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6 34절부터 27 4절까지 입니다

 

에서가 40세에 족속 브에리의 유딧과 헷족속 엘론의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그런즉 기구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아멘.

 

이삭의 두려움과 하나님의 동행

이삭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나안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는 순종했지만,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가득하여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우물 문제로 인해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큰 부자가 되었음에도 우물을 팔 때마다 빼앗기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것을 부자가 된 순간뿐만 아니라, 적들에게 쫓기며 고통과 슬픔을 겪는 모든 순간에 알려주셨습니다.

 

이삭의 인생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려면 창세기가 기록된 시기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가 기록한 이 책의 독자는 출애굽 여정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에는 출애굽의 상황을 반영하는 언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접하는 ‘혼돈’과 ‘흑암’도 사실은 광야를 표현하는 단어들입니다. 이삭과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교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먹는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

창세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교훈을 찾는 것을 넘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이 책은 분명히 그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이기에 우리 모두에게도 교훈이 되지만, 첫 번째 독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우물이나 물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특히 ‘먹는 이야기’가 중심 소재로 계속 나타납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로 만든 요리를 좋아했고, 심지어 “사랑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별미를 만들어 달라고까지 말합니다. 에서에게 문제가 생긴 것도 야곱이 요리한 팥죽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깊은 이해 없이 읽으면 단순히 음식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이삭 가족의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하던 광야의 언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의 잘못된 선택과 난국의 시작

본문에 따르면, 에서가 40세에 헷 족속의 가나안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이것이 이삭과 리브가에게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 야곱의 나이가 77세가 되었을 때, 이삭은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어르신들이 그러하듯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이제 갈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는 약 140세였는데, 이후에도 50년을 더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삭은 눈이 어두워졌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에서를 부릅니다. 이때부터 이 이야기는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난국’으로 흘러갑니다. 이 이야기에는 네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한 사람도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죄인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이삭에게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쯤 되면 이삭은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교훈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남아 있는 인생 동안 그를 끝까지 훈련시키시는 것을 창세기를 통해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네 명 중 가장 먼저 다룰 사람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인 그 가족의 가장, 이삭입니다.

 

가장 이삭의 잘못된 판단

이삭이 에서를 부른 사건은 그 자체로 굉장히 어둡고 침울합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그가 하는 이야기는 유언과도 비슷한 성격을 띱니다. 일반적으로 유언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모든 자식들을 다 불러 모은 다음에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면 열두 아들을 모두 부른 후 한 명씩 축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언은 모든 가족 앞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삭은 에서만 불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 실행에 옮기고 있습니다. 성경 기록을 통해 우리는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판 사건과, 이 둘이 리브가의 태에 있을 때 주셨던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삭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이것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야곱을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리브가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뒤로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아브라함의 약속’을 에서에게 모두 주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으며 어떤 이유로 이렇게 시작되었는지는 성경이 정확하게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이삭이 에서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에서를 사랑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함으로 그를 사랑했다.” 어떻게 고기를 얻어먹었다고 해서 그 아들을 다른 아들보다 더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에서가 이삭에게 음식을 준비하고 그 대가로 복을 받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기에 이러한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행하는 이삭은 에서를 부르고 야곱과 리브가를 제외시킬 정도로 이 일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 복은 에서가 받아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자기 판단이 분명하고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이후에 일이 잘못되어 야곱이 형의 복을 가로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당해하며 놀랐던 그의 행동과 말들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우선 자기의 모든 것을 에서에게 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 이 모든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그 계획이 잘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속으로 양심에 걸리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의 결심이 옳다고 확실히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삭의 빗나간 판단과 감정의 합리화

