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6 26절로 33절까지입니다.

 

“아비멜렉이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우리와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아멘.

 

이삭의 생애와 신앙의 본질: 흔들리지 않는

이삭의 삶은 신앙과 믿음의 본질을 조명하며, 동시에 우리의 영적 위기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탐구했던 주님의 약속인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말씀은 신자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핵심 명제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자가 자신만을 위해 살거나 자신의 인생을 영위하는 이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고, 그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리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가장 흔들리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동행 의식을 상실할 때입니다. 홀로 세상을 감당하고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릴 , 우리는 필연적으로 신앙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삭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감사와 더불어, 우리가 무엇을 간과하거나 상실할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가 나그네라는 본질적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땅에 깊이 뿌리내리고 영원한 흔적을 남기려 합니다. 세상이 삶의 전부인 착각하며, 종국에는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다가, 땅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있는 모든 기쁨을 잃어버린 살게 됩니다. 이는 신자가 마땅히 누려야 풍성한 축복을 놓칠 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값없이 주신 헤아릴 없는 은혜들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흘려보낼 있는지요.

 

오늘은 이삭의 생애에서 여섯 가지 교훈 가지만 심도 있게 나누겠습니다. 이야기가 결코 간단한 메시지가 아님을 미리 밝혀둡니다. 하지만 설교를 인위적으로 길게 늘이지는 않을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이삭의 고난과 하나님의 동행: 끈질긴 인내

이삭의 삶은 창세기 26 12절부터 33절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비멜렉 왕의 허락 아래 그랄 땅에 정착한 이삭은 농사를 시작했고, 놀랍게도 100배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떼와 소유는 크게 불어나 엄청난 부를 축적했죠. 그러나 이삭의 번영은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를 샀고, 결국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그곳을 떠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삭은 그랄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내려가 새로운 터전을 모색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우물을 팠는데, 파는 곳마다 물이 솟아났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들마저 빼앗으려 했고, 이삭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마침내 그가 다시 정착했을 , 아비멜렉이 그를 찾아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내내 끊임없는 고난과 갈등에 직면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약속: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창세기 3절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선포하셨는데, 말씀은 이삭의 생애 후반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3절의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미래형 약속으로,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이삭의 전반에 걸쳐 유효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번째 확증은 24절에 나타납니다. "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하지만,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지금 순간에도 이삭과 동행하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가장 인상 깊은 표현은 28절에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비멜렉과 그의 신하들이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고백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너와 함께하셨음' 직접 목격했음을 증언하는 완료형 표현입니다.

 

이처럼 미래형, 현재형, 완료형으로 이어지는 가지 시제의 하나님의 동행은 이삭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약속을 받았으며, 지금 순간에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난 모든 순간 우리를 지켜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온 주의 크신 은혜라'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동행을 매일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인간 본성, 그리고 이삭의 분노: 상처와 진실

이제 조금 깊이 있는 도전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이 너무나 뻔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 이토록 반복하여 말씀하시는가?' 우리가 자주 망각하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깊이 성찰해 보면, 이삭과 블레셋 아비멜렉의 약속, 그리고 하나님과 이삭의 언약이 병행되어 나타나는 배경을 이해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약속을 지키는 보였지만, 결국 이삭에게 떠나라고 요구합니다. 함께 살도록 허락해 놓고는 돌아서서 나가라고 하는 상황은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이삭이 처음 착수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농사였습니다. 농사는 수확의 규모와 관계없이 최소 6개월에서 8개월, 일반적으로는 1년가량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땅을 일구고 씨앗을 심어 수확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떠나라고 요구받은 것입니다. 이는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혹자는 이삭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우물을 빼앗겨도 기꺼이 양보하고, 온유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이해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알고 계신다면, 오늘 우리가 읽은 27 말씀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이삭에게는 '뒤끝'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는 나가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화평을 논하자고?"라며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이삭은 분노했고,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토록 정착하려 노력했지만 좌절되었기에 그의 마음은 온전치 못했습니다. 이삭이 좋은 마음으로 우물을 내어준 것이 아니라, 사실 우물 사건 속에는 하나님의 절묘한 섭리가 개입되어 있었음을 우리가 놓칠까 , 하나님께서는 27절을 통해 이삭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신 듯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단순히 '이삭은 참았고, 아비멜렉은 나빴다'고만 치부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의 인간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십니다.

