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 25절부터 33절까지입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이르되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떼에 두루 다니며 중에 아롱진 것과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염소 중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품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아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야곱과 그의 결심을 흔드는 라반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여시어 요셉이 태어났을 , 야곱은 중대한 결정을 합니다. 바로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들 열한 명이 태어날 때까지 겪은 일은 말로 없을 만큼 진흙탕 같았습니다. 피투성이처럼 서로 싸우고 물어뜯던 라헬과 레아, 그리고 야곱,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셨고 사랑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인생과 그의 믿음, 그리고 삶을 배워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그는 요셉이 태어나자마자 벧엘에서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이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누워 있던 땅을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라반에게 말합니다. 14년이 거의 지난 시점에 ' 처자를 위해 일했으니, 이제 끝났으니 그들을 내게 주십시오. 가나안으로 돌아가려 합니다'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상당히 정당한 요구이며, 우리가 보기에도 야곱은 분명 신앙의 결단을 좋은 가장처럼 보입니다. 아마 실제로 그가 떠났더라면 약속한 하나님의 손길을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라반의 믿음

그런데 라반이 말을 듣고 야곱의 마음을 흔듭니다. 라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주신 것을 내가 깨달았다.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좋게 여기거든 여기 그대로 머물러라." 말은 '야곱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부자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있어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깨달았다'라는 개정개역의 번역을 새번역에서는 '점을 쳐서 알았다'라고 번역합니다. 히브리어 자체가 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 틀리지 않은 의미로 보입니다. 라반은 하나님을 섬기는 같지만, 사실 집에 '드라빔'이라는 조그만 우상을 가족 수호신처럼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드라빔도 섬기고 있었기에, 새번역은 그가 드라빔으로 점을 쳤을 것이라고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보면 라반은 '하나님이 너를 통해 나에게 복을 주셨다' 말하며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야곱을 붙잡기 위해 계속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라고만 하지 않고 '여호와'라고 분명하게 이름까지 언급한 것을 보면,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것도 틀리지 않아 보입니다.

 

어쨌든 가능하지만 중요한 점은 ' 하나님이 너를 위해 나에게 이렇게 복을 주셨다'라는 라반의 인식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야곱으로 인해 자신이 부자가 것도 압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도 알죠. 그렇다면 라반은 누구에게 보여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아닌 야곱을 붙잡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는 같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일 라반 자신의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야곱을 붙잡으려는 이유는 하나님이 뒤에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 위함입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죠. 이는 아주 전형적인 어리석고 거짓된 믿음의 형태입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어리석음

라반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언제 잘못된 신앙에 빠지는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거나, 야곱이라는 조건이나 사람,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고 있을 있습니다.

 

라반의 "네가 나를 좋아하거든 여기 머물러라"라는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라반의 그림을 없지만, 이렇게 얼굴이 두꺼운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야곱이 14년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라반 때문에 엄청 고생했는데도 이런 말을 합니다. 라반의 딸들조차 "아버지가 우리를 팔아 자기 모든 재산을 통째로 먹어버렸다" 말할 정도입니다.

 

사람이 언제 얼굴이 두꺼워질까요?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자신이 얻을 이익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모두 잊어버릴 그렇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거짓으로 만들고 온갖 짓을 하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상 많은 악덕 기업주나 잘못된 정치가들이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라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가 크면 남이 보이지 않고, 욕심이 커도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앞서기 시작하면 다른 어떤 것도 설득되지 않습니다. 전도할 "와서 봉사하래요? 밥하래요? 그냥 와서 앉아 먹고 가라" 해도 오지 않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하래요?" 그냥 교회 와서 설교 들어보라는 것도 세상 끝날 일처럼 여기곤 합니다. 우리도 그랬기에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억울함: 나는 가진 것이 없는가?

