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7장 6절로부터 13절 까지 입니다.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가 내 형 에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님을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내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내게 명하는 대로 염소 때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내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내가 그것을 내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내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아멘.
장자권 갈등으로 인한 가정의 위기
창세기 27장을 보면, 21장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요 인물, 즉 이삭, 야곱, 리브가, 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입니다. 비록 이들 중 세 명이 우리가 아는 신앙의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제는 바로 장자의 명분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유산 싸움으로 인해 화목했던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장자권이라는 문제가 던져지자, 야곱, 에서, 이삭, 리브가 모두가 그 일로 인해 가정이 완전히 뒤틀리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리브가의 지혜와 결단, 그리고 그 방향성
원래 리브가는 아리따울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만났을 때, 그에게뿐만 아니라 그의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길어다 주었습니다. 사람에게는 한 잔이면 충분하지만, 낙타는 엄청난 물을 마십니다. 이는 그녀가 매우 사려 깊고, 부지런했으며, 나그네를 섬기는 데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또한, 엘리에셀이 이삭에게 빨리 가자고 했을 때, 아무도 없는 낯선 곳으로 오직 결혼할 남편과 그 가정을 믿고 따라나서려 했던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지혜롭고, 용기 있고, 결단력이 있다는 것은 신붓감으로서 정말 훌륭한 요건이었죠.
야곱을 위한 리브가의 계획
그런데 이러한 리브가의 결단력이 둘째 아들 야곱에게도 발휘되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장자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직접 속이는 일을 했지만, 모든 계획을 세우고 뒤에서 일을 시작한 사람은 바로 리브가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삭과 에서 사이에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잘 알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려 했다는 사실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세요. 그는 열두 아들을 모두 불러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에서에게만 모든 것을 주려 했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에서인 척 들어가 축복을 전부 받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 야곱의 몫을 분명히 남겨두었어야 함에도 이삭과 에서는 이미 비밀스러운 계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러한 상황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기에 야곱과 함께 오늘 본문의 일들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야곱이 에서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장자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리브가의 문제 제기는 사실상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 했고, 이삭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정당하게 반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의 그릇된 판단과 가족의 비극
이삭은 이 모든 문제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셨음에도, 이삭은 끊임없이 장자인 에서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려 했습니다. 이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가져다주어 자신의 마음을 만족하게 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던 거죠.
그 결과는 심각했습니다. 단순히 집안의 문제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뜻을 더 우선시했습니다. 이는 이삭뿐만 아니라 모든 족장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죄악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보다 앞서는 것이니까요.
올바른 의도, 잘못된 방법: 리브가의 비극
우리 신앙인들도 익히 아는 내용입니다. 우선순위는 분명히 하나님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우리여야 합니다. 이삭이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우리보다 신앙심이 부족해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만족하고 원했던 것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없어야 했겠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했던 리브가와 야곱이 결국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고 가정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겉보기에는 올바른 방향처럼 보였던 그들의 방법 때문에 말입니다.
깨어진 70년 평화와 리브가의 고통
리브가는 이삭의 잘못된 결정을 바로잡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결단력 있게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이삭 가정이 누렸던 70년간의 평화는 완전히 깨져버립니다. 야곱이 이 사건으로 에서를 피해 도망가는 나이가 대략 70세 정도 됩니다. 비록 이삭과 리브가가 20년간 자녀를 낳지 못해 노심초사했던 시간이 있었지만, 야곱이 태어난 이후 약 70년 동안 이어졌던 이삭 가정의 긴 평화는 이때 무너졌습니다.
형은 동생을 죽이려 했고, 동생은 도망쳐 20년을 방랑하게 됩니다. 며칠이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려 20년이 걸린 거죠. 리브가에게도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다시는 야곱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했던 리브가의 행동이 도대체 왜 이런 결과를 초래했을까요? 무엇이 문제였는지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고, 우리 역시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과 유혹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할 때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 합니다.
첫 번째 문제: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을 앞세우는 것
리브가의 문제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원하는 것을 앞세웠던 것입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이 원하는 것에 꿰맞추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원래는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정해져야 하지만, 리브가는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이는 얼핏 납득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너무나 자주 빠지는 과오입니다.
