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9장 31절로 35절 까지 입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새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아멘.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과 신화
오늘 본문은 야곱의 결혼과 자녀 출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개인 가정을 넘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보통 민족이나 국가가 태동할 때 우리는 수많은 신화를 접하게 됩니다. 단군 신화나 박혁거세 신화처럼, 나라를 세운 이들을 신격화하거나 그 역사를 미화하여 특별함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태동을 놀라울 만큼 사실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민족이 시작될 당시, 그 가정은 시기, 질투, 거짓, 경쟁, 고통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고 열두 지파를 세우셨습니다. 그 시작이 죄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열매인가, 뿌리인가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에게 우리와 다른 대단한 특징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복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 함정에 자주 빠집니다. 때로는 우리 조상의 신앙이 우리의 믿음의 근거인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 집안은 4대째 기독교인입니다"라는 말은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시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내가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성경을 많이 읽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가'만을 가지고 자신의 신앙을 평가하려는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신앙을 점검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는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니 남과 다른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이라는 은밀한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정한 신앙의 열매를 맛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강조하셨듯,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내 나무에 열매가 생기지 않느냐'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우리가 어디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잊어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시기, 질투, 절망, 고통, 경쟁으로 서로에게 아픔을 주던 바로 그 자리에서 열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해지고 회개했을 때가 아니라, 가장 비참했을 때, 그리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를 사랑하고 부르셨습니다.
레아의 삶: 사랑에 굶주린 여인
이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작입니다. 이 진리를 놓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평생 성경이 말하는 참된 기쁨과 확신, 그리고 가슴 뛰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내가 뭘 하고 있으며 얼마나 잘하고 있느냐'에 우리의 신앙을 매기려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셔서 붙잡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연약함 속에서도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죄인일 때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과 우리의 죄, 연약함, 시기, 질투, 거짓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녀는 여러모로 보아 정말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동생의 혼인식 날, 그 기뻐해야 할 날에 동생 대신 신방에 몰래 들어갔던 여인입니다. 게다가 남편이 될 사람은 자기에게는 별 관심이 없고 동생을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상황이죠. 성경은 그녀의 시력이 약했다고 표현하는데, 당시 미인의 기준 중 하나가 반짝이는 눈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학자들은 레아의 눈이 지금 말로 '흐리멍덩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제가 더 놀라는 건, 아브라함 족보에 사라나 리브가 같은 당대 최고의 미인들만 나오다가, 드디어 레아라는 미인이 아닌 여인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굉장히 조용해 보였던 레아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었음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가정적이고 조용한, 야곱과 비슷한 성격을 가진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레아가 아버지에 의해 억지로 야곱에게 보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라반과 리브가의 이야기를 기억해 보면, 레아의 마음도 동참하지 않았을까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데리러 갔을 때, 리브가에게 '나를 따라가겠느냐'라고 묻자, 그녀는 '지금 가겠다'고 스스로 선택했었습니다. 이처럼 그 집안에는 민주적인 요소가 있었으므로, 레아가 억지로 끌려갔다기보다는 라반의 속임수에 암묵적으로 동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 야곱은 이 부분에서 레아에 대한 상당한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자세히 보면, 처음에는 야곱이 레아를 라헬보다 '덜 사랑했다'고 합니다. 즉 미워하진 않았지만, 라헬을 더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혼인 후에는 야곱이 레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나옵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 ‘사네’는 사실 '미워한다'는 표현에 더 가깝습니다. 성경의 대부분 단어들은 미워한다고 번역되었는데, 여기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라고 부드럽게 표현한 것입니다. 야곱은 사실상 레아를 미워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를 미워한다는 단어에도 이 단어를 씁니다. 따라서 이것은 꽤 강한 표현입니다.
