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8장 10절부터 15절 까지 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 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아멘.
야곱의 여정과 고독
야곱이 드디어 집을 떠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에서가 그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 리브가는 “네 아내를 얻기 위해 저 하란으로 가라”고 말하며 그를 떠나보냅니다. 하란이 어디쯤 되는지 지도를 준비했습니다. 왼쪽 지도는 현재의 이라크, 이란, 그리고 터키(튀르키예)가 있는 곳입니다. 레바논,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는 오른쪽 하단에 있습니다. 성경의 지도는 조금 다릅니다. 밧단아람과 하란이 이쪽에 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습니다. 가나안은 이쪽이고, 브엘세바에서 출발해 벧엘을 거쳐 지금 하란으로 가는 길입니다. 상당히 먼 거리이며, 가나안 밖으로 나가는 여정입니다.

가나안 밖으로 아내를 찾으러 가는 일이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까지의 성경 논조로 볼 때 매우 독특하고 특별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이삭을 직접 보내지 않고 종을 보냈습니다.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리로 가지 말고, 너는 이 가나안 땅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에는 이삭이 일부러 그를 가나안 땅에서 떠나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같은 방식으로 야곱의 이야기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야곱 이야기의 시작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등장인물 중에 의인은 없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줄 때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창조의 언어인 “생육하고 번성하라”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창세기 1-3장의 이야기처럼, 죄 때문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자신이 죄인이기에 지금 가나안을 떠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겪는 문제가 단순히 재물을 얻지 못했거나 장자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장치를 통해 알려줍니다.
첫 번째 장치는 11절에 있습니다.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야곱은 하란을 향해 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직 가나안 땅에 있지만,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르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여행입니다. 야곱의 나이는 약 70~77세로, 그 나이에 홀로 먼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마음을 여러 장치를 통해 보여주는데, 첫 장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한 곳에 이르렀다. 그랬더니 해가 졌다.” 이 구절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상해 보십시오. 아버지에게 쫓겨난 아들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집을 나서는데, 석양이 지고, 잘 곳을 찾고 있습니다. 그때 떠오르는 단어는 ‘쓸쓸하다’일 것입니다.
야곱은 단순히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을 시작했는데 해가 지고 어떤 곳에 도달했다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되는 순간, 야곱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정처 없이 떠돌다가 발길 닿는 곳에 도착했는데, 해는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이제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고,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온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배경인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편히 쉴 곳도 없는 상황에 처했고,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배경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돌베개와 자기 의지
야곱은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었고, 더 이상 계획도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배를 위한 장소를 찾은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여행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찬송가처럼 돌단을 쌓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의 모든 계획은 무너졌고, 그는 아무 의미 없이 빈손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야곱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토록 외롭고 절대적인 고독을 경험하며 쓸쓸함을 느끼는 이유가 단순히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홀로 남았기 때문일까요? 야곱을 생각해보면 이는 그답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머리를 써서 위기를 극복하려 했을 것입니다. ‘외삼촌 집으로 빨리 가서 아내를 얻고 돌아와 내 자리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우리는 결말을 알고 있기에 야곱이 20년 동안 고생할 것을 알지만, 야곱의 마음에는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빨리 결혼해서 돌아와 자기 자리를 찾을 생각뿐이었습니다. 리브가도 길어야 한 달 정도면 에서의 마음이 바뀌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야곱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쓸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 정도 시련은 극복할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힘을 내서 모든 것을 되찾으려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고통의 근원은 그 자신도 모르는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삭의 축복을 듣고 나왔고, 자신이 방황하고 있는 이 땅이 자기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모든 술수를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가서 우리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단서가 또 하나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돌베개’ 사건입니다. 이 돌베개는 우리가 흔히 찬송할 때 생각하듯이, ‘야곱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땅바닥에 누워 돌을 베고 잤을까?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라고 여깁니다. 목침도 딱딱한데, 하필이면 더 단단한 돌베개를 베고 잤다는 것이 불쌍해 보입니다. 이런 생각은 한국적 정서와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돌베개라는 사건을 놓치기 쉽고, 당연히 고생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찬송가에서도 ‘우리가 고생하는 것이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든 것 같다’고 표현하죠.
