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6 1절에서 15 까지 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하나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는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아멘.

 

오병이어, 기적이 아닌 예수를 보는

오늘 함께 나눈 본문은 오병이어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라는 소재는 여러분이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하셨고 아는 내용이기에, 대개 우리의 관심은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드린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는가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또한 어떻게 하면 오병이어와 같은 헌신을 하나님께 드릴 있을지 고민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본문이 내포한 기본적인 배경을 설명해 드림으로써, 구절을 이해하는 더욱 명확한 해석의 틀을 갖추도록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사건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먹을 것을 제공하신 사건이 아니라,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겪었던 사건을 하나의 그림자로 제시하며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을 행하실 , 그저 기계적으로 진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세상 속에 어떻게 도도히 흐르고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또한 역사를 땅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시고 일을 일으키십니다. 따라서 사건은 결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며 구약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을 단순히 모방하는 수준을 넘어 구약을 완성하고 그것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매우 독특한 사역이라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 기억할 사실은 구약의 광야가 그림자라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먹이신 광야 사건은 구약의 그것을 넘어 완전하게 성취된 광야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정성을 다해 드리자’는 교훈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병이어의 실체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초점이 있습니다. , 예수님 자신이 친히 오병이어가 되셔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먹게 주셨다는 사실이 이야기의 핵심 배경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린 보잘것없는 것을 가지고, 마치 적은 양의 쌀을 크게 부풀리는 뻥튀기처럼 그저 양적 팽창을 일으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능력이 끝이 없으며 풍성함이 한량없음을 나타내셨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음을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인내와 오래 참음이 친히 우리의 떡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도저히 참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의지하여 인내하게 하시고, 원수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에도 사랑의 떡이 되신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깨닫고 행하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쁨의 떡이 되시고 온유의 떡이 되시는 분입니다.

 

광야의 시험과 인간의 실존적 한계

만일 이야기가 단순히 떡에 관한 것으로만 끝난다면, 본문에 빌립과 안드레가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저 "이제부터 내가 너희의 떡이니 내가 너희를 먹이겠다"라고 선포하며 떡을 나누어 주시면 그만일 텐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빌립과 안드레가 등장해야만 하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빌립과 안드레를 대조하여 빌립은 부정적인 사람, 안드레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혹은 안드레가 아이를 데려와 전도했기에 헌신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을 갖기 전에 먼저 본문에 기록된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빌립을 등장시키신 이유는 바로 말씀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주님은 지금 빌립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배경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사건은 출애굽 당시 광야 사건과 궤를 같이합니다. 그렇다면 빌립을 시험하시는 사건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신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 있음을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시험하신 목적은 단지 빌립의 능력을 확인하거나 그의 적은 믿음을 질타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 것처럼, 주님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사도의 대표 격인 빌립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셨을까요? 이유를 알기 위해 구약의 신명기 8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 8 2절입니다. "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음이 어떠한지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시험하셔서 그들이 명령을 지키는지 알고자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속마음을 정말 모르셔서 시험을 통해 확인하려 하셨다고 오해해서는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생각과 뜻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시험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시험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으로 사는 존재인가' 깨닫게 하려는 있습니다.

 

목적은 이어지는 8 3절에 더욱 명확히 나타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너도 알지 못하며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시험의 참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고 정보를 얻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진정 무엇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지를 우리 스스로가 알게 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떡을 먹는 사건 자체가 하나의 시험이자 내용이 됩니다. 우리가 원리를 이해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빌립과 안드레가 겪는 시험 또한 동일한 목적과 본질적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것입니다.

