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6장 14절에서 21절 까지 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아멘.
오병이어의 표적과 세속적 열망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기에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의 여러 사건 역시 설교를 통해 자주 접하셨을 줄 믿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직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두 왕으로 모시려 했습니다. 비록 당시에 왕이 존재했으나 사실상 로마의 통치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만의 왕국을 이루는 것은 간절한 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을 너무나 갈망했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그것이 성취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발견했으며, 자신들의 필요를 완벽히 충족시킬 수 있는 왕을 마주한 것입니다. 그들은 환호하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이 흔히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며, 이제 드디어 살길이 열렸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보라, 오천 명을 먹이셨다.” 여러분, 오천 명이라 하지만 부녀자까지 모두 합치면 약 이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신 사건입니다. 당시의 인구 상황을 고려할 때 이만 명은 중소도시 전체의 인구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시 전체를 먹여 살린 셈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런 분을 통치자로 추대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직장이나 사업 문제로 마음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만 준비하면 우리 모두가 먹고살 수 있습니다.” 이보다 편안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 민족이 일제 강점기에 억압받았던 것처럼, 당시 로마의 압제 아래 있었던 그들은 자신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할 이 사나이를 왕으로 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지금 눈앞에 놓인 답답한 현실로부터 하루속히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주님의 참된 관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현실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 내면의 욕심이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그보다 더 나은 생활을 갈구하게 되고, 결국 끝없는 욕심에 끌려다니다가 때로는 ‘내가 정말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라는 깊은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늘 자신의 인생을 답답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새로운 왕이 나타난 것입니다. 나의 답답한 현실을 깨뜨려 주고, 도저히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단번에 해결해 줄 능력을 갖춘 한 사나이가 등장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환호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관심과 예수님의 관심이 과연 같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이들을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다시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임을 아셨습니다. 즉, 자기 자신과 개인의 이익만을 사랑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거듭나는 것이 그들을 향한 주님의 진정한 마음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며 외친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혈통적 확신과 기복적 신앙의 한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구원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할례를 받았고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니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관심사는 눈앞에 놓인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그것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느냐에 국한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문제나 개인의 삶이 더욱 풍족해지는 문제, 즉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세속적인 고민들이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성도 중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 발을 들였으니 천국행은 이미 예약된 것이라 여기고, 정작 마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괜찮게 살 수 있을지에 쏠려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서 기도를 하든 신앙생활을 하든, 그 결과로 이 땅에서 더 풍요롭고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 교회를 찾는 핵심적인 목적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자기 기만과 수단이 된 하나님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단순히 그러한 이유만을 마음속에 품고 계신다면, 교회를 다니고 있기에 오히려 스스로 속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차라리 교회를 다니지 않았더라면 최소한 죄책감이라도 느꼈을 텐데, 이제 교회에 와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내가 교회에 나와 집사도 되고 장로도, 목사도 되었는데 설마 하나님이 나를 모른 척하시랴” 하는 안일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것은 자칫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조금은 경험할 수 있고, 일시적인 감동과 은혜를 받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이것이 오히려 개인의 욕심을 부채질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고 기뻐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불러대고 자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요청하는 수준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께로 진실하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과 욕심대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그 길을 보장해 줄 강력한 신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스스로 계획한 인생이 있는데, 그 인생을 뒷받침해 줄 신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아온 것이라면 여러분과 저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정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그리고 어쩌면 우리도 예수님을 그런 목적의 왕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분만 왕이 되면 우리가 계획한 모든 것이 보장될 것이고,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군중을 떠나 산으로 향하신 주님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유대인들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홀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같으면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 결정적인 기회를 설마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과감히 산으로 향하셨습니다.
단순히 주님의 겸손이나 군중을 피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는 또 다른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제 배를 타고 저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상황이 조금 의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산으로 올라가시거나, 아니면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셨다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홀로 산으로 가시고, 제자들은 바다로 보내셨습니다.
이는 설교자에게도 큰 숙제와 같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제자들과 동행하셨다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풍랑 속에서도 그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라고 전하기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혹은 산으로 가실 때 제자 몇 명이라도 데려가 기도하셨다면 “주님은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제자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라고 위로의 말씀을 전하기 참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바다로 떠나보내시고 당신은 홀로 산에 오르셨습니다.
