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4장 20절에서 26까지 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아멘.
물의 사건과 출애굽의 구속사적 배경
오늘 본문은 내용을 읽는 즉시 체감할 수 있듯이 예배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한복음을 문맥에 따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왜 여기서 갑자기 예배의 문제가 대두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앞서 주님은 우물가에서 물을 달라 하시거나 “내가 생수를 주겠다”라고 말씀하셨고, 이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셨는데, 돌연 여인이 예배의 처소를 묻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대개는 여인이 남편 이야기에 당혹감을 느껴 화제를 전환하고자 종교적인 문제를 꺼낸 것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의 전체적인 배경을 깊이 숙고하면 그보다 훨씬 심오한 영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출애굽 사건과 구속사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 여정 중 사흘간 물을 마시지 못해 갈증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찾았으나, 그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마라’, 곧 쓰다고 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한 나뭇가지를 지시하시어 물을 달게 하셨고, 이후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그들로 마시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명시하며 그들이 영령의 물을 마셨음을 증거합니다. 또한 민수기에는 백성들이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고 화답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물과 성도의 삶에 관한 귀중한 교훈을 전하는 동시에, 출애굽의 물 사건이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광야의 여정과 시내산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실존
예수님께서는 친히 반석에서 솟아난 생명이 되어 진정한 생수를 허락하시는 분임을 선포하고 계시지만, 여인은 아직 그 영광스러운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여정 중 이스라엘 백성에게 육신의 양식과 물만을 공급하신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흔히 삶의 고단함을 토로하지만, 정작 우리가 삶에서 목도하는 본질적인 사실은 인간의 철저한 무력함과 간사함입니다. 상황이 조금만 호전되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칠 듯이 눈물로 찬양하다가도, 형편이 어려워지거나 기대에 어긋나면 주저 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외면합니다.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듯 보이나, 실상은 “하나님, 어찌 우리를 이토록 궁벽한 곳으로 인도하십니까?”라고 항변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아픔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행위조차 실상은 그저 배불리 먹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받으려는 세속적 욕망에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며 비로소 ‘우리가 겨우 이 정도 수준의 존재구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셨을 때처럼, 우리의 허물은 세상을 살아가며, 특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더욱 선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의 문제를 묵과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지적하시어, 우리가 누구인지를 온전히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출애굽의 구속사는 이처럼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다시금 재현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여인의 질문이 왜 예배의 처소인 ‘산’의 이야기로 귀결되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의 시험을 거쳐 1차적으로 당도한 목적지가 바로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산의 이름은 시내산입니다. 예루살렘이 자리한 시온산과는 달리,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했던 호렙산을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여인의 대화를 온전히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 담론이 출애굽기 시내산 사건의 영적 배경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 피상적 열심을 넘어선 영적 예배의 본질
우리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씀을 익히 알고 있으며, 예배의 문을 열며 이 말씀을 묵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영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으로 예배할지니라” 하신 말씀이, 몸과 영을 분리하여 영만을 따로 데려와야 한다는 뜻입니까? 육신이 머무는 곳에 영이 함께함은 당연한 이치일진대, 어떻게 영을 별개로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흔히 이를 마음을 다하는 지극한 정성이라 이해하곤 합니다. 만약 그러한 주관적 감정이 본질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의 영을 자각하고 그 영이 뜨겁게 예배하는 실재를 매 순간 경험하고 계십니까?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의식이나 감정의 파동은 인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영’이라는 차원은 인간의 감각으로 포착하기 지극히 어려운 영역입니다.
더불어 주님은 “진정으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여기서 ‘진정’은 대개 ‘진심’으로 해석되어, 깨끗한 마음과 전력을 다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예배 중에 잡념을 버리고 경건에 힘쓰며 전심을 다하는 것은 물론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연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심이라 확언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힘을 다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진실로 온 힘을 다해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를 마친 후 이 자리를 온전한 기력으로 걸어 나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영적 예배’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피상적이거나 추상적인 영역에 가두어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 선포를 온전히 해득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이 전하는 구속사적 맥락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단어들이 지향하는 참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어떤 신비주의적 탈혼 상태에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의식을 잃고 신비한 세계를 경험하는 경우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실을 망각한 채 명상에 잠기는 것이 영적 예배의 본질일 수는 없습니다.
