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29장 14절로 20절 까지입니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아멘.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지는 삶
저희는 야곱에게 벧엘 사건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약속에 대한 그의 반응도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그 반응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시고,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으로 인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곧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이 바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자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대면한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 가장 먼저 우리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자신을 직면하는 일은 쉬워 보이지만, 사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마주해 본 적 없이 살아갑니다.
우리는 흔히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 혹은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불리며 살아갑니다. 사장, 학생, 교수, 박사 등 다양한 역할과 지위가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본질을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릴 때 그 누구도 여러분을 박사나 사장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진짜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을 대면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늘 겉모습만을 보며 살다가, 어느 날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혹은 인생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야 비로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고 비로소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속는 자가 된 야곱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교활하게 남을 속이며 승승장구하던 그를 '속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복이 아니라, 그가 휘두르던 칼이 사실은 자기 자신을 찌르는 칼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그의 본모습이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성전으로 세워가는 이 과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라반의 의도
여러분은 야곱이 라반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성경은 야곱이 라반에게 자신의 모든 사정을 이야기했다고 기록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아무것도 없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와 아버지 이삭이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했던 말을 전했을 것입니다.
당시 근동 지방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해 가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빈손이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과거 리브가를 데려온 엘리에셀이 가져온 재물을 보고 라반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라며 극진히 맞이했습니다. 라헬로부터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갔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는 사윗감이 왔다는 생각에 잔뜩 기대했겠지만, 야곱이 빈손인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의 무서움은 그다음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내 뼈요, 내 살"이라는 뜻으로,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야곱은 이 말을 듣고 광야를 지나온 고생이 드디어 보상받는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난 후, 라반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합리적인 제안처럼 보이지만, 이 말에는 숨겨진 칼이 있었습니다. '조카'가 아닌 '품꾼'으로 대하겠다는 뜻이었던 겁니다. 아들에게 품삯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가족이 아닌 종으로 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겸손과 낮아짐의 수업
여러분, 그 일 이후 야곱은 무려 20년 동안 종처럼 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한 그가 처음으로 받은 수업은 바로 겸손과 낮아짐이었습니다. 한 집안의 어엿한 아들이었던 그가 친척의 집에서 종의 대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과거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신이 섬기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첫 번째 수업은 바로 겸손과 섬김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개혁 신앙과 낮아짐
지금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여 년이 지난 시기입니다. 보통 종교개혁의 시작을 루터가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던 날로 기념하지만, 사실 종교개혁의 움직임은 그 이전부터 계속되어 왔습니다. 교황 중심의 로마 가톨릭에 저항(protest)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외쳤던 이들로부터 개혁 신앙이라는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개혁 신앙에는 하나님의 주권, 오직 은혜, 오직 믿음과 같은 놀라운 신앙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혁 신앙의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잊고 지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와 같이 낮아지는 겸손입니다. 많은 분이 올바른 신앙을 추구하면서도 이 낮아짐의 의미를 잊고 지내곤 합니다.
교만이라는 함정
저를 포함하여 모든 성도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신앙을 갖기를 원할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말씀에 대한 사랑이 줄어들 때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신앙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위험 신호입니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가려 노력할 때도 우리는 종종 유혹과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쉽게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단순히 우리가 말씀을 읽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신앙 서적을 읽고 기도하도록 부추겨서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틀린 것만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좋은 것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유혹합니다. 만약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진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더욱 어둡고 위험한 길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
우리는 신앙의 위대한 선배인 바울에게서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학교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 그를 성전으로 다루셨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자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이들 중'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뿐만 아니라, 신앙이 약하고, 지식이 부족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이들 가운데 자신이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태도가 우리에게 진심으로 있을 때, 우리는 교만이라는 무서운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는 억지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본모습을 온전히 알 때,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는 것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높아지려 할 때, "내가 이만큼 하나님 앞에 잘 나아가고 있구나"라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남보다 위에 서려고 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자랑하고 싶어질 때, 또는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될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자신을 낮추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렇게 해보십시오. 항상 다른 사람을 높이십시오. 그가 나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말을 존중하십시오. 혹 그에게 조언을 하거나 잘못을 지적할 일이 있더라도, 그를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고 높여주십시오. 그렇게 상대방을 높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여러분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하기에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낮아지심
주님께서는 훌륭한 베드로의 발을 씻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해결하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십자가에 거꾸로까지 매달렸던 그 베드로의 발 앞에 무릎 꿇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며 모른다고 말할 그 베드로 앞에 무릎 꿇고 그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낮아지신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이 자라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지기를 원한다면, 야곱이 제일 처음 배웠던 섬김과 겸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 역시 똑같이 고백하고 회개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목사는 설교를 하면서 마치 내가 설교와 같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우리 모두가 똑같이 받는 말씀입니다.