 

계산에 갇힌 인생과 '우리'라는 동행

이제 주님의 질문을 살펴봅시다. 본문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질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릅니다. 빌립은 사람들을 모두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 필요하다고 돈의 액수를 답했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어디서" 떡을 사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장소나 근원, "이것을 어디로부터 가져오겠느냐"라는 본질적인 물음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빌립의 대답은 동문서답처럼 들리지만, 사실 그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사건이 일어난 디베랴 바다 건너편은 그의 고향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는 인근의 지리에 밝았기에 어디에 파는 곳이 있는지 누구보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디서 사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이미 떡을 있는 환경임을 전제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에 빌립은 "주님, 돈이 있어야 어디든 아닙니까?"라고 항변하는 셈입니다. 쌀도 없는데 어떻게 지을 곳을 물어보시냐는 현실적인 반응입니다.

 

사실 순간 빌립은 예수님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곳을 물으시는데, 빌립은 돈이 없음을 지적하며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화의 진정한 핵심은 질문의 주어에 있습니다. 5절을 다시 보면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라고 나옵니다. 주님이 "네가 어디서 오겠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우리"라는 표현을 쓰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빌립에게 심부름을 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일을 하고 있다"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신 것입니다.

 

빌립의 대답을 보면 그가 '함께함'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 줄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라고 답합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장정 이백 명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큰돈입니다. 빌립은 스스로 사람 수를 헤아리고 필요한 예산을 계산해 보았지만, 계산 속에는 정작 주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돈이 있어야 해결된다"라는 그의 사고 안에는 '우리'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주님을 철저히 배제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아의 실패

이러한 맥락에서 , 오늘 본문의 사건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던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시험의 가장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앞서 살펴본 신명기 8장의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애굽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광야에는 먹고살 것이 없으나 애굽에는 풍족한 먹거리가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앞섰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면 텐데, 무엇하러 광야에서 고생하느냐”라고 불평하며, 심지어 애굽을 가리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대단히 반역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대신 자신들의 이성적 계산을 앞세워, 광야의 죽음을 피하려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결국 광야 이스라엘의 결정적인 패인은 그들의 고백 속에 ‘우리’라는 주어가 사라졌다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라는 믿음 대신, 오직 애굽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불신앙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에서 완전히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답과는 전혀 무관한 반응을 보이며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주목해야 놀라운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시험에 낙방한 결과로 광야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고라 자손을 비롯해 애굽에서 나온 세대의 성인 남성들은 대부분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혹자는 “선택받은 백성이라도 순종하지 못하면 죽는 것인가”라고 질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후세들 역시 온전히 순종했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광야 세대의 죽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하나의 본보기이자 샘플입니다. 그들은 불순종으로 인해 죽었으나, 빌립 또한 그들과 다를 없이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안드레는 어떠합니까? 많은 이들이 안드레가 아이를 데려오고 오병이어를 가져왔기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아이의 보잘것없는 점심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은 것이 과연 합격의 근거가 되었을까요?

 

사람의 헌신이 아닌 생명의 떡이신 주님

또한 주일 학교 시절에 들었던 사건에 대한 설교가 여전히 생생합니다. ‘한 아이가 어머니가 정성껏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나섰습니다. 며칠 동안 말씀에 매료되어 배고픔도 잊고 지내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먹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고, 주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를 축복하셔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진 것을 모두 드려 , , 배의 복을 누립시다. 대개 이런 내용의 설교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단호하게 말씀드리건대 이러한 해석에 현혹되어서는 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아이의 헌신이나 우리가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건의 핵심은 친히 ‘오병이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이는 저의 사사로운 견해가 아니라, 성경에서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신 것이기에 결코 부인할 없는 진리입니다.

 

요한복음 6 후반부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내가 너희에게 떡을 것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고도 결국 죽었던 만나와 같은 것을 주려 함이 아니다. 너희를 육체적으로 배부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너희에게 알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생명의 떡이다. 주님의 선언 앞에서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투표로 결정할 수도, 임의로 변경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오병이어를 드릴 것인가” 혹은 “어떻게 나의 작은 헌신을 크게 부풀릴 것인가”라는 식의 기복적인 생각에 빠지지 마십시오. “적은 헌금으로 빌딩을 샀다”거나 “가난한 형편에도 기도했더니 풍족한 부자가 되었다”는 식의 논리는 성경이 말하는 오병이어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오병이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본문이 사실을 얼마나 단호하게 표현하는지 확인해 봅시다. 9절에서 안드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흔히 생각하듯 “주님, 비록 이것뿐이지만 모두 드립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보잘것없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사람들을 집으로 돌보내어 각자 해결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결국 안드레 또한 시험을 통과한 합격자가 아니라, 빌립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한계 앞에 무너진 사람일 뿐입니다.

