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8 16절로부터 22 까지 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성의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집이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아멘.

 

야곱의 여정: 아브라함의 길을 거꾸로 걷다

야곱은 드디어 집을 떠났습니다. 그의 출발점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성경 말씀처럼, 자신과 가족 모두 의인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란으로 향하는 야곱의 길을 놀랍도록 인도하십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당시 지명이 정해지지 않은 루스였지만, 훗날 벧엘이라 불리게 장소였습니다.

 

지명은 이미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올 '벧엘과 아이 사이' 제단을 쌓았다는 성경 기록에 등장합니다. 이는 모세가 기록을 남길 당시 벧엘이라는 지명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아브라함이 들어왔던 길을 야곱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하란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해안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아브라함의 길을 택한 것은 분명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여정에서 아브라함의 '오마주' 같은 신앙의 흔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둘의 여정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을 누리기 위해 가나안으로 들어왔다면, 야곱은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쫓겨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았지만, 야곱은 벧엘 근처에 누워 잠들었을 제단을 쌓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가나안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그의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났던 것처럼, 야곱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계단(사다리) 보여주셨습니다. 계단은 하늘에서부터 야곱에게까지 이르렀고,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다시 확인시켜 주시며, 야곱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네가 모든 일을 이루기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단잠에서 깨어난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반응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겪는 신앙의 문제와 근본적인 답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야곱의 번째 반응: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가 살펴볼 야곱의 번째 반응은 창세기 28 16절에 나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백은 단순히 '하나님이 여기 계신 몰랐다' 의미를 넘어섭니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정녕 내가 알지 못하였구나"라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와 같은 언어는 동사의 어미에 주어가 이미 포함되어 있지만, 야곱은 굳이 주어를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잡으러 군중에게 "에고 에이미(내가 바로 그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표현 방식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뜻의 '에이미(I am)' 주어인 '에고(I)' 덧붙여 자신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어를 반복해 사용하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라고 자신을 계시하신 것과 같은 패턴입니다. 예수님은 표현을 통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야곱은 '내가 정말 내가 알지 못했다' 주어를 강조하여 말합니다. 이는 그의 개인적인 반응을 넘어, 우리 신앙인들이 겪는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해답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삶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여러분, 우리 신자들이 겪는 문제는 많습니다. 경제적,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우리 개인의 문제들로 인해 기도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지요. 우리는 여러 가지 일로 인해 피곤해지고, 실망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합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매일 헛도는 쳇바퀴처럼 사는 것이 과연 신자의 삶이 맞는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것에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루시는 방법과 인도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본다면, 모든 것의 대답은 사실 하나로 모아집니다.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면 우리는 처해 있는 상황과 문제들을 바로 없고, 그것 때문에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기 때문에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안다면, 여러분과 저는 거의 대부분의 근심에서 자유로울 있을 것이고, 겪고 있는 많은 갈등과 속상한 일들 속에서도 오히려 감사하며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자기 문제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오해하고 있었죠. 그는 이삭이 주는 재산과 장자의 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 때문에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쓸쓸하게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아무도 그와 함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관심은 오직 '내가 그것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외롭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바로 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하나님이 내민 계단

야곱은 실패자였고, 자신이 행동했던 모든 때문에 와신상담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외삼촌 집에 가서 신부를 얻고 돌아와 권리와 재산을 되찾겠다' 결심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자신이 지은 때문에 가나안에서 쫓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주실 것만을 쫓아 살았던 야곱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계단을 자신에게 뻗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가 처음 것은 '너에게 복을 주겠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계단이었습니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간 계단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야곱에게 지금 뻗고 계시는 계단을 보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 장자의 권한과 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달콤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었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예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부르는 이유가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누리고 싶어서입니까? 물론 그럴 있고, 그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아픔과 고민, 연약함과 실패를 가지고 나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짜 관심은 무엇입니까? 야곱의 관심은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의 관심에 대답하기 전에 야곱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단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임마누엘!

 