 

복과 고난 속의 하나님의 동행: 그분의 섭리

우리는 흔히 이삭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 농사도 배의 수확을 내고 떼도 크게 불려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만 주실 없으니 고난과 어려움도 주셨다고 여길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만약 그렇다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말씀을 이토록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고난의 의미를 설명해주셨겠죠.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지만, 계속해서 강조하고 싶어 하시는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삭이 농사에서 배의 결실을 맺었을 ,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아멘입니다. 그가 양을 쳐서 부자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야 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이는 '노맨' 같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면 지금까지 주신 것을 어떻게든 사용할 있게 해주셔야 아닙니까? 양은 어느 정도 끌고 있었겠지만, 논바닥을 어떻게 파서 가져갈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이삭의 인생에서 결코 잊지 말아야 것은, 그의 인생의 좋은 순간에만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실패하고, 억울하고, 분노하며, '내가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하는 그때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주님의 은혜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남의 이야기처럼 쉽게 생각하지만, 이삭에게는 얼마나 기막힌 일이었겠습니까? 마치 평생을 바쳐 이룬 회사의 명의가 알고 보니 다른 사람에게 있었다는 것과 같은, 정말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겪을 때도 하나님이 함께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어려운 일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뒤에서 돕고 계셨다'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서 일이 진행되고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멀거니 서서 뒷짐 지고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모든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성찰하게 하기에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러분, 이삭은 자신이 미움을 받았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미워해서 나가라고 아니냐?' 스스로 언급했습니다. 그는 우물까지 메워버렸습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물이 나오는 우물을 자신들이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아예 메워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우물을 찾아 다시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언제,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 복을 주시는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단순히 고난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시려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고난 자체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여러분과 제가 모든 가운데 결코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실망할 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에게, 교회에게,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믿었던 가족에게, 친구에게도 실망합니다. 실망하는 일은 부지기수입니다. 그때는 모든 일이 뒤틀리고, 풀리지 않고, 힘들며,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순간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 그리스도의 충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시려는 것은 단순히 복이 아니라, 최선의 , 가장 좋은 것입니다. 최상의 복이 무엇인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대신, 바울의 권면을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의 기도는 성도들의 사업이 번창하거나, 건강이 회복되거나, 물질적 결실을 맺는 있지 않습니다. 성경 바울의 기도에서 이러한 유형의 간구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본질은 "너희가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한다"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몰랐느냐고요?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주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여전히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기를 구하노라." 이것이 바울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신자가 땅에서 살아가는 참된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 이는 우리가 경험하고 누려야 실제입니다. 이러한 충만함을 향한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겠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 사업이 되고,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야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이라고 생각한다면,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여기게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찬송했는데, 만약 자녀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면?' 그때는 하나님이 무언가 잘못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질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순간조차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채우시기 위한 과정이라면,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므로, 이는 문자 그대로 '아멘'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눈물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눈물이 없겠습니까? 아프고 힘들죠. 고통스러운 순간을 좋다고 말할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이 얼마나 화나고 분노했겠습니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화내지 .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너무 억울해하지 . 왜냐하면 나의 충만으로 너를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나의 풍성함으로, 내가 가진 지혜로, 놀라운 의로, 사랑으로, 관용으로, 용서로, 기쁨으로 너를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이 없기 때문에 너는 나와 함께 일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선언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우리가 구하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다."