이삭이 에서를 선택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그가 보기에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계보를 잇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에서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야곱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둘째, 야곱과는 달리 에서는 이미 가정을 꾸리고 있었고, 77세의 야곱은 아직 미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자손이 창대하게 되는 일은 결혼을 통해 가능하므로, 이삭은 가정을 이룬 에서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이성적이고 아브라함의 집안을 위한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삭의 판단이 옳지 않았음을 그 출발점을 밝힘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이삭이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삭의 잘못된 판단이 고작 '먹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판단들이 사실은 감정적인 요인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상황을 재해석하고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음식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다면, 이삭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에서는 가끔 사냥으로 고기를 잡아왔지만, 평소 이삭의 식사를 대부분 준비한 사람은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야곱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해주는 음식을 매일 먹었음에도, 이삭은 가끔 먹는 에서의 고기 때문에 에서를 더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번에 살폈던 빗나간 두려움에 이은 빗나간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삭은 지금 사랑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에서를 향한 이삭의 사랑이 하찮은 고기 요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이 스토리 전체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에서가 아버지를 극진히 섬긴 효자였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습니다. 고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 삶의 대부분의 시작은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사소한 일로 놓치는 중요한 것들

처음 만났을 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 사람에게 우리는 쉽게 마음을 열고, 무심코 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가시로 남아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사소하고 작은 지식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그 판단이 굉장히 이성적이었다고 믿습니다. 작은 친절이나 격려와 같은 것은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그것으로 전체를 판단하게 되면 큰 실패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소한 사건이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해서 섭섭해하고, 심지어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을 키워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삶에서 빈번하게 반복되는 일들입니다.

 

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향해 아버지가 달려가 안고 잔치를 벌이자, 밭에서 일하다 돌아온 맏아들은 불만에 가득 차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집 나간 동생이 돌아온 것은 생각지도 않고, 자신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주었는데 동생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섭섭했던 것입니다. 작은 염소 새끼 한 마리로 아버지의 마음을 오해하고 모든 것을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내 아들아,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어떻게 내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런 조그만 염소 새끼 한 마리로 아버지의 마음을 판단하느냐.” 큰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잘못 오해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들었던 사건, 심지어 직접 목격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정말 모든 것을 바르게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는 어려운 일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형은 이미 서운하고 억울해졌으며, 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그가 반드시 보아야 할 중요한 아버지의 진심을 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 때문에 중요한 것을 놓치는 우리 삶의 모습을 탕자 비유의 맏아들을 통해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의 빗나간 사랑과 합리화

이삭에게 있어서 에서는 사랑의 대상이자 특별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효자였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가문을 지키고 흥하게 할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야곱이 아니라 에서가 보였습니다. 에서가 훨씬 더 큰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고,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중요한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또 그것들을 모두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실 중 하나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던 에서의 경솔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장자권을 위해 형을 속인 야곱이 미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합리화입니다. 경솔하게 장자권을 팔았던 에서를 책망하는 대신, 야비하게 형을 속인 야곱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올바른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우둔함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매우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이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그는 하나님이 금하신 가나안 여인과 에서가 혼인하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내 리브가를 얻기 위해 멀리까지 사람을 보냈던 유명한 이야기를 에서는 몰랐을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맏아들이자 장자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 사실조차도 합리화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을 에서를 통해 생산할 수 있겠구나.' 야곱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은 에서를 통해 나올 것이라고 이삭의 눈에는 보였을 것입니다. 모든 이전의 사실들을 덮고 넘어갈 만한 논리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불러서 그에게 축복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빗나갔지만 자신을 기쁘게 해주었고 마음에 든 아들 에서를 더 사랑했습니다. 이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분명히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이삭의 마음을 흔들 수 없었습니다.

 

논리와 감정 사이의 갈등

이 일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에게 해를 입힌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 때, 그것이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해 주셨기에, 우리에게 이웃의 죄를 용서하라는 명령은 마땅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왜 그 논리가 우리에게 쉽게 적용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감정이 쉽게 항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에 의해 훨씬 더 많이 움직인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일어났고, 광야와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이삭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던 근본적인 출발점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옳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출발점이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이었고, 그로부터 계속된 에서에 대한 호의가 그가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이러한 잘못된 결정에 대한 확신은 본문 마지막 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음껏 축복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마음껏'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푸시케'이며, 이를 직역하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처럼, '생령' '인간의 존재가 되었다, 생명을 가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가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마음껏' '내 생명을 다해서 너에게 축복하겠다'는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진실로'라고 번역되어도 무방합니다.