저 또한 가끔 설교를 하면서 성도들이 제가 원하는 것처럼 변하지 않을 때, "아무리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구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지 않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베푸시는 사랑과 긍휼을 잊어버린 채, 제 생각과 판단으로 사람을 평가했으니 말입니다.
야곱의 고난과 수고
야곱이 들었던 첫 수업은 그저 강의실에서 듣거나 고개만 끄덕이던 강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삶 속에서 이 강의를 정말 힘들게 들었습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했던 고백은 창세기 31장 38절부터에 나옵니다.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과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내 손에서 도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나이다.”
이 고백을 통해 야곱이 20년 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돌보던 양 떼의 새끼를 잃지 않았고, 양을 함부로 잡아먹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맹수에게 찢기거나 도둑맞은 양은 자기 재산으로 변상하며 충실하게 일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배운 것
하지만 야곱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말은 40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야곱은 이 인생이 한두 해가 아니라 20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고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야곱이 직접 말했고,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은 집안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운 손에 곱상한 얼굴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밖으로 나가 남의 양을 치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 치마폭에 있던 인생이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맹수와 싸우고 도둑을 막아내야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더는 곱상한 얼굴이나 하얀 피부는 찾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검게 그을린 초원의 남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야곱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는 집에 자주 들어올 틈 없이 매일 들판에서 가축들을 돌보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러다 가끔 집에 들어와 쉴 때, 그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에서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전에 집 안에 있으면서, 늘 밖에 나가 사냥하며 털이 많고 거무튀튀한 에서를 그는 어쩌면 우습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저런 사람이 무슨 장자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에서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 이것 자체가 얼마나 큰 메시지가 되었겠습니까? 그는 매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라반이 품삯을 열 번이나 약속과 다르게 주었습니다. 이는 약속한 대로 품삭을 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혼자였으니 괜찮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내 둘과 종들, 그리고 열두 명의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상황에서 라반은 계속해서 약속을 어겼습니다.
회사에서 월급을 올려주겠다고 해놓고 열 번이나 약속을 어긴다면 누가 남아 있겠습니까? 하지만 야곱에게는 다른 곳에 갈 곳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모습입니다. 야곱은 이 모든 과정을 고난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야곱은 이 고난을 통해 섬김과 낮아짐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설교 한 번 듣고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고난의 학교에 들어왔고, 그곳에서 섬김을 배우고 성전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많은 분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성장시켰는지 간증합니다. '이런 고난과 아픔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신앙이 있었을까'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말했듯이, "고난이 성도에게는 유익이라 내가 그것 때문에 주님의 율법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의 순종
제가 섬김의 부분에서 정말 놀라는 점은, 야곱이 이 모든 고난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꾀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잔머리의 왕은 야곱입니다. 라반과 야곱의 이야기는 서로 속고 속이는 드라마처럼 흘러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이 온 힘을 다해 이 모든 일을 감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두 아내 레아와 라헬에게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온 힘을 다해 라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
야곱은 조금만 잔머리를 썼어도 많은 재산을 챙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했어도 라반의 뒤통수를 치고 빨리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20년을 꼬박 채웠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는 바로 그 전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31장 5절과 6절을 보면, 야곱이 아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야곱이 힘을 다해 라반을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훗날 야곱은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으므로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고 고백합니다.
야곱은 분명히 종이었고, 라반에게 불이익까지 당하며 고난과 수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힘을 내어 온 힘을 다해 섬김을 감당했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7년간 일하고, 다시 7년간 더 일했던 14년의 세월을 마치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습니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이 하룻밤을 보낸 이야기는 한 장에 걸쳐 기록된 것에 비하면 매우 간략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짧은 기록을 보며, 마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의 인생에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야곱이 겪었던 모든 일을 통해 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시간의 가장 중요한 진수였습니다.