 

여러분과 제가 생각할 있는 것은 인생이 조금 편안해지는 , 이것이 우리 모두의 유일한 바람은 아닐지라도 아마 가장 강력한 열망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편안함을 원합니다. 그래서 저희 어머님도 저에게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 세상 사람들은 쓸데없는 DNA 발견했다고 노벨상을 주냐? 전기밥솥 만든 사람, 세탁기 만든 사람, 이런 사람들한테 노벨상을 줘야 한다. 이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그런 것은 상을 주고, 쓸데없이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노벨상을 주는 거냐?" 일리가 있는 말씀이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최고로 여기시어 그것으로 채워주신다면,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얻을 있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기억나십니까? 어떤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가게에 갔습니다. 가게 주인이 아이의 귀여운 모습에 "얘야, 내가 너에게 사탕을 테니 저기 사탕 있는 가서 주먹 가져가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사탕을 가져가지 않고 계속 주인 아저씨의 눈치를 봅니다. ", 괜찮아. 눈치 보지 말고 맘대로 가져가라." 그래도 아이는 가져가지 않고 계속 아저씨를 쳐다봅니다. 그랬을까요? 아저씨가 꺼내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하나, 아저씨의 손이 자기 손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보다 크신 분이시며, 그분은 말로 표현할 없고 무엇과도 비교할 없습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손으로 그것을 온전히 헤아릴 있겠습니까? 우리가 겪는 눈물로 깊이를 측량할 있겠습니까? 우리가 힘들다고 하는 것으로 그것이 전부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충만이 너에게 충만할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하며, 너의 인생 속에서 일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빈약한 기대와 생각을 넉넉하게, 단숨에 넘어 버리시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기도하지만 주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영생을 주노라" 하시죠. 이것이 어찌 비교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부유함을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준다" 하십니다. 이를 보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릴 없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 단위 같은 숫자들도, 옛날에는 1 원이 우리나라 1 예산쯤 돼야 나오는 단위였습니다. 요즘은 애플 주가가 3 달러를 넘었다고 하는데, 3 달러가 얼마나 되는지 여러분 계산이 되십니까? 그것조차 계산이 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숫자가 과연 얼마나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를 우리가 어떻게 감히 우리 생각으로 헤아릴 있겠습니까?

 

'목사님은 좋게 말씀하시려고 '충만, 충만'하시는데, 저는 지금 골치 아파 죽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실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러냐면, 가치가 도저히 계산될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지금 갖고 싶은 장난감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설명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차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그래, 좋은 말씀이다'라고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라는 분이 정말 이런 분인가, 내가 생각하고 구하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상상할 없고 꿈도 없는 것으로 주시는 분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통이 크신 아십니까? 하나님 나라를 그냥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 분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저에게 까불지 말아주십시오. 아버지가 그런 분입니다. 제가 그런 분과 함께 삽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그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이는 우리 마음속에 너무나 필요한 시각(視角)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방패와 도전의 : 동행과 교제

오늘 설교에서 저는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번째는 마치 방패처럼, 여러분이 입은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하는 부분입니다. 번째는 창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깊이 꿰뚫고자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전에 언급했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 약속이 가지 시제를 관통하며 적용됩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홀로 외롭게 삶을 마감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잠들고,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설 것이며, 부활과 모든 영광 또한 주님과 함께 누릴 것입니다. 지금 순간에도, 예배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고 동행하시며, 여러분은 사실을 속에서 계속 경험하게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이 자신을 그러한 존재로 인식한다면, 저는 여러분 곁의 성도들 역시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눈으로 그들을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에만 하나님의 동행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도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하신 흔적이 있습니다. 흔적이 여러분의 것보다 깊거나 뜨겁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나에 비하면 별것 아니지, 정도 가지고 아프다고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신 귀한 흔적들입니다. 그러한 흔적들을 함께 보고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참된 성도의 교제입니다.

 

다시 파는 우물과 언약의 회복: 굳건한 신앙

이제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시간을 초월하여 어떻게 역사하는지 깨달아 위로를 얻었다면, 이제는 이삭의 , 오늘 설교의 제목이기도 '다시 파는 우물' 통해 의미를 심화하고자 합니다.