 

이렇듯 그의 마음의 출발이 선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것을 확신했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기 판단에 대한 깊은 성찰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판단, 행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받았다고 말한다 해도, 저는 그것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삭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복을 준 사실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자식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조차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심, 아픔, 어려움뿐만 아니라, 기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거나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어 안심이 될 때, 만약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면 우리의 평안함과 기쁨은 현실적인 것에만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이유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마음으로 한 발 더 깊이 다가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삭처럼 자신을 항상 합리화하고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기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주일의 의무를 다한다'고만 생각한다면, 그 의무를 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왜 예배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시나요?

 

우리에게 있어서 그 작은 문제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이제 이삭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삭이 가지고 있던 감정은 사실 그가 마땅히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사실과 진리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삭의 이야기를 통해 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우리 내면에 있는 그 작은 문제의 출발점을 꼭 찾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예배 행위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인지, 아니면 내가 좋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오고 있는 것인지를 명확히 알 수 없게 되고, 이삭과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마음속의 그 사소한 출발점을 함께 파헤쳐 보겠습니다.

 

사소한 것과 신앙

앞서 모세가 기록한 이삭의 이야기 속에 ‘먹는 이야기’가 포함된 것은 지금 출애굽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먹는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했고, 성경은 이를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런 먹거리 하나도 주실 수 없으세요?'라고 물으며, 애굽에서는 생선, 오이, 참외, 부추, , 마늘 등을 ‘공짜로’ 얻어먹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고작 고된 노동 끝에 겨우 먹을 수 있었던 참외 한 조각 때문에 다시 애굽의 종살이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이삭을 비롯한 많은 신앙인이 이러한 잘못에 쉽게 빠집니다. 각자는 자신의 결정을 매우 논리적이라 여기며 확신을 갖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굶어 죽는 것보다 애굽으로 돌아가 종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주장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흔들 수 있는 많은 사소한 것들을 발견하고 그것들과 싸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소하다’는 것은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늘, 부추, 참외, 고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일관적으로 ‘사소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들은 이처럼 작고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하나님과 관계없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결정이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예를 들어, 팬데믹 시기에 교회에서 많이 행해진 온라인 예배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결정하기 위해 찬성과 반대 의견을 모으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의견이 너무나 많고, 어느 쪽이 옳은지 시비를 가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은 이런 모든 의견의 근원적인 출발점이 이삭처럼 '사소한 것'이 아닌지를 정확하게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적인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의 출발이 사소한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방법에 대해 오늘 본문의 이삭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사소함을 점검하는 세 가지 방법

첫 번째, 내가 결정하거나 계획한 일이 나의 죄를 깨닫게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알게 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자랑하거나 나의 유익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소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삭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결정이 죄인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편애하는 에서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하고 앞으로 맛있는 식탁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삭은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고 기뻐할지만 보았기에 사소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역시 어떤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할 때, 그 일이 사소한 것이 되지는 않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 나의 죄를 깨닫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는지, 그리고 나의 영광을 차지하려는 마음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탕자 비유의 맏아들 이야기처럼,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르게 발견하는 것이 우리의 결정이나 행동이 사소한 일로 전락하는 실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비교와 자기 연민, 그리고 기복신앙

두 번째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남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반대로 낙담하여 자기 연민에 빠지는 일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삶을 사소한 일이 되게 하는 원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며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이며, 어떤 복을 누리는 자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만약 '나는 잘하고 있는데 왜 저 사람들은 나처럼 잘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는 사소한 일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더라도, 천하 만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더라도, 비교와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면 그 모든 일이 사소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며 자신이 얼마나 높은지를 생각하고, 바리새인처럼 행동합니다.

