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4장 35절에서 42까지 입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아멘.
추수의 본질: 결산과 종말의 선포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함께 읽은 바와 같이 ‘추수의 때’에 관한 말씀입니다. ‘추수’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결산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하신 사건을 ‘추수’라고 표현하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뿐만 아니라 앞으로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전도 생활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전도와 선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초대교회 이후 지금처럼 선교와 전도에 대해 뜨거운 관심이 집중된 적도 드물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은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우려되는 지점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선교와 전도는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합니다. 흔히 해외로 나가는 것을 선교, 주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전도라 구분 짓기도 하지만, 사실상 동일한 사역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굳이 나누자면 해외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해외 전도요,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국내 전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각성 운동의 빛과 유산
미국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두 차례의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는 18세기에 일어난 ‘제1차 대각성 운동’입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독립 이후까지 이어진 이 운동 당시, 영국의 저명한 설교자 조지 휘필드(George Whitefield)가 미국을 방문하여 복음의 불을 지폈습니다. 또한 미국 현지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이 주님의 뜻에 따라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젊은 나이에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으나, 안타깝게도 우두 접종 시험에 자원했다가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가 남긴 완전한 형태의 저서는 없으며 몇 권의 논문집만이 전해지지만, 그것만으로도 오늘날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가계는 많은 학자에 의해 연구되어 왔는데, 그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인디언 선교를 위해 헌신하다 스물일곱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신앙 여정이 담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신앙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한 청년의 인생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그 가슴 벅찬 삶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신앙의 지침서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대각성 운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복음으로 돌아오는 경이로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시대적 위기 속에서도 이어져 온 참된 기독교
우리는 흔히 미국을 청교도 정신 위에 세워진 기독교 국가이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로 인식하곤 합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면밀히 따져볼 때, 이는 다소 낙관적으로 해석된 측면이 있습니다. 사실상 이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국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 역시 기독교적 원리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거나 정책을 세우는 것이 아니며, 여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자국의 국익을 우선하여 움직입니다. 이는 국가로서 당연한 생리일 것입니다.
미국 독립 직후의 종교적 상태를 살펴보면, 제1차 대각성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789년의 한 기록은 당시의 풍경을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불안한 마음으로 시민들 사이에서 종교적 원리와 예배가 소홀히 여겨지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종교의 법과 기관에 대한 경멸적 태도가 만연해 있으며, 무신론적 성향을 띠는 불신앙이 팽배해 있습니다. 종교의 쇠퇴와 비례하여 도덕은 타락하고 방탕함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마치 오늘날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흔히 현대 기독교의 위기를 말하지만, 사실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수차례 위기를 맞이했고 때로는 멸절의 위협을 느낄 만큼 힘겨운 시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성경이 증언하는 ‘참 기독교’는 항상 그 맥을 이어왔습니다. 기독교가 쇠락했을 때 갑자기 새로운 기독교가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참 기독교’는 처음부터 변함없이 존재해 왔으며, 역경의 순간마다 역사의 중심을 지키며 그 흐름을 주도해 온 것입니다.
