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2730절로부터 35 까지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아멘.

 

창세기 27장의 인물들: 복잡한 관계 진실 찾기

지난 시간, 우리는 창세기 27장이 담고 있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장에는 선한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 에서, 리브가, 야곱, 이 네 명의 주요 인물(혹은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완벽한 모습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그들이 얽혀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때로 어디까지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호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거짓말조차 하나님의 말씀 속에 기록되어 있기에,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복잡한 창세기 27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의 도움이 필수적입니다. 과연 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삭의 문제: 자기 만족이 우선시될 때

지난 설교에서 우리는 이삭이 자신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이삭이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먹고 그를 사랑했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단순히 고기 한 조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에게 그는 모든 것을 주려 하였습니다. 그 정도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보다 위에 있을 정도였습니다. 자신의 만족을 최우선에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이삭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에서의 삶과 장자의 명분 경시: 세속적인 욕망

오늘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에서입니다. 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었죠. 온몸에 털이 많고 붉은색을 띠어, 훗날 '붉다'는 의미의 에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에서'라는 이름 자체의 어원은 명확치 않으나, 분명 그의 특징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이 에서가 자라면서 오늘날의 '상남자' 같은 모습으로 성장합니다. 사냥을 나가 짐승을 잡아 아버지에게 요리해 드리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가 매우 외향적인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붉은 얼굴의 관우나 털이 많고 거친 장비와 같은 인물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장비의 외모 묘사는 후대 소설가들의 극화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에서는 이처럼 강렬한 인상을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제가 에서의 인상을 강렬하게 묘사하는 이유는, 그가 집안을 이끌어 갈 장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서 70세가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야곱과는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에서가 더 장자다운 모습이었죠.

 

그러나 에서는 자신이 가진 장자의 권리를 붉은 죽 한 그릇에 팔아버립니다. 이는 단순히 배고픔 때문에 저지른 순간적인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사건을 통해 이를 뒷받침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해 먼 하란까지 종을 보냈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장자의 권한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에서는 부모의 의견을 듣고 신중하게 배우자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결혼은 부모에게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이는 에서가 장자의 권리에 큰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삭이 사소한 만족에 매여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면, 에서는 중요한 것을 잊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12장에서 본 경고: 화평과 거룩함의 중요성

이제 신약 성경 히브리서 12장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경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마음에 새기기 위해 암송했던 14절부터 함께 보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아멘.

 

이 말씀이 나오는데, 여러분 이제 개역개정이 새로 나오면서 옛날에는 없었던 내용을 성경에 많이 기록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락마다 그 주제를 (항상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잡아준 것이죠. 좋은 성경을 가지신 분들은 그 글씨가 아마 여러분 성경에 있을 것입니다. 14절 바로 위에 그 단락의 주제에 뭐라고 쓰여 있나요?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라고 말이죠. 14절부터 그것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없으신 분들은 성경을 새로 사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경고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를 설명해 드리면, 11장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믿음장입니다. 12장에 들어오면, "너희들이 이 믿음의 선조들이 무엇을 바라보았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보고 그 도성을 바라보았으며, 믿음으로 살았다"라고 합니다. 그 바라보는 믿음의 진정한 대상이 누구냐? 믿음의 창조주요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처럼 그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이 곧 이 11장 믿음장의 사실상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징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희가 징계 받을 때 낙심하지 마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다." 그 말이 나온다면, 그 반대로 이번에는 경고가 나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러한 경고가 굉장히 많습니다. "너희가 성령의 빛을 맛보고도 타락한다면 너희는 다시는 회개케 할 수가 없다"는 매우 무서운 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은 과연 누가 먼저 읽습니까? 신자입니까, 불신자입니까? 그렇습니다, 믿는 자를 향해서 쓴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여러분을 향해 "당신은 배교자다, 당신은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 한 번만 실수하면 당신은 끝이다"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요? "그러므로 너희가 이렇게 살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살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다시 한번 그 구조를 보면, "이것이 없으면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성경 읽어라, 기도해라, 예배에 빠지지 마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사도 바울이든 혹은 히브리서 기자든 모든 사도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진짜 기초 중에 기초라 이야기를 안 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것들이 없이는 이것을 이해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안 한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 현재는 그런 이야기보다는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너희가 서로 화평하지 않으면,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으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화평과 거룩함의 의미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모든 사람과 그저 잘 지내라'는 의미의 화평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화평하게 하셨고,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화목 제물은 단순히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 특히 에베소서에서는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다는 것을 중요하게 이야기합니다.