보이는 너머의 진실

여러분, 지금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갔던 길을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을 누리기 위해 가나안으로 들어왔는데, 자신은 죄를 짓고 땅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의 자손뿐 아니라 너로 인하여 모든 이가 복을 받을 '이라고 하는데, 지금 자신이 챙길 복도 하나 없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이 외롭게 혼자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너의 속에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실 같으세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며,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조차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가나안에서 쫓겨나야 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약속을 너와 했으며, 이것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땅만 보고 살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에서 그에게 계단을 뻗으심으로, 하늘나라와 영광, 거룩과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자신의 인생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계단이 자신에게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비로소 장자의 복이 세상에서 먹고 살라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 인생은 하늘과도 연관되어 있구나, 영원과 연관되어 있구나, 이것이 모두 끝이 아니구나'라는 것을 그가 하나님을 만나며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그가 이해하기 시작한 거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것이 아니니라" 하죠.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 누릴 있고 가질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인생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인생이 단순히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고백을 넘어섭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거룩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문제와 생각으로 고민합니까? 해결 방법이 없는 문제, 답이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들이 우리에게 근심이 되고 불안하게 합니다. 이민자들은 심하죠. 땅에서 무엇을 믿고 있겠습니까? 한국에서는 은행이 파산한다는 말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미국에 와서 은행이 파산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의 국채가 위험하다는 신문 기사도 봅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세상에 하나님 외에 여러분이 발을 딛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하지 않는 , 영원한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반석과 방패와 근거는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뉴스에도,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석이신 하나님 안에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번째 반응: 두려움과 깨달음

야곱은 지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는 중입니다. 죄인으로 도망치는 자신을 찾아오신 주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예전이라면 하나님을 멋있게 맞이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는 가진 것이라고는 여행에 필요한 몇몇 물건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약속을 하십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죠.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야곱은 동시에 번째 반응을 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며, 우리가 잊고 사는 반응입니다. 두려움은 다른 데서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데서 오는 것이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조금 알게 되자, 야곱은 ', 내가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사실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하나님이 나를 돌아볼 이유조차 없는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자신이 건강하거나 능력이나 물질이 있을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면,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있었을 텐데, 지금은 모든 것을 잃고 도망쳐야 하며 앞날도 보이지 않는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신 겁니다.

 

' 하나님은 하필 지금 나를 부르셨는가. 여기서 나를 인도하시는가. 여기서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얘기하시는가.' 야곱은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그가 하나님을 거역하며, 하나님의 손에 있던 떡만을 얻으려고 애썼던 자신의 인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리에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있는가' 생각나게 하는 것이죠.

 

죄인의 고백과 복음의 시작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며 생각하시나이까"라는 고백처럼, 야곱은 자기 죄를 알고 있기에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요. 아담이 하나님이 찾으실 숨었던 것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인생은 숨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 하와를 ' 자의 어머니' 불렀고, 여인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부수게 것이라는 복음의 시작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죽여 피를 흘리게 하시고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아담은 복음을 듣고 에덴 밖으로 나가게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 죄인이 무엇을 있는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담대하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두려움과 죄로 인해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할 없으며, 자신을 때는 아무 희망이 없지만, 나는 이렇게 고백한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요, 이것이 하늘에 이르는 문이라.'

 

이곳에 계단이 있었고, 계단이 바로 자신에게 이어졌으며, 자신이 바로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을 야곱은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야곱은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둥: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믿음의 고백

야곱은 자기가 누워 있던 돌을 세우게 됩니다. 돌의 배경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오늘은 사진을 하나 준비했습니다.

 

돌은 가나안에 있는 돌이며, 본문의 야곱이 세웠던 돌과는 다릅니다. 가나안에 있는 돌이고 하나님께서 모두 부수라고 명령하신 바로 돌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상과 신상을 부수라고 하시며, 특히 기둥 () 자를 쓰는 '주상' 부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주상을 신을 대표하고 신성이 깃든 것으로 여겨 숭배했습니다. 애굽의 오벨리스크처럼 크진 않았지만, 대부분의 가나안 주상은 우상숭배의 도구였죠. 지금 보시는 돌이 중의 하나입니다. 주상에 쓰여진 비문은 가나안 신을 찬양하는 문구이며 가나안 사람들은 돌에 신의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였고, 주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야곱이 베고 잤던 돌도 목침만한 작은 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의 몸을 바람이나 적으로부터 숨길 있을 만한 상당한 크기였을 겁니다. 그러므로 크기가 가나안 주상들의 크기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할 있습니다. 야곱은 바로 돌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신을 섬기던 주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말입니다.

 

그는 누워 있던 돌을 세워 '기둥'이라 부릅니다. '마쩨바'라는 단어인데, 기둥은 하늘과 땅을 잇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꿈에서 보았던 계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인자 위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보리라" 하셨을 , 천사는 있지만 계단은 없는 아시죠? 그리스도가 계단이시고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다리에서 완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의미는 결국 야곱이 느꼈던 두려움이 어떻게 풀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두려워했지만,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성전이 되십니다"라는 깨달음으로 그의 반응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기둥에 담긴 메시아에 대한 믿음