 

이삭이 처음에 이용했던 우물들은 사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미리 놓았던 것들이었습니다. 이삭이 그토록 농사에 성공하고 떼가 번성할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미리 놓은 우물 덕분이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모든 번영을 누릴 있었습니다. 당시는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가나안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정도의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삭이 물을 마음껏 사용할 있도록 풍족한 공급을 허락하셨고, 결과 떼가 늘고 농사도 풍성하게 지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우물들을 메워버립니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부분입니다. 어째서 함께 나눠 있는 것을 굳이 메워버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종종 내가 되지 않으면 타인이 되는 것마저 인정하기보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지 않습니까? 우리 인간은 참으로 신기한 존재입니다. 타인이 진심으로 되면 당연히 박수를 주어야 같지만, 겉으로는 박수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두고 보자' 생각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러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어쨌든 그들은 우물을 메워버렸고,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이삭은 그랄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아브라함이 예전에 우물을 놓았던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우물은 사실 돈을 주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아비멜렉(이전 ) 암컷 어린 일곱 마리로 계약을 맺어 우물 소유권을 확보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삭이 가보니, 우물들마저 모두 파묻혀 있었습니다. 이삭이 일은 우물들을 다시 파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단순히 '잘했다'고만 상황이 아닙니다. 그때는 기근으로 인한 극심한 가뭄의 시기였고, 아무것도 기대할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말라버린 곳을 다시 판다고 물이 나올 만무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애초에 우물을 메워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파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물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치 '사촌이 땅을 사면 아프다' 속담처럼,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의 분노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번째 이야기는 바로 아브라함이 놓았던 우물의 회복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끊임없는 회복이 일어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적 위기와 언약의 기억: 잃지 않는 중심

이야기는 신자에게 매우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 삶에서 신앙의 우물이 메워져 있는데도 다시 파지 않을 , 우리는 영적 위기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으신 언약,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을 우리가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십니다.

 

이삭이 우물을 다시 파는 행동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고백과 같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주님께서 나의 복이 되신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나와도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이 물을 찾거나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고민과 회복의 : 은혜의 재발견

여러분과 저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험과 유혹, 그리고 깊은 절망을 겪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 78% 목회를 포기할 생각을 해봤다고 합니다. 저는 20%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토록 높은 수치에 놀랐습니다. 목회가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죠. 또한 예전에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들어 저도 78% 속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지금까지 길을 걸어왔을까요? 바로 여러분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저의 눈물이자 기쁨입니다. '나의 고민 나의 기쁨'이라는 제목의 책처럼, 교회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존재인 같습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돌릴까?', '어떻게 하면 일이 풀릴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저는 말씀을 다시 묵상하며 회개하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구나.' 만약 우리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회복은 바로 하나님이 나와 맺으셨던 언약,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있습니다. 혹시 내가 지금 은혜를 희미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안에서 은혜가 새어나가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돌아보게 것입니다.

 

저는 신앙에 문제가 생겼을 가장 먼저 '나도 이삭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복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시 상기하고, 그것을 위해 우물을 다시 파는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깊이와 하나님의 사랑: 삶의 근원

십자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두 아는 듯하지만,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아침 너무나 크게 회개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아침에는 십자가를 보았는데도 눈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얼마나 깊이 마음과 삶에 새기고, 그로 인해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마치 다시 우물을 파는 일과 같습니다.

 

기근이 땅에서 이삭은 다시 한번 우물을 팠습니다. 이는 언약을 잊지 않겠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였습니다. 농토를 잃고 사막으로 내몰린 이삭이 쩍쩍 갈라진 땅을 보며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고 절망하는 대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으셨던 언약을 기억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를 지셨는지를 되새기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를 다시금 깨닫는 과정입니다. 모든 진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과 동행할 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각박하고 메마른 우리의 마음조차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분노로 가득했던 이삭의 마음도 버리지 않으셨듯이 말입니다. 속상하고 답답하며, 어떤 이야기에도 쉽게 튀어나갈 만큼 위축된 우리의 마음조차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의 물로 끊임없이 적시십니다. 우리는 과연 사랑을 진정으로 보았습니까? 우물을 다시 파고 있습니까?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 안에 얼마나 풍성한 물이 담겨 있는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까?