리브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기를 원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때에 그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확증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본래는 그 반대가 되어야 했지만, 리브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내 욕망에 맞추는 위험
우리 또한 흔히 이런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특히 말씀을 읽을 때 자주 범하기 쉬운 그릇된 습관이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피곤하며 힘들 때, 우리는 어떤 성경 구절을 가장 좋아할까요? 아마 "내가 너와 항상 함께하리라"와 같은 위로의 말씀을 듣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회개하라"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지금 이렇게 힘든데 무슨 회개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너무나 듣고 싶고 마음에 딱 맞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을 앞두고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사업을 시작하며 "지금은 작은 가게지만 나중엔 반드시 애플이나 삼성 같은 큰 기업이 되리라"는 마음을 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나중을 창대하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말로 표현하기는 꺼림칙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신자인데 어떻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받겠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죠. 그런데 마침 성경에 내 마음에 꼭 들어맞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지금 내 욕망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을 애써 외면하거나 감추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참된 동행의 의미
여러분이 그토록 좋아하는 마태복음 28장의 말씀을 떠올려 보세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그러나 그 말씀 이전에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나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의 전체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앞의 내용은 읽으면 마음이 찔립니다. '내가 언제 전도를 했던가? 언제 남에게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했던가? 아니, 심지어 내가 그 말씀을 지키려고 열심히 살았던가?' 이런 생각에 앞부분은 우리 모두에게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결국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라는 부분뿐이죠.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면 매일 "잘한다, 너희들 너무나 착하다"라고 하실까요? 아니면, "'너, 오늘도 아니야. 이렇게 살면 안 돼"라고 하실까요?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는 삶이 여러분 생각처럼 위로의 연속일 것 같습니까? 위로도 물론 있겠지만, 끊임없는 주님의 격려와 죄를 지적하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힘을 주시는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니라"는 말은 우리에게 큰 위로이면서 동시에 놀라워해야 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제부터 여러분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하나하나를 지적하고 간섭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때 마냥 위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로 그 말씀을 위로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사정과 마음에 따라 자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삶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인생이 부딪혀서, 여러분의 인생 중에 말씀과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잘려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바른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부분에 부딪혔을 때, "주여, 제가 회개합니다"라는 말이 나와야 하며, "주님, 그것이 옳습니다. 제가 아니라 주님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그 옳은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제가 중고등학생 때를 생각해보면, 시험 보기 전에는 항상 기도했습니다. "공부하지 않은 것까지도 기억나게 해주시고 그래서 답을 잘 쓰게 해달라"고요. 어떠세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망한 겁니다. 시험을 칠 때 공부하지 않은 것은 답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정신을 차리고 실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든 하나님의 능력이든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입맛에 맞게 만드는 데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말씀이 우리 앞에 있거나 우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래에 있었던 거죠.
이단의 유혹과 참된 위로
절실할수록 자꾸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너무 필요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자꾸 여러분 아래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단에게 자주 속을까요? 왜 이단들이 그토록 흥성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되고 싶은 것들을 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마치 은혜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뇌되었거나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 위로와 함께 그 위로의 진정한 원인을 항상 알려줍니다. 여러분은 그저 좋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며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우리를 그 나라의 영광 속에 살게 하시기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깨지고 부서지고, 갖고 있던 욕심이 무너지고, 생각했던 인생 목표들이 흔들리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내 앞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수록 우리 인생이 진정한 기쁨 속에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말씀의 바른 이해
우리가 문제 가운데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응답으로 받았다고 말할 때도, 반드시 여러분이 듣고 싶던 말씀을 찾은 것이 아니라 드디어 나의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르게 세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좋은 말씀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라는 말씀이 들립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어떤 사람이며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며, 나의 죄가 어떤 것이며 주님의 은혜는 무엇인가. 이것이 먼저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그 문제를 바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내 욕심과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이 문제를 나에게 주셨으며 이것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나를 위한 문제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응답이 되었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구절들을 알고 있다가 기도하면서 그 구절이 생각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신다고 얘기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리브가의 첫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을 끼워 맞추려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성경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들을 수 없게 만듭니다.
