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장 14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밀 거둘 때에 루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에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아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여러분,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부모님이나 친구를 떠올리는 분도 있을 것이고, 대부분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심지어 심리학자들도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 실험 결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에서 진행된 실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은 잘 아는 것 같지만, 자신이 얼마나 똑똑하고 매력 있고 창의적인지, 무엇을 희망하며 살고 있는지와 같은 실제 본질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정작 내가 얼마나 똑똑하고 창의적인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안다고 해도 그것을 말하기는 참 곤란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까요? 야곱의 아내 레아는 사랑받지 못해 평생 괴로워했습니다. 반면 라헬은 사랑은 받고 있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보지 못하고 시기심에 사로잡혀 "나는 왜 자녀를 주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괴로워했습니다. 괴로운 심정은 잘 알았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진정 문제였는지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계속 자식을 낳으며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했던 것이죠. 그러나 몸종까지 동원하며 자식을 낳았던 이들의 경쟁은 결국 서로의 이기심과 시기심, 절망, 그리고 상처만 드러내는 진흙탕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끝나지 않는 싸움
이 싸움은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특히 레아가 네 번째 아들 유다의 이름을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라고 지었을 때, 우리는 레아가 드디어 하나님께 시선을 돌렸다고 생각했죠. 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라헬은 레아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진흙탕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고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첫째 아들 루우벤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스토리가 끝나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갈 것 같다는 신호가 됩니다. 루우벤은 들판에서 '합환채'라는 식물을 발견합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랑의 묘약으로 알려진 이 식물은, 이것을 가지고 있거나 먹으면 남편의 사랑을 얻거나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독특한 향기를 가지고 있어 그렇게 불렸던 것 같습니다. 물론 미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할 레아와 라헬이 그 합환채를 두고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그들은 서로 합환채를 갖고 싶었던 것이죠. 이것이 정말 둘 사이의 문제 핵심이었다면,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레아와 라헬은 오히려 자기들의 마음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빼앗는 자매
중요한 단어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샀다'라는 단어입니다. 루우벤이 합환채를 가지고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라헬은 싸우던 레아에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갑니다. 아들을 너무나 낳고 싶었기 때문이죠. 라헬은 합환채를 달라고 청구하지만, 레아는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도 작은 일이 아니지 않냐, 그런데 내 아들의 합환채까지 빼앗으려 하느냐"라고 말하며 순순히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라헬이 조건을 겁니다. 야곱은 항상 라헬을 사랑했기에 일이 끝나면 라헬의 방으로 왔는데, 라헬은 "오늘 밤에 남편이 언니 방으로 갈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해 줄 테니 합환채를 나에게 달라"고 말합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얻고 싶었기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합환채를 라헬에게 넘겨줍니다. 서로의 약점을 알고 정곡을 찌르는 거죠. 저녁에 야곱이 돌아오자, 레아가 나와 야곱을 맞이하며 말합니다. "오늘은 당신이 우리 방으로 와야 합니다.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습니다." '샀다'는 단어는 '고용한다'는 뜻입니다. 결혼과 사랑이라는 관계를 물건을 사고파는 것처럼, 종을 고용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도 과거에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샀었죠. 지금 레아는 합환채를 가지고 남편의 사랑을 사고 싶어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
그런데 이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고 대반전이 일어납니다. 합환채를 얻은 라헬이 자식을 낳아야 하는데, 아이를 가진 사람은 레아였습니다. 레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쌤통이다! 봤지? 하나님은 내 편이야! 너 내 앞에서 까불지 마!"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겁니다. 라헬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셈이죠. 여러분, 둘은 자매였고 야곱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좋은 관계였을 겁니다. 레아가 신방으로 들어가는 일도 라헬이 전혀 모르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세 사람의 타협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레아는 라헬에게 "네가 내 남편을 빼앗았다"고 말합니다. 원래 라헬이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으니 남편을 뺏은 것은 사실 레아였는데, 라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보기에도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 말이 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바로 서로의 시기심과 욕심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얻고, 자식을 꼭 가지고야 말겠다는 것을 성경은 시기심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밖에 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겁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
여러분,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 같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 인생에 그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한 적이 몇 번이나 되세요? 주로 먼저 원하는 것을 구하고는 "하나님, 이거 주세요. 이거 안 들어주면 나 다시는 교회 안 나가"라고 하지 않나요? 우리의 인생을 보면 라헬과 레아와 뭐가 다를까요? 우리 자신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우리가 그분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설교를 들을 때는 전부 남의 이야기로 듣습니다. 내 이야기는 없고, 설교에 떠오르는 것은 김 집사, 박 집사뿐이죠.