인위적 전도 방식의 도입과 변질
이러한 영적 파국으로 치닫는 듯하던 18세기 말, 하나님께서는 제2차 대각성 운동을 허락하셨습니다. 초기 운동은 하나님의 놀라운 간섭이 현저히 보일 정도로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당시 집회 장소는 엄숙한 찬송과 열정적인 설교, 그리고 진지한 기도로 가득 찼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초기의 운동은 후반기에 접어들며 여러 복음 전도자들에 의해 조직화되었고, 점차 본질에서 벗어나며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집회 안에 오락적인 요소가 침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엄숙한 찬송 대신 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드라마틱한 설교를 선호하게 되었고, 전도자들 역시 청중의 기호에 맞추어 설교했습니다. 특히 이때 기독교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인위적인 결단’이라는 요소가 대대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분들은 손을 들어 표해 주십시오”, “진심으로 믿는다면 앞으로 나오십시오”와 같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부흥회 방식이 이때 생겨난 것입니다. 바로 이 제2차 대각성 운동이 현대 부흥 집회의 원조가 되었으며, 오늘날 집회의 형태를 결정짓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문화적 충돌과 간증의 과잉
미국인들에게 이러한 ‘결단’의 행위는 실용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그들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졌기에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이 한국에 도입되었을 때는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와 충돌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초창기 선교사들이 “예수 믿을 사람은 손을 드십시오”라고 했을 때, 모두가 손을 드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확인해 보니, 손을 들었던 사람이 부를 때마다 계속해서 손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해진 선교사가 이유를 묻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멀리 타국에서 오셔서 고생하시는데, 그 청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미안해서라도 어찌 손을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복음의 본질보다 체면과 정을 앞세웠던 당시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방식은 정서상 온전히 부합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이로 인해 어떤 이들은 반복해서 결단하면서도, 막상 문밖을 나서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다가 다시 집회에 들어와 또다시 결단하는 부작용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회에는 자연스럽게 ‘간증’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방탕했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기적처럼 변했다’는 식의 극적인 서사에 사람들이 매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간증 자체가 무가치한 것은 아니나, 어느덧 교회 안에서 간증이 신앙의 척도로 자리 잡으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신의 결단 경험을 기준으로 타인의 신앙을 재단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확연하게 변화되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극적인 체험이 없는 이들을 비그리스도인으로 몰아세우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무엇보다 심각한 위험성은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에 있습니다. 찬송으로 감정을 고양시키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과정에서 “찬송으로 마음을 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에 근거가 없는 표현입니다. 찬송은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지극히 경건하고 본질적인 예배 행위여야 합니다.
간증의 과잉과 인위적 분위기 조성의 위험성
이러한 전도 집회의 성격은 제2차 대각성 운동이 조직화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당시 집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눈물을 흘리며 드라마틱하게 회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과거에 이러한 삶을 살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기적처럼 변화되었다’는 식의 극적인 서사에 사람들이 매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교회 안에는 자연스럽게 간증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간증 자체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나, 어느덧 교회 안에서 간증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본질적인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과거로부터 어떻게 돌아섰고 어떻게 결단했는지를 지나치게 내세우는 이들이 늘어났으며, 급기야 자신의 결단 경험을 척도 삼아 타인의 신앙을 재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토록 분명하게 결단하고 돌이켰는데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렇게 믿어서야 되겠느냐, 예수를 믿는다면 어느 날 갑자기 확연한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그러한 경험이 없는 이들을 비그리스도인으로 몰아세우는 부작용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 방식은 긍정적인 면도 있겠으나, 동시에 인위적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소위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이 그러합니다. 찬송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자극적인 연출로 분위기를 돋우면 대중은 뜨겁게 반응합니다. 이 과정에서 “찬송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음악이라는 도구로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라는 뜻에 불과하며, 성경적으로는 근거가 없는 표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지극히 경건하고 아름다운 예배의 행위이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청중을 준비시키는 수단이 아닙니다. 찬송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본질적인 목적이어야 합니다.
감정적 자극의 한계와 진정한 전도의 실종
‘찬송으로 마음을 열라’는 것은 결국 음악적 자극을 통해 감정을 움직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원리적으로 볼 때, 유명 가수의 공연에 열광하며 환호하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에 무조건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이를 잘못 활용하면 결국 인위적인 분위기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기보다 자신의 감정이 얼마나 고조되었는지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위험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 집회를 열거나 특히 청년들이 찬양할 때, 이 점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일부 그릇된 이들이 약물과 같은 외부적 자극에 의지하여 감정을 돋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도 이러한 인위적인 몰입의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며, 교회의 어른들이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깊이 고민하고 자녀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할 대목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인위적인 방식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경향을 비판하는 이들이 인위적인 요소가 싫다는 이유로 전도 그 자체까지 아예 포기해 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사람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움직여 전도하느냐"라며 방식의 오류만을 지적하다 보니, 정작 자신들은 복음 전파의 사명 자체를 외면하는 모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비판에만 매몰되어 전도의 본질적인 사명까지 놓쳐버린 상황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도: 종말과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
오늘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도와 추수의 원리를 살피고자 합니다. 지금의 교회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선교가 절실한 순간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전도를 정의하시기에 앞서 ‘추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추수는 농사의 마무리를 뜻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그 놀라운 사건을 ‘추수’로 표현하신 것은, 전도의 근본적인 성격이 곧 ‘마지막’임을 가르쳐 줍니다. 즉, 전도한다는 것은 종말을 선포하는 것이며 최후의 복음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누군가에게 “예수를 믿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여유로운 시간 중에 건네는 한 번의 권유가 아닙니다. 그 순간은 영적인 종말이자 마지막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최후의 통첩처럼 선포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는, 혹여 전한 후에 스스로 버림받을까 두려운 마음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러분이 말씀을 잘못 배워 전도나 구원의 본질을 오해하실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도가 지닌 이 심각성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단기 선교를 가서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보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전도의 본질은 우리가 무언가를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마지막’이 선포되었음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미 완성되었으며, 다른 구원자를 보내어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엄중한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간절한 중심이 필요합니다.