요한계시록의 말씀처럼, 예루살렘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성전이심이라" 합니다. 성전이란 모든 하나님의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는 ,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는 곳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새롭게 하셨고, 야곱은 언약에 반응합니다. 복음으로 시작된 계단은 하나님과 야곱을 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계단을 기둥으로 삼아 기름을 붓습니다. '메시아' '그리스도' 진짜 뜻이 '기름부음 받은 ' 아닙니까? 그는 기둥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단순히 기둥을 거룩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기름부음 받은 , 그가 성전일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22절을 보세요. 야곱이 이렇게 약속합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집이 것이라." 기둥이 하나님의 , 성전이 된다고 얘기하죠. 그런데 창세기 사건 이후로 야곱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야곱이 십일조 했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벧엘에서 제사한 이야기는 있습니다. 그곳을 하나님의 집처럼 제단을 쌓은 일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기둥을 하나님의 , 성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지금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고백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기에 야곱의 고백을 이해할 있습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지금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세운 기둥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늘의 , 성전의 기둥,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선언하시고 자리를 위해 계단을 내려 보내신 바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의 두려움은 이제 이상 자기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닌 겁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내려오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둥을 세우고, 이제 그의 관심은 재산이나 장자의 권리가 아닌, 이삭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을 붙잡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손으로 잡아야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겁니다. 그가 아무것도 없는 자가 되었을 무엇을 잡아야 할지를 알았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반응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키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 것이 고백의 전부라면,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고백하지 못하는 것일 있습니다. 무엇이 함께 있어야 할까요?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내가 앞에 경외하며 두려움을 느낀다" 고백입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졌을 , 그는 수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나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고백 없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분명히 어딘가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알게 되고, 동시에 사랑을 받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내가 누구이관대 하나님은 나를 보살피시며 지키신다고 하시는가? 인생이 나의 것인 것처럼 살았던 내가 아닌가?' 그런데 그러한 나를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그런 나를 ,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분 앞에 감히 이름을 이야기할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두려운 것입니다.

 

야곱의 번째 반응: 서원과 하나님의 주권

우리가 두렵지만, 두려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붙드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빈손이니까요.

 

여러분은 오늘 어떤 손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빈손이 아니라면 십자가를 붙잡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할지라도, 손양원 목사님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고백은 "주님, 나는 무익한 자이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할 뿐입니다"라고 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오셨습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한다면, 어찌 근심하고 걱정하며 쓰러져 있습니까? 어찌 힘없는 자처럼, 하나님 없이 사는 자처럼 초점을 잃고 기쁨이 없는 것처럼 있을 있습니까? 여러분의 손에 것이 많기 때문에 여전히 근심을 털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순간, 도대체 무엇이 여러분을 어떤 것으로부터 떼어놓을 있단 말입니까?

 

서원, 내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야곱의 마지막 반응은 알려진 서원입니다. 신약에 이르면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머리로도 하지 말라 네가 터럭도 희고 검게 없음이라." 맹세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네가 맹세를 지킬 없다는 겁니다. 능력도 되면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가 맹세의 의미를 모르고 맹세하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서원하고 그것을 지킨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만큼 했습니다. 인생에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런 것을 내놓을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하나님, 제가 이것을 약속할 테니 복을 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나는 성경을 이만큼 읽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사랑합니다. 나는 이만큼 성도를 위해 봉사했고 애썼습니다. 나는 이만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말에 항상 붙어 있지 않나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마치 그것이 우리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끊임없이 바리새인으로 돌아가려 하지 주님의 제자로 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신을 끊임없이 회개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십자가를 붙잡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있겠습니까? 말도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킬 없는 맹세를 이야기하시면서, 맹세를 지킬 없는 우리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맹세란 하나님과의 협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만큼 해주시면 나도 이만큼 드리겠습니다'라는 식의 합의가 아니라는 거죠. 모든 훌륭한 구약 학자들이 말하듯이, 서원이나 맹세는 어떤 계약이나 합의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바뀔 것을 보여주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약속들을 결국 이루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삶이 바뀌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요, 사랑이며,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야곱의 경우 그의 서원은 가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기둥으로 성전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인생이 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의 성전이 되신 것처럼, 저도 주님의 성전이 되겠습니다'라는 고백이죠. 야곱이 이것을 스스로 지킬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 속에서 이것을 이루어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맹세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십일조였습니다. '내가 분의 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했죠. 이것은 있을 같지만, 사실 십일조는 항상 가장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도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여러분은 총수입에서 떼나요, 아니면 순수입에서 떼나요? 어디까지가 수입입니까? 여러분의 시간은 어떻게 드립니까? 분의 일이라는 것조차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십일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 십일조를 했다는 이야기는 번도 나오지 않지만, 맹세는 야곱이 이제 '십일조의 인생'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야곱의 새로운 여정