사마리아의 종교적 배경과 정통성을 향한 자부심
우리는 이제 출애굽 사건의 투영체로서 사마리아 여인의 역사적 배경을 응시해야 합니다. 여인이 언급한 ‘이 산’은 그리심산을 가리킵니다. 기원전 400년경,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만의 예배를 위해 그곳에 성전을 건립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함락된 후 강제 혼혈 정책으로 인해 혈통적 순수성을 잃어버린 민족입니다. 이로 인해 정통 유다 민족으로부터 멸시를 당하며 신앙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게 된 그들은, 유다 사람들이 포로 귀환 후 성벽을 재건할 무렵 자신들만의 종교적 거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예루살렘 재건을 방해하는 등 갈등이 깊었으나, 그들에게 그리심산 성전은 포기할 수 없는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심산을 선택한 일차적 이유는 그곳이 아브라함이 가나안 입성 후 처음으로 단을 쌓았던 세겜과 인접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 그리심산을 ‘모리아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본래 모리아산은 이삭을 번제로 드렸던 곳이며 예루살렘의 시온산과 동일시되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산을 모리아산이라 칭하며 신명기의 예언이 이곳에서 성취된다고 믿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하여 그들 나름의 성소를 구축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 성전을 통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적통임을 증명하려 했음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축출당한 약속 없는 자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발취를 따라 예배하는 정당한 후손임을 천명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사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정통성 있는 행위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이 종교적 결단 이면에는 정치적 계산도 숨어 있었습니다. 솔로몬 이후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이 예배를 위해 남유다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민심이 유다 왕에게 기울 것을 우려한 여로보암은 결국 인위적인 종교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릅니다.
우상 숭배와 자의적인 신앙의 위협
열왕기상 12장 26절에서 29절에는 여로보암의 정치적 야욕과 불안이 투영된 종교적 변개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민심이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 귀속되어 결국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제작하여 무리에게 선포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안치하고, 피조물에 불과한 그것을 가리켜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라 참칭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의 행태는 여로보암에 의해 처음 시도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출애굽기 32장, 시내산 아래에서 발생했던 불신앙의 재현입니다. 당시 아론은 백성들의 금 고리를 취하여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아론은 그 우상 앞에 제단을 쌓고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 공포하며 가증한 종교적 열심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아론과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는 동일한 영적 맥락을 공유합니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대상에 ‘여호와’라는 거룩한 이름을 덧입혀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준엄한 영적 도전을 던집니다. 인간은 언제든 자신만의 종교를 고안할 수 있으며, 그 허상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붙여 정당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예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그 실상은 주님과 무관한 자아 숭배일 수 있습니다. 평생을 헌신과 봉사로 점철했다 자부하나, 실상은 자신이 조형한 신을 향해 “나를 구원한 여호와”라 부르며 허망한 종교 놀이에 침잠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이 범한 중대한 오판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제사의 형식만 구비하면 그곳이 어디든 곧 성별된 시내산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제의적 절차만 수행된다면 그 장소가 하나님이 보장하신 처소라 맹신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을 시내산의 대용물로 여겼으며, 훗날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당시의 예루살렘을 시내산에 비유하며 형식주의에 매몰된 신앙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이든 그리심산이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제사하는 곳이 곧 시내산이요 절대적 성소가 되었던 셈입니다.
율법의 의문을 넘어선 영과 진리의 새 시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결정적인 의중을 살필 수 있습니다. “신령과 진정”이라는 선포는 그리심산이라는 지리적 배경을 넘어, 그 저변에 흐르는 시내산의 영적 배경을 통찰할 때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시내산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율법을 수여받은 산인 동시에,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며 배교했던 역설의 장소입니다. 즉, 시내산은 율법적 행위와 인간의 전적 타락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내산이 상징하는 율법주의적 자부심을 먼저 해체해야 합니다. 시내산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근거지였으며, “우리는 율법의 규례를 준수하는 자들이다”라는 종교적 우월감이 집약된 곳입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완벽한 교단적 정통성과 세련된 조직, 훌륭한 목회적 인프라를 갖추었으니 우리야말로 참된 교회라고 자부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 자부심은 그리스도의 선언 앞에서 온전히 파쇄되어야 합니다. 규범을 철저히 이행한다는 사실이 영적 안녕을 보장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아마도 “우리는 비록 그리심산에 있으나 이곳을 시내산이라 믿으며 예배합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진짜 시내산은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여인은 율법의 계승자로서 인정을 갈망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답을 주십니다. 예루살렘도, 그리심산도, 아니 그 모든 형식을 대변하는 시내산조차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가시적 장소나 형식에 고착되는 시대를 지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새로운 구속사의 지평이 열렸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시내산을 부정하신 것은 이제 낡은 질서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시내산의 율법 조문을 따라 드려지던 제사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적 준수를 넘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를 뜻하며, 이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예배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과 7절은 이를 극명히 대조합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율법)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성경은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조문과 생명을 부여하는 영을 대비시키며, 새 언약 아래 있는 영적 직분의 찬란한 영광을 강조합니다.
