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 35에서 51까지 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함께 거하니 때가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일을 보리라.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새로운 창조, 시작의 부름

우리는 지난 시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세례 요한의 증언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비워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하였고, 마침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우리에게 소개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증언의 이튿날,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본문 속에는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입을 통해 놀라운 고백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바로 그분이라”는 고백들이 없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갑자기 빛을 알아본 것일까요? 그저 세례 요한이 “어린 양이다”라고 하니, 말을 듣자마자 깨닫고 예수를 좇은 것일까요? 이러한 이해로 인해 구절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지금까지도 ‘안드레 전도법’, ‘빌립 전도법’이라 불리며 전도의 방법론으로 매우 유명해졌습니다. 안드레처럼 전도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빌립처럼 “와 보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초청하여, 우리가 흔히 총동원 주일 같은 행사를 “와서 보라, 일단 보면 아니냐”라고 권유하는 식의 전도법이 모두 구절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사실이 있습니다. 구절을 이해함에 있어서 요한복음 전체의 구조를 결코 잊어서는 된다는 점입니다.

 

방법론을 넘어선 하나님 나라의 시작

요한복음 전체의 기조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으나 그의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있습니다. 스스로 듣고 깨달은 사람도 없고, 가르쳐주어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문제가 해결되고,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참된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맥락을 이해하고, 요한복음 21장에 이르러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다운 고백이 완성된다고 본다면, 오늘 본문의 중심은 안드레나 빌립의 전도 기법에 있을 없습니다.

 

안드레가 무엇을 명확히 알아야 전도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온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전도를 있겠습니까? 빌립과 나다나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전도의 방법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하면 전도가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이면의 배경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의 시작인 1 19절부터 51절까지를 저는 '7일간의 역사' 나누어 설명해 드렸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도입부부터 있듯이, 이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건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7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는 7일간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 읽은 본문은 그중 3일부터 5일까지의 분량에 해당합니다.

 

창조의 관점에서 본다면, 태초의 천지 창조를 ‘처음 창조’라 하고, 이후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됩니다. 홍해가 갈라질 수면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고 바람이 불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처럼 솟아오른 길을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물이 갈라지고 뭍이 드러나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며, 땅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올라오는 모습은 마치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의 장면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기를 ‘제2 창세기’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지금 본문이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이어 다시금 ‘새로운 창조’를 선포하는 대목임을 알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심으로 진정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세워진 것처럼,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열두 사도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린 양”이라는 한마디에 모든 것을 깨닫고 즉시 안드레가 쫓아왔거나, “메시아다”라는 소리에 베드로가 금방 항복하고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와서 곧장 교회에 열심히 다닌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 온전히 따르기까지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물을 치고 있을 주님이 다시 부르시던 장면, 그리고 “배 오른편 깊은 데에 그물을 던져라” 하신 말씀에 고기가 가득 차는 기적을 보고 나서야 주님 앞에 엎드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하며 주를 따랐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단번에 부름을 받아 제자가 아닙니다. 지금 순간 모든 것을 깨닫고 “예수님이 메시아구나”라며 좇아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기초와 성도의 찬란한 정체성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단순히 전도에 관한 방법론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여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조금 넓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나라의 백성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부름을 받는가 하는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본문의 배경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명확하게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창세기의 구조를 번째 증거로 있고, 하나는 본문에서 사도를 부르시는데 수가 전부 열둘이라는 점입니다. 구약의 지파가 열두 지파였던 것처럼, 이제 신약의 이스라엘이 등장할 주님은 열두 사도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도 가롯 유다가 떠난 빈자리를 두고 굳이 명을 뽑아 열두 명을 채우는 것입니다. 새로 뽑힌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다시 나오지 않더라도, 그는 12 사도의 숫자를 채움으로써 자기가 일을 셈입니다.

 

요한계시록 21 11절부터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에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의 , 북편의 , 남편의 , 서편의 문이니 성의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지금 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였고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분이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하면서 요한계시록 21장을 근거로 금과 보석으로 지어진 화려한 장소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수많은 보석이 가득한 곳으로 묘사하며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강조하지만, 그것은 사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것에 불과합니다.

 

천국은 단순히 그런 외형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읽으신 21 9절을 보십시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신부가 누구입니까? 바로 어린 양의 아내인 교회이며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 성령으로 보여주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 양의 신부인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모든 보석과 찬란한 모습들, 지파와 사도들의 이름은 바로 성도 여러분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찬란하며 보석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에는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입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의 부르심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드디어 출발했음을,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언약의 표시입니다.