 

당시 이방인과 이스라엘은 동해와 서해처럼 멀리 떨어진 존재였습니다. 이들은 함께 앉아 식사할 수도 없었죠. 정통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방인이 지나간 곳의 과일도 사지 않았습니다. 파리가 이방인의 가게에 앉았다가 유대인의 가게에 앉을까 봐 가까운 곳에 있는 가게에서는 아예 물건을 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저희 서 권사님과 장로님이 과거 팜스프링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호텔을 운영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이 되면 모든 불을 켜놓고 가스도 켜놓아야 했습니다. 그날은 어떤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엘리베이터도 미리 다 준비해 놓아야 했습니다. 이 정도로 정통 유대인들의 규율은 엄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이방인과의 접촉이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둘의 막힌 담을 허무셨다고 합니다. 제가 왜 이 부분을 강조할까요? 우리 신자들끼리의 담은, 사실 담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끼리의 담은 말도 안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경은 강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이것이 없다면, 너희가 이것을 전혀 추구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가끔 정말 새로운 담이 생긴 것처럼 속상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진짜 신자인가 아닌가'조차 흔들릴 정도로 힘들 때가 있죠. 그러나 우리가 지금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위해 죽으셨으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는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화평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동시에 거룩함을 추구하라고 강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쓴 뿌리

그것만이 아니라, 그다음에는 여러분이 잘 아는 매우 유명한 구절로 넘어갑니다. 15절을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놀랍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매우 많이 이야기하고, 찬양에도 은혜 찬양이 많죠. 우리는 은혜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 어떤 배경이냐면, '너희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불릴 수 없다'는 경고의 구절 속에 무엇을 중요하게 이야기하냐면,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형인데,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면"이라는 뜻이죠. "너희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지 않는다면,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매우 강력하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은 이렇지만 내일은 또 주님의 은혜로 살겠지", "오늘은 이렇게 지쳤지만 또 내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또 일어설 수 있겠지" 정도로 생각하거나, "그래 맞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거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것이 여러분의 죽고 사는 일처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으면 무엇으로 살겠습니까? 자기를 의지하여 살게 됩니다. 내 힘으로 살 수밖에 없죠.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 빼놓고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가진 자원, 내 힘, 내 능력밖에 없잖아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인생을 책임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겉으로는 매우 당당하고 멋있는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만약 그것이 멋있고 당당하기만 했다면 세상에 그 많은 드라마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드라마 내용은 다 그런 것이죠. 자기를 찾아가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실패하고 거기서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하는 일들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항상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는데, 인류의 역사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가 결정하는 대로 살았을 때 우리가 겪은 모든 전쟁과 지금도 겪고 있는 전쟁의 진짜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하고 그 안에서 서로를 죽이는 일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인간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자주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나마 좋은 나라에서, 풍성한 나라에서 (좋은 나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저 ", 은혜가 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주님,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저는 죽습니다"라는 그 이해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그 깊이가 어떤지를 더 깨닫기 위해서, ", 내가 내 인생을 오늘 아침에 오늘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고 하루를 이렇게 살아야겠구나"라고 하는 인생이 얼마나 가벼운가를 아실 겁니다.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인생을 우리는 오늘 아침에도 계획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한 순간도 사실 아무도 자신할 수 없으며 의미를 찾을 수 없는데,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의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은혜 없이 산다는 것을 넌 정말로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야기하죠.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쓴 뿌리에 대해 언급합니다. '쓴 뿌리'는 많이 오해된 구절 중 하나인데, 저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쓴 뿌리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십시오, 혹시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습니까?"라는 말도 하고, "여러분의 과거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 혹은 주위의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얼마나 쓴 뿌리로 남아 있어서 그것들을 없애지 않으면 여러분은 올바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라는 말도 듣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나와 단절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여러분이 겪었던 어려운 일들, 여러분 마음에 있던 상처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할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소위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는 많은 것들이 여러분 인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쓴 뿌리'라는 것은 그 큰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여기서 '쓴 뿌리'는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구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릴 테니 무엇을 말하는지 한번 보세요.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 하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다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한다. 너희가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기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독초와 쑥의 뿌리, 즉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안에 우상이 생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과 관련해서 여러분이 흔히 알고 있는 쓴 뿌리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쓴 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누구나 과거가 있습니다. 아픔이 있죠. 저도 어떤 때는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과거의 일이 기억나 등에서 식은땀이 날 때도 있습니다. 너무 창피하고 너무 부끄러운 일들이 많으니까요.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로 그런 기억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은 그래서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고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신자는 사실 거기서 끝일 수 없습니다. 신자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과거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런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자식이나 부모로부터 이러한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에, 사는 동안 이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과거에 의해서, 그리고 여러분이 받은 상처에 의해서 여러분을 정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을 정의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한 자리에 함께 있으며, 주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십니다. 여러분의 상처조차 이길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은 과거로 자신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은 승리할 수 있으며, 그것 때문에 이미 승리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일지라도, 그것들이 여러분을 쓰러뜨릴 수 없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과거의 일들이 여전히 여러분의 오늘을 움직이고 있고, 심지어 주님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조차, 여러분의 아픔과 슬픔조차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그 우상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거의 어려움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우상이 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저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에서의 망령됨과 세상적 가치 추구