왜 하나님께서 설교라는 형태를 주실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도망을 칩니다. 자기밖에 보지 못하는 레아와 라헬처럼, 우리는 상대방의 아픔이나 상처는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둘 다 자신들이 받은 것은 보지 못하고, 상대가 가진 것만 보입니다. 남이 잘된 것은 보여도, 내 상처와 아픔은 보여도, 내가 가진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를 미워하기 시작하죠. 우리나라 속담에 "며느리가 미우면 뒷발꿈치가 달걀 같아도 밉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다 미워 보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왜 자꾸 남을 보게 되는지 잘 보여주는 서양 속담도 있습니다. "빨랫줄에 걸린 빨래가 더러워 보이는 이유는 네 창문이 더럽기 때문이다." 창문을 통해 빨래를 볼 때, 창문이 더러우면 아무리 깨끗한 빨래도 더럽게 보이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우리의 눈과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습니다. 다른 사람, 환경, 내가 살아온 배경에서 찾는 거죠. 라헬과 레아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름에 담긴 마음
여러분, 레아가 본문에서 지은 이름 '잇사갈'은 '보상'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몸종을 야곱에게 주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지금 그것을 나에게 보상하시는 것이다." 이 말은 "내가 가진 가장 귀한 재산을 야곱에게 내어놓았고, 그것으로 자녀를 얻었다. 하나님이 내가 헌신한 것을 이제 보상해 주려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의 자랑과 행한 공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이러한 모습을 자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저 집 아들이 좋은 대학 갔대" 하면 "그래, 내가 알아봤어. 그렇게 교회 열심히 봉사하더니 아들이 좋은 대학 갔구나"라고 말하지 않나요? 우리는 겪는 모든 일에서 전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나는 레아와 라헬이 아니야"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쩌면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내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았다"는 것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도 어릴 때 목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거든요. "나는 목사가 돼서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할 때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처음에는 이렇게 하면 천국에서 상이 클 것이고, 목사가 되면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 하나님이 나를 더 예뻐해 주실 것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생각을 당연히 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가장 큰 상급을 받는 길인 줄 알았던 거죠. 제 마음속에 이것을 고치지 않았더라면 무엇을 위해 살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일을 잘해서 그 공로로 하나님께 이쁨을 받아 천국 가서 남들은 다 초가삼간에 살 때 나는 맨션에서 한번 살아보자" 이렇게 됐을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너무나 깊은 욕심과 본성이기 때문에, 레아와 라헬에게서 나왔다고 해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레아는 라헬에게 정말 승리했다고 느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보상하셨다"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지만, 그 이유가 "나는 내 걸 줬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거죠. 마지막 아들 스불론의 이름을 붙일 때도 "하나님이 이것을 인정하셨다, 높여주셨다, 명예롭게 하셨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라는 뜻을 담은 겁니다.
하나님이 보셨고 들으셨다
정말일까요?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의 20절을 한번 보십시오. 레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여섯 명의 아들을 낳고 나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가 이제는 나와 함께 살 것이다." 어디로 돌아갔나요? 제일 처음으로 돌아갔잖아요. 처음에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나와 연합해 주십시오, 그가 나와 연합할 것이다, 그가 나를 이제는 기억하고 내 말을 들을 것이다." 남편에게 완전히 쏠려 있던 레아의 마음이 유다로 인하여 회복되는 줄 알았는데, 그러나 다시 돌아옵니다.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또다시 처음 야곱의 사랑만을 구했던 그 모습으로 돌아온 거죠.
더 위험한 것은 사실 그녀는 지금 그것만이 아니라, "나는 이제 하나님을 위해 할 만큼 했고, 하나님께 헌신했으며, 하나님도 나를 인정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너무나 쉽게 돌아가 버립니다. "주님, 주님이 옳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뜻을 따라 올바른 복음을 따라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그렇게 살기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일어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거죠. 지금 레아를 보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라, 사실은 그녀가 갖고 싶었던 복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과연 그녀는 할 만큼 했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있었으며, 잘하고 있었을까요?
