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46절로부터 28장 5절까지입니다.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아멘.
야곱의 사건 이후, 변하지 않은 사람들
저희는 이삭, 에서, 야곱, 그리고 리브가라는 네 명의 인물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기가 막힌 '악인 가족'의 모습을 보았고,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은 죄가 있음을 발견하며 주님의 말씀 앞에 섰던 몇 주간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여 집안을 뒤흔든 야곱의 사건이 끝난 후,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야곱과 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한 사람도 없었고, 그들의 태도 역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에서를 보십시오. 야곱이 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내가 그를 미워하여 죽이고 싶다'고 말할 만큼 굉장한 분노였죠. 처음에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내뱉었고, 그 이야기는 리브가에게 전해졌습니다.
리브가는 '인간 도청기'였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들었듯이, 이번에도 에서의 혼잣말처럼 극소수에게만 이야기했을 에서의 말을 듣게 됩니다. 에서의 태도는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 있었고, 그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빼앗아간 것이죠. 이는 우리에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 불이익을 당하거나 화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리브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후 야곱에게 알리고, 그를 대피시킬 준비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에서를 또다시 이용합니다. 에서가 이방 헷 족속 여인과 결혼한 것을 핑계 삼아 이삭에게 말하는 것이죠. "에서가 저런 아내를 얻어 우리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이 많습니까? 그러니 야곱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을 말했지만, 이는 상당한 꼼수였습니다. 이삭이 어떻게 결혼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이삭은 직접 아내를 찾아가지 않았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가나안 땅에 머물게 하기 위해 종인 엘리에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리브가는 이삭에게 "야곱을 라반의 집에 보내 아내를 구하게 하자"고 말하고, 이삭은 그 말에 따릅니다. 이로 인해 야곱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가나안으로 들어왔는데, 야곱은 비슷한 나이에 가나안을 떠나게 되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입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들어왔지만', 야곱은 가나안을 '나가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경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다뤄보겠습니다.
변화된 이삭과 '엘 샤다이'의 의미
이삭의 변화된 모습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야곱이 에서를 대신하여 들어왔음을 깨달은 순간, 그는 몸을 떨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축복을 야곱에게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고집과 계획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에서에게 "너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그는 야곱에게 "어쩔 수 없이, 속아서" 축복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축복합니다. 이삭의 태도는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야곱을 보낼 때도 형을 속인 행동을 질책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주셨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합니다. 즉, 이삭은 이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때 그가 사용한 단어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28장 3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며"라는 구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엘 샤다이'라는 단어입니다. 20~30년 전에 나온 마이클 카드의 '엘 샤다이'라는 찬양을 기억하실 겁니다. 에이미 그랜트 같은 유명한 복음 성가 가수가 불러 더 알려졌지만, 가사와 멜로디만으로도 참 좋은 곡입니다. 특히 가사에 담긴 구속사적인 내용이 인상적입니다.
이 찬양은 하나님이 지극히 높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출애굽 사건과 아브라함의 언약 등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가사에서 '엘 샤다이'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이 단어가 모세 언약 이전에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유명한 이름이 우리나라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된 것은 70인 역을 번역한 제롬의 라틴어 성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가톨릭에서 가장 권위 있게 여기는 그 라틴어 번역이 헬라어 번역을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옮겼고, 이것이 영어권에도 자연스럽게 전해졌습니다. '능력'이나 '힘'이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이 단어의 깊은 뜻을 모두 담지는 못합니다.
'샤다이'라는 단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원을 찾기 매우 어려운 단어입니다. 가장 널리 주장되는 어원은 '능력' 또는 '만족하게 한다'는 뜻이지만, 최근 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의미는 'Mountain', 즉 '산' 또는 '산맥'입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산'을 뜻하는 '샤다이'가 만나 '하나님의 산'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번역도 맞지만, '하나님의 산'이라는 의미는 성경 전체의 중요한 흐름을 생각하게 해주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의 책처럼 통일된 주제와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수천 년에 걸쳐 40여 명 이상의 저자가 썼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일관된 흐름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신약을 몰랐고, 신약 시대 사람들도 구약 전체를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성경이 한 권으로 묶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구텐베르크의 발명 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성경을 독점했었죠.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성경 전체 내용에 통일성이 있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이 책의 저자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건입니다.
