깨달을 수 있는 당연한 진리입니다. 다름 아닌, 야곱이 했던 말에 담겨 있죠. 야곱은 "내 집을 세우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으로 세우려 한 걸까요? 바로 재물로 세우려 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재물을 모으려 했고,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6년이 지난 후에 야곱은 두 아내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는데"라고 이야기하며 이 모든 일을 처음으로 설명합니다. 그 설명을 들어보면 지금 야곱이 굉장히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양과 염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이렇게 했더니 우리 재산이 이렇게 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양과 염소 새끼가 다 알록달록하게 많이 나왔지만, 야곱은 자신의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해서 된 게 아니라 오히려 라반이 말하는 대로 된 거예요." 야곱이 아니라 라반이 "점 있는 것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자 새끼가 전부 점 있는 것만 나왔고,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바꾸자 그다음에는 얼룩무늬만 계속 나왔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쓴 방법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는 야곱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9절 말씀인데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하란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이름을 꺼낸 것은 오늘 이 짧은 아내에게 설명하는 부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다섯 번이나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전에는 "하나님이 안 주는 걸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할 때 딱 한 번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 동안은 다섯 번이나 하나님이 나오는데, 그것도 그냥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셨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빼앗아 주셨느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것들을 빼앗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라반이 받아야 할 복을 가져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라카'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제가 왜 이 히브리어를 말하냐면, 뒤에 우리나라 말로는 똑같고 영어로도 똑같은데 히브리어로는 다른 단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의미도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야곱은 라반이 받을 복을 이제 너에게 가져오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아까 말했던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라반의 가축을 자신에게 주셨다고 했을 때는 다른 단어를 씁니다. 바로 '자르'라는 단어인데, '건지다', '구원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건지셨느니라, 구원하셨느니라"라고 하시는 것처럼, 지금 이 양 떼를 건지셨다고 말하면서 "내가 라반이 하는 모든 행동을 보았느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라반이 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양들을 건져내셨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이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양과 염소 떼를 갖게 됐지만, 야곱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이때쯤 두 아내에게 "우리 양이 몇 마리고 염소가 몇 마리"라고 자랑할 만합니다. "우리 이제 괜찮으니까 이것들 끌고 가면 된다"라고 이야기할 것 같지만, 그는 양의 숫자를 말하지도 않고 염소를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 이야기합니다. 아내에게 설명할 때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란에 와서 처음으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집을 세운 줄 알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나의 집을 세우셨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이 거하실 하나님의 집'인 우리의 집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사를 "내가 가져왔다"가 아니라 "내가 건져냈다, 구원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양 떼와 염소만을 구해낸 것이 아니라, 야곱을 구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 할 그 모든 인생의 삶을 야곱이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20년 동안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파를 세우시고,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십니다. 이제 그에게 돌아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점진성: 나비의 이야기
하란을 떠나는 야곱의 이야기는 성경에 반복되는 구원의 패턴을 보여줍니다. 지금 야곱의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출우르'하게 하셨고, 야곱을 '출하란'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아주 짧고 한 문장에 가까웠지만, 야곱의 이야기는 훨씬 더 자세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계획하셨고 어떻게 이루어가시며 무엇이 이루어지는지를 더 많이 설명하시죠. 이 뒤에는 출애굽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10가지 재앙, 유월절, 홍해 바다, 광야 이야기 등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중심적인 부분은 모두 구원이라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처음에는 짧아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 더 알게 되고, 출애굽 이야기를 알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시려 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성경신학자 게할더스 보스는 이를 '구원의 점진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계시가 점점 더 문이 열리듯이 쫙 열리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뱀의 뒤꿈치를 여인의 후손이 물지만, 오히려 머리를 밟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이해했을까요? 우리도 창세기 앞부분을 읽어서는 잘 몰랐죠. 그런데 그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완성되는 요한계시록까지 이르면서, "아, 이 계시가 좀 더 분명해지는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도대체 누가 그 여인의 후손인가" 했는데,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다윗인 줄 알았지만, 다윗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여러분이 잘 아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그때 그 자손을 여러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한 자손', '그 자손'이라고 하셨는데, 그가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 계시가 확연하게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이것을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하죠.
야곱이 깨달은 진리
왜 주님은 그렇게 계시를 한 번에 다 알려주시면 될 것을 이렇게 일하시는 걸까요? 물론 여기에는 많은 깊은 뜻이 있지만,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야곱의 인생을 보면, 처음에는 장자권에 대한 욕심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죽을 뻔하다가 쫓겨난 사람입니다.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14년은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그저 아내를 위해 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야곱이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린 이야기입니까?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펼쳐 나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되죠.
게할더스 보스는 이 구원의 점진성을 마치 나비의 일생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나비가 알을 낳습니다. 그 알을 보면서 누가 나비라고 생각했겠어요? 그리고 애벌레가 됩니다. 그 애벌레를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애벌레가 번데기가 됩니다. 아무도 그 안에서 나비가 태어날 줄은 모릅니다. 그런데 호랑나비처럼 찬란한 날개를 가진 나비가 나옵니다.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나비가 등장하죠. 우리가 보기에는 그 형태가 달라 보이지만, 그것은 전부 다 나비의 알이고, 애벌레고, 번데기고, 나비입니다. 그것을 통렬하게 관통하고 있는 한 가지 단어가 있죠. 바로 나비입니다.