 

이삭의 경우를 보면 또 다른 사소함이 드러납니다. 말씀을 보고 인용하며 말씀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의 결과만을 보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삭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어마어마한 복이 보일 뿐입니다. 그 복을 에서에게 주고 싶어 하고, 에서가 그것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과만을 보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누릴 수 있는 혜택과 결과에만 관심이 있다면, 아무리 교회에서 많은 봉사와 힘든 일을 했더라도 그것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며,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망치는 일이 됩니다.

 

사소함의 기준: 그리스도의 승리

마지막으로 사소함을 점검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지하는가, 아니면 나의 실패와 상처를 의지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사건들과 연결됩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받았던 시험은 ‘과연 너희들은 이 광야에서 너희들의 배를 만족케 하는 음식을 의지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도 똑같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시험의 내용은 ‘이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였습니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였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속에는 여러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무엇이 사소한가'를 알게 하는 시금석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유혹에 답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어떠한 상황과 문제에 닥쳤을 때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받은 상처들과 아픔을 의지하고 있거나 내 삶의 패배를 생각하고 있는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삶의 패배를 생각하고 있다면, 사실은 사소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그분의 승리를 의지해서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광야에 나가서 하신 일은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그 까다롭고 어려운 일들 속에서 고통과 슬픔에 그냥 머물면서 나에게 상처 주었거나 내가 상처를 입혔거나, 혹은 내가 실패했거나 성공했거나, 교회에서나 회사에서나 심지어 가정에서 겪었던 그 많은 것 때문에 상처를 붙잡고 연민에 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고 그것을 의지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나의 실패를 의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소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사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우리 인생이 어떤 인생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저는 이것이 정말 달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땅에서 정말 놀랍게도, 우리가 누구이며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 있는 자이며, 앵무새처럼 외우는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 때문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것을 누리게 되는 사람입니다. 사소한 것을 경계해야 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주님이 허락하신 풍성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승리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신분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무엇을 허락하고 계시며, 어떠한 인생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이렇게 그럴듯하게 예배하고 설교를 듣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계신지 저 자신이 같은 경우이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집안 속에서도 항상 아픔과 문제가 있고, 아무리 불행해 보여도 웃음과 기쁨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그렇게 간단하고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바는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이 사소한 일에 쉽게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우리가 생각하는 내 유익들, 내 욕심이 이것들을 만들어 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의 인생에는 사소한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아무리 작은 것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으며, 내가 나 된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이라고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사소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이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인생 속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겪는 모든 일 속에서 좌절하는 것 같지만 성경은 여러분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향해 나간다고 말합니다. 쓰러지는 것 같으나 어느 것도 우리를 억누르지 못하며, 낙망하여 눈물밖에 흘릴 수 없는 존재 같으나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이제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놓고도 아직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인생 앞에 있는 그 삶을 누가 붙잡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왜 이 땅에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찬양하며 살 수 있는지, 우리 중에 누구도 작은 인생이 없으며 사소한 인생이 없으며 우리 모두가 다 정말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결정하는 작은 일들로 인해 우리의 인생을 얼마나 쉽게 내어주는 자인지 잘 압니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 때문에 인생 전체를 포기하기도 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놓아버리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시고 영원한 나라로 가자 하시는 놀라운 약속을 알면서도, 하나님조차 마치 우리가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토록 과소평가하다니,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토록 우습게 생각하다니,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주님, 저희를 붙들고 가시는 그 주님의 손길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게 해 주시고, 주께서 이스라엘과 이삭, 아브라함, 모세를 세우셨던 그 놀라운 순간들을 저희에게 다시 보여주옵소서. 저희도 그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이제 드디어 우리 신앙의 모든 조상들이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인생을 저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주님, 저희로 잊지 말게 하시고 그 인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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