고통 속에서 피어난 믿음
레아가 그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혼했을 때 그녀가 원했던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녀도 사랑받기를 원했죠. 결혼 후에는 야곱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사랑받는 것에 목말라 있던 여인들입니다. 성경의 여러 증거를 보면, 그들의 아버지 라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름에서도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레아는 ‘들소’, 라헬은 ‘암양’이라는 뜻입니다. 왜 딸들에게 짐승 이름을 붙였을까요? 훗날 레아와 라헬의 고백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14년 동안 일하고 떠나려 할 때, 야곱이 받은 품삭은 두 딸뿐이었고 재산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때 레아와 라헬은 "아버지가 우리를 팔았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를 보면 두 딸은 아버지에게 재산 취급을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 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레아가 얼마나 사랑에 굶주려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헬도 마찬가지였겠죠. 왜 레아와 라헬이 그토록 야곱의 마음을 얻으려 경쟁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다시 레아에게 초점을 맞춰봅시다. 레아는 스스로 아버지가 자기를 팔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팔린 뒤 남편에게서마저 사랑을 받지 못했으니, 정말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과 같은 상황이었죠. 시집을 왔는데도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었던 겁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때 레아가 집안에서 종과 같은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마음을 더 생생하게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아내였던 소피아의 고백입니다. "남편 톨스토이와 함께 사는 것은 고통스럽고 모욕적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 쓸모없는 짐승이었다." 이 고백이 레아의 마음과 가장 가까웠을 것입니다. 어렵게 결혼했는데 남편조차 사랑을 주지 않으니, 모든 것을 잃은 것 같고 자존심까지 상하는 상황이었죠.
여러분, 날이 너무 추워 얼음이 얼 정도인데 바람까지 쌩쌩 불면 얼마나 더 춥겠습니까? 에스키모인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눈으로 벽돌을 만들어 이글루를 짓습니다. 밖은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지만, 이글루 안은 영상 5도 정도가 됩니다. 이 얼음집을 더 따뜻하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불을 피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물을 뿌립니다. 물이 얼면서 열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물이 증발하면서 열을 빼앗아가는 것과는 반대로, 물이 얼 때는 열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얼음집을 따뜻하게 하려면 불을 피운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물을 뿌리는 것처럼, 레아의 삶을 하나님께서 이와 유사하게 다루십니다.
레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남편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에는 계속해서 '남편이 나를 사랑할 거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랑받지 못했으니 계속 나오는 말이겠죠. 가장 필요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얼음집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추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오히려 레아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보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네 아들의 이름에 담긴 의미
첫 번째 아들은 유명한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보다'라는 뜻의 '르우'와 '아들'을 뜻하는 '벤'이 합쳐진 말입니다. 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벤허에도 나오듯, '허 가문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보아라, 아들이다'라는 말은 야곱에게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의무적으로 남편의 의무만 다하고 있는데, 보세요, 하나님이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레아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뒤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 괴로움을 보시고"라고 말합니다. 레아는 야곱에게 자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셨다'고 고백합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녀의 괴로움을 보셨다고 말합니다. 레아는 야곱보다 '여호와'라는 언약의 이름을 열 배는 더 많이 말합니다. 이 일을 통해 그녀는 끊임없이 그 이름을 반복하기 시작합니다. 과연 누가 진정으로 복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가정에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르우벤이라는 이름은 분명 고통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셨다'고 말하니까요. 그러나 이 사랑받지 못하는 자리, 하나님이 괴로움을 보시는 그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첫 지파가 탄생했습니다. 사랑받는 라헬이 아닌,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준비된 자가 아닌, 부르심을 받은 자
이것은 우리가 창세기 전체를 통해 보아온 주제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이 특별해서 하나님께 택함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택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내가 얼마나 준비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준비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준비를 의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준비는 우리의 실력으로 일을 감당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조차 고린도에 갈 때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나도 주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는 오히려 잠시 멈춰 서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어? 하루하루 사는 것도 힘겨운데'라고 생각할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일하실 때입니다.