앞서 행하심에 대한 새로운 이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먼저 보내시고 당신은 뒤에 남으시는 상황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야곱 같은 인물은 자신의 가족을 먼저 보내고 자기는 뒤에 숨어 있었지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언제나 앞서 행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험한 길을 닦아 탄탄대로를 걷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일부러 먼저 앞서 보내셨다고 표현합니다. 제자들을 앞세우고 본인은 뒤에 남아 산으로 올라가 버리신 것입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우리가 흔히 좋아하는 ‘하나님이 앞서 행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우리 앞서 가셔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미리 다 처리해 주시고, 힘든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길을 깨끗이 닦아주어 우리가 그저 멋지고 안락하게 걸어가도록 해주시는 것만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앞서신다는 의미가 반드시 그런 식의 편의만을 뜻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때로는 그런 은혜를 베푸실 때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순종의 길에 마주한 풍랑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도대체 왜 이런 방식으로 일하셨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주목할 부분은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만 보아서는 제자들이 그저 자의로 바다에 내려간 듯 보이지만, 같은 사건을 다룬 마가복음 6장 45절을 보면 상황이 더 명확해집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들을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나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종하며 나아가는 그 길에 바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좇아갔으니, 고요한 바다 위에 순풍이 불어 요트를 타듯 평온하고 아름다운 여정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종하여 내디딘 발걸음이 황금길로 변하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세상의 장애물들이 벌벌 떨며 물러나는 기적 정도는 있어야 이른바 ‘예수 믿는 맛’이 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본문 18절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을 전합니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신앙의 현실과 보이지 않는 보상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때로 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고 그 말씀에 순종했으니, 전쟁터에서 총을 맞아도 품속의 성경책이 총알을 막아주어 목숨을 건지는 것 같은 기적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간증을 들을 때면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나에게도 저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그리 흔치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 총에 맞으면 목숨을 잃기 마련입니다.
다른 이들은 신앙생활을 하며 복을 받아 경제적으로도 번성한다는데, 정작 나는 주님을 잘 섬겨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조차 실패로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손을 대는 일마다 어긋나고 손해를 볼 때, 우리는 “주님,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며 한탄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다른 모든 것이 어려워도 나는 특별히 보호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불만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데, 왜 내 인생은 이토록 불편하고 고단합니까?” 무언가 시원하게 풀리는 일도 있어야 신앙의 재미를 느낄 텐데, 도리어 잘 풀려가던 일조차 막히는 현실 앞에 답답함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우리가 고난당하고 일이 막히는 것을 즐기시는 분일까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 그런 분이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순종의 길을 선택했으니 그에 따르는 작은 보상이라도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앞서 본 것처럼 성경은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에는 오히려 고요했던 바다가, 순종하여 배를 타고 나가자마자 거친 풍랑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야속하고 공교로운 일입니까? 제자들은 말씀대로 행했으나 정작 그들 앞에 닥친 것은 거센 풍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풍랑 너머를 향한 시선과 주님을 향한 두려움
제자들은 분명 거센 풍랑을 마주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에는 제자들이 풍랑 때문에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제자들의 대다수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이었기에 웬만한 풍랑에는 놀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4장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을 상기해 보십시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가득하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자신들이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느냐고 소리쳤습니다.
이전의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의 일로, 당시 제자들은 주님이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위용 앞에 두려워 떨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역사를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상이 다릅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제자들이 풍랑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놀라 두려워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단순히 세상의 환란 앞에 떨다가 주님이 오시니 안도했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님을 시사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풍랑에 대해서는 의연했으나, 도리어 풍랑을 딛고 다가오시는 주님의 실존 앞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의 시선을 세상의 풍파가 아닌, 그 풍파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께로 돌리게 합니다.