그러나 이 ‘돌베개’라는 말은 단순히 ‘베개 대신에 돌을 베고 잤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대 근동의 문화나 성경의 단어 사용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돌을 옆에 놓고 누워 자신을 보호하려 할 때 그 돌을 가져다 놓는 경우를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바위 안에 나를 감추신다’는 표현을 보셨죠? 이미 예수를 믿고 성경을 아는 우리는 ‘어려움으로부터 나를 감추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바위 속으로 왜 들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동굴이라면 모를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땅에서는 바위가 그늘을 제공하고 피난처가 되기 때문에 뜨거운 날씨에 바위 밑으로 숨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자 밑으로 가야 하죠. 이처럼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문화적 관습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되는데, 돌베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는 베개의 개념보다는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돌의 개념이 훨씬 강합니다. 야곱은 바람이나 다른 위협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돌을 옆에 두고 기대어 잠든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힌트를 주는 이유는, 그가 지금도 끝까지 돌베개를 삼아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인생에서 겪은 모든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자기 안에서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세상적으로는 당연한 태도입니다. 이민자들이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대개 문제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무너졌기 때문에 좌절합니다. 환경이 좋아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헤쳐 나왔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호랑이가 물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죠. 이것이 세상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한계입니다. 세상은 ‘너 자신을 믿어라,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항상 ‘너는 하나님을 어떻게 따르고 믿고 의지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돌베개를 보호막으로 삼아 자기 힘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 합니다. 문제나 상황 자체가 우리의 문제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결국 나 자신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라도, 자신만을 끝까지 믿으면 결국 자기 자신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는 보암직하고 먹음직했기에 맛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당면한 문제와 사탄의 유혹 속에서 해결 방법을 찾았지만, 의지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과 욕심이었습니다. 나를 의지한다는 것은 결국 여러분의 욕망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때로 그것이 통하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도 있습니다.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버텨온 여러분은 생존력이 강하고 매우 뛰어난 분들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아온 인생이 마지막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야곱처럼 계속해서 돌베개를 찾습니다.
야곱의 문제는 계획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언제든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가 잃어버리고 잊었던 것이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돌베개를 베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고통의 근원과 사닥다리 꿈
우리의 진정한 고통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왜 나는 이 고독을 이기기 어려운가? 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삶에 성경이 약속한 것들이 있는데도 고통과 근심에 휩싸여 있는가?’라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처럼 우리가 가진 것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잊고 있는 것이 진짜 문제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야곱에게 돌베개는 단순히 베는 용도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의지하는 도구였습니다. 비록 초라하지만, 피난처와 같았기에 그것을 곁에 두고 의지하며 위로를 삼으려 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꿈을 꾸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야곱의 사닥다리’라고 부르는 이 ‘사닥다리’라는 단어는 사실 ‘사다리’라기보다는 ‘계단’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신을 섬기기 위해 만든 제단인 ‘지구라트(ziggurat)’는 대부분 계단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바벨탑을 떠올릴 때도 그런 형태를 상상합니다. 바벨탑은 바로 그 계단을 통해 ‘하늘의 문(Gate of Heaven)’에 닿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합니다. 당시 모든 지구라트는 하늘에 오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본 것은 달랐습니다. 12절을 보면 성경의 순서가 분명합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먼저 땅을 보았습니다. 그가 본 것은 땅에까지 놓인 계단이었습니다. ‘하늘에서부터 사닥다리가 쫙 내려와 있더라’가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땅에까지 이른 계단이 먼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카메라 앵글처럼 위로 올라갑니다.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을 보게 되고, 마침내 ‘하늘 위에 하늘’, 즉 하나님이 계신 곳에까지 그의 눈이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문’, 하나님께 이르는 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곱의 인생,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생을 거의 거꾸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땅에서부터 하나씩 쌓아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야곱이 보고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계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단은 하늘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그 위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약속
결국 야곱은 그 놀라운 광경 속에서, 마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과 같은 경험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이 아니라, 그 영광과 거룩함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탄과 놀라움,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그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라고 나옵니다. 천사들까지 본 야곱이 더 눈을 올렸더니 그 위에 하나님께서 서 계신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니 형체가 없으시고, 서거나 앉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에게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을 표현할 때 보좌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우주,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 모두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그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표현이 아니라 서서 말씀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서’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 표현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과거에는 사도행전 6장에서 스데반이 순교할 때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서 서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그만큼 더 ‘흥분하셨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문맥이 이야기하는 것을 잘 살피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서서 말씀하신 이유를 훨씬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서서 뭘 말씀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하신 말씀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똑같이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을 네게 줄 것이고 네 자손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자손들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했던 이야기, 즉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다시 한번 새롭게 갱신하는 것입니다. 별 이야기가 없는 것 같은데, 왜 하필 서서라고 표현을 했을까요?