우리는 레아의 마음을 압니다. 그녀가 겉으로 "하나님이 보상하셨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라고 아무리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는 우리가 압니다. 그녀는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분노에 잠겨 있었으며, "내 남편을 빼앗았다"는 라헬을 미워했고, 라헬은 여전히 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이겨야 할 대상이지 함께할 사람은 아니었죠. 자매인데 한 번쯤은 "그래, 너도 얼마나 힘들겠냐. 자식을 낳았으면 참 좋겠는데"라고 농담으로라도 한 번 건넬 것 같은데, 둘은 서로의 상처만을, 그 아픔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그녀의 마음속은 너무나 가난했고 상처 속에 있었으며, 오직 자신만을 보았기에 가장 중요한 원리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이었나요? 그녀가 자식을 낳게 된 진짜 원리는 무엇이었나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녀를 보셨다, 하나님이 그녀를 들으셨다." 합환채도 아니었습니다. 합환채였다면 라헬이 낳았어야죠. 여종도 아니었고, 보상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단순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들으셨더라." 물론 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들
라헬의 경우도 보십시오. 라헬도 합환채를 가지고 야곱을 통해 자식을 낳으려고 했습니다. 여종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던 거죠. 그녀가 결국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뭐라고 말합니까? "내 수치와 내 자존심이 해결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합환채를 받고 곧바로 아들을 낳아야 할 사람은 라헬이었죠. 그런데 레아가 먼저 낳았잖아요. 그때 라헬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찢어졌겠죠? 얼마나 약이 오르는 일입니까? 합환채는 내가 사다시피 했는데 아들은 레아가 낳아버렸으니,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니 결국 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들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레아에게 자랑하러 갔을 수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수치를 드디어 없애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아들이 아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 이름이 '요셉'인데, '요셉'은 '하나 더 달라'는 뜻입니다. 아들 하나 더 주십시오.
아들이 많아도 그녀의 마음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아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기심과 욕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 문제가 사실은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기 자신도 몰랐던 거죠. 아들만 생기면 해결됐을까요? 만일 레아의 경우에 야곱이 그녀를 사랑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보았더니 그것이 진짜 문제가 아니었던 겁니다. 라헬이 아들을 다섯 명 더 낳았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됐을까요? 레아가 여섯 명을 낳았으니까.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라헬 역시 자기의 진짜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 보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똑같이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니." '그의 소원'은 번역자가 넣은 부분입니다. 원래는 '들으셨다'라는 단어예요. '들으라 이스라엘아'라는 '쉐마'와 같은 단어입니다. '들었다'는 뜻이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나 호소를 들으셨겠죠. 그러나 저는 여기서 '들으셨다'는 단어만 쓴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들으시려고 했던 것은 그들의 기도나 호소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 진정한 필요, 그리고 그들이 무엇으로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야곱의 열두 아들이 태어나는 이 사건이 의미 있는 사건이 되었다고 봅니다.
핏덩이라도 살아있으라
여러분, 라헬과 레아는 자식을 낳을 때마다 자기가 원하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이겼다고 말했죠. 사실 그들의 마음은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레아는 여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라헬은 시기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들으셨지만, 그들 자신은 몰랐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가진 것이 있어도 그것을 볼 줄 몰랐던 거죠. 심지어 그들의 인생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없던 아들을 낳았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지만, 기적을 보고도 그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 같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피투성이였습니다. 시기심과 피해의식, 그리고 절망 속에 있었던 거죠.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보셨습니다. 사랑받는 라헬을 보신 것이 아니라, 시기심으로 지쳐버린 라헬을 보셨습니다. 자식을 먼저 낳고 "이겼다"고 외치는 레아가 아니라, 사랑받지 못해 외로움 속에서 매일 눈물로 시간을 보내는 레아를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피투성이 상태로 죄와 상처 속에 잠겨 있는 그녀들을 보셨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식이 없는 울분 때문에 하루하루를 눈물과 한숨으로 지내야 했던 그녀를 보셨습니다.