성경 전체 내용에 이러한 통일성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께서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건 중 하나입니다. 이 통일된 흐름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같은 큰 주제도 있지만, 더 자세히 보면 자주 등장하는 '옷'도 일관성 있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히신 사건부터 시작된 '옷' 이야기는, 제사장의 옷과 그리스도의 옷을 통해 마지막 날 계시록까지 꾸준하고 일관성 있게 이어집니다. 이처럼 성경은 역사성을 가진 책이며, 이러한 역사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대상이 바로 '산'입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산'이라는 개념은 마지막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 이야기의 끝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미지를 기억하십니까?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서 본 큰 신상 말입니다. 머리는 금이고 발은 진흙으로 된 그 동상 말입니다.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던 이 꿈을 다니엘이 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고대 역사를 하나님께서 계시로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의 마지막에 한 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산에서 '뜨인 돌'이 날아와 신상을 부수는 장면이 나오죠. 여기서 '뜨인'은 '삽으로 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뜨신 그 돌이 날아가 신상을 부수고, 그 역사의 끝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히 서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계시록에서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 '뜨인 돌'은 바로 메시아, 즉 구원자이시며,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니엘서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신상과 하나님의 산은 마치 두 개의 산처럼 서로 대적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산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의 산을 세우실 것을 보여주는 언어인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한다면, '엘 샤다이'라는 말이 단순히 '전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원이 불분명하거나 정확하지 않을 때는 어원보다 문맥을 따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단어를 써도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문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가 서툴러도 사회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이유도 바로 문맥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단어는 몰라도, '우리 식으로 대충' 그 문맥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현명한 권사님 한 분은 우체국에서 늘 한국으로 우편물을 잘 부치셨습니다. 항상 '익스프레스'로요. 그런데 그 딸은 영어가 어려워 '익스프레스'로 어떻게 보내는지 묻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보여주며 "휘익!"이라고만 해도 직원이 '익스프레스'로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언어는 단어뿐 아니라 문맥과 분위기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엘 샤다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부분을 보면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7장, 28장, 35장에 등장하는 이 단어는 언약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엘 샤다이'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을 '전능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힘이 센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언약을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산의 개념과 함께 생각하면, '세상에 어떠한 방해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대적하여 세상의 산을 무너뜨리시고, 하나님의 나라인 언약을 이루신다'는 의미가 바로 '엘 샤다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존재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구원하고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약속하실 때, 바로 이 엘 샤다이 하나님이 우리와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나를 떠나신 것은 아닌지, 하나님과 친밀할 때는 함께하시는 것 같다가도, 조금이라도 게을러지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실 거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주님, 잠깐만 딴 데 봐주세요. 이것만 끝내고 돌아올게요"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순간이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약속에서 결코 벗어나게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하고 또 어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야곱을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려 씨름에서 이긴 '이스라엘'로 기억하며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야곱은 처음부터 뭔가 달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붙드신 것이 아닌가?' 하고 야곱에게서 자꾸 조건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인생과 함께하실 때, 모든 무게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에 두고 계십니다. 우리의 조건이나 존재 때문에 이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쉽게 말해, 야곱이 복을 받는 뿌리는 야곱의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곱은 하나님을 속이고 이름을 모독하며 죄를 지은 범죄자였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시작입니다. 야곱이 순종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가 속이는 자였던 그 순간에도 함께하시며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야곱을 통해 다시 알게 됩니다. 우리는 로마서 3장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진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출발점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과 생각 전체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죄인이라는 진리
우리는 모두 똑같은 죄인으로 만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죄인들이 모인 것이죠. 그렇다면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향해 "당신은 왜 그렇게 삽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 성립될 수 없는 말입니다.