이전까지 야곱의 여정은 '어떻게 하면 빨리 결혼해서 돌아와 몫을 챙길 것인가'라는 계획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인생은 이상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그의 인생은 이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순례의 인생이 것입니다. 그는 여정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것이고, 인생의 목적과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야곱이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을 겁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맹세를 그의 이름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 그의 죄를 덮어주시고 "이제 살아보자"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제 죄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 앞에서 죄와 싸우는 인생을 살기 시작한 겁니다. ' 사함을 받았으니 눈과 같이 희다' 말하며 다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았으므로 이제 죄는 내가 싸워야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싸우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에서와 화해할 때까지,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끝까지 지키실 때까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성전으로 만드시고, 그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십일조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는 그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께 드릴 것이며, 하나님이 그와 함께 거하는 성전이 것입니다. 그의 맹세는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안에는, 하나님이 이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서 포기하지 않고 함께하여 형상을 회복하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끊임없이 괴롭히시며, 우리가 속에 빠져서는 편할 없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는 갈증을 느끼고, 말씀을 듣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며, 기도하지 않고는 인생에 의미가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요, 성도인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게을러지거나 도망치려 하고 합리화할 때마다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너는 무엇을 향해 가는 자인가' 끊임없이 물으실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했지만, 자신을 지키고 먹이시며 입히시기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전에 이삭의 모든 재산을 원했던 그가 이제는 단지 '하루 먹고 입게 해달라' 변한 것입니다.

 

말씀으로 사는 인생

야곱은 자신이 서원이 얼마나 위대한 말인지 몰랐습니다. 말의 진정한 의미는 출애굽기에 이르러서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심고 거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늘에서 주는 만나로 먹게 것이며, 반석에서 물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먹이고 살리는 것은, 너희를 광야에서 낮추어 너희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셨죠. 이것이 바로 야곱이 했던 말의 위대한 의미였습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바로 여러분의 주님이시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땅을 살게 하는 주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아름다움

야곱의 서원 십일조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십일조와 연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쟁의 승리 십일조를 드렸지만, 야곱은 패배한 자였음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자가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자신을 입히시고 먹이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끌어가실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여러분의 서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쉬운 같아 보입니까? 야곱을 보면 있듯이, 험난한 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반드시 빛나고 아름답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 아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어 사업이나 가정에서 성공하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이만큼 잘하게 되었다' 간증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그날,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아름다웠는지를 놀라며 보게 것입니다.

 

가장 빛나는 순간

내가 다른 사람의 때문에 힘들어서 성도를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울며, "주님,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으니 내가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그렇게 울며 힘들어했던 순간이 가장 빛났다는 것을 여러분은 그때 알게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교회 때문에 고민하고, 교회를 나가면 마음이 편하고 은혜를 받고 즐거웠던 것도 물론 중요한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 때문에 기도해야 했으며, 그들을 위해 아파하고 시간을 내어주고 마음을 주어야 했던, 그래서 내가 너무 손해 보는 것처럼 살았던 시간들이 가장 아름다웠다는 것을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복된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바뀌고 달라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아프고 힘들어서 눈물을 흘리며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시간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마지막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빛나는 시간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 앞에 순종하기 위해, 주님과 가까이 가기 위해, 주님과 함께 걷기 위해 여러분이 그곳에서 발버둥치며, "주님 살려주십시오, 주님 제가 같이 가기를 원합니다, 저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주님을 붙잡겠습니다, 주여 나를 붙드소서" 했던 일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빛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서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서원과 맹세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이 맹세하고 서원하고 있습니까? "주님,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제자의 삶을 살겠습니다. 주님,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을 이룰 능력이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나 제자의 , 어떤 것도 스스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게 되실 것입니다. 헛된 맹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걸으심으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들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이루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고백: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신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옳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여러분의 생각, 계획, 능력은 틀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맞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도저히 ", "나는 죄와 싸울 없어"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옳은 말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고, 자책하며, 모든 것을 책임질 것처럼 사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나는 거룩하지 않다" 말하는 것은 겸손해 보이지만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나는 거룩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 혼자 인생을 간다" 생각은 틀렸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이것이 옳습니다. 여러분의 의심과 주저함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땅에서 승리할 것이다" 이것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손을 늘어뜨리지 말고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하십시오. "기운을 내라,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습니까"라는 말은 잘못하면 틀린 길의 시작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나의 부모님들과 친구들이여, 나의 누이와 동생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멘.

 

기도합시다

 

아버지 집에서 먹던 고기도, 평안히 살던 침대도 아니었고, 편히 베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야곱을 지키셨고, 먹이셨으며, 입히시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의 인생을 빛나게 하셔서 결국 바로를 축복하는 자리까지 이끌어내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붙잡혀 있음을 고백하며,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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