바로 그다음 이야기 때문입니다. 1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이것은 이제까지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의 언약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 평상시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15절의 내용입니다.
야곱의 상황을 한번 생각하고 야곱의 마음을 조금만 가져보세요. 아버지가 “이 땅은 네 땅이다”라고 말했지만, 쫓겨나 하란으로 가던 길에 자고 있는데, 꿈속에서 하나님이 “이 땅은 네 땅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물론 마음이 좋아서 “아, 하나님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아닐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약 올리십니까 지금?” 아니, 그러면 여기서 에서가 야곱에게 달려와 “형제 사이에 그런 것을 가지고 이러면 안 된다. 네가 여기 있어도 좋으니 같이 살자”라고 한다거나, 이삭이 사람을 보내 “아비가 잘못 생각했다. 아내는 내가 구해다 줄 테니 빨리 돌아오거라” 같은 일이 벌어져야 맞는 것 아니겠어요? 그래야 꿈이라도 기분이 좋겠죠. 그런데 이 꿈의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야곱에게는 훨씬 더 마음 아픈 꿈입니다. 지금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게 아니잖아요.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같이 있어 주겠다.”
우리는 너무 은혜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서 “아, 주님께서 거기까지 같이 갔다 오신대”라고 생각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안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가지 못하게 해주시는 게요. 그런데 ‘갔다 올 때까지 같이 있어 주겠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신나는 일일까요? 지금 야곱은 굉장히 속이 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들은 약속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야곱이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그의 진정한 문제의 뿌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잘못하고 실수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야기했고, 형을 피해 도망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시니 야곱은 깜짝 놀라는 것이죠. 마치 벌을 받으러 가는 학생에게 “벌만 주려는 게 아니야. 네가 시험을 100점 맞게 하려고 그렇게 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어머니가 틀린 시험지를 들고 “밖에서 서 있어”라고 혼내려다가, 다시 나와 “자, 정신 좀 차렸냐? 네가 뭘 잘못했지?”라고 물을 때 “시험 잘못 본 거예요”라고 대답하면, 어머니께서 “아니지, 네가 덤벙대다가 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고 답을 안 쓴 것을 깨달으라고 한 거지”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 자체가 여러분과 저의 인생을 사울이 바울로서 예수를 만난 사건, 그리고 야곱이 그 하나님을 만났던 사건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사건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야곱의 깨달음과 성전 되신 하나님
야곱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자신과 함께하고, 앞으로도 함께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은 놀라지 않을 수 있지만, 이 이야기는 가나안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기대하는 것이었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졌던 복이었습니다. 이 땅이 자손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에덴임을 알고 있었죠.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가는 그곳도 내가 에덴으로 만들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였을까요? ‘내가 네가 가는 곳에 너와 함께하고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내 신앙생활은 처참합니다’라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네가 죄악 속에 쓰러져 돌베개를 껴안고 자고 있을지라도, 네가 가는 곳 어디든 가나안 밖으로도,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내가 너의 성전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죄인인 야곱이 떠날 때, 하나님은 그 죄인에게 ‘내가 너의 거룩한 집이 되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었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하나님의 집, 즉 아브라함 언약의 진정한 핵심인 ‘내가 너의 성전이 되어줄 것이다’를 잊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답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문제나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기 마련이고, 그것이 해결되는 것을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신앙생활에 뭔가 변화가 필요하고, ‘다른 사람처럼 뜨겁게 믿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결국은 ‘나’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처럼 절망 속에서 돌베개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깨닫습니다. ‘내가 너와 어디든지 함께 갈 것이다. 내가 너의 성전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생각지도 못했던 답이었습니다.
