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29장 13절에서 20절 까지 입니다.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아멘.
하나님의 성전이 된 야곱
야곱의 인생에 있어 신앙의 가장 큰 변곡점은 바로 벧엘 사건입니다. 그에게 벧엘 사건은 마치 새로운 출발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들었고, 그 약속에 즉시 반응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는 그분께 무언가를 갚으려 하기보다 그 사랑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게 됩니다.
그의 반응은 "하나님이 나의 성전이 되어 나를 이끄시고 지키시는 것처럼, 이제 나 또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주님과 함께 걷겠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야곱은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고, 비로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이 자신의 하나님이 되기를 소망하는 귀한 고백을 올렸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창세기 29장 1절이 그가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을 묘사하듯, 그는 기쁜 찬송을 흥얼거리며 걸어갔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야곱처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막연한 기대로 신앙생활을 종교 활동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어떻게든 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우리 목사님 믿음이 좋으시니 목사님과 친하면 나도 천국에 갈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야곱에게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와 만나주시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그러하셨듯, 우리 인생에도 하나님의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구약 인물들이 보여주는 그리스도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전합니다. 예수님을 모세보다 훨씬 위대한, 비교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하며 '마지막 모세', '마지막 아브라함'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구약의 인물들이 단순히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였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아담을 '첫째 아담', 예수님을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이라 부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아담이 실패했던 삶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통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곧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그들이 가리키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완성하시고 이삭과 야곱의 약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마지막 야곱', '마지막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삶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가 깨닫는 놀라운 사실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아브라함의 생애가 바로 우리에게도 있으며, 이삭과 야곱에게 이루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나에게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완전히 바꿉니다. 구약성경은 더 이상 단지 교훈을 얻는 책이 아닙니다. "이때는 이런 일이 있었구나, 나도 배워서 삶에 적용해야겠다"라고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이삭과 야곱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인생을 살아낸 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 아브라함의 인생, 모세의 사건, 출애굽의 이야기, 홍해의 기적이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삶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가 되는 성경
여러분은 더 이상 성경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성경의 역사는 기록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의 역사, 우리의 역사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단지 야곱의 삶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야곱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부름받았음을 깨닫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통해 성전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성전으로 세우시고 이루어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는 것은 곧 나의 인생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시선으로 하나님이 야곱의 삶을 통해 어떻게 성전을 세워가시는지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
야곱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중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성전으로 지어가시기 위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자신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가는 야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고난받는 종'임을, 세 번째는 '사랑받는 종'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은 야곱이 겪는 사건 속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인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런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라헬을 얻기 위해 칠 년 동안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라반의 요구가 아니었고,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7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아내를 데려오기 위한 비용은 50세겔인데, 7년 동안 목동으로 일하면 최소 70세겔 이상을 받게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지불해야 할 돈의 두 배가 넘는 조건을 제시한 것입니다. 저도 7년 연애를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7년을 기다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속는 자가 된 야곱
7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린 야곱은 결혼식을 올렸고, 첫날밤이 지난 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사랑했던 라헬이 아닌 레아가 옆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야곱은 기가 막히고 황당하여 라반에게 “어떻게 저를 속이실 수 있습니까?”라고 따져 묻습니다. 상황을 보면 당연한 반응이지만, 정작 야곱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는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쳐 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뱉는 순간, 야곱은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속이는 자였던 야곱이 속는 자가 되면서, 형 에서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끈질긴 죄와 반복되는 깨달음
하나님은 한 번만 깨닫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품삯을 열 번이나 속임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자신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훗날 요셉 사건을 통해서도 야곱을 깨닫게 하십니다. 야곱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속아 요셉이 죽었다는 거짓말을 믿게 됩니다. 후에 요셉을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나님은 끊임없이 야곱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고 보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일들을 통해 야곱에게 "네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지었던 죄가 얼마나 끈질기고 무서운 것인지, 죄가 우리를 얼마나 쉽게 흔들고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모습
우리도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삽니다. 그 가면이 너무 단단해져서 자신이 가면을 썼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나를 움직이고, 화내고, 행동하게 하는 내면의 모습을 잊고, 우리가 쓴 가면을 진짜 나라고 착각합니다.