그리고 세 번째로, 처음 세 가지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에서의 이야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에서의 말과 한 묶음으로 연결됩니다. 여기서는 에서가 어떻게 나오는지 1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여기서 에서에게 쓰인 '망령된 자'라는 표현은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세상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세속적이다'는 의미와도 통합니다.

 

성경, 특히 히브리서는 에서의 문제 중 가장 첫 번째로 그가 장자권을 우습게 여기고 팔아버린 것에 대해 그가 세상을 사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그가 한 번 실수했거나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는 장자라는 단어가 가진 진정한 의미를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장자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장자가 그래서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무엇인가'였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팔았으면서도 이삭이 그에게 축복한다고 했을 때는 그 축복을 받고자 했습니다. 복은 받고 싶은 것이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기 귀찮지만 설마 내가 지옥에 가겠느냐', '당연히 나는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 내가 뭐 그렇게 잘못한 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을 끊임없이 흔들고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굳게 주님 앞에 고백하면서도, 사탄은 여러분을 순간적으로 흔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하게 만들고, '내가 누구인가'를 흔들어 버리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보다 '내가 누구의 자식이고 나는 인간적인 존재이며 그래서 매일 실수하고 실패한다'는 것에 여러분의 눈이 고정되어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인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함정에 너무나 쉽게 빠집니다.

 

장자의 권한은 아브라함의 언약이었고, 아브라함의 약속은 실제로 마지막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질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맏아들이시며, 그가 모든 맏아들 됨을 성취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맏아들이 누려야 할 모든 것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우리도 그를 따라 아들이 되었으며 딸이 되었다'고 말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유업으로 받는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집에 갔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와서 ", 몰랐는데 우리가 옛날에 모르고 산 땅이 갑자기 발견됐는데, 문서가 글쎄 발견됐네? 알고 봤더니 이 땅이 지금 수억 대가 됐다! 우리가 그때는 한 150만 원 주고 산 땅인데 지금 수억 대가 됐다"라는 전화를 받으셨다면, 그 다음 주에 차가 바뀌겠죠. 아마 이사도 가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이 터져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으실 겁니다, 상속하실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그런가 보다. 받을 때는 받겠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풍성함과 여러분이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상속받을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 상속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상속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문서를 줘야 믿지, 말로야 누가 못 해요.' 이런 표정이신데.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장자의 권한을 받는다는 의미인데, 에서는 그 하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무엇을 사랑한 것입니까? 땅의 것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소유한 자요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이것이 성도의 다른 이름인데, 에서는 그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사람으로 땅의 것을 사랑한 자가 된 것입니다.