지금 많은 문제들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시겠죠? 가정, 사업,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많은 근심과 걱정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답으로 생각합니까? 가정이 더 행복해지는 것, 교회가 사랑이 넘치고 올바르게 되는 것, 혹은 개인적으로는 신앙이 바로 잡히는 것 등입니다. 이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야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의외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자리에 설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돌베개에서 벧엘로, 그리고 그리스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돌베개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답을 내어놓으십니다. ‘내가 너의 성전이다.’ 모든 것이 틀어져 버린 줄 알고, ‘나 자신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며 돌베개를 껴안고 잠든 야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로서는 할 수 없겠지.’
이는 마치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을 때,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 때문이었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자’는 곧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자녀가 많거나, 유업이 많거나, 부유한 것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복 신앙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갔다는 소식에 금방 귀가 솔깃해지곤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돌베개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때 깨달은 것입니다. ‘아, 내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았는가! 내가 어떤 것을 답이라고 생각했는가!’
우리는 다음 주에 더 자세히 보겠지만, 야곱은 자신이 의지했던 돌베개를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하늘이 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에덴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곳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벧엘과 함께하는 삶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누워서 안고 잘 베개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다시 발견했고,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이 진정한 답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 이곳이 바로 성전이구나!’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리라’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네가 이것을 보고 놀라느냐? 인자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다.’ 이는 성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임재가 나와 함께하는 것을 볼 것이며, 내가 바로 그 성전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계단이 되어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셨고, 여러분을 위해 계단뿐 아니라 성전이 되어 여러분을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끝은 바로 이 나다나엘의 이야기에서 완성됩니다. 야곱이 꿈을 통해 어렴풋이 보았던 하나님의 임재, 성전의 모습이 이제는 우리가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옷자락
더욱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뿐 아니라, 이제 우리가 그분 안에서 성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함께 찬양하는 것처럼, 이사야서에 나와 있듯이, 주께서 보좌에 앉으셨을 때 그분의 옷자락이 온 우주에 가득 찼습니다. 죄 속에 있던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의 옷자락이 가득 채운 것입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성전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거하시고, 하나님의 옷자락이 그를 덮은 것입니다. 야곱에게 그 옷자락은 아마 용서와 의의 옷자락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 가득했던 거룩의 옷자락이 우리 인생을 채웁니다. ‘너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 내가 너의 의가 되어줄 것이며, 내가 너의 옷이 되어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에게는 이보다 더 놀라운 옷자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의롭게 하는 옷자락뿐 아니라, 그와 함께하실 하나님의 옷자락을 입었습니다. 그는 실패 속에 있었고, 무기력했으며, 왜 소망 없이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정처 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모든 계획이 깨어지고, 무엇에 기대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었을 그를 덮은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성전에 가득했던 하나님의 옷자락, 곧 그리스도의 옷자락입니다. 그의 고통과 함께하며 그 고통을 덮은 옷자락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를 사랑과 자비와 긍휼로 감싸주신 옷자락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겪었던 아픔과 눈물, 이민 생활에서 겪었던 상처들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까요? 그 모든 것을 아시며 여러분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하셨고, 그 옷자락으로 덮으셔서 위로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머물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 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곳에서 넘어져 있을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나 걸어갈 인생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성전으로 선포하시고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거할 것이며, 어디에 있든지 너와 같이 있고, 나의 옷자락이 너희를 덮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선언을 듣지 못하십니까? 그 어떤 것이 이것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것이 이 하나님의 옷자락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눈과 같이 희리라’고 하신 그 말씀처럼, 여러분을 순결한 신부와 같이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처에 눈물을 흘리며 그 옷자락으로 덮으시고, 아픈 곳을 싸매 주시며,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앞날이 막막할 때도, 그 옷자락에 담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하며 노래하고, 주님의 놀라우신 의의 옷자락, 지혜의 옷자락, 기쁨의 옷자락을 지금 입고 누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분께 나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한 걸음이라도 더 주님의 옷자락, 주님의 옷을 입고 성전으로서 걸어가게 하소서. 누가 뭐라고 해도 이 길을 포기할 수 없으며, 이 길을 담대히 걸어가게 하소서.
주여, 주의 옷자락으로 저희를 덮으소서. 우리의 더러움을 덮으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덮으소서. 우리의 쓴 뿌리들을 덮으소서. 우리의 억울함을 덮으소서. 우리의 어리석음을 덮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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