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4장 31절에서 37까지 입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아멘.
하늘의 양식과 하나님의 뜻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오간 대화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심도 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마리아 여인은 마침내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자 예배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즉시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여인과 주님의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마을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옵니다. 제자들은 그 대화의 마지막 대목을 분명 목격했을 것입니다. 여인이 “모든 것을 알려줄 메시아가 오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라”는 경이로운 선언을 하시는 장면을 말입니다. 성경은 당시 상황에 대해 “제자들이 이를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광경을 무척 생경하게 여겼습니다. 당시의 관습상 랍비들이 대낮에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결코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랍비들은 자신의 부인과도 낮에는 길에서 대화하지 않을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인과 말씀을 나누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메시아임을 밝히는 파격적인 선언까지 하셨습니다. 훗날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한 사건이 훨씬 뒤의 일임을 상기한다면, 이는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커다란 화두가 되었을 법한 상황임에도 묻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라는 신뢰로 침묵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본문을 세밀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당시 제자들의 관심이 이 놀라운 사건 자체에서 비껴나 있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관심과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은 이미 다른 현실적인 문제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와 진리, 그리고 구원이라는 경이로운 역사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제자들은 자신들이 골몰하고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본래 이방인이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 돌아와 무릎을 꿇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둘째 아들’의 모습이라면, 지금 제자들은 동생이 돌아왔을 때 집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큰아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주님 곁에 머물면서도 마음은 이미 밖으로 나가버린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자들의 관심사는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에 보여주었던 갈망과 매우 유사합니다. 앞서 여인은 주님께서 생수에 관해 말씀하시자 “그 물을 내게 주사 다시는 여기 물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청한 바 있습니다. 이를 현대적으로 비유하자면, ‘이제는 수고하여 일할 필요 없이 버튼만 누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삶’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본문 31절부터 33절은 그 상황을 생생히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랍비여 잡수소서”라며 음식을 권하자, 주님께서는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답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라며 서로 의아해합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혼자 몰래 드시는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들이 음식을 구하러 간 사이에 주님께 언제 먹을 것이 생겼는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사이 사마리아 여인은 소중한 물동이마저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가 예수님을 전합니다. 전도의 본질은 어떤 특별한 기술이나 훈련 이전에, 영적인 눈을 감았던 자가 눈을 뜨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체험에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 생명을 경험한 자는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법입니다. “전에는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이 정직한 고백이야말로 전도의 가장 강력한 동기이자 핵심적인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인생의 해갈
여인은 지체 없이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달려갔습니다. 마치 맹인 바디매오가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처럼, 여인 역시 동네 사람들에게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이 사람을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외칩니다. 칼빈(Jean Calvin)은 이 대목을 주해하며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과거를 다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만 하셨음에도 여인이 ‘모든 일’이라고 고백한 것은, 그 짧은 문답 속에서 자신의 전 인생이 주님 앞에 온전히 드러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여인은 평생을 통틀어 자신의 존재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주는 단 한 분을 만난 것입니다. 세상 누구도, 심지어 다섯 남편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와 아픔, 실패와 좌절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는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이 감격 속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었으나, 제자들은 여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육신의 양식에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여인은 이미 예수를 믿는 자의 길을 걷고 있는데, 제자들은 도리어 세속적인 필요에 마음을 쏟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마리아 여인도, 제자들도 아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역사가 이 보잘것없는 여인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영혼을 위해 집요하게 찾아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을 거쳐 가나안까지 인도하셨던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향해 세밀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마땅히 전율해야 하지만, 혹시 이러한 은혜의 서사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에 나타난 이 놀라운 출애굽의 역사는 곧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을 타인의 이야기나 한 편의 극(劇)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역사의 주인공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한 여인을 죄악의 땅에서 출애굽 시키고 계십니다. 물을 찾는 이에게 당신이 생수임을 계시하심으로써,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셨던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심령에 재현하십니다. 자신과 세상을 원망하며 실패의 그늘에 갇혀 있던 여인에게 주님은 그녀의 실상을 직면하게 하시고,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이는 광야의 백성들이 원망할 때 그들의 죄를 드러내어 바른길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와 같습니다.
