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0 1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이 이르되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억울함을 푸시려고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음에 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음에 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아멘

 

라헬과 레아, 그리고 야곱의 결혼 이야기

우리가 함께 비유를 살펴보았고, 이제 지난번에 멈추었던 창세기로 돌아갑니다. 창세기는 50장까지이며, 우리는 이제 30장으로 들어갑니다. 뒷부분은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야곱과 요셉이 애굽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펼쳐 나가시는지, 여러분의 인생을 읽듯이 함께 읽고 말씀에 가까이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의 결혼식을 기억하시나요?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7년을 하루같이 기다렸지만, 첫날 밤에 언니인 레아가 들어옵니다. 황당해하는 야곱에게 외삼촌 라반은 "우리 지방에서는 번째가 첫째를 앞서가는 법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작은 , 둘째가 첫째를 이기는 것이 인생이었던 야곱에게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헬과 혼인하기를 원했고, 7년을 일하는 조건으로 레아와 라헬을 모두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성경은 야곱이 라헬만을 사랑하고 레아는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명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번째 아들 유다를 낳으며 레아는 자신의 괴로움과 아픔 속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하며 위로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시기심과 욕심의 시작점

그러나 오늘 본문 창세기 30 1절에는 다른 괴로움을 가진 여인, 라헬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식이 없었습니다. 당시 자식은 집안의 힘이자 복의 척도였기 때문에, 라헬은 자신이 집에 와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라헬뿐만 아니라 사라, 리브가, 한나에게도 있었던 문제입니다.

 

라헬은 언니 레아가 자식 낳는 것을 보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한나는 브닌나의 괴롭힘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갔지만, 라헬의 괴로움은 외부의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레아가 자녀를 낳는 것을 보며 처음에는 부러워했겠지만, 점차 마음은 시기심으로 바뀌어갔고, 성경은 그의 시기심이 커졌다고 표현합니다. 라헬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자신의 시기심 속으로 깊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 해결 방식과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문제 자체에서 해결책을 찾기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 속으로 쉽게 빠져듭니다. 계속해서 곱씹을수록 억울함과 분노가 커지고, 문제와 상관없이 감정에 갇히게 됩니다. 사랑을 받고 있었던 라헬 역시 가지지 못한 것을 원하기 시작합니다. 시기심이란 자신이 가진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남이 가진 것을 원하는 마음입니다.

 

라헬은 야곱에게 “자식을 낳지 못하면 죽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식이 없으면 자신의 삶에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무서운 고백입니다. 무시나 멸시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식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시기심을 넘어 욕심이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은 결국 우상숭배로 이어집니다. 우상숭배는 돈이나 명예뿐만 아니라, 우리 안의 탐욕에서 시작되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잊을 생기는 문제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것을 구하기 시작하면 쉽게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돈이나 건강, 명예, 행복 등을 우상으로 삼기 쉽지만, 라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상숭배의 시작점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를 잊어버렸을 , 우리는 다른 것을 귀하게 여기고 원하며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잊고,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를 알지 못하며,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할지를 잊을 , 바로 자리에서 우상이 시작되고 시기심과 질투도 생겨납니다. 우주를 '빛이 있으라' 말씀으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선언하셨는데도 우리는 말씀의 귀중함과 무게를 너무나 소홀히 여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하신 말씀은 무게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부끄럽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성경은 바로 그러한 우리를 사랑했고 아들을 주었으며 우리로 인해 기뻐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전혀 약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나의 사랑', ' 신부'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며 사실입니다.

 

야곱은 14 동안 라헬에게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기간의 사랑이었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으신 분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물론, 건강을 잃거나 때문에 고민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로 괴로워하며 힘들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비교할 없습니다.