전도의 핵심: 하나님의 나라와 뜻의 성취
요한복음 4장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전도가 종말론적 성격을 띨 뿐만 아니라, 단순히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대개 전도를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만 국한하여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한 개인의 구원 사건 자체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에 더 큰 비중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증언하는 전도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전도란, 위험에 빠진 영혼을 내가 가서 건져내어 씻기고 데려오는 수준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곳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당당히 선포하는 것이며, 복음을 듣는 이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취되는 역사적인 순간 속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 하나님의 성품으로의 회복
단순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만 표현하면 이해하기 쉽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전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한다는 말을 할 때는 우리 자신의 공로가 들어갈 틈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것은 단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소극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내 인생에서 성취되어, 그 거룩함이 삶의 전 영역에서 흘러넘치게 된다는 거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에 임하고 있다’는 고백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사회와 가정,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인격 전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도의 첫 번째 목적은 단순히 영혼을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과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영혼 구원이란 이제 겨우 “내가 살았다”라고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인도를 받으며 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저 살려만 놓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타인과 다투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남을 해치고 자신마저 무너뜨리는 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러한 상태로 생명만 부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영광과 거룩함으로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즉, 생물학적인 목숨이 연장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전도와 구원은 이처럼 우리가 살아나되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된다는, 지극히 폭넓고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도의 본질: 개인적 체험을 넘어선 하나님 증거
전도가 이렇듯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그 내용 또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전도를 할 때 개인적인 간증이나 체험, 혹은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전도의 전부인 양 오해하곤 합니다. 누군가의 신앙이 좋다는 칭찬을 들을 때 그 이유를 물으면, 대개 삶이 변했기 때문이라고들 대답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은 뒤 삶이 변화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그러나 구원과 전도의 본질적인 내용은 어떤 사람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사실 그 자체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전도의 핵심은 우리가 어떻게 믿게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의 진정한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결코 개인적인 체험이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을 설명하기 위해 경험을 곁들일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본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전도란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지를 전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전도에는 우리의 입술뿐만 아니라 몸과 가정, 그리고 사업까지도 포함됩니다. 성경에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우리의 삶 모든 영역이 쓰임 받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온전한 의미의 전도입니다.
전도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앎
오늘 본문 40절부터 42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함께 머무르기를 청하였고, 주님께서 이틀을 유하시자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이들이 예수님께 머물러 주기를 청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타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나 순간적인 감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직접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타인의 체험만으로는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그것은 온전한 전도의 방법도 아닙니다. 참된 전도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며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직접 대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하기에 앞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점검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가를 먼저 자문해야 합니다. 이는 결코 신학자처럼 방대한 지식을 소유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모든 일의 이면에서 그 사건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 일을 행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병이 나았다’거나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고백은 귀한 신앙의 편린이지만, 그 자체가 전도의 본질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왜 내 마음이 편안해졌는지, 내가 만난 분이 누구이며 그분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는 것이 전도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전도의 주체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할 때 단순히 교회를 권유하거나 설교를 자랑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삶과 인격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살피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며 깊이 묵상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전도의 출발: 하나님의 열심에 동참하는 기쁨
요한복음 4장 35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도의 또 다른 특징은 이 사역이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의 섭리대로라면 넉 달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영적인 추수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이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기다리던 추수의 때가 이미 도래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전도의 시작점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전도란 내가 앞장서서 나아가고 하나님께서 나를 돕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계획하고 이루어가시며, 우리는 그분의 뜨거운 열심에 초대받아 참여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진정한 동기는 ‘아버지의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그 사랑을 배워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하에 우리가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전도는 의무를 넘어선 감격이 됩니다.