여인은 이제 예배에 관한 담론을 통해 드디어 주님과 함께 영적인 시내산에 오릅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루살렘입니까, 그리심산입니까? 어떤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라고 묻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이신 당신 자신을 가리키십니다. 그리고 과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잔치를 그녀의 영혼 속에 베풀어 주십니다. 예배는 더 이상 특정한 장소나 형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배가 되시고, 예배의 대상이자 내용이며, 동시에 온전한 예배자가 되시는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 예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대개 교회에 올 때 스스로를 예배자의 자세로 무장하려 노력합니다. ‘오늘만큼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려보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굳은 결심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선다 한들, 인간의 의지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려 한다면 곧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사실 목회자조차 예배에 온전히 침잠하기 어려울 때가 적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늘 앉으시던 자리에 보이지 않으면, 강단 위에서 예배를 인도하면서도 ‘저분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하는 염려에 마음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예배당에 들어서는 순간 오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한 설렘으로 충만하여, 주님 외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고 계십니까?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찬송의 고백이 실로 여러분의 영혼을 울리는 실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세상의 무거운 근심을 짊어진 채 예배의 자리에 앉습니다. 예전 한국의 성도들이 ‘연탄불을 제대로 갈고 왔는지’를 걱정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일상의 소소한 염려들에 사로잡혀 예배의 귀한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합니다. 비단 구체적인 걱정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자기 힘과 의지만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실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는 중에도 생각은 쉴 새 없이 삼천포를 유랑하기 일쑤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선언하십니다. “너의 힘으로, 율법의 자구에 매여 네가 지키고 행함으로 섬겼던 그 예배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이제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새로운 은총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진정한 예배자이십니다. 우리는 참 예배자이신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써 그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 그분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주님,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나아갑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참 예배자이신 예수님을 외면한 채 우리 스스로 ‘멋들어진 예배’를 드리려 할 때마다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예배라기보다 형식에 치우친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유한한 의지와 편협한 관심만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대면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양식: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갈증을 누구보다 깊이 아시기에 스스로 목마름을 자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감당하신 갈증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으실 때에도 끝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처럼 주님은 사마리아를 ‘반드시’ 통과하셔야만 했습니다. 우물가에 지친 듯 앉아 계셨던 모습은 단순한 여정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한 여인을 찾기 위해 피곤이 깃들 때까지 걸어오신 주님의 열심이 빚어낸 장면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시사하는 가장 중요한 배경입니다. 그리고 이 집요한 사랑의 서사는 이제 여인을 넘어 제자들에게로 그 초점이 옮겨갑니다.
제자들의 삶을 대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보인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항변하며 끊임없이 창조주를 시험했습니다. “떡을 주시고 물을 주소서. 더 나은 환경을 허락하시면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따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채워진다면 목숨 다해 섬기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했습니까? 오늘 본문의 제자들 역시 그 관심의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시내산의 언약이나 홍해의 기적은 현재 자신의 굶주림과는 무관한 과거의 사건일 뿐이었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이적이 없어도 좋으니 당장 먹을 것을 달라’는 아우성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단지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세속적 욕망과 참된 관심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철저히 실패했던 이유는 본문의 제자들과 동일합니다.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자들의 시선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먹을 양식’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인간이 아무리 고상한 이상을 논해도 결국 우리는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다”라는 세속의 말처럼, 생존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실제적이고도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문제로 시험에 들고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인지상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관심이 ‘오로지’ 그곳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일상의 필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전체가 그 필요에만 고착되어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만화가 고우영 씨의 ‘서유기’에는 인간의 집착을 풍자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삼장법사가 오대산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며 “참으로 경이로운 풍경이구나”라고 감탄할 때, 먹을 것에만 골몰하는 저팔계의 머릿속에는 오직 “저 단풍을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라는 생각뿐입니다. 장엄한 폭포 앞에서도 그의 관심은 “저 물로 무엇을 해 먹을까”에 머물러 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고귀한 가치나 아름다움은 그의 관심 밖입니다. 지금 주님 앞에서는 한 여인이 거듭나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영적인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선생님,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하셨습니까? 우리는 음식을 구하느라 이토록 고생했는데, 주님은 언제 양식을 드셨습니까?”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는 부끄러운 실상입니다.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여러분의 심령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은 어디에 머물며,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나 혼자 구원받아 안락한 천국에 가겠다’는 개인적인 안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나는 예배의 자리에 있으니 안전하게 천국 열차를 탄 사람이다’라는 막연한 종교적 안도감에 젖어 계신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이 땅의 삶에서 하나님께 적절한 도움을 받아내겠다’는 보상 심리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것입니까? 혹은 더 나아가 ‘나는 타인보다 교양 있는 종교적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고상한 자기만족에 빠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주님보다 앞선다면 우리는 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십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의아해할 때 주님께서는 본문 34절을 통해 그 해답을 명확히 제시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 짧은 문장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본질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냅니다. “나의 양식이 무엇이며, 나는 무엇으로 진정한 배부름을 얻는가? 나는 너희가 가져다주는 세상의 음식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으로 만족하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 내 삶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