지난밤, 교회 수도 파이프가 새서 단수가 되었습니다. 교회 옆에 거주하는 한 홈리스가 파이프를 잘라 훔쳐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교회 주변에 홈리스가 많아져서 큰일이다. 교회가 지저분해지니 걱정이네", "어떻게든 저 사람들이 좀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분들과 우리가 똑같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깨닫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옳을까요? 우선 공감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까. 우리는 그저 몇 시간 물 때문에 불편하지만, 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생계 때문에 도둑질까지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대처해야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그들보다 우리가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으니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물론 의인은 없지만, 죄인에게도 차이는 있습니다"라고 덧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이 진리를 철저히 깨닫는다면, 사실 마음 상할 일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특별히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특별히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 옳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가 깊이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죄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실 수 없을 만큼 거룩하신 분이시죠.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거짓과 미움, 분노와 교만 속에 살아가며 자신의 꾀가 최고인 줄 아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시작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 샤다이'를 통해 "어떤 것도 나의 백성을 향한 나의 사랑을 막거나, 멈추거나, 좌절시키거나, 없앨 수 없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엘 샤다이'를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제 내가 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약속대로 될 것을 안다. 그리고 너에게도 그 복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말하며 아브라함의 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죄를 강조하지만, 사실 이 말씀은 매우 따뜻한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시면 더욱 따뜻하게 들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런데 우리는 모두 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사업이 안 되고, 자녀에게 문제가 있거나, 집안에 어려움이 있는 것만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공허와 아픔, 눈물 속에 있습니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우리의 핵심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해도 반드시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자녀 문제가 해결되면 남편이나 아내의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교회 사람 때문에 속상할 때도 있죠. 우리가 그 문제에만 매달리기 시작하면 인생은 끝없이 문제를 해결하다가 끝납니다.
야곱의 창세기와 우리의 천로역정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 매달리면, 눈앞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생과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야곱의 이야기에 '엘 샤다이'만큼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이삭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 말은 아브라함의 언약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실 때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생물학적인 의미로, '빨리 자녀를 많이 낳아 하나님의 백성을 늘리라'는 의미로 이해하곤 합니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이 육적으로 번성하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이 패턴은 창세기와 같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야곱의 창세기의 시작인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아담이 에덴동산을 떠나듯 가나안을 떠납니다. 왜 떠날까요? 돌아오기 위해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떠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회복을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정이 바로 야곱의 인생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작이 어디라고 했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입니다. 원래 창세기는 "죄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 시작했지만, 우리의 창세기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도 없는 곳이 아니라,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내십니다. 처음 창세기는 죄로 인해 타락했지만, 이제 죄에 빠진 우리를 다시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죄에 머물지 않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야곱의 창세기와 같은 창세기가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존 번연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곱의 '천로역정'이 시작된 것이고, 우리의 천로역정도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천로역정을 보는 눈이 바로 창세기 안에 담겨 있으며, 이것이 우리가 알려고 하는 주제가 됩니다.
시편 24편과 야곱의 하나님
시편 24편 1절부터 6절까지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이 구절을 읽다 보면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거짓말하지 않는 자'라고 말하는데, 그들이 찾는 하나님이 왜 '야곱의 하나님'일까요? 거짓말쟁이였던 야곱의 하나님이라니, 적어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해야 더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야곱의 인생이 우리가 읽고 있는 그대로의 야곱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찾는 자가 의인이라는 말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여기서 '문'은 성전의 문을 뜻합니다. 성전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의미합니다. "성전아 너희의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라는 구절은 바로 그 앞에 있는 내용이 가능케 되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는, 야곱이 아니라 그 야곱을 완성하시는 왕, 즉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왕만이 손이 깨끗하고 거룩한 자입니다. 야곱이 그런 것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야곱을 보시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을 찾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 저는 거짓되고 은혜를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입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의로운 자요,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나의 기쁨이요, 나의 찬송이요, 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죠.