 

시험을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런데 빌립과 안드레에게는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가장 경이롭고도 놀라운 대목입니다. 흔히 우리는 구약의 사건이 신약을 해석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약의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열쇠가 됩니다. 보십시오. 과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시험에 실패하여 모두 죽었으나, 예수님이 계신 완전한 광야에서는 명도 죽지 않습니다. 주님은 빌립을 꾸짖지도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빌립아, 그것밖에 생각하지 못하느냐? 돈이 아니라 나를 믿으라”는 식의 질책도 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아이의 헌신에 집중하기에는 성경의 기록이 너무나 빈약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아이의 이야기가 뒤로 번이라도 나옵니까?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언급될 , 성경은 아이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헌신으로 어떤 복을 받았는지에 대해 일절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정작 관심을 두는 부분은, 제자들이 주님이 내신 시험 문제를 전혀 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조상들은 광야에서 죽었는데 이들은 살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치 “너희 조상들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으나 생명의 떡인 나를 먹는 너희는 영원히 살리라” 하신 말씀처럼, 시험에 실패하고도 죽지 않는 현실이야말로 본문이 전하는 파격적인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누가복음 22 28절과 29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자들인즉,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이라는 대목입니다. 시험은 단순히 광야의 40 금식 시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애를 통해 겪으신 시험을 뜻합니다.

 

도대체 누가 시험을 받았던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빌립과 안드레가 받아야 시험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시험 문제를 내신 분도 주님이시지만, 문제를 직접 담당하여 푸신 분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문제를 풀지 못해 죽었으나, 광야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었기에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대신 푸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문제를 풀지 못해 받아야 진노와 심판, 그리고 사망을 주님이 고스란히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보리떡이 되셨고, 자기 영광을 버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참된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시험을 받아 죽으심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풍성히 먹게 되는 은혜,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누리는 복음의 실체입니다.

 

성경의 인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신앙

저와 여러분이 오늘 어떻게 복된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흔히 '은혜'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것이 가슴 깊이 납득되지 않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빌립과 안드레의 처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을 제삼자의 눈으로 관조하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이 바로 빌립과 안드레처럼 대답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래 빌립과 안드레 같은 대답을 내놓는 이들은 광야에서 결코 살아남을 없는, 죽어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구경만 한다면,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다 한들 결말은 달라질 있습니다. 천국이 가장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그곳이 지옥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바라만 보는 신앙은 우리를 매일 천국 앞에서 좌절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빌립과 안드레가 바로 ''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시는 시험 앞에 자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은 시험을 통해 우리에게 저주나 죽음을 주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은 주님이 직접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없다' 사실을 일깨워 주십니다. 빌립에게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떡을 없다는 한계를, 안드레에게는 설령 가진 것이 있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무력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핵심은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요, 내가 가진 것으로는 어떤 선한 일도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있어 인간이 소유한 어떤 것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빈손으로 나아가는 참된 신자의 고백

방금 우리가 부른 찬송 188 3절을 보면 ‘빈손 들고 앞에 십자가를 붙드네’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찬송은 단순히 입술로만 부르는 노래가 아니며, 평범한 생각으로 지어진 가사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무엇을 손에 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주님 앞에서는 공로가 없기에,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주님을 만나는 이들의 참된 특징입니다.

