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9장 1절에서 8절 까지 입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아멘.
족장들의 특별한 시작
족장들의 삶에는 각자 특별한 시작점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 사건을 통해 언약의 의미를 깨달으며 족장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야곱에게는 '베델'이 그 시작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야곱에게 "내가 너의 성전이 될 것이며, 어디든지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이에 "하나님께서 나의 성전이 되어주신 것처럼, 이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성전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십일조를 서원한 것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그 약속의 깊은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했던 마음은 진심이었을지라도, 그 약속의 모든 의미를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주를 따라 평생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살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고백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단순히 약속이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자신을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은 우리가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인생입니다.
야곱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을 믿었지만, 그것이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종처럼 지내는 생활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와 함께하셨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그가 계획한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단순하지만 가장 놀랍고 중요한 진리입니다.
야곱 인생의 전환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모든 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도하신다는 사실은 야곱의 인생에서 극적인 전환기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야곱은 죄를 짓고 마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듯이 가나안 땅을 떠나게 됩니다. 그에게 일어난 이 모든 사건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나 "내가 너의 에덴이 되어주겠다"는 놀라운 약속을 받습니다. 이 약속은 야곱이 지은 죄가 사라지고 죄의 짐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 너의 죄는 용서받았으니, 너는 죄와 싸우고 대적하며 하나님의 종, 의의 종으로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고백할 때, 그 진정한 의미는 더 이상 죄의 용서와 심판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나와 함께하시고 내 인생을 붙들어 주실 것이 분명하다"는 고백으로 인해 변화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죄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게 됩니다.
이전에는 양심을 자극하는 정도였던 죄에 대해 우리는 훨씬 더 민감해집니다. 죄는 이제 내 인생 전부와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나의 인생은 하나님께 드려진 십일조가 될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야곱은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한 뒤 하란으로 향합니다. 창세기 29장은 해석이 쉽지 않은 어려운 장이며, 그중에서도 1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발걸음이 가벼운 야곱
"땅에 이르렀다"는 말씀은 히브리어 원문을 통해 볼 때, 야곱의 발걸음이 가볍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음을 의미합니다.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야곱은 마음에 기쁨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란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 29장부터 31장까지 이어지는 혼인 이야기 전체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본래 야곱은 빨리 아내를 얻어 가나안으로 돌아가 장자권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하란으로 향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도 며칠만 다녀오라고 말했었죠.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그의 인생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계획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삶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야곱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야곱이 여행 중 우물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목마르고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우물이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장소와 같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야곱의 이동 경로와 장소의 묘사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물가에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세 떼의 양과 목자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일반적이라면 인사를 나눈 뒤 물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물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디서 왔느냐"고 묻고, 그들이 하란에서 왔다고 하자 "라반을 아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야곱의 마음에는 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란과 라반, 그리고 라반의 딸이었습니다.
원래 야곱의 목적은 빨리 라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가나안으로 돌아가 장자권에 따른 이삭의 재산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델에서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본 후, 그는 변했습니다. 땅의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함께하시고, 자신이 땅에서 끝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전이 되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이 변화되었다는 증거는 나중에 나타납니다. 그는 라반에게 원래 며칠이면 충분했을 일정을 말도 안 되게 길게 약속합니다. 이전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데려갈 때 며칠 만에 돌아가길 요청했고, 리브가도 아들에게 자신처럼 며칠만 있다 오라고 말했었죠. 그러나 야곱은 스스로 7년이라는 시간을 결정합니다. 이는 원래 우리가 알던 야곱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이야기의 중심, 신랑 야곱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야곱이 아닙니다. 만약 라반이 "7년 동안 일하면 딸을 주겠다"고 했다면, '속이는 자'로 살아온 야곱은 야반도주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접근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원래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데려오는 사건의 중심은 신부인 리브가였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에게 낙타까지 먹일 물을 줄 만큼 신실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노동 강도를 생각할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리브가 사건과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라반의 딸 라헬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라, 신랑인 야곱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야기의 중심이 신부에서 신랑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 '신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리브가 사건에서 엘리에셀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리브가를 만났지만, 야곱은 기도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지도 않습니다. 리브가 이야기에서는 리브가가 물을 준비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완전히 바뀌어 신랑인 야곱이 신부인 라헬에게 물을 준비해 줍니다.
우물가에서 보인 야곱의 행동
이 이야기에서 우물의 돌을 옮기는 시점은 흥미롭습니다. 목자들이 "라헬이 양을 몰고 오고 있다"고 말하자, 야곱은 곧바로 그들에게 "해가 아직 높은데 왜 여기서 게으르게 있느냐, 빨리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풀을 뜯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라헬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었던 야곱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다른 목자들이 있는 상황이 아닌, 라헬의 양 떼가 왔을 때 자신이 직접 돌을 옮겨 물을 먹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양 떼가 모두 모이고 목자들이 함께 돌을 옮겨야 물을 먹일 수 있다"고 답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읽은 8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9절부터 야곱의 행동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라헬이 도착하자마자 야곱은 혼자서 우물의 돌을 옮깁니다.
성경은 왜 그가 혼자 돌을 옮겼다는 것을 강조할까요? 당시 70세가 넘은 중년의 나이였을 야곱이, 여러 목자가 함께 움직이던 돌을 혼자 옮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라헬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야곱이 라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을 넘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진행하고 계신지를 보여줍니다. 이 물을 누가 먹일 것인가, 누가 이 물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이 이야기의 핵심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순위가 바뀐 야곱
리브가 사건과 완전히 대조되는 이 이야기는 야곱이 라헬과의 혼인을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신부가 아닌 신랑인 야곱에게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우선순위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장자권과 재물을 얻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는 빨리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자손을 번성하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단순히 땅의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약속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의 삶에서 최우선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깨달음과 삶의 변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은 간단하고 당연해 보이지만, 신자의 삶에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뻔해 보이는 진리를 깨달은 후, 야곱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일의 일을 결정할 때, 여러분의 가장 최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건강, 재산, 감정, 이익 같은 것들입니까?