 

에서의 후회와 회개의 기회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였을까요? 그저 땅의 것을 사랑하면서 '내가 그래도 하나님 나라의 이름이라도 걸어놓을까' 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 마치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성경은 그다음에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림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엄청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한편으로는 "어유, 깜짝이야!" 하고 놀라셨을 테고, 또 한편으로는 "이거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기회조차 주지 않다니"라는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에 나오는 본문이 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말할 때 에서가 "내 복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자, 이삭은 "나는 이미 주었다. 그 복을 야곱에게 주었고, 야곱을 내가 너의 주로 세웠다. 그의 모든 형제인 너 에서를 야곱에게 종으로 주었고, 모든 곡식과 포도주와 내 모든 재산을 그에게 주었다. 너에게 줄 것이 없구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삭의 이 말은 우리가 오늘 마지막에 다룰 이삭의 이야기에 연결되기 때문에 제가 미리 힌트를 드리자면, 사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여러분,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르우벤을 축복했어야 했지요? 장자니까. 르우벤을 축복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아들은 아무것도 못 가져갔던가요? 다른 자식들도 다 복을 못 받았나요? 아니, 이것을 전혀 모르신다는 듯이 저를 보시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다 아실 것이기에 제가 다음으로 넘어가려던 이야기입니다만, 당연히 모든 아들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야곱한테 다 주었기 때문에 너한테 줄 게 없다"라는 것은 사실상 일반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우리가 ', 이삭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게 되는구나'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선 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힌트만 가지고 에서 이야기로 돌아온다면, 에서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냐면 아무런 복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내게도 복을 주십시오!" 하며 소리쳐 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울었습니다. 여러분, 왜 울었을까요? 회개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그가 회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기 우리가 알고 있는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말한 것은 '회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영어 성경의 English Standard Version이나 다른 역본에서도 일반적으로 다소 쉽게 번역되어 버렸는데, 이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사실상 좀 더 잘 번역된 것은 우리가 구하기 어려운 몇몇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직역하는 것이 좋은 번역입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억울해진다는 것이죠. "아니, 어떻게 기회도 안 줘? 기회는 줘야지."

 

그러나 여러분, 에서가 기회를 정말 얻지 못했습니까? 그가 회개할 수 없었나요? 그럴 수 있었습니다.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입을 막아버리고 "넌 절대로 회개 못 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연히 회개할 기회는 있었습니다. 여기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말은 직역하면 "회개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라는 뜻입니다. 회개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가 회개할 곳에서 회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결과 거부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가 회개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졸랐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을 거부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새 번역은 그것을 조금 다르게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 아버지께서 변화, 그 달라지도록 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 "아버지가 변화를, 아버지에게 변화를 주지 못했다"라고 새 번역에서는 그렇게 뒤에 관주를 달아놓았습니다. 하지만 의미는 이제 아실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에서가 자기가 회개할 곳에서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회개할 자리를 찾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회개: 말씀 앞에 서기

, 그렇다면 에서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처음부터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만약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회개의 가장 첫 모습은 자기 죄와 대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 것이죠. 그런데 그는 자신의 죄가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가 장자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그 직분을 그렇게 소홀히 여기지 않았을 텐데, 그는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에서 입장에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사냥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복을 가로채 갔죠. 이때 에서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 내가 장자권을 이해하지 못하고 팔아버려서 이렇게 됐구나"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무엇이 먼저 나왔을까요? "속았다. 이건 누가 잘못이다? 야곱의 잘못이다!"

 

여러분, 그런데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날까요? 에서가 죄와 대면하는 가장 중요한 모습은 자신의 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심도 중요하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새겨주신 법 중 하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가 행한 것과 내 삶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으로 부름받고 장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저 자기 생각에 "장자면 많은 것을 갖는 자, 아버지로부터 두 배를 받는 자"라고만 여긴 것이죠.