 

여러분을 '영원한 나의 신부' 하신 하나님의 말씀, '영원히 너와 함께하며 너를 즐거워할 '이라는 약속보다 크고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라헬의 이야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번째 부분입니다. 시기심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욕심에서 출발한 우상숭배라는 , 그리고 시작은 우리가 믿는 신자로서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잊어버리는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내가 누구이며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 자신의 실력이나 가진 것으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고 찬양하는 것처럼, '나의 '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상을 만나고 만들며 우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의 주인이 되는 순간

신자가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사랑을 받은 사람인지를 잊어버리면 결국 세상으로 나가 자신을 세상과 비교하게 됩니다. 시기심은 하나님을 잊게 하고, 자기 자신의 처지에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고 자신의 문제에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이웃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성도 분을 떠올렸을 , 성경에 나온 대로 분도 귀하지 않은 분이 없는데 과연 내가 그들을 그만큼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는가 하는 질문에 부끄러웠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믿고 알았다면, 많이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함께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들의 인생에는 힘든 순간, 신앙의 유혹, 아픔, 위에서의 고민이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귀함을 조금도 깎아내리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귀한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셨고, 여러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우주를 지으셨고, 지금도 그것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곁에 있는 가족과 성도들이 정말 귀중한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쉽게 세상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고 실망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라헬에게는 남편 야곱이 있었지만, 본문을 보면 그는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의 말을 듣자마자 화를 내며 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구구절절 맞는 말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해 자식을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야곱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라헬 당신도 아시다시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손에 달린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화를 내며, " 나한테?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나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있겠느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건 속에서 라헬이 느꼈을 감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야곱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야곱은 옳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말을 믿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마치 하나님의 주권을 아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권을 핑계 삼아 자신이 해야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다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 모든 일의 주인,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우리 함께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주권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정말로 믿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권자가 하나님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았던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끌어온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느냐?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야곱은 답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답을 아는 것만을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답을 알고 맞추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함께 풀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그분을 알아가며 배워가는 모든 순간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더욱 친밀해지는 모든 순간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정답을 내밀며 "하나님, 맞았습니까?"라고 묻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종종 일을 크게 혼동합니다. 바리새인의 길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여러 듣고 알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정답을 갖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답을 아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정말 답을 몰랐을까요? 성경을 몰라서 문제였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 뜻대로 해석한 것은 그들이 사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문제 속에 들어가서 함께 어려움을 겪으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가고, 주님과 가까이 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알아가고 사랑하며, 함께 걸어가며 인생의 진정한 기쁨을 나누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기보다, 답을 빨리 받아서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주님과 함께 걸어가느라 고민하고 넘어지며 지치고 쓰러지더라도, 모든 속에서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어가며 주님을 더욱 배워가고, 주님으로 인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자리에 서는 것이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신앙, 골라 먹는 음식이 아니다

저는 야곱과 같은 신앙을 골라 먹는 신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맞는 말을 했지만, 그것을 골라 자기에게만 유리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주권을 이야기했다면 기도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고 함께해주십시오."라고 함께 기도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말씀만 골라 먹고 다른 말씀은 무시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우리에게 당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되, 모든 말씀을 전파하라고 말입니다. 어떤 부분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고, 항상 말씀 전체를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 가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자신의 방법, 세상의 방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주권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다는 것은 일에서도 증명됩니다. 라헬이 내놓은 방식은 자신의 몸종을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일이 얼마나 실패를 가져왔는지 알면서도 아무 없이 그대로 행합니다. 자신의 할머니인 사라가 일로 인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았을 텐데도 말입니다. 라헬 역시 이것이 실패로 이어질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식을 얻고 싶은 욕심을 참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라헬이 가진 번째 문제의 핵심입니다.

 

라헬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지 않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 해결하려 합니다. 자기의 방법을 의지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라는 설교를 자주 듣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면 좋을 텐데,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처럼 막연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문제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지혜를 구하기보다 빨리 답을 찾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고민하고 속에서 무언가를 얻기보다는 즉각적인 결과를 얻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주인공의 실력이 갑자기 강해지거나 사랑이 갑자기 깊어지는 것처럼 손쉽게 결과를 얻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건들을 원합니다.

 

운동이나 음악, 미술 분야에는 천재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들은 적은 노력으로도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죠. 하지만 천재들조차도 잘하기 때문에 노력합니다.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반복적으로 연습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본 도형을 그리고, 음악가들은 가장 기본적인 코드와 음계 연습을 반복하죠.