 

하나 우리가 있는 중요한 증거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신 이름을 ‘아담’이라 지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5 1절과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름을 짓는 이가 대상을 온전히 안다는 뜻이며, 동시에 “내가 너를 창조하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라는 소유와 약속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창조를 상징하는 일곱 날의 과정 속에서 시몬에게 ‘게바’,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이는 의심할 없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사역이 ‘창조적인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전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이루시고 나라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채우시는 모습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야 제자들이 의미를 온전히 깨달음으로써 온전해지겠지만, 본문은 시작 단계부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임을 놀라운 증언들을 통해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시작하시고 채우시는 이것이 실상 진짜 전도입니다.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기술이 전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란 세상을 머리로 삼고 매여 살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들어오라고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대로 하나님 나라를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일을 성취하는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채우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나라를 알리고 초청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모습인가를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거하는 제자의

여러분, 안드레나 빌립, 그리고 베드로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어부 출신이라고 해서 무식하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웠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깊고 방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지, 자신이 무엇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었으며, 결코 생각이 없는 자들도 아니었습니다. 사리 분별조차 해서 그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그런 이들이 아니었으며, 자존심 또한 누구보다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것을 단숨에 이겨버리는 능력과 내용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조차 초월하게 만드는 강력한 능력을 만난 것입니다. 바로 실체를 대면했을 ,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자신들의 삶으로 증명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약에서 ‘제자도(弟子道), 제자의 도리라 부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본질이 바로 제자도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도는 소위 말하는 ‘제자훈련’을 받는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제자훈련을 통과한다고 제자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 안에 제자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도리와 본연의 모습이 이미 주어졌기에 비로소 ‘훈련’이니 ‘연습’이니 하는 과정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미국 시민권을 얻었는데 영어가 서툴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영어를 연습해야 것입니다. 그러나 영어를 아무리 유창하게 연습한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 시민권을 보장해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민권이 먼저 있고 영어가 따르는 것입니다.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릴 있는 풍성함을 비로소 향유할 있게 됩니다. 그것은 연습할 있고, 삶으로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통하여 풍성함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저 경건의 모양만을 흉내 내서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자도는 결코 “내가 어떤 훈련 과정을 마쳤기에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라고 말할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제는 이만큼 성장했다”라거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토록 지키며 살았으니 이제 제법 괜찮은 수준이 되었다”라고 자부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성취를 제자도라 칭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의 본질을 한마디로 정의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정체성이자 제자도의 본질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제자도의 구체적인 양상을 더욱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와 제자의 특징

그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오늘 본문 3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무엇을 구하느냐? 질문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나 항상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질문에 대해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얼핏 보면 선문답 같기도 대답을 그들은 선택했을까요?

 

여러분,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물음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무엇을 구했을까요? 이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봅시다. “여러분은 교회에 오십니까? 기도하며 찬송하십니까? 참으로 다양한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의 웅장한 분위기가 좋아서 오기도 하고, 어떤 분은 그곳에 위로와 평안이 있으며 좋은 사람들과의 기쁜 교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식대로라면 “기적을 구합니다”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교회에 오면 기적을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기적을 원합니다. 병이 낫기를 원하고, 꼬여 있는 사업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며, 답답한 마음의 근심들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대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복을 주십시오, 행복을 주십시오”라고 답합니다. “하나님, 세상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저도 숨통을 트고 있도록 여러 복을 더해주시고, 어려울 때는 곁에서 거들어 주셔서, 더는 짜증 내거나 눈물 흘리지 않고 살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소박한 꿈이기도 하며, 자체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 제자의 도를 알아야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대답을 보십시오. 그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어디에 거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물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집이 어디인지, 어디에 사시는지를 묻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질문에 담긴 의도는 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계신 곳에 나도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당신이 계신 그곳에 나도 머물기를 원합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실 있는 어떤 혜택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답변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랍비여, 선생님이여, 어디 계십니까? 나는 예수를 알고 싶습니다.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고 당신과 교제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거룩함과 영광과 기쁨이 무엇인지 깊이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도의 번째 특징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분 자체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싶어 하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경륜, 그리고 계획을 갈망하며, 그분이 거하시는 곳에 또한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사랑하자”라는 구호를 하도 많이 접하다 보니, “관심이 예수에게 있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말이 어느덧 너무나 추상적인 표현이 되어버렸습니다. 쉽게 말해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는 모든 순간과 모든 경우에, 여러분은 일들을 통하여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여러분의 일만을 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자 제자도의 본질은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말씀에 진심으로 ‘아멘’ 하셨다면, 여러분은 결코 실망할 없습니다. 여러분의 성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했기에, 설령 일이 실패하더라도 실패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도리어 감사하게 됩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 삼았다면, 인생의 길이 막혀 암흑과 같은 철벽이 앞을 가로막을 때조차 좌절하거나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벽이 뚫리거나 어둠이 걷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우리가 어찌 좌절하고 절망하며 속상해할 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아멘” 하셨는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대하는 모든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부터 당장 완벽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러한 삶의 지향점을 의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영원한 운명 공동체

주님이 답변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와 보라. 우리가 아는 Come and see,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가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와서 봐라, 집에 숟가락은 개나 있는지, 가구는 무엇을 쓰며 침대는 어떻게 해놓고 사는지 봐라’는 뜻이 아닙니다. 혹은 ‘내가 얼마나 거룩하고 멋있고 경건하게 사는지 와서 확인해라’는 뜻도 아닙니다. ‘보라’는 말씀은 구절을 놓치면 결코 온전히 이해할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처음에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 내가 정말로 어린 양인지 아닌지 직접 와서 보라”는 초대입니다.