이 성경의 이야기와 스토리가 다양하고 모두 달라 보이지만, 그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 이 구원의 역사가 점점 열려서 나비까지 이루어지는 그 한 분이 있는 겁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이해하며 바라봐야 하는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고, 사실은 성경이 여러분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이며, 예수님 자신이 설명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성경을 읽고 영생을 얻는 줄 알고 그것을 열심히 공부하고 배우지만, 그것이 누구에 대하여 증거하는가?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야곱의 이야기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구원의 역사
왜 주님은 이러한 패턴을 가지고 계실까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이야기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통하여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구원의 역사를 긴 역사를 통해 알려주심으로써, 하나님이 진정으로 인애로우시며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신 분임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한 문장만으로는 그 깊은 의미를 온전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 속에서 무너질 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라"라는 그 말씀과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명제가 아니라 그 명제를 증명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속에서 완성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완성하고, 모든 율법을 지킴으로써 모세의 이야기를 완성하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 속에 등장했던 만나와 생수를 통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너희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구약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됩니다. 구원의 역사가 한 인격 속에서 이루어지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저와 여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는 나의 과거와 인생
오늘 읽은 야곱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겪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 속에는 우리의 인생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읽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구원의 역사가 결국 실패하지 않으며, 그를 방해했던 모든 수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시고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기장과 여러분의 인생이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과거는 여러분 나름대로 기억하고 있죠. 어떤 것은 잘못되게 기억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거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과거가 그저 우리가 살아온 시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을 함께 걷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외롭고 힘들었을 때, 그것은 여러분 혼자만의 외로움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울부짖으며 "하나님이시오, 이제 나를 버리시는 것입니까?"라고 기도했던 그 속에 여러분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길을 다윗과 함께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과거를 보는 시선을 바꿀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내 과거 때문에 내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 과거의 주인이셨고 나의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훨씬 더 정확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저 이 땅에 태어나 한 인생을 살다가 교회를 다니게 되고,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낸, 그리고 그 놀라운 영광을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나비가 될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
이렇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성도들도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 이분은 이미 아름다운 날개를 지닌 호랑나비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 생각을 바꿔주십시오. 우리 중에 호랑나비는 없습니다. 날개가 조금 삐져나와 색깔이 조금 보이는 분은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여전히 번데기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개를 완전히 펴는 날은 주님 앞에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날개를 펴고 싶으나 힘들게 날갯짓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필요하고, 주님이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적들이 나타나 번데기를 눌러버리면 그걸로 끝날 만큼 우리는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모든 연약함을 넉넉히 상쇄하고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아직 날개를 펴지 않고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애벌레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뭐가 있다고요? 나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이 "와, 저 사람은 정말 본받고 싶다"고 느껴지는 경우는 아주 적습니다. 솔직히 아주 적습니다. 주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예수를 몇 년 믿은 거야? 저 사람이 집사래?"와 같은 의문을 갖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겁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와서 직접 말은 못하지만 "저 사람도 목사인데? 아, 그럼 나도 신앙생활 할 수 있겠네" 할 때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안에 나비가 있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볼 때 여러분은 그 시선을 절대 놓치시면 안 됩니다. "왜 넌 날갯짓 못하냐"고 말하기보다, "나도 날갯짓을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처럼, 그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고 애쓰고 있구나"라고 함께 보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누구도 다 이룬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오, 내가 그 모든 것을 가졌다 함도 아니라, 나는 푯대를 향하여 지금 달려갈 뿐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며 욕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연약함이 우리에게는 함께 위로가 되고, 함께 격려가 되며, 같이 칭찬하며 주님 앞에서 함께 나아가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일 못하는 사람 많고,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사람 많습니다. 존경심을 잃어버릴 정도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균형이 아주 잘 잡혀있는 신앙인을 만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어떤 한 가지는 잘하지만 다른 것은 엉망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의 약함을 서로 세워주고 받아주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함께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교회를 '복수'로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돌봐줘야 하는 사람인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구역이 시작됩니다. '아, 참 묘하게 어떻게 이 사람과 같은 구역이 되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사람을 내가 함께 지지하며 어떻게 받을 것인가, 나로 인해 저분은 무엇이 서게 될 것인가를 서로 기뻐하십시오. "오늘은 저 사람의 말을 듣고 나니까 너무 마음이 상해"라고 이야기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선하심을 우리가 함께 바라보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우리를 모으셨겠습니까? 바로 이 일 때문입니다.
훈련을 회피하지 않는 삶
이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살아가는데,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야곱다워지는 인생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아, 하나님의 섭리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것이고 나를 훈련시키는 것이지." 그러나 훈련은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짠'하고 나타나기를 바라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훈련받기는 다 피하고 도망가려고 합니다.