이제껏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야곱이 기쁜 마음으로 우물의 돌을 온 힘을 다해 옮길 수 있었던 이유는 최우선순위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약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소중한 경험은 신자인 우리 삶에서도 당연히 나타나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이었던 칼빈
우리가 존경하는 종교 개혁가 칼빈은 자신의 이름이 후대에 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확한 무덤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칼빈주의'나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은, 그가 가르친 올바른 성경 해석과 신앙적 유산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주의의 정신은 성경 말씀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이루어가려는 모든 종교 개혁가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칼빈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에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 운동에 초대받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따르기는커녕 그를 쫓아냈습니다. 그의 설교 중에 술 취한 사람이 고성을 지르거나 귀를 막고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칼빈은 죽기 몇 해 전까지도 제네바 시민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물론 칼빈에게도 잘못은 있었을 것이고, 많은 오점을 남겼을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하나님을 향해 가고자 했던 방향만큼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서 쫓겨난 후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종교 문제로 카톨릭 교회에서 쫓겨난 프랑스 사람들을 목회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제네바의 동료 목사 파렐이 그를 다시 부릅니다. "보이지 않느냐, 들리지 않느냐, 복음을 알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이 잘못된 신앙 속에서 무너지는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시 제네바 교회의 도덕적, 교리적 타락은 오늘날의 교계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단지 로마 가톨릭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것만 달랐을 뿐입니다.
칼빈은 파렐의 요청에 답을 합니다. 사실 그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존경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목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 결정은 사람들의 사랑이나 자신의 편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답답하고 절망적인 현실보다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씁니다.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나의 뜻과 애틋한 감정들을 복종시키고 흔들리지 않으려 합니다. 나 자신의 뜻을 버려야 할 때면 언제든지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말씀하실 것을 소망하며 나 자신을 복종시키겠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편안함과 감정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억누르고 버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편지 서두에서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말을 남깁니다. "주님, 나의 심장을 주께 드리나이다, 지금, 그리고 신실하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하루를 살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고 모든 결정을 하십니까? 내일 직장으로 출근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시작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하루의 시간과 물질, 건강을 내가 처한 현실이나 답답함, 교회 내의 문제 때문에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문제들이 간단한 것은 아니며, 가정, 경제, 육체적 문제들이 온전한 말과 행동을 어렵게 만들 수는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교회와 내 인생 속에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에 집중되어야 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리나이다!" 여러분이 자녀와 배우자에게 헌신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교회 성도들에게 헌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십니까? 야곱은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바꿀지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물의 돌 하나를 옮긴 일로 시작해서 그는 20년 동안 고난을 겪게 됩니다. 칼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깊이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뼈를 갈아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으로 나아가는 두 가지 길
야곱의 원래 계획은 며칠 만에 아내를 얻어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란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 시간이 낭비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성경은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셨고, 그의 전 인생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길은 우리 모두의 인생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기쁘게 그 길을 가는 것과 질질 끌려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길의 도착점은 동일합니다. 참된 신자는 누구나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날에 도달합니다. 이 땅에서 겪는 어려움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주님의 나라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문지기조차 행복합니다. 그곳에는 기쁨과 즐거움만 가득할 뿐, 슬픔이나 부러움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교와 부족함은 지옥에서나 있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의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길을 어떻게 가고 싶으십니까? 하나님 손에 질질 끌려가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길은 어렵고 힘듭니다. 고난도 많습니다. 야곱이 "험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이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될 것이 무엇인지 알 때입니다.
세상에서도 열심히 일해 돈을 벌면 그 돈을 보며 고생을 잊고 행복해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이 길에서 흘리는 눈물과 고통이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삶, 영생, 그리고 영원한 복락을 이루는 과정이라면 어떨까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방법으로 이 길을 가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야곱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인 삶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과 고집, 때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져 기쁨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질질 끌며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목사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흔들리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 있으면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상처받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가장 기쁠 수 있는 길을 걷고 있으니, 기쁨으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와 같은 신랑, 야곱
야곱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으로 오실지를 예표합니다. 야곱은 신랑으로서 신부인 라헬을 위해 돌을 옮기고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이삭이나 아브라함의 종과는 달리, 야곱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뿐이었죠.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 모든 것을 줍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진정한 러브 스토리입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단지 그의 부족함이 우리와 닮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 가장 낮은 자리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부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입니다.
성경에는 물을 구하는 사람은 많지만, 물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물을 구하러 온 줄 알았지만, 그는 물을 주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처럼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주는 분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자신이 물을 구해야 했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성경은 아무것도 없는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예수님도, 그리스도도 아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야곱의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발견할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는 야곱의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그를 사모하며 정의롭게 행하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우물의 돌을 옮기고 여러분에게 물을 먹이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계십니까?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와 함께하시기에 저희가 어느 길을 가야 할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혹 저희가 여전히 주님을 모르고 있다면, 주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은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성령님께서 저희 마음 가운데 오셔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희가 무엇으로 움직이고 결정하는지, 저희의 인생을 무엇으로 결정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저희의 뜻과 간절한 바람, 속상한 마음과 답답한 현실, 혹은 기쁨과 성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저희의 인생을 사로잡게 하옵소서. 놀라우신 계획으로 저희 인생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저희의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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