 

밖의 예수님과 참된 동기: 삶의 주인

우리가 방금 부른 찬송가 ' 예수 대문 밖에' 요한계시록 3장에 기록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구절은 주로 전도의 목적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니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영접하라'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이 찬송할 때도 느꼈겠지만, 말씀은 불신자에게 하는 전도 구절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우리는 ' 주를 믿노라고 이름 부르나' 주님을 밖에 세워두고 있습니다. 얼마나 충격적이고 도전적인 말씀입니까? 제가 이것을 ''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찬송가와 이삭의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끊임없이 회복시키고 일으키시는 모습을 보면서, 찬송이 떠오른 것은 우리가 주님을 이처럼 밖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가가 탄생하기까지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곡을 작곡한 윌리엄 하우 목사님은 자신의 서재에 헌트가 그린 ' 되신 예수님'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걸어두고 주님을 묵상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흔히 보신 그림은 예수님께서 하얀 옷을 입고 등불을 들고 옆에서 손잡이를 잡고 노크하는 밝은 그림일 것입니다.) 헌트의 그림은 원래 매우 어두운 분위기로, 예수님만이 빛을 발하며 정면을 바라보시고, 문을 옆으로 잡고 노크하는 손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보며 묵상하던 하우 목사님은 어느 설교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찬송시를 쓰게 됩니다. 그는 감동받은 부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부하고 강한 자들이여, 그리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박힌 , 핏방울 흐르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께서 이제는 지쳐버린 손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참으시며 문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가? 상한 예수의 마음이 영영 떠나기 어서 속히 문을 열라." 구절을 읽는 순간 하우 목사님은 깊은 감동에 휩싸였습니다.

 

그토록 감동이었을까요?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이유는 '나를 빨리 들여보내 주어 어서 예수를 믿게 하라' 것이 아닙니다. "볼지어다, 내가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여러분,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의 진정한 동기가 바로 말씀 때문입니까?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하셔서 '주는 나와, 나는 주와 더불어 먹고', 여러분 때문에 주님도 기뻐하시고 함께 즐거워하시며 들으시며, 여러분 또한 주님으로 인해 만족하고 기뻐하며 먹는 , 그것이 여러분이 봉사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며, 자녀를 교육하고, 우리가 교회 예배로 모이는 진정한 동기입니까?

 

그리스도와 더불어 먹고 그분께서 우리와 더불어 먹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사는 기쁨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것이 우리를 붙들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자리에 있으며, 이것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사실이 여러분을 견고하게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나와 함께 먹고 마시자, 나와 사랑하자, 나와 모든 것을 누리자' 예수를 밖에 세워둔 , 집을 마치 우리 집인 것처럼,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러분, 회복은 어디까지 나아가야 할까요?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마시고 먹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내가 기쁘고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을, 너무나 뻔하고 귀에 익숙해진 십자가의 역사가 여러분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묻고, 상처들을 주님의 용서 안에 온전히 내맡겨야 합니다. 용서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툼, 고소, 정죄를 넘어선 그리스도 안에서의 : 승리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이삭이 무엇을 이겨냈는지 명확히 보게 됩니다. 우물을 파자마자 즉각적인 공격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물 이름을 '에섹(Esek)'이라 불렀는데, 이는 '다툼'이라는 의미입니다. 시비와 다툼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삭을 흔들 없었습니다. 다툼도, 공격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죠.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참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번째 우물의 이름은 '싯나(Sitnah)'였습니다. 이는 '고소'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어떤 고발도 그를 흔들 없었습니다. '네가 예수를 믿으면서 어찌 그렇게 있느냐?' 식의 고소조차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네가 이삭이라고? 족장이라면서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였다니!' 이러한 모든 정죄 역시 그를 흔들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르호봇(Rehoboth)' 이르렀습니다. 우리 또한 그곳에 이를 것입니다. 르호봇은 '열린 공간' 의미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배웠듯이, 우리는 어항이 아닌 바다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고래는 어항에서 기를 없으며 오직 바다에서만 살아갈 있습니다. 이삭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우물뿐 아니라, 본문에서 '샘물의 근원'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영어로는 '근원'보다 '리빙 워터(Living Water)', '살아있는 '이라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그는 살아있는 물의 우물을 발견했고, 물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와 완성의 축복