두 번째 문제: 죄책감의 물타기
리브가가 가졌던 두 번째 문제는 바로 죄책감의 물타기입니다. 리브가와 야곱 모두 자신들의 죄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을 속이다가는 저주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만큼,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지하고 있었죠. 리브가는 더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야곱이 저주를 받게 된다면 그 저주는 자신이 감당할 테니 야곱은 꽃길만 가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남의 죄로 내 죄를 정당화하다
하지만 리브가와 야곱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이삭과 에서가 먼저 꼼수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삭의 모든 유산을 에서에게 몰아주려는 부당한 방법을 공모했습니다. 이처럼 내가 비판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사람의 죄가 내 눈앞에 너무나 선명하게 보일 때, 우리는 애석하게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마치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처럼, 의도하진 않지만 결국 그렇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관계 속 죄의 물타기
우리는 흔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말하며, 때로는 큰소리를 내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한 친구들이 신랑에게 "아내와 기싸움에서 절대로 밀리면 안 된다"고 조언하는 경우가 많죠. 마치 부부 관계를 경쟁처럼 만들며,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가 결혼의 최우선 과제인 양 조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친구들이 불러내서 놀 때 아내에게 전화가 오면, "지금 들어가면 평생 잡혀 산다"는 말도 안 되는 조언으로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실패했다고 새로운 신랑까지 흔들어서 죄를 혼자 짓지 않는 것처럼 만듭니다.
이런 행동들이 바로 자신이 짓고 있는 죄를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죄를 보면서 상쇄시키려는, 죄의 물타기에 해당합니다. 이삭과 에서도 꼼수를 부렸으니 자신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도 잘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너도 그랬지 않느냐'며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는 거죠. 자신의 죄를 스스로 회개하면 될 일인데,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춰내 자신의 죄를 희석시키려 합니다.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의 진정한 의미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죄 없는 자는 돌로 치라"는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죄인인데 우리가 조금 죄를 짓는 게 뭐 그리 대수겠느냐'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너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보아라. 나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찾으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를 남의 죄로 물타기하지 말고, 내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회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부부 관계, 자녀와 부모의 관계, 성도 간에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죄를 알았으면 진심으로 고백하고 회개하면 될 것을, 굳이 다른 사람의 죄를 끌어와 나의 죄를 물타기하려 합니다. 결국 서로 회개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리브가가 범했던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이며, 우리가 자주 빠지는 함정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문제: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
세 번째 문제는 앞서 언급한 접근 방식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결과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앞세웠기에, 그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 또한 자기 방식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다면, 그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을 고려했겠지만, 그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리브가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즉 야곱을 장자로 만들고 있다고 믿었기에, 다른 모든 면에서는 자신이 죄를 짓더라도 죄가 아니라고 여기려 했습니다. 오직 목적만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성장 지상주의가 낳은 교회 문제
목표가 분명하다는 것이 때로는 좋은 일이지만,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 신앙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목표만을 바라보기 때문이죠.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하던 시기에 우리는 모두 성장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들어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리라는 기대를 품으며 부흥만을 추구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지금도 '참된 신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교회로 부르고, 그들을 신자로 삼아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기에 우리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무조건 사람들을 교회에 앉히기만 하면 모두가 교인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신자가 아닌 것도 모른 채 그저 교회에 출석했고, 자신도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신자로 착각하는 상상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목적이 낳은 리더십 부재
자신이 교인이며 참 신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를 세웠고, 그렇게 세워진 지도자들은 결국 마땅히 감당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목사가 된 것입니다. 제가 특정한 목회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음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생긴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는 '목적'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길을 가는 동안 목적만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가는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아닌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참 신자는 무엇이며, 믿음이 어떤 것이고, 신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서로 전하고 나누며 감동하고 기뻐하며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모습, 즉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참모습이 정말 많이 약해졌습니다.
우리는 점점 각개전투에 능해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교회에서 누구도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존경할 만하고 따라갈 만한 지도자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결국 내 신앙은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많은 분들이 안타깝게도 '유튜버 신앙'을 갖게 되는 거죠. 교회에서 함께 부대끼며 상처를 이겨내고, 자신의 약함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아름다운 훈련의 장소를 벗어나, 책으로 제자 훈련을 하고, 교회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하나님을 섬기려 합니다. 결국 모두가 자신을 태운 하얀 재만 남아 주님을 찬양하고 싶어도 바람에 날리는 재처럼 마음이 흩어져 속상해하고 있는 겁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고,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부담과 고통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세상의 두려움 vs 하나님의 경외
성경 속 예수를 믿던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심지어 핍박을 받고 모든 것을 빼앗기며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라, 너희는 기뻐하라"고 말하며 그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때와 지금, 예수님이 변했습니까? 성령 하나님이 다른 분입니까?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가 다른 분입니까? 여러분과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리브가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는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방법론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그 방법만을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문제인데, 우리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 해보고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것들만을 자꾸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들은 방법이 전부가 아니며, 그것들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진정한 문제의 근원을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사실 이삭의 뜻을 거스른 부인이었습니다. 그녀가 만약 이삭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었다면, 이 문제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만족을 추구했습니다.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경외함'