훈련도 받으시되 다 머리로만 받으려고 합니다. 읽고 쓰고 보는 것으로만 해결하려고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와, 우리는 저렇게 올바른 복음을 알고 있으며 이것이 신앙의 모습이니까 이것이 맞는 것이다" 하고 끝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인생 전체, 특히 20년 동안 야곱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렇게 훈련하셨습니다.
여러분 힘드십니까? "회사도 다녀야죠, 애들도 봐야죠, 아내도 돌봐야 되죠, 남편도 섬겨야 되죠, 그리고 교회 일도 봉사도 하라죠. 구역도 와서 하고, 금요 집회도 와야 한다고 하고, 새벽에도 기도회가 있다..." 전부 이 많은 부담입니다. "목사님 그렇게 살다가는 우리 일찍 죽어요." 잘 보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오래오래 살고 싶으세요? "아니래요,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여러분 저한테 여러 번 이야기하시고 찬송도 부르셨잖아요. 제가 비결을 알려드릴게요. 주님을 위해서 모든 시간을 다 한 번 투자해 보십시오.
물론 이것은 제가 과장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에 존 낙스는 실제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저 썩어서 죽기보다는 닳아 없어지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입니까? 우리가 어쩌면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과 그렇게 열렬하게 사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가보지도 않고, 해보지도 않고 마칠까 봐 좀 겁이 나기는 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가장 깊은 교제를 한 번도 나눠보지 못하고 천국 가서 주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인지, 내가 주님을 위해,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 나의 시간과 마음과 물질을 한 번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그저 나 사는데 바빠서 내 일만 정리하다가 내 인생을 마쳤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모습이 어디 있을까" 겁이 나기는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훈련하십니다. 여러분이 요리조리 피해 다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을 붙잡고 "이 일을 꼭 해야 한다"고 붙들어 끌진 않으시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셔서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멍에가 가볍다는 것을 배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야,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아갔더니 어느 날 그를 용서하며 그와 함께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그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의 모토는 '사람을 소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는 삶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불태워서 하나님께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불태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기쁨을 누려주십시오. 주님도 그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하시니 놓치지 마십시오. 야곱은 온 힘을 다해 훈련에 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재산만 불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가축을 돌보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세상이 내가 칭찬받고 영광을 받으며 붙잡고 살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이상하지만 정직한 신자의 삶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롯을 구하고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도 만났지만 소돔 왕도 만났습니다. 소돔 왕이 "당신이 정말 잘했으니 전리품을 가져가라"고 말했을 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준 그것이 나를 부자가 됐다는 말을 나는 들을 수 없다. 나는 그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봤을 뿐이며, 하나님과 같이 갔을 뿐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을 받을 뿐이다."
신자는 참 재미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탁월한 인생을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세상과 모든 사람이 보기에 "정말 열심히 사는구나, 정직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는 자기의 몫을 주장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게 살까요?
신자의 세 가지 고백
야곱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세 가지 고백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살게 합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모든 것에서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둘째, 나는 돌아갈 자라는 고백입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것에 마음을 다 빼앗기지 않습니다. 우물물은 길어 마시면 시원하지만, 그 안에 빠지면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것을 붙잡고 내 것이라고 주장하며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 자신이 나의 기업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지으셨는데, 그 하나님 자신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당당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과 안 가진 것, 건강하고 건강하지 않은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성공하는지도 최고의 관심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겠지만, 우리의 것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야곱이 돌아갈 길에는 벧엘이 있었고, 그는 그곳에 "이곳에 하나님의 집을 세우게 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성전을 짓는 사람들
야곱은 성전을 직접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의 자손들도 한참 뒤에야 성막과 성전이 생겼죠. 그러나 야곱은 "성전을 짓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으려 한다면, 아마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성전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따르면, 이미 성전이 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성전으로 삼으셨고, 벧엘이 되어주셨으며, 하나님의 집으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겨우 양, 염소, 낙타 몇 마리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주님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 나의 승천에 너를 하늘의 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할 것이며, 이 온 우주를 다스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부르시고 이 세상을 함께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얻은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인생입니다.
기도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무엇인가를 주의 말씀을 통해 배우는 일은 우리에게 기쁨이지만, 동시에 훈련의 길을 걷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피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길이라면 피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것을 우리의 모든 것으로 삼을 줄 아는 기쁨도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기뻐할 줄 아는 귀한 신앙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주님, 야곱은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주님의 나라를 향하여 돌이켜 걸었습니다. 저희도 그 길을 함께 걷습니다. 예수 안에서 걸어가는 이 길이 아름다울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그 길을 기쁨으로 걷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창세기-109-추적 (2) | 2025.08.31 |
|---|---|
| 창세기-108-도망 (2) | 2025.08.31 |
| 창세기-106-네 품삯을 정하라 (3) | 2025.08.30 |
| 창세기-105-사랑의 묘약 (4) | 2025.08.28 |
| 창세기-104-아전인수 (3) | 2025.08.2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