고난의 유익
우리는 고난을 통해 야곱이 오랜 기간 섬김을 배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을 겪으면 사람이 달라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과, 젊을 때 고생하면 그것이 약이 된다는 말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이 과연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어도 세상에서 고생하면 사람은 단단해지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훨씬 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진정 깨달은 것은, 자신이 고난을 통해 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자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습니다."
야곱의 사다리
야곱의 사다리는 그가 고난받던 바로 그 자리에 놓여졌습니다. 야곱이 속고, 눈물을 흘리며 고통받던 자리, 품삯을 열 번이나 속으며 가족들과 함께 어려움을 호소하던 자리, 성실하게 일했음에도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던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의 계단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온갖 거짓과 가식, 오만과 절망이 넘치던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다리를 그의 앞에 놓아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이 힘을 더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이곳에 두신 하나님을 알았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라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라반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하늘로부터 사다리를 내려 자신과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의 주님이시며, 그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래서 순종했습니다. "여기까지 나를 두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길
야곱이 원했던 자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와 얼마나 유사합니까? 우리도 원하던 자리에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이민자들은 대부분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살고 있는 방식을 계획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저 살다 보니 생계를 위해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 아래 있으며, 가장 선한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혹시 "왜 이런 어려운 일이 생겼을까"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어려움이 없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부자가 되고,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그것이 더 나은 인생일까요?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서 대단한 일을 이루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시간은 길어야 100년입니다. 직장에서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한 일을 하고 많은 재물을 모아도 40년에서 50년이면 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려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 선한 목적을 위해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인도해 가시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 설마 저를 이런 구석으로 모시는 겁니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과 같이 확신해야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라반을 꾸짖으셨다"고 말할 만큼 확신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속은 자처럼 보였고, 열심히 일했지만 복이 오지 않은 것처럼 보였는데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 인생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여러분, 우리는 한 발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꿈꿀 수 있지만, 그 꿈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놓칠까 염려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을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자리에서 고백하게 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할 때, 자신이 얼마나 순종했고 성실하게 일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순종과 충성은 분명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남을 속이던 자신의 본성을 이겨내고 끝까지 충성하려 했던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행위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오히려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며 그 약속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 그것이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야곱의 삶을 통해 우리는 참된 순종과 고난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성경은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고난을 통해 온전한 순종을 이루셨고, 그 순종으로 우리 모두를 구원의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 순종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곧 "내가 주님 앞에서 열심히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순종이나 잘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순종이 그의 믿음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에 온전해질 수 있었던 것처럼, 야곱의 고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온전한 고난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된 것입니다.
야곱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야말로 바로 이 일의 증인이며, 함께 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야곱의 삶이 그러했듯, 우리 인생 또한 나의 노력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으로 인해 완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부족하고, 오늘도 죄와 싸우며 때로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힘겨워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것인지 모르는 삶 속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 묻고 또 묻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 불완전한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나는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으며, 주님께서 내 삶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이 모든 고난과 순종을 야곱이 왜 감당했는지 아십니까? 야곱은 단 한 문장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여러분을 위해 이천 년이라는 시간을 하루처럼 여기며 기도하고 탄식하셨는지 아십니까? 왜 우리가 죽음, 고난, 절망과 싸울 때조차 단 한 번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하셨는지 아십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죽도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가서에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한눈에 반했던 것처럼, 아가서를 통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어떻게 여기시는지 보여주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나의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줄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마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한 번 살짝 본 것만으로 솔로몬이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주님은 여러분에게 마음을 빼앗기신 분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까닭에 자기의 모든 것을 주신 분입니다. 그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우주보다 크며, 우리가 이 땅에서 지었던 모든 죄악보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절했던 우리의 삶보다 더 크고 위대합니다.
이제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에게 여러분의 눈길을 주십시오. 주님께 마음을 빼앗긴 여러분의 눈으로 그 주님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기도합시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 달콤한 음성을 듣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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