종교적 의식과 율법의 올무를 벗어난 참된 참여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의미의 요체는 율법의 성취에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 율법의 규례를 좇아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영’ 안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의를 쌓으려다 도리어 율법의 정죄 아래 놓여야 했던 심판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과거 한국 교회 초기, 예배당 중앙에 포장을 쳐서 남녀의 좌석을 엄격히 구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전의 뜰을 구분했던 구약의 예법을 들어 이를 어길 시 엄중한 벌을 받는다고 경계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그것이 곧 신앙의 정석인 줄 알고 두려움 섞인 순종으로 그 형식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조직과 구조, 혹은 율법적 조항에 매몰되어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자칫 죽음에 이르는 ‘의문의 예배’가 될 소지가 다분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구습에서 자유롭다 자처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율법의 올무에 매여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배에 빠지면 벌을 받을 것 같은 막연한 공포를 느끼거나, 헌금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기보다 그것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의 찜찜함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종교적 본능은 인간의 깊은 곳에 자리하여 떨쳐내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창한 기도, 정교한 예배 순서, 웅장한 찬양을 예배의 본질이라 오해하며 안도하곤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가시적 요소들을 예배의 중심축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견지했던 율법적 예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제의적 절차에 있어 결코 부족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과할 정도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예배를 얼마나 극적으로 연출할 것인가, 어떠한 장치로 회중의 감정을 고양시켜 눈물을 끌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자칫 인간적 감동을 신령한 은혜로 착각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율법적인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으나, 그 ‘인간적인 열심’이 하나님의 뜻을 가릴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배의 성패는 우리가 얼마나 만족스러운 예식을 거행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질에 합치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호와 정성이 반드시 하나님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기도를 의지하며 그 은혜에 동참함
우리는 오직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선 것이 나의 의지나 공로가 아니며, 하나님 앞에 나를 과시하거나(Show up) 단순히 수동적인 수혜자로 머물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이 거룩한 자리에 참여하게 하시며 지금도 친히 대제사장으로서 예배를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듯하나 실상은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를 의지하는 것이며, 그분의 기도가 부재하다면 우리는 결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찬양이 메아리치는 듯하나 진정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찬양하시며,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공로에 기대어 그 위대한 예배의 여정에 동참할 뿐입니다.
이러한 고백이야말로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예배를 마친 후 ‘오늘 설교가 유익했다’거나 ‘찬양이 감동적이었다’는 식의 인간적 평가만이 남아서는 곤란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 집례하시는 예배에 내가 머물렀고, 주님께서 나의 중심을 보셨으며, 나 또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확인하였다”는 고백이 심령 깊숙이 새겨져야 합니다. 우리를 소생시키는 것은 인간의 화려한 수사나 언변이 아니라, 주님과 인격적으로 조우하며 나누는 그 은혜의 실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노출된 시내산과 그리심산, 그리고 여로보암의 사건을 관통하는 핵심은 우상 숭배의 변칙적 형태입니다. 이는 자신이 고안한 신을 향해 ‘나를 구원한 여호와’라 명명하는 영적 오류입니다. 즉,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재구성된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내 기호에 맞게 편집하고 내 욕망을 투사하여 만든 신을 섬기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스스로 종교적 최면에 걸려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다가, 모든 것이 파탄 난 뒤에야 비로소 그 길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곤 합니다. 이처럼 영적 감각이 마비된 우리는, 자신의 형편에 따라 ‘예수’를 소비하고 ‘그리스도’를 선택적으로 이용합니다.
고난의 직면했을 때는 전능한 힘으로 상황을 반전시킬 ‘능력의 그리스도’를 갈구하다가도, 죄의 문제를 직시해야 할 때는 모든 것을 덮어주는 ‘방임적 사랑의 예수’ 뒤로 숨어버립니다. 자신의 필요에 부합하는 예수를 부단히 제조해내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인에게 예수가 없다”는 통렬한 비판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담보해 줄 수단을 찾는 자들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의 행보를 무조건 지지하고 축복만을 남발하는 신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발명한 기복의 우상일 뿐입니다.