말을 들은 야곱은 하소연합니다. "장인어른은 지금 부자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이유가 장인어른이 말한 것처럼 때문이에요. 그런데 나는 뭡니까, 지금?" 야곱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뭡니까'라고 이야기하는 야곱의 본심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신앙에 입문한 것처럼 가나안으로 돌아가려 했던 그의 마음속에 있던 억울함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해서 부자가 됐는데, 부자가 이유가 나를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나는 뭐가 되나?'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라반은 부자이고 이유가 야곱 때문인데, 정작 야곱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화가 나고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한테도 복을 주실 정도인데,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에게 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야곱은 자기가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도대체 예수는 누가 믿고 복은 누가 받는 거냐" 말을 합니다. 이야기는 김익두 목사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아낙산 호랑이'라고 불리던 깡패였던 김익두 목사님이 부흥사가 되어 길을 가다 취한 사람에게 실컷 맞았습니다. 그는 "형님, 때렸소?"라고 물었고, 목사님이 "형님,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았소"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내가 김익두요"라고 하자 사람이 엎드려 빌었다는 후일담도 있습니다.

 

실질적인 불신자와 같은 믿음

여러분, 정말 김익두 목사님 말이 사실일까요? 예수는 우리가 믿는데 사람만 복을 받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복을 받은 사람은 김익두 목사님입니다. 그는 죄악에서 구원받았을 아니라 자신을 때린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도둑이 남을 돕게 되고, 강도가 다른 사람의 집을 세워주며, 폭력배가 매를 맞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으니, 누가 복을 받은 것입니까?

 

야곱은 하나님 덕에 라반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제가 약속을 믿고 가겠습니다. 함께해 주십시오'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사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의지하지도,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질적인 불신자'입니다. 믿는다고 말하고 예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솔직하기라도 하지만, 우리는 솔직함조차 잊어버렸을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세상을 봐주고 계십니다. 돈이나 물질, 명예, 건강이 여러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만해지고, 걱정이 줄어들어 마치 세상이 생각대로 되는 것처럼 느껴질까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말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해도, 마음으로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야곱이 그렇지 않았나요? 하나님을 입에 담고 있었지만, 라반의 한마디에 흔들립니다. 그리고 '나는 가지지 못했나?'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품삯인가, 상급인가?

라반의 중에는 " 품삯을 네가 정하라" 무서우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말이 있습니다. 말에 대답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테니 일하라' 것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을 네가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겠다' 제안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고, 마음속에 있는 가장 깊은 욕망은 무엇입니까? 라반의 말은 야곱을 꿰뚫어야 했지만, 야곱은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품삯' 일한 것에 대한 대가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품삯을 자신의 원하는 대로 정하라는 말에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품삯'이라는 단어는 야곱의 아들 잇사갈의 이름과 관련이 있습니다. '잇사갈' '사갈' 바로 '품삯'인데, 레아가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보상해 주셨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희생한 것에 대해 하나님이 보상해주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보상'이라고도 번역됩니다.

 

단어에는 하나의 놀라운 의미가 있는데, 바로 아브라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상급이니라"라고 하셨을 사용된 단어와 같습니다. '품삯'으로도, '보상'으로도, '상급'으로도 번역될 있는 단어는 야곱에게는 단순히 자신이 버는 , 자신이 일한 대가에 불과했습니다.

 

야곱이 품삯을 '자신의 대가' 여겼기에 라반은 품삯을 번이나 바꿀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제안합니다. " 떼와 염소 떼는 보통 흰색인데, 그중에 얼룩덜룩한 , 있는 , 검은 것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것들이 몫이 것입니다." 비율은 거의 9 1 가까웠을 것입니다. 거의 나오지 않는 색깔이었으니까요. 라반은 뛰어난 장사꾼답게 애매한 계약에 동의합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부터 아롱진 , 얼룩덜룩한 , 검은 것을 추려내겠다. 그리고 너는 하얀 것만 데리고 3 떨어진 곳으로 가서 양을 쳐라. 같이 있으면 짝짓기 해서 나올 있으니까. 거기서 것만 네가 가져라." 라반은 배의 이익을 취하려 했습니다.