교만과 겸손, 그리고 교회의 실상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 대해 많은 분이 오해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그 일을 감당할 자격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많은 목사님이 '하나님께 이끌려 왔다'고 간증합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에, '이렇게 바른길로 온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며 제가 얼마나 아무것도 준비되지 못한 사람인지 더 많이 느낍니다. 성도들의 지적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말 자격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지,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일을 하려다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시간을 내어 섬겨도, 오히려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교회는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똑같다'고 생각하며 포기합니다. 사실 이것이 맞는 답입니다. 죄인들이 모인 곳에서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런 교회를 발견하거든 제발 가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이 가게 되면 그 교회가 다시 나빠지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희 교회를 냉정하게 보면 부족한 점이 정말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 부족함을 보며 좌절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저는 바로 이때가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이 눈에 보이고, 우리의 사랑이 너무나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펴고 일어나 "주님, 저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주님과 함께 걷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목회를 하며 저는 자주 실망합니다. 때로는 '나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가'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내가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교회를 위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교만해졌을 때입니다. 교회는 개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는 정말 이렇구나'라고 깨닫는 그 순간,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일이 기대되는 때입니다.
한때 저희 교회는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겠다고 온 힘을 다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깨달았습니다. '이 교회에 오면 평생 존경할 만한 목사나 장로를 만날 수 있겠지?'라고 기대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아,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를 낮추고 계셨구나'라고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최고로 잘한다고 생각하며 열심을 냈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바로 지금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사 당신의 일을 이루시려는 때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이름, 유다
레아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절망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을 때마다 그 이름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드러냈습니다. 둘째 시므온은 '들었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름 자체가 레아의 괴로움과 고통, 그리고 변하지 않는 남편에 대한 절망을 보여줍니다. 셋째 레위는 '연합'이라는 뜻으로,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로다'라는 바람을 담았지만, 야곱은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넷째 아들을 낳았을 때 성경은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레아가 아이를 더 이상 낳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가르치시려던 첫 번째 수업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녀의 1교시가 끝난 이유는 드디어 앞에 세 번 지은 이름에 대한 진짜 의미와 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넷째 아들의 이름은 유다였습니다. '찬송'이라는 뜻의 이 이름과 함께 레아는 "이제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녀의 모든 관심은 남편의 사랑에만 있었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절망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넷째 아들 유다를 낳으면서 그녀는 마치 정답을 제출하듯 중요한 깨달음을 얻어 첫 수업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사 아들을 주셨고, 나를 사랑하사 인도해 주셨고,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이 상황 속에서 내게 물만 뿌려 계속 얼음만 주시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정말 따뜻하게 하셨구나. 내가 누구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누구와 함께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의 그 이름이 레아에게 이렇게 들린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 하나님이 나를 들으신다. 하나님이 나와 연합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찬양이 되신다.' 그녀는 인생의 진정한 기쁨을 맛보고, 찬송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 속에서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요. 그저 아들 넷이 태어났을 뿐이고, 레아에게는 남편이 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편이 변할 줄 알았는데 셋이나 되는 아들을 낳아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절망하고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겠지만, 사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름들은 제사장의 흉배에 붙여질 이름입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앞으로 여덟 명이나 더 나옵니다. 그 이름은 제사장의 흉배뿐만 아니라 나중에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을 단장할 때도 똑같은 보석으로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르우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고, 여러분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르우벤입니다. 불꽃 같은 눈동자로, 그 사랑을 멈추지 못하는 눈동자로 나를 보시는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르우벤이고, 시므온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신음과 강한 목소리, 심지어 나조차 듣지 못하는 내 심령의 소리까지 들으시며 나를 붙드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시므온, 바로 나의 이름입니다.
레위가 바로 우리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입니다. 유다! 하나님이 나의 찬송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그 영광스러운 이름이 바로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레위가 바로 우리의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입니다. 유다! 하나님이 나의 찬송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그 영광스러운 이름이 바로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의 흉배에 새겨져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뵙는 그 영광,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열두 보석처럼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돌리며 빛의 자녀로 살게 될 그 영광을 여러분이 지금 받아 누리는 그 자리에 여러분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기뻐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르우벤도, 시므온도, 레위도, 유다도 바로 우리의 이름입니다. 주님께서 오직 나만을 보시고, 나의 모든 소리를 들으시며, 나와 하나가 되어 주시고, 나의 찬송이 되어주시니, 주님, 우리가 영원히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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