 

하지만 아브라함의 언약은 바로 이 장자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부딪히는 것이 없습니다. 무엇에만 부딪힙니까? 내가 받을 복에만 부딪히는 것입니다. 내가 받을 것, 아버지에게서 받을 내 상속분, 내가 받아야 할 그 나귀들, 내가 받아야 할 그 종들, 내가 받아야 할 그 재산들. 그것만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러니 억울할 수밖에 없죠. "내가 받을 건데 왜 네가 가져가느냐, 나를 속인 자 야곱이 몽땅 다 나쁜 것이다"라고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여러분, 신자의 가장 무서운 상황이 언제일까요? 오늘 히브리서를 통해서 그리고 에서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무서운 상황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두지 않고 여러분의 상식이나 여러분의 기준 앞에 자신을 두기 때문에, 여러분이 회개할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회개할 것이 별로 없을까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늘 다툴 때 제일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이러면 속이 뒤집어지죠. 왜일까요?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잘못한 걸로 치자" 이거 아니겠어요? 자기는 정말 잘못을 안 했는데 말입니다. 또 속 뒤집혀지는 것이 어떤 경우입니까? "잘못했다, 그래, 나도 잘못했다, 그런데..."라고 토를 다는 것이죠.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너도 잘못했다. 나만 잘못한 게 아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모든 것을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훌륭하고 똑똑하신 선조들께서 이러한 말을 남기신 것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더라." 핑계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말씀 앞에 서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설명 가능합니다. '나만 잘못한' 인생의 일이 없습니다. "내가 왜 모든 책임을 져야 해? 자식의 문제도 뭐 나만 잘못했어? 남편도 잘못이고 물론 나도 조금 잘못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충분히 우리를 합리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을 때는 다릅니다. "하나님, 살인이라니요, 죽인 적이 없는데요?" "주님께서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너의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욕한 너는 그 형제를 죽인 자라'고 하십니다." 깜짝 놀라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 말씀 앞에 설 때는 절대 여러분이 합리화시키고 타협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말씀 앞에 서십시오. 그 말씀이, 그 십계명이 그대로 계명인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말로 알고 싶으시다면, "아 그래, 누가 이걸 다 지켜? 누가 이걸 다 할 수 있어? 이것도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일인데" 이렇게 하지 마시고 정말로 말씀 앞에 서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 말씀 앞에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길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이삭의 회개

거기서 끝일 수는 없지요.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항상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첫 번째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회피하기 때문에 우리 삶 속에는 회개와 회개의 열매가 너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그렇게 살면서도 회개해야 할 수많은 것들을 대충 넘어가곤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하나님 말씀 앞에 두고 회개하며 돌이켰는지를 볼 때마다 놀라야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타협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 말씀은 이런 뜻일 거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말씀이 말하는 정말 진정한 의미, 그 본연의 의미를 여러분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말씀 앞에 서니 내가 이런 자로구나. , 내가 정말 사랑이 없는 자로구나. 내가 정말 이웃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내가 성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 앞에 서십시오. 여러분,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면이 있겠죠. 여러분 중에 하나님 말씀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번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단순히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다시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하나님의 참된 말씀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겸손히 서지 않으면, 십자가의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는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이삭의 뒤늦은 깨달음과 믿음