정말 피가 낭자한 인생이었죠. 상처에 상처가 더해지고 소금까지 뿌려지는 고통 속에, 핏덩이 같은 그녀의 인생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사랑하셨습니다. 상처 속에 있었기에 그 상처 속에 있는 그녀를 사랑하신 겁니다. 그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마음뿐일까요? 여러분의 마음은 다를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보셨으며, 들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고, 그들이 지었던 이름들을 실제로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들을 높이셨습니다. 레아는 자신이 그토록 외쳤던 상급, 보상 '잇사갈'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이 그녀의 상급이 되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닌가요? 우리 역시 핏덩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가져와서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기도하며 나올 때 무엇을 가지고 나올 수 있습니까? 신앙 시인 김현승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눈물'이라고요. 한숨과 눈물, 그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전부라고요. 작은 소망조차 짓밟히고, 숨이 가슴에 턱턱 막히고, 가슴에 맺힌 한이 썩어 들어갈 것 같은 인생.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수많은 상처와 아픔들이 분노와 자존심, 열등감으로 나타날 때, 혹은 교만이나 남을 미워하는 것으로 드러날 때, 그것들을 누르고 눌러 덮어버렸던 우리를 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도저히 뚫고 나갈 길이 없어 보이는, 돌이 얹힌 것 같은 마음,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로 쌓여 있던 그 마음을 시인은 '눈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눈물을 보셨고,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웃을 때가 아닙니다.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하나님, 이제부터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할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십니까?" 할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썩은 마음 때문에, 선하지 않은 마음 때문에 갈등할 때, 바로 그 모습을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눈물에 씨를 심으셨고, 그 눈물로부터 싹을 틔우시기를 약속하셨으며, 결국 옥토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라는 시의 마지막은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꽃이 시든 것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내 인생이 가장 찬란할 때,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젊어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할 때, 그때가 잘 서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육신의 힘도 다 사라지고 마음도 식어버린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래서 "하나님, 이제는 그냥 주님 곁에 가는 게 내 인생 다가 아닌가요?"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신다는 겁니다. 내 마음속에 내가 가진 것 같으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듯, 주님은 그 꽃잎이 지는 여러분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정말 피투성이인 여러분을 보셨습니다. 에스겔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너를 돌보아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기에, 네가 태어난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너는 들에 버려졌느니라." 하나님을 떠난 우리에게 어찌 참된 회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메마르고, 쓰러지기 쉽고, 상처 속에 있습니다.
"내가 너의 곁을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너에게 이르기를 '그 피투성이 속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며 살아보겠다고 하는 너를 보며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다시 이르시기를 너는 핏덩이라도 살아있으라. 내가 너를 살리리라'" 여기서 '너'는 이스라엘이지만, 바로 여러분이 아닙니까? 핏덩이라도 살아있으라. 하나님은 바로 이 날을 보셨습니다. 우리의 깊은 속을 보셨고, '내가 꾸민 나'가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가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미천한 나'를 보셨습니다. 핏덩이라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냥 지나치실 법도 한데, 건강한 이들도 많고, 싹수가 보이는 이들도 많은데, 하나님은 핏덩이 같은 우리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나를 보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상한 갈대 같고 꺼져가는 심지 같기에,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기억하셨습니다.
마리아가 기도할 때,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녀의 기쁨의 근원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피투성이처럼 버려져 발짓하며 이 세상을 향해 "나를 무시하지 말라. 내가 이만큼 살아왔다. 나도 가진 것이 있다. 내놓을 것이 있다"고 외치며 살았습니다. "내 집안이, 내 실력이, 내 학력이, 그리고 내가 번 이 물질들이 나 그렇게 쉬운 사람 아니다. 나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참된 나를 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핏덩이 같은 나를 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상처와 아픔을 자존심만 가지고 버티고 있는 나를 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그 하나님이 들으셨고, 그래서 말씀하시는 거죠. "살아있으라. 살아라. 내가 너를 살리리라." 나를 아시기에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알고도 사랑하십니다. 이제 그리스도 자신이 나의 잇사갈, 나의 상급이 되어 주시고, 내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나를 살리실 것입니다. 나의 명예, 나의 인정, 나의 높임, 나의 스불론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나를 높이 드실 것이고, 나에게 은혜를 더하고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이 되는 거죠.
우리의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다윗의 기도가 우리에게 먼 기도가 아닐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 "내가 너와 함께할 정도가 아니라 나의 선함이 너의 인생을 따라갈 것이다"라는 것을 다윗은 알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이 더하고 더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에게 더하고 더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족한 것은 가지지 못한 물질이 아닙니다. 세상이 약속한 어떤 것도 아닙니다. 아내나 남편의 사랑도 아니고, 자녀들의 문제도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신 것을 모르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더 가까이 가지 못한 바로 우리들의 더러운 창문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지금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누가 여러분에게 은혜를 더하실지 기억하십시오. 돈에게, 성공에게, 거짓 기쁨에게 자신을 꾸미고 서지 마십시오. 나를 가장 잘 아시고, 핏덩이인 나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오십시오. 여러분의 잔이 넘칠 것이며, 더 흘러넘쳐서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살아생전에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그렇게 저희를 보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가 주님을 바라보겠나이다. 오 주님, 성령의 충만으로 더하소서. 오 주님, 주님의 은혜로 더하소서. 오 주여, 주의 평강으로 더하소서. 더하소서, 더하소서. 차고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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