이와 비슷한 예가 출애굽기 1장에 나옵니다. 바로가 히브리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성경은 잘 알려지지 않은 두 산파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이들은 출애굽기 이외의 다른 성경에서는 다시 등장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이 두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셨습니다. 이 산파들은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죽이라는 명령에, 그들은 "히브리 여인들은 애굽 여인과는 달라서 우리가 갔을 때는 이미 아이를 다 낳아서 아이가 벌써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늦게 도착했다는 의미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꼼수'를 부린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모든 꼼수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 여인들이 꼼수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 모든 것 속에서 선한 결과를 내게 하신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바로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여러분은 이 너무나 간단한 원리를 다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세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이렇게 살면 망한다, 이렇게 처신하면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랑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너희는 서로 정말 사랑하여 이 세상이 놀라는 사람들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십니까? 성경은 이 부분에 있어서 너무나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이 걱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고 움츠러들게 하고, '이렇게 해도 될까'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이것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할 수 없어'라고 만드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정말 두려워하며, 그것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멈춰서는 것이 맞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며 열심을 다하여 사랑하고 너의 마음을 다하여 성도와 자매를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이 여러분이 두려워해야 할 말씀입니까? 더 이상 무엇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더 두려워하고, 우리가 겪는 억울한 처지에 놓이는 것을 더 두려워하며, 우리가 가진 이 상황과 환경을 더 두려워하고, 그리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참된 신자의 삶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를 대충 섬겨도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네가 마음에 지치고 힘들고 피곤하거든 그래, 놀고 쉬어라"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네가 시간이 없고 바쁘다면 그래, 그렇다면 너는 그냥 놀고먹어도 된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나는 바쁘기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한다. 내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 주님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입니까?
네 번째 문제: 저주를 대신 받겠다는 잘못된 태도
마지막 네 번째 문제는 리브가가 야곱에게 했던 말에서 드러납니다. "아들아, 만약 이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까 너는 너의 꽃길을 가도록 해라." 어머니로서는 참 감동적인 대사입니다. 하지만 이 대사가 세상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피하고 가장 두려워해야 할 말 중 하나입니다. 특히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대사입니다.
자녀를 향한 잘못된 사랑의 결과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불구덩이로 함께 들어가는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걱정하지 마라, 모든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까 너는 괜찮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일이 남의 일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내 아이가 비록 여러 학원에 다니고 최선을 다해 가르치며 기회를 주기 위해 열심히 하지만, 나는 다른 극성 부모들처럼 하는 건 아니지. 나는 저들처럼 아이를 데리고 지옥으로 들어갈 마음은 전혀 없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바로 극성 부모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그분이 바로 그 정도를 하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회복
그것 또한 경종을 울릴 만한 일이지만, 사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더 넓게 본다면, 이 일로 인해 야곱은 리브가가 생각한 것처럼 꽃길을 간 것이 아니라 20년을 방황하게 됩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처럼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외삼촌에게 긴 시간 동안 속임을 당하며 살게 됩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다시 보지 못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에서와 이삭은 말할 것도 없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형벌로 끝내신 것일까요? 여러분과 저는 그것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열방의 어머니가 되었고, 이삭은 약속의 후손을 낳은 아버지였습니다. 야곱은 12지파를 통해 이 땅에 이스라엘을 세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 방식대로 했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며,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두 가지가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보기에는 야곱, 이삭, 리브가 모두에게 분명히 저주 같은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만 더 읽어보면 이것이 저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죄 용서와 죄로부터의 회복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시는 일이 여러분과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내 죄를 깨닫게 하셨다는 것이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와 야곱의 죄를 물론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서 나아갔을 때, 야곱 같은 경우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무엇을 주인으로 삼았는지를 알게 된 사건들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깨달았고,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말은 여러분과 제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모든 것이 백신을 맞은 것처럼 깨끗하게 되어 아무것도 없어진다는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과 제가 생각하는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면에서 백지와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들어 여러분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 죄의 용서는 분명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 속에는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들어 가신다는 의미도 함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성경에서는 두 가지로 표현하지만, 저는 이것을 죄로부터의 회복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은 죄의 용서를 경험했지만, 이제 죄로부터의 회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간단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며, 그가 죄로 인해 무너지고 뒤틀렸으며 마음이 흔들렸던 그 상황을 그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그를 끊임없이 인도하며 붙들어 가시는 일. 그것은 바로 그가 죄로부터 받은 수많은 깊은 아픔과 상처를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야곱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우리의 인생이기도 합니다.