고난을 통해 깨닫는 신앙의 본질
이 본문이 이토록 독특하게 기록된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어쩌면 주님께서 자신들을 왜 홀로 바다로 보내셨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함께 "주여, 왕이 되어 주소서"라고 외치던 그 열기 속에서, 제자들의 마음 또한 한껏 고조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왕이 되시면 나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 국무총리나 장관이 되어 이 나라를 다스려보자.' 이런 세속적인 야망과 계획들이 제자들의 마음속에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원대한 계획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배에 태워져 떠난 제자들이 마주한 것은 영광의 보좌가 아니라 거친 풍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축복을 보장받는 수단이 아님을 뼈저리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는 아직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눈앞의 풍랑 자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알았습니다. 이 고난의 사건 속에 담긴 주님의 다른 뜻이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깨달음이 있었다고 해서 고난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거센 풍랑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를 저으며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고난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절실히 주님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전에는 주님이 배 안에서 주무시기라도 하셨는데, 왜 이번에는 우리끼리만 보내셔서 이런 고생을 하게 하시는 걸까?' 주님과 동행했다면 겪지 않았을 고난 앞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먼저 보내신 주님의 의중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응답 없는 고난과 주님의 침묵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하십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이제부터는 세상 욕심을 따르지 말자.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불러주셨는데, 여전히 욕심에 매여 산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지금 겪는 이 어려운 환란도 나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일 것이다”라는 신실한 고백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로 마음을 정돈하고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제 주님께서 이 고난을 거두어 가실 법도 한데, 현실에서는 고통이 끊이지 않고 계속될 때가 참 많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역시 목회를 하며 매일 이 문제와 마주하곤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름대로 경건한 생각을 하려 애씁니다. “주님, 저를 겸손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참 교만했습니다.” 이렇게 회개하면 문제가 속히 해결될 것 같지만, 주님은 좀처럼 상황을 바꾸어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통과 고난의 현장에 우리를 더 오래 머물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속으로 ‘아, 내가 무언가 잘못 짚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제목을 찾아 다시 회개해 보기도 합니다. “주님, 제가 가족에게 소홀했습니다”, 혹은 “성도님들께 부족했습니다”라며 간절히 기도해 보지만, 고난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정말 견디기 힘들다는 마음이 듭니다. 마치 선생님이 산더미 같은 숙제를 내준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만 같습니다. “선생님, 숙제만 내주시고 도대체 어디로 가셨습니까? 이 가엾은 학생은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나를 위한 훈련인 줄은 알겠지만, 정말 힘들어 죽겠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이 배 위에 홀로 두시고 떠나 계십니까?”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애굽과 보이지 않는 전쟁
과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난 속에 홀로 방치하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의 배경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배에 태우신 이 일은 단순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에 일어났으며, 그 기적의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 한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광야의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오늘, 물 위를 건너는 이 사건은 홍해 도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너무나 확명하게 과거의 출애굽 사건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새로운 출애굽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죄의 애굽으로부터 다시 건져내어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경이로운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물을 건너는 사건은 출애굽기 14장의 홍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 연관성을 확인하기 위해 출애굽기 14장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1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함에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뒤에서 싸우시고 앞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이 구절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본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보다 앞서 행하며 길을 인도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기둥들이 백성들의 뒤편으로 옮겨갑니다. 예수님 역시 항상 제자들을 앞장서 이끄셨으나, 이번 사건에서는 갑자기 뒤에 남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리하셨을까요? 단순히 제자들을 떼어놓고 홀로 산에서 휴식을 취하려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의 사자가 뒤로 물러난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추격해오는 애굽 병사들과 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이 뒤에 남으신 이유 또한 분명합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그들을 위하여 친히 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한 전쟁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괴로움과 환란 속에서 “주님, 저를 어찌 이토록 힘들게 홀로 내버려 두십니까?”라고 절규할 때, 보이지 않는 주님의 부재를 원망하며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을 때, 주님은 이미 우리 뒤에서 후방을 위협하며 달려드는 애굽 군대와 맞서 싸우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셨고, 주님이 먼저 그 싸움에서 승리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뒤를 지키시는 동안 앞서 나가는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출애굽기 14장은 오늘 본문의 사건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14절과 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마치 홍해 바다 한복판으로 밀어 넣으시듯 말입니다.