 

야곱은 하얀 떼를 데리고 가서 나뭇가지의 껍질을 벗겨 알록달록하게 만들고, 그것을 물가에 꽂아 놓고 앞에서 양들이 짝짓기하게 합니다. 그러자 하얀 염소와 하얀 양에게서 알록달록한 새끼들이 나옵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야곱의 헛된 시도와 하나님의 은혜

야곱이 일은 합환채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합환채가 정말로 아이를 낳게 해줄까요? 야곱은 당시 미신처럼 내려왔을지도 모르는 방법으로 '이렇게 하면 되겠다' 생각하고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새끼가 나왔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하얀 양에게서 검고 알록달록한 새끼들이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번만 기록된 같지만, 라반이 품삯을 번이나 바꿨다는 것은 라반이 조건을 바꿔도 계속해서 야곱의 재산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야곱이 일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혹시라도 오해할까 야곱의 입을 빌려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나에게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 눈을 들어보라. 떼를 숫양은 얼룩무늬 있는 ,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잘해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야곱이 일은 엄밀히 말해 헛짓이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기에 복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에는 '이렇게 하니 새끼가 나오는구나'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번이나 방식이 바뀌는데도 재산이 늘어나자, 그는 점차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고, 방식으로 것이 아니었구나."

 

진정한 가치를 쫓는

야곱이 부를 누린 것은 라반 덕분도, 야곱이 잘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이건 사람 덕분이다', '좋은 기회를 잡아서다', '운이 좋아서다', '내가 준비를 잘했더니 거다'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 팔자 덕분'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진심으로 말하기를 어려워할까요?

 

야곱은 가나안으로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만 크게 보이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었어야 하나님께서 짓고 계신 그의 집이 보였을 텐데, 그는 여전히 그저 약속이라는 간판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눈을 들지 못해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로 눈앞에 집을 지을 있는 재물이 떨어진 것을 보고 그것을 잡았습니다. 하늘을 바라봐야 그의 눈에 보였던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믿고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의미를 두지 않았던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표지판이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될까 정말 두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고, 읽었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습니까? '요즘 성경 많이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예전에 읽었던 말씀이 생각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말씀조차도 아무 의미 없는 표지판 정도밖에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이 가야 길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분명히 알려주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 잊어버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은 세계 7 난제 하나인 '푸앵카레의 추측' 문제를 풀고도 100 달러의 현상금을 거절했습니다. 그에게 교수직과 연구직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려 하는지 묻자, 그는 "나는 지금 우주의 비밀을 쫓고 있는데 내가 어찌 백만 달러를 쫓을 있겠느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 사람도 자신이 가치를 느끼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생각할 있는 가장 것도 포기합니다. 지푸라기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겨우 수학 문제 하나 푸는 것을 '우주의 비밀'이라 여기고 모든 돈을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도저히 없는 하나님, 놀라운 영광, 하나님의 상급을 가지고 그것을 따라가고 추구하는 우리는 어찌 그리 자주 뒤를 돌아보고 곁눈질하며, 작은 유혹이 오면 덥석 받아버립니까? 품삯, 그것이 그리도 좋습니까?

 

무엇으로 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결국 품삯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품삯은 내가 일한 것에 대한 단순한 보상에 불과합니다. 품삯은 우리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들고, 시기와 질투, 그리고 욕심을 낳습니다. '누가 많이 받았는가?', '누가 가졌는가?', '누가 세상에서 좋은 인정을 받는가?' 계속해서 따지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급이라면 어떨까요? 상급은 우리가 받을 것이 없을 때조차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상급을 좇아가면 우리에게서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올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우리의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품삯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상급이신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면,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늘에 쌓고 있는 여러분의 상급, 여러분의 예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말투 하나, 눈짓 하나, 마음 하나, 그리고 작게 베푸는 모든 손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까? 아니면 품삯을 얻으려고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줄기를 키우고 잎을 내며, 꽃을 맺고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천국에 쌓고 있는 여러분의 인내, 기쁨, 소망, 친절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들을 하나님의 상급이기에 이미 받은 자로 누리고 있으며, 그것들이 하늘나라에 쌓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품삯을 붙잡고 것을 움켜쥔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루를 품삯으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상급이신 하나님으로 사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는 무엇으로 살겠습니까?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습니까? 이제는 십자가도,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품삯을 주겠다는 말이 우리 귀에 너무나 달콤하게 들립니다.

 

눈앞의 품삯이 우리를 흔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바라보게 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나의 상급이신 주님만을 생각하도록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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