죄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회복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사실 죄의 두려움과 무서움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죠. 그래서 여러분이 죄로부터 받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도 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신 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눈과 같이 희게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삶 속에, 기억 속에, 살아온 인생 속에 죄로 인해 찢기고 상처 받으며 흔들렸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징계를 통한 자녀됨의 완성
저는 히브리서가 이 회복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봅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부터 7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면한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여러분, 여러분을 징계하신다고 하죠? 여기서 '징계'라는 말은 '파이디온'이라는 '어린아이'를 뜻하는 단어와 같은 어원입니다. 즉, 자신의 자녀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여러분의 일상과 삶 속에, 여러분의 과거 속에서 일그러지고 무너진 것들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회복시키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과거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심으로 그 모든 것을 선하게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연단을 통한 의와 평강의 열매
히브리서 12장 11절부터 12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뭐라고요?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이것이 바로 회복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 우리가 지은 죄가 있을 때, 여러분 생각에는 '나는 다 용서받았으니까 더 이상 이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고 그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진정한 기쁨의 이유는 그 죄로 인해 우리의 삶에 깊이 새겨졌던 모든 아픔과 일그러짐, 그리고 절뚝거림조차도 고침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용서의 내용입니다.
참된 회개의 의미와 삶의 변화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몇 해 전 화제가 되었던 영화 '밀양'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이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했으니까 나는 이제 괜찮다, 당신의 죄도 용서받았냐?'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지은 죄가 모두 해결된 것처럼 여기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 일로 인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고, 그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할 길이 어떤가를 알며, 자신이 어떻게 고침을 받아야 하고, 무엇을 회개해야 하며, 어떻게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니까 내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흐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 변화도 없고, 삶에 일그러진 것이 바로 세워지는 것도 없으며, 절뚝거리는 발이 다시 뛰는 것도 없고, 무너진 인생이 다시 세워지는 것도 없는데, 어찌 그것이 용서의 전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용서에는 반드시 우리가 아는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고, 죄로부터의 회복이 우리 인생 속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통해 배우는 회복의 역사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오히려 이 일을 통해 리브가와 야곱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그들의 죄가 어떤 것이었으며, 자신이 어떻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파괴했었고,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아픔이 있었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서의 인생을 상처 주었고, 야곱 자신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죄의 용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저 한마디로 '그래, 내가 너는 이제 아무 죄도 없는 걸로 여겨 줄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자로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채찍을 두려워하지 않고 꾸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며, 한없이 격려하고 위로하며 계속해서 회초리를 들고 여러분을 그 자리에 서게 하기까지 여러분과 함께하실 것이며, 여러분을 그 자리에 세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이며, 야곱이 겪었던 인생이며,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멈추지 않으실 것이며, 그 회복의 사명을 우리가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회복하십니다. 이것이 죄의 용서의 열매들입니다.
회복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
여러분,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죄가 씻겨 눈과 같이 희게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행하고, 이웃에게 서로에게 행하십시오. 절대로 대충 넘어가지 마시고, 회복하고 사랑하며 위로하십시오. 악에게 지지 마십시오. '왜 또 그러냐고, 결국은 똑같냐고' 그렇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내가 옛날에 다 회개하고 용서받았는데 지금 그 이야기를 또 꺼내어 문제를 삼냐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그렇게 상처를 입은 겁니다. 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 아팠던 겁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속상해하고 짜증 내지 말고, 주님께서 나를 다시 용서하시고 나를 회복하시는 그 일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 주님께서 나를 만들어 가시는 그 인생을 여러분이 감사와 기쁨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희생과 꽃길
여러분, 리브가는 능력도 없으면서 '네가 받을 저주를 내가 대신 받겠다, 너는 꽃길을 걸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자신도 죄를 지으며 죄 속에 있는 자가 누구의 죄를 감당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2000년 후에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으며 죄의 모양조차 없던 한 분께서 여러분 모두의 죄악, 여러분과 제가 받아야 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담당할 테니까, 내가 너의 어그러진 것을 고쳐줄 테니까, 너의 인생과 함께해서 너를 회복시켜 줄 테니까 이 꽃길을 걸으라"고 하신 분이 오셨습니다. 이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은혜 속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오르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저희가 담대하게 외칩니다. 주여, 주님의 손을 멈추지 마시며 저희를 주의 형상으로 빚어 주옵소서.
그 길을 걸어가는 기쁨을 알게 하시며 감사하게 하시고, 주님, 그 길을 걸어가는 영광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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