전도의 보상: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즐거움
요한복음 4장 36절을 보십시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았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거두는 자는 바로 제자들이며, 동시에 오늘날의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이라는 선물, 즉 ‘삯’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 거두는 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라고 한 것은 전도의 사명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신 목적이 뒤이어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전도는 결코 교회 좌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누가 더 많이 전도했는지를 겨루는 경쟁도 아닙니다. 전도의 진정한 목적은 씨를 뿌리신 하나님과 거두는 우리가 그 기쁨을 함께 나누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불신자들을 보며 “내 열심과 말솜씨로 이 사람을 기필코 변화시키겠다”는 의욕을 앞세우곤 합니다. 그러나 전도의 본질은 내 실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뿌려놓으신 씨앗을 거두는 그 즐거운 과정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인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는 것이 전도의 참된 의미입니다. 누군가는 백 명을 전도하고 누군가는 한 명을 전도했다고 해서 믿음의 크기를 재단하는 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전도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는 거룩한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이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할 때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든 감동을 주어 변화시키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다 보면 결국 관계의 다툼이 생기고, 상대방이 교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대신 주님의 말씀처럼 이 과정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뿌리신 씨앗이 어떻게 역사하고 드러나는지를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며, 하나님과 함께 그 일을 기뻐하십시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여러분이 인내를 배우는 기회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빚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에 이는 마땅히 기뻐해야 할 축복입니다.
전도: 주님의 수고에 참여하는 은혜
전도하는 우리에게 흔히 나타나는 약점 중 하나는, 이 일이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37절 말씀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여기서 심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며, 거두는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이치가 옳다고 확언하십니다. 이어지는 38절에서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 본질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전화를 걸고, 마음을 쓰는 모든 수고는 그저 ‘사랑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 수고 자체가 원인이 되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가는 존재들입니다. 본문에서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라고 말씀하실 때, 이 ‘다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주님이 오시기까지 그분을 예표하며 증거했던 구약의 허다한 인물들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가 그리스도를 증거했고, 마침내 주님께서 오셔서 이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시고 시작하신 그 거룩한 추수의 현장에 우리가 동참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전도는 나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이 완성하신 구원 역사의 잔치에 초대받아 그 결실을 누리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수선이 아닌 재창조의 은혜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리가 선포하는 구원은 결코 구걸하듯 사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값싼 동정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우리의 모든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셔야만 하는 유약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직접 계획하셨고, 그 일을 완수하시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분이며, 그 과정에 당신의 사랑과 거룩, 그리고 하나뿐인 생명까지 온전히 쏟아 부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결코 나의 요구에 순응하는 존재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며, 구원자이시고, 진정한 산성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문제에 사랑이나 위로라는 당분을 섞어 적당히 넘기게 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을 조금 고쳐서 ‘조금 더 괜찮은 인생’으로 수선해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분은 인생의 모든 상황과 죄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땜질하여 쓰시는 것이 아니라 전무후무한 새 존재로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선포합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인 것 같아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주관적인 의식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찰나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재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제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전혀 다른 나라의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시민권을 얻었다고 해서 모든 생활 방식이 단번에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국적에 따른 삶의 도리를 배워가야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는 수준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허락하신 주님은 우리를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주되신 그리스도와 성육신적 전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 자신의 물동이를 버려두고 달려갔습니다. 과거의 습관, 옛 자아, 자신이 의지하고 소중히 여겼던 생각들을 기꺼이 뒤로하고 주님을 좇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녀의 신앙은 단지 머리로만 “이분이 메시아구나”라고 이해하는 지적 동의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자신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된 여인은 지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전 인격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마음과 생각이 반응했고, 무엇보다 그녀의 몸이 반응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물동이를 내던지고 마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외친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영혼의 일부분만을 건져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온 인생을 주관하시는 주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드디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즉, 그녀에게 예수는 단지 구원자(Christ)일 뿐만 아니라 삶의 주인(Lord)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분은 우리 영혼의 일부만 취하여 나중에 천국으로 인도하는 정도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인격이 반응할 수밖에 없는 분,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육체가 거부할 수 없이 반응하게 