고난 주간의 참의미: 이웃을 향한 위로와 사랑의 실천
사랑하는 여러분, 자의적으로 빚어낸 신은 당장 마음의 위안을 줄지는 모르나, 우리가 믿고 고백하며 사랑을 나누어야 할 참된 하나님은 아닙니다. 다가오는 주일이 부활 주일이기에, 오늘은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 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당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양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군중이 불과 며칠 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역설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대개 이날부터 부활 주일 전까지를 고난 주간이라 부르며, 성도들은 금식하거나 일상의 분주함을 물리치고 경건에 힘씁니다. 평소보다 언행을 삼가며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은 분명 고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건의 형식에만 몰두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본질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단지 금식하거나 주님의 아픔을 흉내 내며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외적인 고통을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분의 삶을 우리의 일상에서 실제로 구현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으로 고난 주간을 보낸다면, 금식으로 인한 허기에 매몰되기보다 내 주변에 소외된 자는 없는지, 영적인 위로가 절실한 영혼은 없는지를 살피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친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실천이야말로 이 고난의 절기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장 숭고한 사역입니다. 사랑의 나눔과 위로는 연말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행해지는 의례적인 선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시점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고난 주간이야말로 영적인 갈증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참된 복음의 선물을 전하고, 위로의 말씀으로 그들의 심령에 기쁨을 불어넣어 주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금요일을 ‘성금요일(Good Friday)’이라 부릅니다. 결코 슬픔에 잠긴 날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과 생명이 부여된 기쁨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금식의 본질은 육체에 의지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신앙의 고백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위해 나 자신을 복종시키는 결단이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주간에는 내가 즐거워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며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우리는 더욱 놀라운 영적 실재를 마주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번 주뿐만 아니라 지난주도, 지지난주도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에 잇닿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다음 주만이 부활 주일이 아니라 오늘이, 그리고 매일이 부활의 아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매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날이며, 매 순간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는 영광의 날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망각 때문에 특별한 절기를 정해 기리는 것일 뿐, 부활의 감격이 일 년에 단 한 번뿐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증인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며, 그 삶의 현장 속에서 여러분의 사랑과 긍휼이 배어 나와야 합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작은 불편에도 쉽게 노하던 옛 자아에서 벗어나, 이제는 내가 손해를 입을지언정 타인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라" - 스스로 계신 이의 영원한 임재
사마리아 여인이 묻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여인은 시내산의 율법이 성취되고 우상 숭배가 종결되는 날, 즉 메시야가 도래하는 그날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우리말 성경에는 ‘그’라는 목적어가 포함되어 있으나, 원문의 의미를 더 정확히 살린다면 “나다(I AM)”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왜 주님은 자신을 단순히 “나다”라고 표현하셨을까요? 이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사용하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라는 선포와 동일한 신적 자기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메시야이며, 출애굽의 여정 속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광야의 갈증을 해소하셨던 바로 그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임을 증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시내산에서 예배하느냐, 예루살렘에서 혹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느냐? 그 모든 산을 창조하고 너희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스스로 있는 자’가 지금 여기 서 있다 말씀하십니다. 시내산보다 크신 이가 여기 있으며,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고 예루살렘보다 더 거룩한 이가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주님은 친히 백성을 찾아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죽기까지 그 법에 복종하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영이 되셨으며, 지금 우리와 함께 예배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다. 내가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며 종종 예배의 순서나 가시적인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곤 합니다.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예배 전체의 은혜를 놓치기도 합니다. 설교나 찬양 중에 마음을 빼앗겨 본질을 그르치거나, 목회자의 외양 혹은 헌금에 관한 언급 때문에 시험에 들어 예배의 자리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율법의 조문에 매여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의식 자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을 비판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대하는 참된 예배자의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참예배자
참된 십일조와 헌금, 그리고 본질적인 예배를 드리고 싶으십니까? 오늘 말씀의 결론과도 같은 빌립보서 3장 3절을 묵상해 봅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을 자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행한 봉사나 업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준수했다는 안도감이나 예배의 자리를 지켰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며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가 곧 참된 할례당입니다. 그가 곧 진정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요, 참된 예배자이며, 마음의 헌금을 드리는 자입니다.
세상적인 수치와 외형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전도 숫자의 많고 적음이나 교회의 예산 규모, 외적인 성장세와 같은 조건들에 침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나의 온 삶을 드려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자랑으로 삼으십시오. 자신의 육신적 조건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향한 시선을 가로막는 모든 세상적 요소를 과감히 끊어내고 나아가는 그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예배자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굴복하지 말고 본질이 아닌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이야말로 참된 할례당이 되시고,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한 긍휼함으로 먼저 다가가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율법의 조문이 아닌 영으로, 허상의 우상이 아닌 계시된 진리 안에서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다시는 과거의 율법적 구습으로 회귀하지 않게 하옵소서. 은혜를 누리면서도 다시 정죄의 굴레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 놀라운 축복과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의 온 삶이 거룩한 금식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위로와 산 제사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삶 자체가 참된 예물이 되게 하시며, 영적인 할례를 받은 자의 진실한 고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이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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