주님은 뒤에서 싸우시며 동시에 백성들을 바다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바다로 들어가는 그 순간, 주의 사자가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그들이 바닷속으로 들어갔을 때, 주의 사자는 그들을 대신하여 바다의 모든 저주를 막아내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세례’라고 부르며, 그들을 홍해의 위협으로부터 건져내셨음을 증언합니다. 주의 사자는 뒤에서 싸우시는 동시에, 그들보다 앞서서, 또한 그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고 계셨습니다.
고난의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
여러분, 제자들이 배에 몸을 싣고 풍랑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맬 때, 그들은 속으로 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은 산 뒤편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물론 당시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역사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토록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며 절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그들의 삶 속에 영적 전쟁을 시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바다 위에서 방황하며 고통당할 때 친히 그 환란 가운데로 걸어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한순간도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왜 그토록 놀랐는지 아십니까? 주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붙드시고 인도하여 벳새다 건너편까지 무사히 이르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때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말할 수 없는 경외감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 시작부터 우리를 위한 전쟁을 수행하셨으며,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 속에서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마침내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사실을 더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전심을 다해 노를 저었습니다. 물론 그 노력이 그들을 직접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인 마태와 마가는 주님께서 산 위에서 노를 저으며 애쓰는 제자들을 지켜보고 계셨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한 눈길을 한시도 떼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주님, 제가 이 풍랑에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풍랑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주님이 나의 전부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이들을 주님은 주목하고 계십니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라고 부르짖는 그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고생과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시며 친히 그 고난의 현장 속으로 걸어 들어오십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고난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
풍랑이 곧바로 사그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늘 황금빛 탄탄대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총알이 우리만 피해 가고, 결코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으며, 어떤 질병에도 걸리지 않는 요술 같은 삶이 보장된 것도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이 주는 모든 아픔과 시련, 그리고 거센 풍랑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풍랑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현실의 무게는 참으로 무겁고 힘겹습니다. "주님, 나와 함께 계신다면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텐데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라고 울부짖을 때,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내니’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이는 곧 “나는 나다”라는 뜻으로, 출애굽의 언어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내가 바로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이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고 홍해를 갈랐으며 광야에서 만나를 내렸던 바로 그 여호와다”라는 선포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그제야 자신들 앞에 서 계신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바로 나다. 너희가 곁에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나, 너희를 떠나버렸다고 오해했던 바로 나다. 아무 말씀도 없이 너희를 고난 가운데 홀로 던져두었다고 생각하며 원망하던 바로 그 주님이 여기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홀로 풍랑과 싸우던 제자들에게 이 음성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위로와 소망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동행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세상을 살아가며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다 써보고, 때로는 "하나님, 제가 그래도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 합니다. 주님께 분명 무슨 뜻이 있으시겠지요"라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고통과 아픔, 여전히 계속되는 삶의 무게 앞에 지쳐있는 여러분에게 주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홀로 둔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 네 인생의 배는 결국 저 땅 기슭에 무사히 닿게 될 것이다.”
주님이 명령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지켜보십시오. 여러분의 유한한 힘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셨음을 깨닫고 이제 두려움을 떨쳐내시길 바랍니다. 고단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힘이 되심을 진실하게 고백하며, 오늘도 믿음 안에서 힘차게, 동시에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께서는 그저 멀리서 바라보지만 않으시고, 친히 풍랑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비록 풍랑이 즉시 잦아들지는 않았으나, 제자들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깨닫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인생 배에 올라타신 것을 아는 그 찰나에, 그들은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이토록 선명하고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번번이 자기 자신에게만 매몰되어, 겸손하지 못한 채 교만함으로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스스로 쥐려 합니다. 주여,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참된 겸손과 세상을 이길 참된 용기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고단한 삶의 현장에 서 있는 저희에게도 들려주시옵소서. 세상살이에 찌들고 지쳐 낙심한 우리 영혼을 향해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들려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요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한복음-35-오병이어, 우리를 채우시는 예수님-II (0) | 2026.04.10 |
|---|---|
| 요한복음-34-오병이어, 우리를 채우시는 예수님-I (0) | 2026.04.06 |
| 요한복음-33-자기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1) | 2026.04.05 |
| 요한복음-32-자기 영광의 감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0) | 2026.04.05 |
| 요한복음-31-예수님의 신성과 십자가 증거 (1) | 2026.04.0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