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18절로부터 19절 까지 입니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아멘.
야곱이란 이름의 뜻과 인생
우리는 창세기 27장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이 장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 중, 오늘은 마지막 남은 야곱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야곱은 27장 이후로 창세기의 거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앞으로 그의 이야기가 계속되겠지만, 오늘은 바로 이 야곱의 삶이 시작되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발꿈치를 잡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에서가 말한 것처럼 '속이는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마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는 '속이는 자'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발꿈치를 잡다'라는 원래 뜻이 있었겠지만, 에서가 야곱이 자신을 두 번이나 속였다고 말하면서 '속이는 자'라는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야곱의 인생은 그 이름의 뜻과 유사하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그 이름의 어원을 더 깊이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그의 이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남을 속이는 삶을 살아가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끊임없이 보호하고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야곱의 인생은 계속해서 남을 속이는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는 두 가지 모습이 교차되어 나타납니다. 그의 이름이 그의 인생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쫓는 야곱
야곱이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에 연루될 때, 그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자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에게 장자의 명분이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들었고,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장자의 명분을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장자의 권리는 알았지만, 그 권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는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오직 장자의 명분만을 쫓았던 것입니다.
복을 위한 속임수, 야곱의 두려움
야곱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성경에 소개되는 사건은 창세기 27장 11-12절에 나옵니다.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야곱과 그의 어머니 리브가와의 대화입니다. 사건의 경위는 이삭이 에서에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을 리브가가 듣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그 말을 엿들은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 에서에게 모든 복을 빼앗기게 생겼으니 이제 자신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에서처럼 보이도록 털옷을 준비해 입히는 등, 이 일과 그 후의 모든 일은 리브가가 꾸민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세우도록 부추긴 야곱의 첫마디가 바로 창세기 27장 11절 말씀입니다. 야곱은 자신은 털이 많은 형에 비해 살결이 매끈한데, 이대로 들어가면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금세 들통나 복은커녕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만약 야곱이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진 자였다면 “어머니, 아버지를 속이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보통의 악인들도 한 번쯤은 고민하고 갈등하기 마련인데, 성경에서는 야곱이 그런 갈등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가 보시기에 자신이 속이는 자처럼 보일 것 같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과 어머니가 꾸미고 있는 일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문제가 된 것은 그 사실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대신 아버지의 저주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는 죄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속이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자기 눈에는 그것이 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무서움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잘못이며, 이 죄로 인해 아파하실 하나님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걱정한 것은 혹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잘못 때문에 마음을 바꾸어 복을 주지 않으시고 대신 저주를 주실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모든 관심의 중심이었습니다.
야곱과 우리의 모습
여러분 어릴 적 기억나십니까? 어머니가 선생님께 불려가셨다가 굳은 얼굴로 집에 돌아오시면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안방으로 들어와라!”는 말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왜 그랬어?”라고 물으셨죠. 그러면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는 여동생의 사탕을 뺏어 먹은 일부터 친구 책상에 선을 그은 일, 여자아이들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간 일까지 모든 것을 실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죄를 뉘우치는 마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혼날 것이 두려워 들키기 전에 미리 고백하면 혹시라도 덜 혼날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야곱의 태도가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열심히 빌고 있지만, 그 이유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보다는, 죄로 인해 자신이 받을 형벌이나 저주만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이나 탐욕을 보지 못하고, 이삭의 눈을 속이지 못할까 봐 걱정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자신의 권리를 찾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형벌은 피하면 그만입니다. 들키지 않으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죄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장 무섭고 위험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으시며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저 혼나지 않기 위해서, 사업이 뒤틀릴까 봐, 자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내가 받을 복을 받지 못할까 봐 움츠리기도 하고, 소위 '열심'을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두려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게으른 자신을 마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하다가는 언젠가 혼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며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과연 이웃과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돌아보기보다, '내가 이러다가 한 번 크게 혼날 것이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 졸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두려워하며 사랑해야 할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사랑하는 백성들을 섬겨야 할 시간들을 핑계로 대신하는 모든 행동들은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안타깝게 하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안타깝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을 안타깝게 보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약속하신 복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내가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불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듣겠다!” 그 약속 때문에 주님은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이 계시는데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만나고 기도를 듣기 위해 목숨을 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은 여러분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목숨을 걸고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지금도 지키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그 일이 여러분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일입니까? “내가 날마다 너를 기다리며 너의 기도를 듣고 싶고, 너와 함께 대화하고 싶다”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야곱의 거짓말
오늘 본문의 야곱은 자신에 대한 성찰에 실패했고, 결국 잘못된 일을 벌입니다. 창세기 27장 20절을 보겠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삭의 질문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참으로 절묘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순조롭게’라는 말은 짐승을 쉽게 발견했다는 의미로 보이지만,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쉽게 짐승을 만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가장 적절하고 알맞은 길’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냥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 앞에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이 빨리 음식을 가져온 것을 의아해하자, 야곱은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에게 바른 길을 허락하셔서 짐승을 잡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는 마땅히 지켜야 할 선을 훨씬 넘어선, 무서운 죄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거나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장자의 권한을 차지할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에 대해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삭의 문제는 분별력에 있었고, 에서의 문제는 땅의 것에 마음을 썼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야곱의 문제의 중심은 그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가 아니라, 자신이 계획한 일이 잘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순조롭게 풀리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하나님이 가장 알맞고 옳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이삭을 속일 수 있었습니다.