제자들은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인 육신적인 양식만을 생각하고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자체가 당신의 양식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흔히 “주님,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주시면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인간은 결코 육신의 갈급함이 채워진다고 해서 주님께 온전히 돌아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성취된다고 해서 주님을 따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것을 기회 삼아 철저히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런 일도 해주실 수 있습니까?”라며 하나님의 자존심을 자극해 원하는 것을 얻어낸 뒤, 다시 자기 이익을 챙기러 떠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하면서도 정작 발걸음은 자신이 원하는 자기만의 길로 향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주님 앞에서 “이번 위기만 넘기게 해주시면 주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호소하지만, 사실은 그 고비를 넘긴 뒤 다시 자신의 길을 가는 데 예수를 동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속기 쉬운 대목이며,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삼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한 길만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보여주신 길, 곧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세속적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 성경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정의하고 계십니까? 단순히 ‘내가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구원을 얻었다’라고만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실상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여러분의 삶에 실제로 성취된 사건입니다. 나의 구원은 곧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구원의 증거로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에 이끌려 오늘도 이 은혜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임했기에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하늘의 양식을 충만히 받은 분들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성도의 양식
그러므로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세상을 향해 이렇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는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탐하고, 그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똑같이 가지려 한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믿는 자들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불신자들이 우리를 향해 “당신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올 때, 당당하게 전할 수 있는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모르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보기에는 내가 지금 무언가를 빼앗기고 억눌림을 당하며, 실패와 좌절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게는 당신이 모르는 양식이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지금 내 인생 속에서 한 걸음씩 성취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영광스러운 현장을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찾으십니다. 한 영혼을 추적하시고 끝내 사랑으로 품으신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여기 이렇게 이루어졌으며, 나는 이것을 행하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도 주님은 다시 한번 같은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오늘 이 여인을 찾아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자신의 백성을 단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 사랑의 깊이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감탄을 금치 못하거나 영혼이 떨리는 전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얼마큼 사랑하십니까? 이 우주를 다 포기하시고라도 우리를 사랑하고 살려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단호한 결심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주시고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결심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그 무엇도 주님의 이 사랑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율법의 완성
우리의 구원을 위해 끝까지 추적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 뜻을 어떻게 행하십니까? 히브리서 10장 7절은 시편 40편의 내용을 인용하며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제사와 예물, 번제와 속죄제는 원치 아니하시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결론짓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뜻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나누었던 예배와 시내산, 즉 율법에 관한 대화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여인은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섬기려 했던 과거의 방식에 머물러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한계 앞에서 율법을 온전히 완성하셨습니다. 스스로를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고,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신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광야의 시험과 승리
이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광야에서 마주하는 모든 시험의 궁극적인 질문이 결국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를 묻는 본질적인 질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실패하였으나,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시험을 온전히 이겨내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셨던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의 요구와 제자들의 주된 관심사였던 ‘떡’의 유혹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기에, 이제 우리 또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세상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끊임없이 찾아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본질은 주께서 당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신 희생에 있습니다. 주님은 ‘단번에, 그리고 몽땅 다’ 주셨습니다. 그분의 인생과 사랑, 그분의 거룩함과 의로우심까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은 요한복음 6장 29절을 통해 대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고, 여러분은 그것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행한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가 결코 할 수 없었던 그 일을 주께서 친히 성취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시는 은혜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복음 4장 38절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제자들이 직접 심거나 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추수의 현장으로 보내십니다. 주께서 그리하시는 이유는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 시작하신 일들이 열매로 맺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을 거두는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이 심었거나 잘해서 얻은 결과가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일을 이루고 계시기에,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가 맺히는 그 경이로운 기쁨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이 찬란한 영광, 그리고 끊임없이 여러분을 찾으시는 그 지극한 사랑 앞에 여러분은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일이 내 안에서 성취되어 가는 기쁨, 내가 심지 않았음에도 거두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기쁨 말입니다. 내가 심은 것이라고는 오직 거짓과 죄와 저주뿐이었으나, 인생의 밭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피어나는 이 신비로운 기쁨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기쁨을 진실로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일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세속적 성공보다,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서 이러한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것으로 배부르며 만족합니다. 비록 삶의 고난이 나를 할퀴고 에워쌀지라도, 내게는 담대히 할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의 양식입니다.” 이 고백을 여러분의 유일한 소망과 기쁨으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에게는 이토록 큰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조건이 우리를 붙잡아 놓아주지 않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한계를 이겨내는 하늘의 양식이 되어 우리의 영원한 배부름이 되십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양식, 곧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이 우리를 진정으로 부유하게 합니다. 이 보잘것없는 인생 속에 거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듭니다.
우리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이기에, 때로는 고통스럽고 눈물이 날지라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신 주님의 기도처럼, 우리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진정한 양식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나를 대적하는 원수조차 실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는 복임을 깨닫게 하시고, 내 육체의 가시들이 주님을 더욱 바라보게 하는 영광임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참된 기쁨과 소망 안에서 진정한 믿음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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