저의 고백과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요? 지금의 제 고백도 맞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실 때 현재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영원한 나라의 관점에서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우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미래의 우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승리를 아는 자의 삶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마이클 조던이나 매직 존슨과 같은 유명한 농구 선수들과 한 팀이 되어 나성남포교회 농구팀과 경기를 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누가 이기는 것이 당연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포교회 팀에 예수님이 선수로 있다면 어떨까요?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예수님이 농구를 잘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이 "너희가 이길 것이다. 점수는 1000 대 500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지만, 과연 몇이나 그 말을 믿고 따를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1쿼터가 끝났을 때 점수는 250 대 0, 2쿼터가 끝났을 때는 320 대 0이 되었습니다. 한 골도 못 넣은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 예수님이 우리를 격려하시려고 1000 대 500으로 이긴다고 하신 거구나! 한 골이라도 넣으면 어디야? 예수님, 우리 3점 슛 하나만 넣어봐요. 저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점만 넣어도 우리는 100점, 1000점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정신 승리를 하려 하지만, 단 한 골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3쿼터가 끝나고, 마지막 4쿼터 15분 중 10분이 지났을 때, 예수님이 작전 타임을 부르십니다. "내가 한 말 기억하느냐?" 모두가 "네, 기억은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1000 대 500으로 이길 것을 믿느냐?"라고 물으시면, 모두가 "그럼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데 믿어야죠"라고 대답하겠지만, 속으로는 '주님, 이 정도면 많이 하셨어요. 함께 뛰어주신 것만도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잘 쓰시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태양아, 멈추어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대 팀 선수들이 모두 멈춰 섰고, 우리는 공을 넣기만 하면 됩니다. 시간은 무한하고, 1000점은 누워서 떡 먹기일 것입니다. 결국 누가 이겼을까요? 1000 대 500으로 이겼습니다. 나성남포교회 팀은 실력은 없었지만, 1000 대 500으로 이길 것이 너무나 분명한 팀이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약하고 허술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있었기에 그 팀은 반드시 이길 팀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의심하며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삶에는 기쁨이 없고 항상 답답하며 흔들립니다. 그는 이 경기를 한 번도 즐길 수 없습니다. 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지기 전에 한 골이라도 넣어보려고 온 힘을 다해 뛰지만 즐거움이 없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이 경기에 임해서 비록 지금 한 골도 못 넣고 있지만, 이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경기를 합니다. 그에게는 골이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상관없이 언제나 즐거운 경기입니다. 상대방이 골을 넣으면 "야, 역시 마이클 조던은 다르구나! 대단하다!"라고 감탄하며 즐겁게 경기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를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나는 승리할 자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종말론적 삶'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마지막을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와 기쁨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찍으신 '엘 샤다이'의 도장
여러분 중에 누가 내일을 알 수 있을까요?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언제까지 살고 어떻게 죽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여러분의 마지막이 어떠할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하나님은 거기에 도장을 찍으십니다. '엘 샤다이,' 내가 이 약속을 반드시 이루는 하나님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성경 전체를 통해 그것을 증명하십니다. "내가 야곱을 이렇게 했고, 에서를 이렇게 했고, 약속의 자손인 요셉을 이렇게 했으며, 모세를 이렇게 하여 내 뜻을 이루었다"고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고 너의 인생 속에서 이 약속을 이룰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두 가지 삶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끊임없이 불안에 떠는 삶입니다. 한 골 넣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오늘도 패배하며 속상한 하루를 보냅니다. 죄에 짓눌려 자기 연민에 빠져 삽니다. "나는 연약한 자니까"라며 한 번도 공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골대를 향해 던져본 적도 없습니다. 안 들어갈 것을 왜 던지냐며 매일 바닥만 보고 살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공이 안 들어가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끊임없이 공을 던지며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그는 승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승리를 아는 자로, 내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아는 자로 오늘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병은 과거의 병이 아니고, 죽음은 과거의 죽음이 아니며, 실패와 좌절은 예수를 알기 전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예전에는 고통뿐이었던 병이 이제는 우리에게 고통만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나눌 부활한 육체가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이루어 선하고 아름다운 길을 걷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죽든지 살든지, 어떤 고통이나 죄, 심지어 죽음도 나를 어찌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알기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같은 실패를 겪는 사람이 아니며, 같은 죽음을 맞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천로역정은 야곱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끝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가치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이길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세기로 마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 인자와 자비, 그 사랑으로 오늘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분들입니다. 승리가 분명한데 왜 눈물을 먼저 흘리십니까? 승리가 분명한데 왜 걱정을 먼저 하십니까? 승리하면서 걱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오늘을 '지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여러분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주님, 저희는 어디까지 가는지도 압니다. 저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갑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함께, 그리스도의 거룩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와 인내와 함께 끝까지 갈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의 영광이 되고, 그것이 우리 삶의 마지막 찬양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그곳에서 저를 보게 해 주십시오. 그곳에서 저의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보게 해 주십시오. 그곳에서 저의 사랑하는 교회를 보게 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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