여러분, 이것이 바로 에서의 인생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 앞에 있었던 이삭에게서 오히려 더 명확히 드러나는 성경을 통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여러분은 과연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그 말씀 앞에 서는 것을 진정으로 고대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에 얼마나 관심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정말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갈망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이 말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엄청난 의미인지 혹시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이 얼마나 엄청난 의미인지 아셨기에,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실 때 계산을 해 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손해를 볼 수 있고, 자존심이 망가질 수 있습니다. 돈을 잃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경우를 본다면 심지어 배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아무리 협박을 했다고 이렇게 아멘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여기 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당연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왜 예배하는가? 나는 왜 신자라고 말하는가? 나는 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가? 나는 왜 십자가를 보면 눈물이 나는가? 나는 왜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깨닫고 그로 인해 감격하는가?" 왜 그렇습니까? 왜일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모두 압니다. 야곱에게 어떻게 했는지도 모두 알죠. 이삭이 어떻게 하다가 두 아들에게 자기의 복을 주었는지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있으니 제가 이 구절을 읽어 드릴 테니,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다." 이것은 제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어떻게 축복했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원래 이삭이 에서에게 다 주려 하다가 야곱에게 모르고 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바로 인생을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부분은 물론 '믿음으로'라는 말입니다. 이 일은 앞에 '믿음'이 빠지면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삭의 인생을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이삭은 거기서 자기 자식에게 편애했고, 그 때문에 에서에게 모든 것을 주려다가 아들한테 속아 야곱에게 복을 주고 완전히 어안이 벙벙해진 사람이며, 에서에게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으로 그는 믿음의 사람이고, 또 다른 일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에게 주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여러분이 아까 읽었던 이 구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삭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에서가 오자마자 "내가 바로 아들 에서입니다"라고 말하니까 이삭이 무엇이라 합니까? "심히 떨며 놀랐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는 매우 치밀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쉽게 속아 넘어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고, 확실하게 증명했고, 확실하게 하나씩 점검했던 사람입니다. 야곱이 왔을 때 그저 야곱에게만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이 일을 완전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이 모든 것을 이끌어 간 줄 알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결론을 보니 야곱이 복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놀란 것이죠. 그는 떨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에게 항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때야 하나님의 주권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이 무엇이며, 자신이 이것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의 주권자이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심히 떨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래, 에서, 내가 너한테 남아있는 복이라도 줄게"라고 하지 않고, "내가 빈 모든 것이 반드시 야곱에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앞에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주님, 맞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하신다면 이 일의 모든 결과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저는 그 일의 모든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여러분에게 이렇게 설명드린 이유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그러한 인생을 그 순간 단면으로 잘라 본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 속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 학자들은 이것을 이삭의 회개라고 합니다. 그가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인정했을 때, 주님은 그의 인생의 고백들과 그가 살아온 것을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믿음으로 그가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회개와 믿음

그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호소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오늘 힘들고, 피곤하고,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10년 뒤에 오늘을 돌아볼 때 '내가 왜 그랬지' 하며 답답해하는 경우가 왜 없겠습니까? 어쩌면 오늘 하루는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아무리 힘들고, 부끄럽고, 놀랍고, 어렵더라도, 여러분이 만일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십자가를 의지하고 고백한다면, "주님,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를 원합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려 하는지 다시 보게 해 주시고, 주님 회개하오니 주의 뜻을 이루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오늘 여러분의 현실을 견딘다면, 다시 살아나고, 여러분의 눈이 하늘로 돌려지며, 포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훗날 정말 이런 말을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 내가 회개하기 잘했다, 오늘 내가 견뎌내기를 잘했다, 오늘 내가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 오늘 내가 돌이키기를 잘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여러분의 모든 날이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과 저는 이러한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목사 한성윤은 태어나서 정말 많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때로는 잘난 맛에 살고, 또 어떤 때는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기도 했지만, 그러한 중에도 목사가 되겠다고 힘썼고, 목사가 되어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때로는 게으르게, 때로는 꽤 잘, 또 어떤 때는 잘난 척하며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주님, 제 인생이 저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것임'을 매일 고백하며 살았기에 믿음으로 그는 살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했고, 돌이켰으며,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 살았기에 그의 인생은 달랐습니다." 여러분, 제 이름을 넣어 송구하지만, 여러분의 이름이 바로 그 믿음의 전당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을 그저 보내지 마시고 회개하십시오.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따라 사십시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야곱은 그렇게 아버지를 속였지만, 이삭에게는 그 속임을 넘어선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에게 다시 복을 줄 수 없었고, 오히려 에서에게 "너는 너의 형제를 섬기는 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돌이킨 이삭의 마음을 보시고, 그의 입술을 보시고, 그의 삶을 보시고 '믿음으로 그가 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야말로 돌이켜야 할 인생입니다. 저희야말로 회개해야 할 인생입니다. 저희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인생임을 고백하오니, 주님 이제 주의 은혜로 오늘도 살게 하시고, 내일도 주님 앞에 돌이키게 하시며, 앞으로 남은 제 인생의 하루하루, 아니 순간순간마다 주님께로 돌이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 모두가 불릴 수 있도록, 사랑하는 주님, 저희를 붙들어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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