 

흔히 우리는 모세를 보며 오해하곤 합니다. “모세가 사십 년간 애굽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고, 사십 년간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쳤기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가 애굽 궁정에서 열성을 다해 배웠던 사십 년의 결과는 고작 애굽 관원 명을 죽인 것뿐이었습니다. 또한 미디안 광야에서의 사십 년은 그가 대단한 연단을 쌓은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뼈저리게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으며 가진 또한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은 “이제 내가 너를 쓰겠다”라며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모세의 겸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식을 높이려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것과 배운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얼마나 무용(無用)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광야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일 비로소 주님은 부르십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역설입니다. 세상에서 대접받는 힘과 능력, 쌓아온 업적들이 교회 안에서는 아무런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힘이라 믿었던 모든 것들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것으로 헌신하고 생명까지 바치겠으니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주옵소서”라고 말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생명조차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열심이 부정당하는 같아 속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예물이 아니라 빈손입니다. 빈손이란 오직 십자가만 붙들겠다는 마음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가 바로 참된 신자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나의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된다’거나 ‘내가 가진 재물의 일부를 떼어 드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입니다. 헌금을 드린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행위이며, “하나님, 나는 재물을 의지하여 살지 않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생명을 드리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생명을 바쳐 무언가 대단한 결과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니 모든 것이 유익합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봉사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봉사가 주님께 대단한 보탬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무 쓸모가 없을지라도,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살기에 일을 합니다”라는 고백이 있을 , 비로소 봉사는 참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함이 주는 참된 행복과 승리

그러나 여러분,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주님, 내가 가진 것이 아무 소용없으니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겠습니다"라는 고백에 도달한 것도 귀하지만, 주님은 거기서 걸음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할 ,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으니 너는 모든 것을 가진 자다"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하십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으로 나를 충만케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참된 의미입니다.

 

우리가 내놓은 것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 주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주님의 나라는 늠름하게 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여들며, 주님의 능력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하는 일도 보탬이 되지 않는데, 이토록 하나님 나라가 견고히 선다는 것은 분명 나와 함께하시는 이가 있다는 증거구나!' 바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가 아닌 복된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갈 자격이 전무함에도 우리를 불러주신 은혜 덕분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마다 "벌레보다 못한 죄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백이 단지 입술의 발린 소리입니까? 아니실 겁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소망이 없으며 내가 가진 것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없습니다"라는 절박한 인정일 것입니다. 돈이나 인격으로 천국에 있다면 우리가 노력이라도 해보겠지만, 하나님이 내신 숙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아무리 훌륭한들 어찌 예수님의 인격을 따라가며, 우리의 재물이 많다 한들 어찌 하나님의 창고를 채울 있겠습니까? 세상의 기준으로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결코 이길 없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바로 지점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 부르며 눈물로 엎드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라고 외치며 "나도 하나님이 좋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주님이 나를 놓지 않으셨음을 발견하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삶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증명된 것입니까? 내가 것이 아니라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나를 업고 오신 , 나를 안고 함께하신 분이 분명히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신명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빌립과 안드레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성취됩니다. "시험을 주어 너를 낮추게 것은 결국 네게 복을 주기 위함이라." 이것이 바로 성도가 마땅히 누려야 참된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보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으며 사는 말입니다. 내가 언제 진정으로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천국을 밖에서 구경하는 자가 아니라 나라에 직접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주님, 인생을 살아오며 버릇 하나 마음대로 고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서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나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합니다"라는 고백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을 위로하거나 교세를 확장하려는 의도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흥왕하고 부흥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가치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절히 전하고자 하는 이유는 오직 이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는 사실을 온전히 알고 그분만으로 만족할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빌립과 안드레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와 내가 함께 있다.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같으냐?"

 

물음에 우리는 이렇게 답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면 어떤 현실적인 결핍과 난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소리에 흔들리거나 속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 하나로 기뻐하며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무엇으로 기뻐하며 무엇으로 찬송하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겠노라 고백하면서도, 때때로 우리의 마음은 이토록 허전하기만 것입니까? 우리가 보잘것없는 인생임을 인정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너무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님, 바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의 인생은 모든 것을 가진 자와 같음을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안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사실을 망각할 때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친히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셔서 우리를 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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