 

많은 분들이 골프, 테니스, 배드민턴을 때도 매일 같은 자세를 반복적으로 연습합니다. 그것이 어렵지만, 바로 점이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매일 일어나고, 겪고, 속에서 부딪히는 일들이 가장 중요한 훈련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따로 특별한 제자 훈련을 만들려고 합니다. 특별한 훈련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진정한 훈련은 매일 부딪히는 순간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순간들을 하나님께 가져가지 않고, 방법과 방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방법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 실제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원래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괴로움과 문제, 건강의 주인이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함께 문제를 풀어갈 때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십니다. 하지만 방식을 내놓는 순간, 그때부터는 내가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순간 나는 문제의 주인이 되고, 괴로움의 주인이 되고, 아픔의 주인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더욱 비참한 순간을 만들어냅니다. 성경은 그래서 여러분에게 막연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아픔, 눈물, 건강까지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를 원하지 않느냐고 물으며, 주님께로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신앙

라헬은 자신의 몸종을 야곱에게 줌으로써, 이제부터 문제의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해결하겠다는 자신이 문제의 주인이 되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몸종을 통해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은 아이들에 대한 라헬의 해석입니다.

 

라헬은 첫째 아들의 이름을 '(Dan)'이라고 지었습니다. '' '심판하다, 판단하다'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셨다" 해석합니다. 레아에 비해 자신이 옳다고 하나님이 편을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자기가 직접 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라헬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의 문제에 응답하신 시점은 이보다 훨씬 뒤인 창세기 30 22절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라고 기록된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녀를 생각하셨습니다. 라헬의 자기 방식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이 이것을 하셨다"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라헬은 모든 일을 자기가 해놓고는 "하나님이 일을 하셨다"라고 말하며,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습니다. 이를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합니다. '자기 밭에 물을 끌어들인다' 뜻으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은 일본식 사자성어입니다.

 

이러한 아전인수식 해석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백사와 명보, 오성과 한음(이항복과 이덕형) 이야기에서 찾아볼 있습니다. 서로 농담으로 "내가 아버지"라고 다투던 사람의 이야기가 선조 임금의 귀에 들어갔고, 선조는 누가 아비이고 아들인지 판결해주겠다며 '아비 ()' '아들 ()' 쓰인 종이 장을 준비했습니다.

 

사람이 각자 장씩 뽑아갔는데, 먼저 이덕형(한음)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제가 아버지입니다"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항복(오성) 역시 웃고 있는 것을 선조가 보았습니다. "너는 웃느냐? 네가 가진 것은 아들 자자인데."라고 묻자, 이항복은 아들 자자가 쓰인 종이를 무릎에 놓고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아들을 얻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전인수식 해석의 최고봉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라헬과 비슷합니다. 자기 방식대로 모든 것을 해놓고는 "하나님이 해주셨다"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우리는 마치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온갖 실수를 저지른 후에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의 많은 일들과 문제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심각한 아킬레스건이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뜻대로 모든 것을 해놓고는 "하나님의 뜻이겠지"라며 덮어버리곤 합니다. 이는 어쩌면 정신적인 자기 위안일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결코 신앙적이라고 없습니다.

 

라헬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녀는 "봐라, 아들을 낳지 않았느냐, 내가 옳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고, 하나님이 해주셨다" 말합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감정과 생각이 위에 있는데도, 본인은 그것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베드로의 표현대로 이는 말씀을 사사로이(私事로이) 푸는 것입니다. 말씀을 말씀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성경보다 훨씬 앞서나가는데도 본인이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 시절, 마틴 루터가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짚으려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생각하자" 주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농부들은 글자도 모르니 우리가 성경을 배워서 가르치는 것이 맞다' 말했습니다. 이는 일리가 있어 보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가르치라는 명령과 타협해서는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섬기고 애쓰고 바치면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느냐' 말도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의지하여 기도하느냐를 보신다고 바르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과 생각 때문입니다.