 

어린 양은 어떤 존재입니까? 결국 죽어야 하는 양입니다.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실 분인지, 십자가를 지실 분인지, 어린 양이 되어 번제단 위에 올려져 타오르며 하나님께 흠향될 바로 죄를 지고 가는 양인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음성에는 강력한 힘이 실립니다. “나를 보라. 제자들은 그분을 보고 비로소 함께 거하게 됩니다.

 

여러분, “함께 거한다”는 말의 의미를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1 서두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말은, 과거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쳤던 성막, 텐트를 친다는 뜻임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막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한다는 뜻입니다. 깊게는 지성소 안에 함께 거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성도가 누리는 제자의 , 하나님 백성의 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를 희생하여 하나님께 대단한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려서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쥐어짜서 여러분이 돈을 하나님 나라에 바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제자의 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성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지성소 안에 숨겨지자는 초대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찌를 없고, 건드릴 없으며, 흔들거나 빼앗아 없는 하늘나라 지성소까지 주님과 함께, 주님을 따라 들어가 그곳에 거하자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그곳이 아무나 들어가는 곳인 아십니까? 제사장들조차 1년에 번밖에 들어가지 못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대제사장이 오셨습니다. 제사장도 그냥은 들어가며 반드시 피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 마지막 어린 양이 오셨습니다. 이제 이상 다른 제사는 필요 없으며, 다른 대제사장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제사장이 오셨고, 마지막 제물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양을 통하여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어린 양을 아십니까? 어린 양을 참으로 여러분의 어린 양으로 고백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성소가 얼마나 안전한 곳인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대우하시며 품에 안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곁에 가기만 해도 모든 것이 죽어버리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존전 , 지성소 안에 주님은 여러분을 숨기고 감추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은 하늘에 감추어진 보물처럼 그렇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정체성입니다.

 

이름을 주시는 주님과 창조의 다스림

제자의 도는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본문 42절을 보십시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주님은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창세기에서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처럼,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창세기의 이름 짓는 장면을 보면 있듯이,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을 존재가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에 맞게 이름을 붙이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에게 ‘아담’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으셨기 때문이며, 그가 흙으로부터 왔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이름을 짓는 이가 대상을 온전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지어주시고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내가 너를 안다”는 선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여러분의 죄가 무엇인지, 여러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리고 여러분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름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도 아무개, “세인트(Saint) 한성윤”입니다. 여러분의 이름 앞에는 ‘성()’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여러분이야말로 거룩한 성전이며 거룩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을 아시고 우리를 아시기에 우리에게 이름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이름을 이가 존재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에 충만하고 번성하며 다스리라고 하셨고, 다스림의 모습을 이름을 짓는 행위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스림’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과거 독재의 아픈 기억 때문일 있으나, 성경이 말하는 다스림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로 끌고 오셨습니까? 아브라함을 독재적으로 대우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고 그를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드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감복하여 도저히 보답할 없는 마음의 뜨거움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독재입니까?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영화 <백드래프트> 유명한 마지막 장면처럼 You go, we go”의 관계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생사를 같이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고백과 약속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에, 자신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기로 작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스리십시오. 인생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그때 그것이 제자의 도의 모습이며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 오셔서 지난주부터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아직 백일도 아기가 있습니다. 이름이 연서인데요. 우리가 무엇을 고백합니까? “저 아이의 인생이 아이의 것이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공동체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모여 함께 앉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까? 집에 혼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며 예배를 드려도 되고, 혼자 성경책을 보아도 되는데 이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는 사실을 여기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예물을 드리는 ‘봉헌’을 통해, 시간을 드림으로, 또한 여러분의 건강과 삶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음으로써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내가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22 3절에서 5절까지를 보겠습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없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노릇 하리로다.

 

또한 계시록 7 4절로 가보십시오. 하나님의 인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14 4 성도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서 ‘인 맞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의 이마에 새겨진 것입니다. (14 4천은 12 지파 곱하기 12 사도 하여 144이고, 여기에 하나님의 완전수인 1000 곱한 숫자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다음 우리가 읽을 부분은 9절부터 17절까지입니다.

 

“이 후에 내가 보니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없는 무리가 나와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앞에 서서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생물의 주위에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장로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입은 자들이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아멘.

 

말씀은 종말에 우리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 나라에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새로운 창조를 입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부름을 받아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바로 자리에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여러분의 해가 되어 주시며, 여러분 인생의 빛이 되어 주시고, 주리지 아니하고 목마르지 않게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약속, 어떤 뜨거운 기운도 여러분을 상하게 하지 못하는 영원한 장막에서 거하는 놀라운 기적과 능력, 내용이 오늘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하나님, 오늘 저희를 새로운 창조의 역사 속으로 부르시고, 세상의 풍파가 결코 건드릴 없는 하늘 지성소의 품에 감추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복이나 혜택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당신만을 구하는 참된 제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셨으니, 이제 우리의 생사가 주님께 매여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주님이 가시는 곳에 우리도 가고, 주님이 머무시는 곳에 우리도 머물겠다" 운명 공동체의 고백이 우리의 남은 평생에 가장 찬란한 보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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