우리 아버지 되신 주님께서는 이삭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때와 시간을 따라 주님의 충만함에 이르도록 가장 선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아있는 샘이 있었습니다. 샘에서 물이 솟아나 그가 먹고 살게 되었을 , 그는 동네의 이름을 '브엘세바(Beersheba)' 지었습니다. 이름은 아브라함이 지은 이름과 같고, 같은 동네입니다. 같은 일을 번이나 반복했을까요?

 

브엘세바라는 말에는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바(sheba)' '맹세' 뜻하며, '약속의 우물' 의미합니다. 이는 이미 아브라함이 선포했던 우물입니다. 하지만 브엘세바의 '세바' 다른 뜻으로 '일곱' 의미합니다. 일곱은 완전수를 상징하죠. 드디어 완성의 우물이 것입니다.

 

여러분, 이삭은 마지막까지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선한 것이 결국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이르게 됩니다. 구약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주시고, 좋은 것으로 끊임없이 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최고의 것을 마지막에 허락하십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지금 받고 누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시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충만이 되십니다. 여러분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지혜, 은혜, 그리고 겸손으로 가득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충만의 충만으로 나아갈 사람들입니다. 충만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쉬지도 않으시고 지치지도 않으시며,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끝까지 여러분을 붙잡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짜내서라도, 웃음을 자아내서라도, 고통과 고민을 하게 하시더라도, 갈등을 일으키더라도,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넘게 하시더라도, 주님은 절대 타협 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충만의 자리까지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운명입니다. 길에 이르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혹자는 고난 속에서 오고, 혹자는 즐겁게 노래하며 오며, 혹자는 순종하며 기쁘게 걸어옵니다. 저는 수없이 많은 사례를 보았습니다. 또한 고난을 겪었지만, 번도 고난 없이 오신 분은 없기에 조금은 위로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조금의 고난이나 힘든 일이 그게 뭐가 그리 대수입니까? 상상할 없고 비교할 없는 하나님의 충만한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하셨고, 길을 기어이 이루어 내신다고 합니다. 이는 약속도, 누구의 약속도 아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감히 상상할 없는 복으로 여러분을 가득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을 얻었나이다: 기쁨과 은혜의 고백

종이 이삭에게 와서 "주인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라고 보고합니다. 이삭은 답합니다. "그래? 그러면 이것을 '세바(sheba)' 하자. 완성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끝이라고 이야기하자. 은혜가 나에게 넘치고 넘친 자리라고 이야기하자." 물론 앞으로도 다른 '세바'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을 깊이 경험하게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순간, 그리스도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신 이날에도 함께 고백합시다. "이제 드디어 물을 얻었습니다. 여기 물이 나왔나이다. 이곳을 세바라 하자. 나의 인생의 기쁨이라 하자. 나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라 하자. 이곳을 '에벤에셀(Ebenezer)'이라 하자."

 

 

기도합시다.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주님께서 하신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을 믿습니다. 저희는 주님을 담을 그릇조차 되지 못하며, 그것을 누릴 자격조차 없고, 맛조차도 분간 때가 있지만, 주님께서는 가장 선한 것으로, 가장 달콤한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 인생을 지금도 이끌어 가십니다. 주여, 저희가 게으르지 않고 우물을 파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지 않고 주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신앙을 다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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