 

승리와 기쁨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라헬은 첫째 아들 '' 이어 둘째 아들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납달리' '경쟁에서 이겼다' 뜻으로, '언니 레아와 겨루어 이겼다' 의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뜻한 대로 일이 이루어졌을 ,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것처럼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거 학력고사나 지금의 수능을 앞두고 기도할 때를 떠올려보세요. 우리는 공부한 것보다 좋은 성적을 얻게 해달라고, 문제가 보이게 해달라고, 찍는 답이 맞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기도들은 우리 신앙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자식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좋은 성적을 얻게 해달라' 기도하며, 이것이 불의한 기도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습니다. 심은 나고 심은 나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급급했습니다.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제가 깊은 수렁에 빠진 이유는 레아 때문이었습니다. 레아는 이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라헬에게 '걱정하지 마라, 나는 괜찮다' 충분히 말해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아는 라헬이 '내가 이겼다' 말하는 것에 가장 화가 났을 것입니다. "네가 이겨? 내가 이겼지!"라고 생각하며, 자신도 몸종을 통해 아들 둘을 얻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이름을 기가 막히게 지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Gad)'인데,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복되도다'라고 번역되었지만, 이는 사실 '행운(fortune)'이라는 뜻입니다. 레아는 '나는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지 않는다, 내게는 복이 온다' 말하며, 라헬이 몸종을 통해 겨우 아이를 낳은 것과 달리 자신은 손쉽게 아이를 낳았다는 우월감을 드러냅니다.

 

그다음 아들의 이름은 '아셀(Asher)'입니다. 이는 '모든 딸들이(여인들이) 나를 기뻐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레아의 관점 역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있었습니다. '네가 아니라 나를 보며 내가 받은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것이다'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레아 역시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처럼 엉망인 상황은 우리 속에서도 흔히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쉽게 있는 문제들을 점점 감정이 개입되면서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문제 자체보다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대부분은 문제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 끝까지 그것을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겪는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라헬과 레아처럼 엉망이 삶을 만들어내곤 합니다.

 

그리스도가 세운 하나님의

이렇게 엉망진창인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가 성경에서는 다르게 표현됩니다. 말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맞춰보시겠습니까?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너의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 룻을 가리킵니다. 나오미와 룻에게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 질투로 엉망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복이 있었을까요?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아기, 룻의 집안에서 태어날 다윗과 다윗으로부터 나올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는 복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막장 드라마' 같은 라헬과 레아의 이야기가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라고 칭송됩니다. 룻에게도 여인들처럼 되라고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라헬이나, 남편에게 매달렸던 레아와는 다른 분이었습니다. 그는 죄인인 우리를 시기할 만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뜻대로 말씀을 해석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모두 꺾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그는 ''이라는 심판의 이름 앞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의 '' 되셨고,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우리의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아셀', 기쁨이 되셨으며, 우리의 '납달리', 승리가 되셨습니다.

 

이처럼 아들들의 이름 하나도 헛되게 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 때문에 라헬과 레아가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자가 되었고, 룻에게 여인들처럼 되라고 말할 있게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엉망진창이고 진흙탕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할 일이 많고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나도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말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한다고 이야기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헬과 레아는 이스라엘의 집을 세웠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세우십니다. 우리는 기가 막힌 현실 속에서 전쟁과 불안을 겪고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신 약속을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과의 약속, 우리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른 것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분은 우리의 '(Gad)' 되셔서 복을 주시고, 우리의 '아셀(Asher)' 되셔서 기쁨을 주십니다.

 

같은 편지를 썼던 사도 요한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요한일서 5 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납달리'라는 이름, '승리'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것이 됩니다. ''이라는 이름, '기쁨'이라는 이름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이름이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이니라."

 

기도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리에 있으며, 그분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시며, 이름이 우리의 인생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졌고, 집을 세운 자들입니다.

 

주여, 모든 이가 집에 들어와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게 하소서. 이곳에서 함께 울고 아파하며, 귀한 성도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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