만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주권자께서 우리 가운데 직접 찾아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이며, 그것이 곧 전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첫 번째 선교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으로 보냄을 받아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아픔과 문제와 고통을 친히 겪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 역시 이러한 ‘성육신적 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더 낫고 저들이 부족해서 도와주러 가는 식의 전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큰 죄인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죄인일 뿐인데,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점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성경적 태도와 긍휼의 마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동성애 문제는 매우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언급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으나, 동성애 관계에 있는 분들은 흔히 자신이 본성적으로 동성에게 끌리는데 어찌하느냐고 항변하곤 합니다. 사실 한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기보다는, 다소 보수적인 정서에 기대어 무조건 거부하거나 비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좀 더 성경적으로 반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동성 간의 성적 끌림과 행위 자체를 분명히 죄라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본래 그런 본성을 타고났는데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으냐”라는 동정론이 일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 안에 동성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 안에는 이보다 더 참혹한 죄들이 수없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본성이라고 해서 모두 용인하며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것이 죄이기에 우리는 마땅히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본성을 타고났다는 주장에 대해 우리가 달리 할 말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것을 죄라고 명시한다면, 그리스도인은 그 죄와 싸울 수 있어야 하며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성애를 하는 분들이 우리보다 더 심각하고 흉악한 죄를 짓고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들의 죄는 더럽고 추악하게 보면서, 우리 내면에 감추어진 죄는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들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으며, 어쩌면 속으로 죄를 꽁꽁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더 악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십자가의 은혜가 절실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절감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배우자를 미워하십니까? 아니요,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동성애를 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사랑의 마음을 품지 못하십니까? 아직 예수를 믿지 못하고 죄의 어려움과 좌절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왜 품지 못합니까? 이는 우리가 깊이 자문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어떤 행위가 죄라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렇기에 그에게도 구원이 절실하며 나 또한 그와 똑같은 죄인임을 기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난처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마음과 비참한 상태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오셨는지를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전도의 완성: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삶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전도의 핵심입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곧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하셨던 그 자리에서 우리도 함께 울며 아파할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고 단단한 껍질에 둘러싸인 채 메마르고 딱딱해진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며, “주님, 제가 과연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맞습니까?”라고 진실하게 회개하며 돌이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고,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잃어버린 영혼들을 품으셨던 주님의 그 애끓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품는 자체가 곧 전도이며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전도하고 있다’는 형식적인 행위 자체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많은 실적을 냈는가’가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그분의 영광을 얼마나 알아가며 그 거룩함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 내고 있는지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전도의 성취입니다.
전도: 짐이 아닌 축복의 잔치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전도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친히 씨를 뿌리셨고 결국 하나님께서 거두실 일인데, 우리가 그 성과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사역으로 부르신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기 위함이며, 그 즐거움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도는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전도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축복입니다.
거저 받은 구원을 마치 자신의 소유인 양 값을 매기며 “너는 나보다 부족하니 내가 가르쳐 주겠다”라는 식으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자를 훈계하듯 대하지도 마십시오. 진리를 소유한 사람답게 가장 겸손한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한 영혼을 대면하십시오. 바른 진리를 먼저 깊이 깨닫고, 그 생명의 복음을 온전히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바른 복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 복음을 여러분의 삶으로 증명해 내며, 입술의 고백과 행동의 실천으로 이웃의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전도합시다. 전도는 고된 노동이 아니라 우리의 특권이자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알립시다. 그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하고 하늘의 기쁨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고 경배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경험하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하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 저희가 복음의 빚진 자로서, 전도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거룩한 즐거움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부어 주시옵소서. 영혼을 향해 눈물 흘리셨던 주님의 심장을 우리에게 이식하여 주셔서, 우리의 말과 삶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열심보다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겸손히 그 영광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는 하늘의 기쁨이 우리의 일상에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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