사건이 아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
우리도 종종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잘 맞아떨어질 때,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섭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보다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맞는 일인지 의심이 되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의 연속인 삶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조금씩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져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원한 뜻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을 쉽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바라는 바와 기가 막히게 일치할 때도 있고, 그것도 물론 하나님의 섭리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과 섭리의 목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달픈 인생 속에서 살게 하시는 목적은 우리가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겨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했던 수많은 수고와 헌신, 구제와 선교, 사랑과 인내 속에서 만약 그 행위만 남는다면, 그것에는 우리의 이름만 남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통해 그 일들을 이루시게 하시는 예수님만 남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을 우리의 인생 속에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야곱에게 순조로운 길은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 가장 순조로운 길은 야곱이 그의 인생 속에서 야곱, 즉 이스라엘로 성장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야곱의 장자권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고 탄식하시는 것도 바로 야곱 자신 때문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요셉이 요셉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알았지만, 하나님은 몰랐던 야곱
야곱은 장자권을 열망했던 사람입니다. 장자권을 귀하게 여긴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구원을 열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장자권을 주시는 것일까? 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약속은 알았지만, 약속하신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믿었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며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따르는 이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 곧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고, 필요할 때 언제든 그 약속의 말씀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같은 말씀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격언처럼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알고 있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모든 일을 하시며,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하시고 우리를 혼자 두지 못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안타까워하시고 탄식하시는지, 왜 지금도 기도하시고 눈물로 우리를 키우고 보호하시는지 그 마음을 정말 아십니까? 혹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약속만을 되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의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여정
놀랍게도 야곱은 이와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창세기 27장에는 '아버지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정작 '자신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다음 장인 창세기 28장 20절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이 서원을 드린 곳은 벧엘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아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렇게 해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거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의 모습에 기특하게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야곱 때문에 마음 아파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드디어 야곱이 자신의 인생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 알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버지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을 처음으로 고백하며 그분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그 이후 야곱의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의 하나님'의 길을 걷게 하시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는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당신의 모든 것을 던지신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그의 거짓과 죄를 위해 죽음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하실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하나님과 자신이 함께 걷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죄보다 강하다
야곱은 앞으로도 많은 속임수와 아픔을 겪고, 수많은 손해를 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끝까지 얕은 꾀를 의지하려 하고, 자신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배반하고 시험하는 야곱에게조차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지 똑똑히 알게 되고, 마침내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야곱에게만 손을 내미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손을 내미십니다. '나의 하나님'의 길, '내 아버지'의 길을 나와 함께 걷자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혼과 인생을 위해 지금도 탄식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하고 안타까워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고, 그 길을 우리와 함께 걷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눈앞에 작은 이익이 생기면 하나님보다 내 이익만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듣기는 했지만, 내 이익 앞에 마음을 빼앗겨 욕심을 부리고, 서로 미워하며 잘난 체하느라 어쩔 줄 모르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기는 싸움
우리는 죄라는 폭탄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만큼 무서운 것임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인간이니까 약하니까'라며 죄를 가볍게 여기는 우리를 위해, 그 폭탄을 몸으로 막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죄가 막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끈질긴 이기심, 탐욕, 시기, 미움조차도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멈추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잘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여전히 죄 속에 살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약속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 모두 실패했고, 이후에도 죄인의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죄와 사탄도 하나님의 사랑을 막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죄 따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죄에게만 핑계를 대야 합니까? 왜 죄 따위에게 져야 합니까? 우리는 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그 사랑이 죄를 이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죄를 멈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와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론 지는 것 같고, 흔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실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나의 구주이시며, 그는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말할 수 있는 바로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따위에게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의 승리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죄의 종일 때에 어떤 열매를 맺었더니 그 마지막이 무엇이었더냐? 사망이 아니었더냐? 저주가 아니었더냐?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함을 입고 성도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영생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므로, 우리는 질 수가 없습니다. 이 경기에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중간에 시합이 끝난다면 우리가 지겠지만, 시간은 우리의 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이겼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싸움을 걸면 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한, 사탄이 지쳐 포기할 때까지 싸울 수 있습니다. 죄가 가져오는 죽음과 저주가 아무리 무섭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삶 속에서 싸울 수 있는 죄로부터 도망치고 피하려만 합니까? 왜 핑계를 찾습니까? 진정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핑계를 대거나 피하지 말고 맞서십시오. 맞서는 것만큼 우리의 것이 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졌기에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약하고 죄와 싸워 이기는 것이 쉽지 않더라도, 조심스럽게 하나씩 시도해 봅시다. 실패하더라도 다시 해 봅시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우리는 멈출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 때문에 우리가 수그러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의 길, 영생의 길
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 바로 '나의 하나님'의 길이었기 때문에, 야곱은 이제 말할 수 없는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길은 결코 쉽거나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의 길은 우리를 진정으로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와 제가 기대해도 좋은 길입니다.
주님께서 야곱의 손을 붙잡으셨듯, 우리의 손을 붙잡고 함께 이 길을 걷자고 하십니다. 매일 돈을 버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는 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시간을 낭비하는 길이 아니라 죄를 흘려보내는 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매일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매일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길을 가자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멋진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순간마다 우리의 복이 되고, 그 복이 쌓이는 길입니다. 이 길을 피하고 뒤돌아서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길을 가면 갈수록 죽음이 아니라 영생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약해질수록 육신의 약함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생을 함께 가자고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나의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기도합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우리에게 주님과 함께 걸어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옵소서. 주와 함께 죽음의 길을, 주와 함께 부활의 길을, 주와 함께 눈물의 길을, 주와 함께 웃음의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주님,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마음이 어떠신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로 인해 어떠한 아픔과 눈물을 흘리셨는지 조금이라도 알기 원합니다.
주의 십자가 깊이가 어떠한지 알기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이 하루하루의 인생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오 주님, 알기 원합니다. 오 주여, 저희에게 가르치시고 주의 긍휼과 자비를 알게 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감격하며 기뻐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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