학자들은 죄가 얼마나 끈질긴지 '중력'과 '관성'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에도, 죄의 유혹에 끊임없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마치 달리다가 갑자기 멈춰선 사람처럼 관성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죄를 멈췄다고 생각해도 죄의 관성에 이끌려 달려가는 것이죠. 혹은 죄의 중력에 끊임없이 끌어당겨지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싸우게 됩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약점
요셉의 이야기는 야곱이 여전히 자식들을 편애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야곱 자신도 부모의 편애로 고통받았고, 라헬을 더 사랑하여 가정에 문제를 겪었으면서도, 자신의 자식들 중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가장 약했던 야곱의 모습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약한 부분을 놓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들추어내십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이 시험을 또다시 겪어야 합니까?" 할 정도로 반복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녀를 가르칠 때, 잘하는 과목이 아니라 못하는 과목의 선생님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한 부분을 계속 건드리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야곱처럼 "잘하는 것으로 시험해 주시면 백 점 맞을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약하고 힘들어하는 부분, 곧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 미워하는 문제, 교만한 문제를 끊임없이 찾아오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이 우리가 자라야 할 곳이고 성전이 이루어져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는 나
하나님은 속이는 자였던 야곱을 속는 자로 만드시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야곱은 속이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나 타인에게 상처를 입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고, 다툼이 있을 때마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상처는 "왜 저 사람이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는가"가 아니라, 바로 내가 그 상처를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상처를 입히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상처받고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으로 지어가실 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바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화를 내며, 아픔을 주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은혜
하나님께서 모든 순간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 중의 은혜는 바로 '내가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아는 은혜'입니다. 상처받은 자라는 것을 넘어, 내가 바로 그 상처를 주는 자임을 아는 것이 가장 깊은 은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화살을 맞은 사람은 아파하며 자신이 화살을 맞은 자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화살을 쏜 자이기도 합니다. 화살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내가 쏜 화살에 맞은 다른 사람의 고통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이며, 교만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내가 억울하다고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가 다른 사람을 억울하게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도 한번 당해봐라" 하고 보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내가 당하는 고통이 사실은 내가 주는 고통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큐티 노트에 쓰여 있던 기도
학창 시절, 성경 공부 그룹에 저보다 어린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유독 제 말에 딴지를 걸거나 얄미운 말을 해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점점 쌓여서 그 친구를 대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저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그 친구를 만나 제 불편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형제님, 기도하다가 깨달았는데, 하얀 백지 위의 작은 점이 크게 보이는 것처럼 형제의 약점이 크게 보여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나이도 많고 신앙 연륜도 있으니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친구가 제게 사과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제 이야기를 조용히 듣더니, 가방에서 큐티 노트를 꺼내 한 부분을 가리켰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한성윤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
저는 제가 화살을 맞은 줄 알았지만, 사실 제가 쏜 화살이 훨씬 많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에게 더 많은 상처를 주었기에 저 또한 아팠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르고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존심을 긁어서 신앙생활조차 힘들다고 느껴질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저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르치셨듯이 여러분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기 위해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칼을 꽂고 있는가?' 야곱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진정한 나를 대면하는 은혜
야곱은 결국 자신이 속이는 자였음을 깨닫고 자신을 대면하게 됩니다. 속아서 마음 아파하는 야곱을 더 눈물 흘리게 한 것은, "내가 바로 속이는 자였습니다"라는 깨달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가장 큰 은혜는 나를 진정으로 대면하는 은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늘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대면하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조차 속이고 살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막고, 자신도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수많은 담을 쌓고 철갑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 안에 갇힌 자신에게 다시 다가가, 지금 받은 상처와 아픔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며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죄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나님과 멀어져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자신은 가장 선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는 순간에도, 내가 얼마나 많은 화살과 칼을 날리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은혜, 그리고 나를 향한 질문
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여 감사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가 날 때 "요즘 예민해져서 그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한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화나게 하는 이 상황이 사실은 내가 누군가를 화나게 했던 그때는 아닐까?
절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절망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 사실은 내가 아닐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어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나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며,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나. 그 '나'가 바로 나를 두렵게 하고, 화나게 하며, 절망하게 하는 진정한 나라는 것을 우리는 야곱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일어서는 삶
이 말씀을 들으며 우리가 목이 뻣뻣해지고 이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할까 봐 염려됩니다. "내 상처는 달라, 내 교만은 아니야"라고 생각하기 전에, 다시 한번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는 무엇이며, 나는 어떤 존재인가?"
진정한 나를 대면하지 않고서는 그곳에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소망 없이 절망하는 나,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멀어지기를 좋아하고,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붙잡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나의 인생까지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내가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아주시는 그분을 붙잡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면할 때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신을 대면할 때, 모든 신자는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바라보면, 이전에는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됩니다. 내가 속이는 자이고, 상처를 주는 자이며, 교만한 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음이 완고하여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하는 인생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러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막연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끈질기게 죄를 붙잡고 사는 바로 그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를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바로 그 예수가 계시다는 것을 볼 때, 비로소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내가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죄와 싸워 승리하시는 예수가 내 안에 살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나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믿음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과 함께 죽어주시고, 나의 죽음이 되어주시는 예수. 이 땅에서 나의 숨이 끝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보이는 순간에 나의 생명이 되시며 부활이 되어주시는 그 예수를 그때 함께 보게 됩니다. 벌거벗고 핏덩이 같은 모습으로,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 핏덩이를 안으시는 예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찾아도 얻지 못했던 나의 능력, 소망, 생명이 이제는 내 인생을 내 손으로 붙잡고 근심하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드디어 "내가 이제 이분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이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 인생이 되어주신다"고 고백하는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신자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아는 것이 구원의 진정한 의미이자 기쁨입니다. 만일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님을 갈망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거나 예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만족한다면, 여러분 자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지만 생명까지 걸어본 적이 없다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내 눈앞에 보여달라, 그럼 믿겠다"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생명을 거십시오. 예수는 여러분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거셨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셨으니, 우리도 생명을 걸고 "하나님이 계신다, 안 계신다"를 물어야 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미 생명을 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분들은 '속이는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 죽고 너희에게 나타난 것은 너희 안에 내가 주는 참된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사는 그 즐거움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사랑받는 종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자에게 칠 년은 며칠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속이는 나'까지 사랑하셔서 내 인생이 되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칠 년이 며칠처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나를 대면하고 주님을 사랑하라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을 기대한다면, 다음을 실천하십시오.
1. 속이는 나를 대면하십시오.
2. 진정한 나를 아십시오.
3. 그 자리에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4. 그분을 붙들고 그 사랑을 충만히 누리십시오.
5.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겉모습이 남편인 줄, 아내인 줄, 자식에게 열심히 노력하는 나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남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하고, 평가받기 싫어하며, 남과 비교하며 속상해하고, 끊임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나였음을 고백합니다. 만족할 줄 모르고 마음속에 늘 나밖에 없던 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저희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하사, 저희가 받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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